#學問/古典

신영복의 고전강독 제8강 노자(魯子)

경호... 2012. 2. 3. 01:41

 

제8강 노자(老子) - 1

 

  1) 노자와 '노자'
   (1) 중국사상은 지배계층의 사상인 유가(儒家)사상과 민초(民草)들의 사상인 노장(老莊)사상이 2개의 축(軸)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 지배담론과 비판담론이 일정하게 대치하는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가(儒家)와 노장(老莊)의 대치는 중국 사상사의 유구한 심층구조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노자(老子)'는 그 2개의 축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사상입니다.

  앞으로 예제를 통하여 확인되리라고 생각됩니다만 동양사상의 정체성은

  '논어'보다는 오히려 '노자'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논어'는 서구사상과 마찬가지로 ‘진(進)’의 사상입니다. 인문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이 진(進)의 내용이 됩니다.

  인문주의(人文主義), 인간주의(人間主義), 인간중심주의(人間中心主義)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노자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進)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歸)입니다. '노자'는 귀(歸)의 사상입니다.

  자연(自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연이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합니다.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제자백가의 사상은 '노자'를 한 편으로 하고 여타의 모든 학파를 다른 한 편으로 하는

  2개의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제자백가들의 사상은 물론 여러 층위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정책적 대응을 본령으로 합니다.
  이에 비하여 '노자'는 다른 학파들의 주장과는 달리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반대합니다.

  인위적 제도나 규제는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책이 되지 못하며 도리어 혼란과 불의를 가중시킬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제도(制度)와 문화(文化)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생성(生成)과 변화발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부터

  언어(言語)와 인식(認識)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노자는 철저하리만큼 근본주의적 관점을 견지합니다.
  
  근본주의적이라는 의미는 인간과 문화와 자연(自然)에 대한 종래의 통념(通念)을 깨트리고

  전혀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25장)”의 논리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법(法)은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체계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체계에 있어서 자연의 생성변화가 곧 도(道)입니다. 인위적 규제는 이러한 질서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말을 불로 지지고, 말굽을 깎고, 낙인을 찍고, 고삐로 조이고 나란히 세워 달리게 하고 마굿간에 묶어 두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도덕적 가치는 인위적 재앙(災殃)으로 보는 것이지요.

  자연을 카오스(chaos)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cosmos)로 인식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노자'의 세계는 반문화적(反文化的) 세계입니다. 건축의지(建築意志)에 대한 거부입니다.

  계몽주의든, 합리주의든, 기존의 인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건축적 의지를 해체(解體)하여야 한다는 해체론(解體論)입니다.
  
  바로 이 점이 '노자'의 현대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결국 법가(法家)사상에 의하여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하였습니다.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 사상계의 통일도 당연히 뒤따르게 됩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도 그러한 사상통일의 일환입니다. 유묵논쟁(儒墨論爭)이나, 유법논쟁(儒法論爭)은 일단락됩니다.
  그러나 통일의 주역인 법가(法家)사상은 난세(亂世)를 평정하는 과정에서는 대단한 역동성을 발휘하였지만

  치세(治世)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는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적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은 단기전에 있어서는 그 역량을 결집하고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가동하는 데에는 법가적 정책이

  탁월한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진정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적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진정한 부국강병이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부문의 자생력(自生力)을 길러내고 꽃피워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러한 장기적인 재생산성을 법가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지요.
  
  그리고 또 한 편으로 당시의 현학(顯學)이었던 묵가(墨家) 역시 진한(秦漢)의 중앙집권적 통일국가가 성립되고

  그 체제가 정비되면서 묵자사상의 핵심인 평등(平等)이념이 그 사회적 지반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자연히 사상계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한(漢) 이후 유교가 관학(官學)으로 자리잡음에 따라 제자백가의 사상은 이제 유가(儒家)사상에 흡수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리하여 유가사상이 지배층의 통치이념으로서 자리잡게 됩니다.
  유가(儒家)사상은 법가(法家)에 비하여 비폭력적 지배방식을 취하고 피지배층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매우 유화적(宥和的)인 정치과정을 정착시켜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권력은 본질에 있어서 폭력적 지배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진한(秦漢) 이후의 제도폭력(制度暴力)이 지배하는 역사적 조건에서 피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저항적 지반이 광범하게 형성된다는 것은 역사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재앙으로 규정하고 자연이라는 근본적 질서를 회복하고,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주창하는

  노자의 반문화(反文化)사상이 지배사상에 대한 비판담론으로서 자리잡게 되는 것이지요.
  비판담론뿐만 아니라 나아가 저항담론과 대안담론으로서 그 지반을 넓혀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중국사상은 지배계층의 관학으로서의 유가(儒家)와 피지배계층인 민초의 도가(道家)사상이

  서로 길항력(拮抗力)으로 대치하는 구조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사회의 전체구조를 생동(生動)하게 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는 다음에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무엇보다 우리는 '노자'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가 '노자'를 읽는 독법(讀法), 다시 말하자면 노자를 재조명하는 이유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를테면 노자의 현대적 의미를 조명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 축적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모순이 누적되는 체제입니다.

  현대자본주의는 누적된 모순이 하부구조(下部構造) 자체의 존립을 부정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은 패권국가들의 집단적 개입과 폭력적 억압에 의하여 그것이 억제된 상태입니다.

  억제된 상태는 해소된 상태와는 다른 것이지요. 내면적으로 그 불안정성을 더욱 첨예화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계화라는 개방압력과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수탈적 공세가 사활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곧 그것의 현실적 표현형태입니다.

  이러한 하부구조에 있어서의 누적된 모순의 필연적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상부구조에 있어서

  극단적인 인위(人爲)와 허구(虛構)의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부구조의 자본축적논리와 상부구조의 상품시장논리가 공동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낭비와 허구의 체계는

  현대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러 그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도의 기호조작(記號操作)체계를 내장하고 있는 상품미학은 이제 이성(理性)의 포섭이 아니라

  감성(感性)의 포섭기제(包攝機制)를 완성해 놓고 있습니다. 대중매체의 가공할 위력을 장악하고

  이러한 기제를 능숙하게 구사함으로써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공략하는 단계에 도달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현대자본주의는 인위적(人爲的) 규제(規制)와 허구(虛構)의 어떤 절정(絶頂)을 보여주고 있는 동시에

  그것의 재생산구조를 완성해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노자'의 현대적 의미가 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화석화된 사상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적 현실성을 띠고 생환되어야 할 당대사상으로서의 '노자'가 있다고 생각하지요.
  '노자'가 이러한 모순구조를 조명해 내고 나아가서 '노자'의 언어들이 물질과 욕망의 총체적 낭비(浪費)체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노자'가 생환될 수 있는 것이지요.

 

제8강 노자(老子) - 2

 

  (2) 노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사마천 '사기(史記)'에 의하면 노자는 성명이 이이(李耳), 자(字)는 백양(伯陽),

      시호(諡號)는 담(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楚)나라 고현(苦縣) 여향(勵鄕) 곡인리(曲仁里)사람으로 주왕실의 창고를 관리하는 수장리(守臟吏)를 지냈으며,

   공자가 찾아와 예(禮)에 대하여 물은 적이 있다. 양고심장약허(良賈沈藏若虛) 교기(驕氣) 다욕(多欲) 태색(態色) 음지(淫志)를

   버리라고 충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존연대는 대략 BC 580-500년경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만 노자의 생존연대는 '사기(史記)'에서조차도

  확실한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노자를 다른 사람, 예를 들면 노래자(老萊子), 태사담(太史?)과 혼동하고 있을 정도라는 것이지요.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노자의 생존연대는 맹자(孟子) 뒤, 한비자(韓非子) 앞이라고 주장됩니다.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노자' 제1장이 바로 유교에 대한 총체적 비판이며 그것도 유교가

  소위 명교(名敎)를 분명히 하고 난 이후의 유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맹자 이후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비자 이전이라는 것은 '한비자'에 '유로(喩老)' '해로(解老)' 두 편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경'에는 맹자 이후의 사상이 혼재되어 있으며 특히 궤변적(詭辯的) 서술 등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명가학설(名家學說)이 상당히 발전된 이후에 씌어진 글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81년 동안 있다가 백발(白髮)로 출생하였다 하여 노자(老子)라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학자들이 자기 성(姓)에 자(子)를 붙이고 있습니다.

  공자를 비롯하여 맹자 순자(荀子) 한비자 묵자(墨子)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유독 노자만 성씨를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老)자와 이(李)자가 두운(頭韻)이 같기 때문에

  병용(竝用)하였으리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음통(音通) 운통(韻通)이라는 것이지요.
  음이 같거나 운이 같은 경우 서로 넘나들며 사용합니다. 한문을 읽다보면 자주 직면하는 문제이지요.

  순자(荀子)를 손자(孫子)라고 쓴 것도 순(荀)과 손(孫)의 두운이 같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노자'는 '李子'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만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덧붙여 놓습니다.

  노자의 자(字)와 시호(諡號)가 바뀌었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대개 자(字)는 이름과 관련이 있고 이름을 붙이는 방법은 태어난 아이의 생김새와 관련이 있습니다. 

  담(聃)은 귓바퀴 없을 담입니다. 당연히 이름인 이(耳)와 관련지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담(聃)이 자(字)라는 것이지요.
  
  공자가 노자를 찾아와 예(禮)에 관해서 물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만

  아마 이 이야기도 도가(道家) 측에서 삽입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는 노자의 충고는 공자의 인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장삿군은 값비싼 물건은 겉으로 내놓지 않는 법이라는 충고는

  공자에게 아는 체 하지 말라는 뜻이라고밖에 이해할 수 없지요.
  충고에 의하여 묘사되고 있는 공자의 모습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교만한 사람이며, 탐욕적인 사람이며, 그리고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사람입니다.

  사마천이 이러한 기록을 남겨 둔 이유가 자못 궁금할 정도입니다.  

 

(3)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은 81장 5천2백여자에 이릅니다.

     상편(上篇)은 도(道)로 시작되고, 하편(下篇)은 덕(德)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게 됩니다.
  
  주(周)나라가 쇠망하자 노자는 주나라를 떠납니다. 이 때 관윤(關尹)이라는 사람이 노자를 알아보고 글을 청하자

  노자가 이 '도덕경' 5천 언(言)을 지어 줌으로써 후세에 남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설파한 노자가 언(言)을 책으로 남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백낙천(白樂天)의 시 '노자'가 그런 내용입니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 법.
       이 말을 나는 노군(老君)에게 들었노라.
       만약 노군이 지자(知者)라면 무슨 까닭으로 스스로 5천자를 지었나."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노자'는 노자 개인의 저작이 아님은 물론, 어느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운자(韻字)를 붙인 구(句)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어서 동일인의 필체가 아니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주요부분은 동일인이 정리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금본(今本) '老子'는 왕필(王弼)이 주석한 왕본(王本)을 지칭합니다.

  1973년 호남성 마왕퇴(馬王堆) 고분(古墳) 3호에서 나온 백서노자(帛書老子)에는 상편(上篇)과 하편(下篇)이 바뀌어 있는데,

  이 백본(帛本)의 하장(下葬)연대는 BC 168년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993년 호북성 곽점촌(郭店村)에서 나온 죽간본(竹簡本)은 하장(下葬)시기의 하한선(下限線)이 BC 300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죽간본에는 금본(今本) '노자'의 5분의 2정도의 분량밖에 없습니다.
  
  '노자'라는 서물(書物)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몇 종류의 노자 서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을 뿐입니다.

  다만 도가(道家)의 사상적 연원(淵源)은 '논어'에도 언급되고 있는 은자(隱者)의 언행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노자'는 여러 갈래의 전승과 여러 종류의 서물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요.
  현재의 통설에 따르면 '노자'는 BC 350-BC 200년경의 집단창작이라는 설이 가장 일반적인 것입니다.

 

 (4) 노자는 송(宋)나라 패(沛)지방에 살았으며 장자(莊子)도 역시 송나라 사람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송나라는 은(殷)나라 유민(遺民)들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송나라 특유의 사상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패배(敗北)의 미학이며, 은둔자(隱遁者)의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노장(老莊)의 반문화(反文化)사상도 그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봅니다.

  원죄의식(原罪意識)을 갖지 않은 동양 특유의 체관(諦觀)과 달관(達觀)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인도(印度) 특히 불교적인 사상내용 때문에 서방(西方) 전래(傳來)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근거는 없습니다.
  '노자' 주석은 3천여 가(家)가 주(註)를 달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 것만 1천여 개나 되며,

  현재 3백46종의 주석(註釋)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주석 중 최고(最古)의 것이 하상공(河上公)의 주와 왕필(王弼)의 주입니다.

  하상공은 한대(漢代) 사람으로 노자를 주로 도교적(道敎的) 관점에서 주하였으며,

  왕필은 위진(魏晋)시기의 주로서 현학(玄學)의 일환으로 씌어진 것입니다.
  왕필(AD.226-AD.249)의 나이 16-18세에 씌어졌다고 알려진 노자주(老子註)는 글자의 수가 1만1천8백90자로서

  누가 누구를 주했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지요.
  왕필은 노자를 주(注)한 목적이 숭본식말(崇本息末)에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본(本)을 높이고 말(末)을 종식시키기 위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왕필이 말하는 본(本)이란 자연을 의미하며 말(末)이란 유법(儒法)의 인위적(人爲的) 규제(規制)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왕필은 지난번 주역강의에서 이야기하였듯이 23세 때 주역(周易)을 주(注)하여

  노역(老易)을 회통(會通)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노자'는 '주역'과 그 형식에 있어서는 극히 대조적입니다.

  '주역'은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처럼 효(爻)와 괘(卦)라는 부호(符號)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물상(物象)의 세계입니다.

  물(水), 불(火), 산(山), 하늘(天), 땅(地) 등 매우 구체적(具體的)인 세계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지요.

  추상적인 부호로써 구체적인 물상의 세계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 '주역'입니다.
  이에 비하여 '노자(老子)'는 정 반대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언어(言語)를 기본으로 합니다.

  이 언어는 그것이 산문이든 운문이든 '주역'의 부호에 비하여 매우 구체적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로 서술하고 있는 세계는 매우 추상적입니다. 현학(玄學)의 세계입니다.

  무(無)와 유(有), 위(爲)와 무위(無爲) 등 추상적(抽象的) 담론입니다. 소위 담현(談玄)입니다.
  
  나는 '주역'과 '노자'를 대비하면서 그림과 글씨의 차이를 연상합니다.

  그림이란 예를 들어 산수화 한 폭을 예를 들어봅시다.

  그 형식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나무와 산과 바위, 물, 새, 사람 등 매우 구체적인 물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이 이야기하는 서술의 세계는 매우 추상적입니다.

  아예 서술구조가 없거나 사의(寫意)가 막연한 그림이 대부분입니다.
  이에 비하여 서예(書藝)는 그 형식이 매우 추상적입니다.

  비록 한자(漢字)가 상형문자(象形文字)라 하더라도 거의 기호화(記號化)되어 있습니다.

  한글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완벽한 발음기호의 조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예의 경우 서술내용은 매우 구체적이고 분명하지만 그 형식은 추상적이기 그지없습니다.
  
  '주역'과 '노자'를 읽을 때에는 바로 이러한 점에 유의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철학적 추상력을 발휘하기도 해야 합니다.
  특히 '노자'의 독법에는 구체적인 단어가 문장으로 조합되면서 만들어내는 그 추상적 진술(陳述)에

  구체성을 입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적 과제와 연결시키는 이른바 현재성을 조명해내는 노력도 함께 해야 되는 것이지요.
  왕필의 노자주(老子註)가 지금까지 노자해석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왕필은 '노자'와 '주역'을 회통(會通)하고 있는데 왕필의 시대적 상황이 노자의 그것과 닮았다는 데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왕필이 노자주를 달았던 시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지(三國志)의 시대입니다.

  조조(曹操) 유비(劉備)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역사무대를 누비던 시기입니다.
  
  한말(漢末) 북방이 전란에 휩싸이자 왕필 일가는 동문인 형주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를 찾아가 의탁하게 됩니다.

  형주는 유표 사후에 조조(曹操)에게 귀속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당시는 조조가 군림하다가 조조 사후에 사마의(司馬懿)의 정변으로 위(魏)가 멸망하고

  다시 진(晋)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급격한 변화가 바로 이 형주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물론 당시는 대제국인 한(漢)의 피폐와 붕괴 그리고 대규모 농민반란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삼국지 시대입니다.

  또 하나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극상(下剋上)과 혼란(混亂)의 시대였습니다.
  
  한대(漢代)의 명교적(名敎的) 질서가 무너지고, 영원불변한 강상적(綱常的) 질서가 흔들리는 시기입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천도(天道)가 부정되는 시기입니다.

  천도와 대일통(大一統)의 관념이 부정되고, 개방적이고 능동적인 사고로 변화하는 격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대(漢代)의 명교체제(名敎體制)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것이 시대사조로 자리 잡았던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변화된 시대적 상황에서 왕필은 당시의 현학(顯學)이던 법(法) 명(名) 유(留) 묵(墨) 잡가(雜家) 등은

  모두가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추구하는, 그 어미를 버리고 자식을 취하는 '기모용자(棄母用子)'의 사상이라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이것이 춘추전국시대의 노자의 입장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필은 노자와 마찬가지로 근본적 사유(思惟) 즉 철학적 문제의식에 충실했던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왕필은 거대하고 복잡한 명교체제와 번망(繁妄)한 한대경학(漢代經學)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근본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욕망의 소종래(所從來)와 명교의 소이연(所以然)을 밝히는 참된 도(道)를 찾았던 것이지요.
  그것이 곧 무(無)를 근본으로 하는 이무위본(以無爲本)의 철학체계입니다. 이것이 왕필의 기본적 철학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숭본말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간단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정리한다(以簡御繁)는 것입니다.
  무(無)를 본(本)으로 삼고 유(有)를 말(末)로 삼는 귀무론(貴無論)이 노자독법(老子讀法)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왕필의 노자주가 노자를 가장 정확하게 읽고 있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왕필의 이러한 근본적 관점은 '주역'의 해석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이른바 주효론(主爻論)과 득의망상론(得意忘象論)입니다. 이 문제는 '주역' 편에서 언급했다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왕필의 시대와 왕필의 철학적 입장이 노자에 대한 가장 핍진(逼眞)한 독해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왕필의 '노자'가 금본(今本) '노자'이며 왕필의 노자주가 노자 해석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왕필은 노자를 주(註)하였다기보다는 '노자'를 편집하였다고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로 전승되어 오던 '노자' 텍스트를 자기의 입장, 주석(註釋)적 입장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자기의 입장과 관점에서 정리하고 편집하여 금본 '노자'를 만들어 낸 것이지요.
  물론 왕필본의 '노자'가 사실은 백본(帛本) '노자'나 죽간본(竹簡本) '노자'와는 다른 또 하나의 전승된 노자 텍스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지요.
  '노자'는 산문(散文)이라기보다는 운문(韻文)입니다. 5천여 자에 불과한 매우 함축적인 글이며 서술내용 역시 담현(談玄)입니다.

  더욱이 노자(老子)사상은 상식과 기존의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고도의 철학적 주제입니다.

  그 위에 간결한 수사법은 여타 철학적 논술에 비하여 월등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8강 노자(老子) - 3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1장)

 

         常(상) : 참다운. 변함 없는. 항상.
         欲(욕) : 하고자 하다. (will, must)
         ?(교, 요) : 변두리(邊), 광대 무변함. 샛길, 實相界.
                         ?(교)로 보아 밝다, 명백하다.
  
  노자 제1장입니다. 널리 알려진 만큼 해석상의 논란도 적지 않은 장입니다.

  몇 가지 번역을 같이 소개해서 서로 비교하여 이해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도라 할 수 있는 도는 항상된 도가 아니고,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천지의 시작을 이름이고, 유는 만물의 어미를 말한다. 그러므로 항상 무욕(無欲)으로 그 신묘함을 바라보고,

      항상 유욕(有欲)으로 그 돌아감을 본다. 이 둘은 같이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같이 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뭇 신묘함의 문(門)이 된다.”
  
  2)“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만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 했을 뿐이다.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고 한다.

      가물고 또 가물토다!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는가!”
  
  3)“도(는 그 이름을)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 이름이) 꼭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이름으로 (어떤 것의)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꼭(항상)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고 (우리가) 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름을 붙이기 전(도의 이전)에는 (천지지시의) 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묘함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붙인 후(도의이후)에야 그것의 요(실상계의 모습)를 파악할 수 있느니라.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것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이름뿐이니(도 이전의 세계와 도 이후의 세계가) 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은 것이니(도와 도 이전의 무엇은 같은 것이니라) 도는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니

      (지금부터 그것을 말하려 하느니)라.”
  
  1)과 2)의 번역은 거의 같습니다. 다만 3)번역이 몇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이 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여기에 나오는 개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위에 주를 달았습니다만 상(常) 욕(欲) 묘(妙) 교(?) 등의 의미를 분명하게 한 다음

  전체 문맥에서 어떤 의미로 읽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장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가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이 장의 중심 개념이 무엇인지 한번 찾아보기 바랍니다. 여러 번 읽으면 가능합니다. 道? 名?
  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와 명은 중심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예로서 든 것입니다. 핵심적인 개념은 무(無)와 유(有)입니다.

  노자의 철학을 ‘무(無)의 철학(哲學)’이라고도 합니다.
  이 점에서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에 대한 3)의 번역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무와 유의 설명과 동떨어지게 되지요.
  
  이 장은 핵심은 무와 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같은 것의 두 측면이라는 선언입니다.

  제1장의 핵심개념은 무와 유입니다. 그리고 그 서술구조는 “무(無)는 ······(을 이름하는 것)이며,

  유(有)는 ······(을 이름하는 것)이다”라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로 띄어 쓰기를 해야 옳다고 생각하지요.

  “無는 天地之始를 이름함이며 有는 萬物之母를 이름함이다”가 올바른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의 번역이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2)의 경우는 無名 有名으로 붙여서 읽고 있습니다. 이름이 없는 경우와 이름이 있는 경우로 나누어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3)도 다르지 않습니다.
  3)은 자신의 번역이 2)와 다름을 강조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무명을 ‘이름을 붙이기 전’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름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유명(有名)을 ‘이름을 붙인 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그것 역시 ‘이름이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2)와 3)은 다같이 첫 글자인 道와 名에 집착하여 無를 名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격하시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무(無)란 없음 즉 ‘제로(0)’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無)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무명(無名)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명(有名)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식물의 경우도 잡초가 가장 해방된 식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인간의 지배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무와 무명은 같은 범주를 의미합니다. 유와 유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의 1) 2) 3)의 번역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섣부른 절충도 피해야 하겠지만 지나치게 차이에 주목하는 것도 옳은 태도는 못됩니다.

  논의의 핵심을 놓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명과 유명은 번역1)과 같이 떼어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유명 무명으로 붙여서 읽는다면 제1장 마지막 구절인 此兩者同出而異名에서 兩者란 ‘無名’과 ‘有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이 없는 것과 이름이 있는 것. 이 양자가 서로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똑 같은 문제가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무욕이관기묘 유욕이관기교)에서도 나타납니다.

  이 구절에서도 무와 유를 중심개념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무는 항상(常: always) ···을 하여야(欲: will) 하고, 유는 항상 ···을 하여야 한다”라는 구조입니다.
  1)에서는 無欲 有欲으로 붙여서 읽고 있습니다. 무욕으로서는 묘를 보고, 유욕으로서는 교를 본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욕(欲)을 의지(意志)나 입장(立場)의 의미로 읽는다면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묘를 보기도 하고 교를 보기도 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현학이라고 하기 어려운 수준이지요.
  그리고 또 한가지 무욕을 가치판단이 없거나 입장이 없는 관점으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문제는 없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가치판단이나 입장이 배제된 그러한 관점(觀點)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고

  그러한 관점이 있다면 무욕과 유욕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지요.
  
  2)에서는 無欲을 無慾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근본적 사유를 논하는 이 장(章)의 의미를 無慾과 有慾이라는 윤리적 문제로 격하시킬 위험이 없지 않습니다.

    천지와 만물 그리고 묘와 교에 관한 사유가 이 장의 본령입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를 강상(綱常)의 도(道)로 격하시키는 셈이 되는 것이지요.
  
  3)에서는 無를 無名으로 그리고 有를 有名으로 해석합니다.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묘함을 보아야 하고, 이름을 붙인 후에는 요(?) 즉 실상계(實相界)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無로서 보는 것’과 ‘이름 붙이기 전에(無名) 보는 것’은 그 사유의 내용에 있어서 다르지 않습니다.

    3)의 번역에서 괄호를 쳐서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묘함이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가 그것입니다.
    마찬가지로 無名은 인식의 주체가 아닌 인식 대상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관(觀)의 주어가 되기 어렵습니다.

    무와 무명은 그 내용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강조점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번역을 비교하면서 느끼는 심정이 그리 편하지 않습니다.

  번역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구(字句)의 해석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것이 전체의 의미맥락에 영향을 줄 정도가 아니라면 자구해석의 차이는 서로 용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노자사상은 그 함축적인 수사로 말미암아 얼마든지 다른 표현과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다른 사람의 번역을 시비하지 않았나 마음에 걸립니다, 더구나 ‘노자’에 대한 관점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그렇다면 당연히 장절(章節)에 대한 해석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의 독법은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하여야 합니다.

  앞으로 예제를 읽으면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노자'는 무위(無爲)와 관조(觀照)라는 동양적 사유(思惟)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사상일 뿐 아니라

   과학, 문화, 예술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에 서구에 소개된 이후 현재 약 60여종의 번역본이 있으며 현대 서구사상에도 매우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노자 강의를 통하여 질주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여러분들이 얻게 되기 바랍니다.  

 

제8강 노자(老子) - 4

 

  우리가 ‘노자’ 제1장을 읽으면서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묘(妙)와 교(?), 시(始)와 모(母), 그리고 무(無)와 유(有)를 대치시키고 있는 노자의 서술방식은

  결코 그것들 간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을 통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취한 서술방식입니다.
  
  무와 유는 둘 다 같은 것인데 이름만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결론으로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지요.

  제1장은 다음과 같은 2가지의 범주로 대별하여 설명하고 있는 구도입니다.
  
      도(道)---무(無)---천지지시(天地之始)---묘(妙)---현(玄)
      명(名)---유(有)---만물지모(萬物之母)---교(?)---현(玄)
  
  그리고 이 2가지 범주는 같은 것이며 다같이 현(玄)한 것인데 이름만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1), 2), 3)의 번역이 전체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강조점이 놓이는 곳에 있어서의 차이는 있습니다.
  
  다음 구절인 ‘此兩者同 出而異名’(차양자동 출이이명)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는 사소한 것이라 해도 좋습니다.

  띄어쓰기를 달리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此兩者 同 出而異 名으로 띄어 쓰면 “이 양자는 같으나, 다르게(異) 보이는(出) 것은 그 이름뿐이다”라는 의미가 되고,

  此兩者同 出而 異名으로 띄어 쓰면 “이 양자는 같으나 (사람의 앎으로) 나와(出), 이름만 달리(異名)했을 뿐이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어느 것을 취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同謂之玄 玄之又玄’(동위지현 현지우현)도 마찬가지입니다.
    1) “(도 이전과 이후는) 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다.”
    2) “그 같은 것(同)을 일컬어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다.”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취하든 대동소이합니다. 물론 이 경우 현(玄)은 묘(妙)보다는 더 근원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모로하시(諸橋)는 현(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노자의 입을 빌려서 서술하는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만

  도(道)의 본체를 무(無)라고 설명하면 세상 사람들은 “아 그렇구나. 유에 대한 무로구나!”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도의 본체는 유에 대한 대립하는 상대적인 무(無)가 아니라 절대적인 ‘무(無)’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현(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현’이란 ‘검을 현’으로 검은 색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단순한 검은 색이 아니라 검은 색과 붉은 색을 혼합한 색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무와 유를 합한 근원적인 무(無)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글자라는 것입니다.
  검은 색은 무를, 그리고 붉은 색은 유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현(玄)에는 현묘불가식(玄妙不可識)의 의미 즉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道를 설명하는 말로서 가장 적합한 글자라는 것이지요.
  
  번역상의 차이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너무 번잡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정리하는 의미에서 제1장의 의미를 풀어서 이야기해보지요.
  도(道)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法則)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道)는 윤리적인 강상(綱常)의 도(道)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최대한의 법칙성 즉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운동법칙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 의미의 도(道)라는 것은 노자가 의미하는 참된 의미의 법칙 즉 불변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못됨은 물론입니다.

  노자의 도(道)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의 대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유를 뛰어넘는 것이지요.
  명(名)의 경우도 도(道)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언어로 붙인 이름이 참된 이름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름이란 원래 약속(約束)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그 실체를 옳게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개미에게 물어보면 ‘개미’라는 이름은 자기 이름이 아니지요.

  더구나 ‘개미’라는 이름은, 개미라고 지칭되는 그 곤충(?)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비상명(非常名)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붙인 표지(標識)일 따름이지요. 사람들끼리의 약속, 즉 기호(記號)인 셈이지요.

  한마디로 언어(言語)의 한계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석 유영모의 풀이도 이와 같습니다.

  도(道)를 도(道)라고 이름 붙인 것은 ‘박은 참’(寫眞)이라는 것이지요. 참도(眞道)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1장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도(道)의 세계는 언어를 초월하는 세계임은 물론이며,

  인간의 사유를 초월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1장에서 노자는 개념적 사유(思惟), 즉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부분에 대한 인식이며,

  가시적(可視的)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인식일 뿐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동체(同體)이며 통일체(統一體)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노자의 제1장은 무(無)와 유(有)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관계론(關係論)의 선언입니다.

  무와 유는 그것에 접근하는 접근로(接近路)에 따라서 구분될 수 있는 개념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따라서 노자의 무(無)는 ‘제로(0)’가 아닙니다. 이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인식대상을 초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無)입니다.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무(無)라는 것이지요.
  도(道)는 천지만물의 존재형식인 일체의 생성(生成)과 변화(變化) 그 자체를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근원적 법칙성입니다.

  인간의 인식이 그것을 담아낼 수 없지요. 도리어 인간의 인식이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도(道)가 작용(作用)하여 만물이 생성(生成)되고 변화 발전합니다. 그것이 유(有)입니다.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본체(本體)는 무(無)이지만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작용(作用)은 유(有)라는 것이지요.
  도무수유(道無水有)가 바로 그것입니다. 도는 없고 물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무형(無形)인 도체(道體)가 유형(有形)인 도용(道用)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자철학을 물의 철학이라고 하는 까닭은 보이는 것 중에서 도(道)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물이기 때문에

  물의 비유(比喩)로써 도(道)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무(無)의 세계든 유(有)의 세계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玄妙)한 세계입니다.

  유의 세계가 가시적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무의 작용이며, 현상형태이며,

  그것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노자’와 노자(老子)를 소개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또 제1장을 설명하는 데에도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가능한 한 간결하게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번역상의 논란이 있기는 합니다만 결정적인 것이 아닌 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제8강 노자(老子) - 5
  
  다음 제2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장도 널리 읽히는 장이며 또 번역상 논란이 있을 정도로 어려운 내용입니다. 우선 원문을 보지요.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제2장)

 

          爲美(위미) : 美라고 한다(謂). 또는 僞美 즉 거짓 아름다움.
            惡(악, 오) : 나쁘다. 추하다. 증오하다.
            爲善(위선) : 이 경우의 爲 역시 謂 또는 僞로 읽을 수 있다.
            無爲之事(무위지사) : 함이 없음. 또는 꾸밈없음(無僞)
            作(작) : 자라다. 만들다.
            辭(사) : 말하다. 거들다. 자랑하다.
            生而不有(생이불유) : 생산하되 소유하지 않는다. 없는 듯이 살다.
            恃(시) : 기대다. 의존하다.
            不去(불거) : 사라지지 않다.
            ‘爲而不志也’(帛書 甲本)
  
  주를 달았습니다만 상반되는 주를 달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더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컨대 이 장은 상대주의(相對主義)의 선언이며, 이 장의 기본 코드는 무위(無爲)입니다.
  상대주의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무위가 핵심이 됩니다. 따라서 위(爲)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제2장에 대해서도 다른 번역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러한 차이들에 관해서는 설명하면서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미(美)를 아름답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추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선(善)을 선하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이 구절의 번역은 주에서 달아놓았듯이 爲를 僞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거짓으로 꾸며진 아름다움(僞美)은 나쁜 것이라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또 위선(爲善)을 위선(僞善)으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장의 해석에 앞서 다시 한 번 노자의 기본적 사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위(無爲)의 사상과 상대주의(相對主義)사상입니다.
  무위란 거짓없음(無僞)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작위(作爲)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自然)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개입과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작위(作爲)가 그러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1장 유(有)와 무(無)의 통일적 인식에서 이미 표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美)와 선(善)의 개념도 상대적인 것으로 규정합니다. 미와 선에 이어서 유무(有無), 난이(難易), 장단(長短), 고하(高下) 등에

  이르기까지 노자는 대립적인 것, 고정 불변한 것을 거부합니다. 세상만물은 변화 발전하고 상호 침투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인 체계입니다.
  따라서 위(爲)를, 여기서는 물론이며, ‘노자’ 텍스트에서는 대부분 인위(人爲), 작위(作爲)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의 개입(介入)이란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자’사상의 기조는 대체로 유가(儒家)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 서 있습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란 인위적인 것이며 그 인위적인 것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지요.

  예악(禮樂) 명분(名分) 문물(文物) 등에 대한 반성과 반문화적 관점이 ‘노자’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제2장을 읽을 때에도 먼저 노자의 이러한 기본적 관점에서 읽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위(爲)를 거짓, 허식(虛飾)등의 의미로 읽는 것은 노자의 철학을 도리어 유가(儒家)의 윤리적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며,

  좁은 틀 속에 가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야말로 최고(最高), 최선(最善), 최미(最美)의 모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미(美)와 선(善)이란 사실은 인위적인 것이라는 것이지요.

  자연스러움을 외면한 인위적인 미나 선은 그것이 진정한 미나 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도리어 그것은 나쁜 것, 좋지 않은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미(美)와 인위적인 선(善)에 길들여진 우리의 기존관념을 반성하자는 것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제2장은 유가적 인식론과 실천론에 대한 반성입니다.

  인위적인 개념과 가치로 길들여진 의식을 반성하고 마찬가지로 실천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인위적 작풍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짓이란 글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위(僞)’입니다.

  ‘위(僞)’는 인(人) + 위(爲)입니다. 거짓(僞)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人爲)’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자연을 속이는 것이지요. 개미라는 이름을 붙이고 곤충으로 분류를 하는 것이지요.

  그 인식에 있어서 자연을 왜곡하여 거짓 인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산을 깎고 물을 막아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지요.
  그 실천에 있어서 자연의 운동법칙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위(人爲)와 작위(作爲)가 바로 거짓(僞)인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이 구절에서는 유무(有無) 난이(難易) 등의 구분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있음과 없음, 어려움과 수월함, 김과 짧음, 노래와 소리, 앞과 뒤 등의 개념은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구분이며

  불필요한 ‘차이(差異)’의 생산이라는 것이지요.

  차이의 생산이 곧 자연의 분열이며, 자연의 훼손이며 그것이 곧 인위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차별적 인식이 특히 ‘어려움’ ‘없음’ ‘짧음’ ‘낮음’ 등의 의미를 부당하게 폄하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의 상태 즉 자연의 가치를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위적인 구분이 초래할 수 있는 혼란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어야 성인(聖人) 이하의 구절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성인(聖人)은 마땅히 무위(無爲)하고 무언(無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경우의 성인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정치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노자는 유가(儒家)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하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하였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功)을 세우더라도 그 공로(功勞)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功)이 사라지지 않는다.”
  참고로 이와 똑 같은 문장이 제10장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生之畜之는 낳고 기른다는 뜻이며, 그 다음의 生而不有와 짝을 이루고 있으며,

  爲而不恃는 長而不宰(길러주지만 부리지 않는다)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방식 즉 성인이 마땅히 본받아야 하는 이러한 작풍이 곧 현덕(玄德)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덕이라고 하면 삼국지의 주인공 유현덕을 연상할 수 있지요? 현덕의 이미지가 이와 유사합니다.

  조조(曹操)처럼 철저히 자기가 주도하는 방식과는 다르지요.

  제갈공명이나 관우 장비 등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의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눈에 뜨이지 않게(玄) 일하는(德) 스타일이지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면서도 해석상의 이론(理論)때문에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

  결론적으로 ‘노자’ 제2장은 인식론(認識論)이며 실천론(實踐論)입니다.
  
  그 인식에 있어서 분별지(分別智)를 반성하고 고정관념(固定觀念)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마 선악(善惡)구분처럼 천박한 인식은 없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OX식의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도 저급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기존의 저급한 인식을 반성하자는 것이지요.
  유무(有無) 난이(難易) 고저장단(高低長短)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自然)스러운 것입니다. 굳이 비교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지요.

  더구나 윤리적(倫理的) 판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미의식(美意識)마저도 기존의 인위적 틀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이 장에서 먼저 잘못된 인식을 전환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이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춘추전국시대를 지배하는 갇힌 인식을 반성하고 조급한 실천을 지양하자는 것이지요.

  열린 마음과 유장(悠長)한 걸음걸이로 대응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지요.  

 

제8강 노자(老子) - 6

 

   ‘노자’ 제1장과 제2장을 설명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해석상의 논란이나 자구(字句)중심의 독해보다는

   우리가 ‘노자’로부터 읽어내야 하는 현대적 과제를 중심으로 읽기로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읽어야 할 제3장은 마침 정치론(政治論)이기도 합니다.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제3장)
  
            不貴難得之貨(불귀난득지화) : 얻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貨(화) : 穀, 또는 商品.
            可欲(가욕) : 욕심낼 만한 것.
            使夫智者不敢爲也(사부지자불감위야) :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爲無爲(위무위) : 無爲의 방식으로 행하다.
  
  먼저 전체적인 의미부터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하여야 하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게 하여야 하며,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정치는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게 하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하게 하여야 한다.
   언제나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하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정치를 하면 다스려지지 못할 것이 없다.”
  
  번역이 자연스럽지 못하지만 전체의 뜻은 짐작되리라 생각합니다.
  노자 정치론입니다. 그가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는 매우 순박하고 자연스러운 질서입니다.
  우선 현(賢)을 숭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賢)이란 무엇입니까? 지혜라도 좋고 지식이라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습득하려고 하는 지식이나 지혜란 한 마디로 자연(自然)에 대한 2차적인 해석입니다.
  자연에 대한 부분적 지식이거나 그 부분적 지식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당연히 자연으로부터 일정하게 괴리(乖離)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숭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오직 농부만이 일찍 도를 따르게 된다고 합니다.(夫唯嗇 是以早服 59장)
  
  그리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인 화(貨)를 귀하게 여기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화(貨)란 여기서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가 만들 수 있는 농산물(農産物)이 아니라 공산품(工産品)이라고 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공산품은 직접적 생산품이 아니고, 또 일차적인 필수품도 아니었다고 해야 합니다.
  화(貨)란 경제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상품(商品)입니다. 그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속성인 물건이 화(貨)입니다.

  현(賢)이 2차적인 재구성이듯이 화(貨)도 자연산이거나 농산물이 아니라 2차 생산품인 공산품입니다.
  노자의 이러한 주장은 마치 오늘날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구하기 어려운 화(貨)를 귀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만

  오늘날은 농산물에 비하여 공산품의 가격이 훨씬 비쌉니다. 사람이 만든 것보다 기계가 만든 것이 훨씬 더 비쌉니다.
  네팔에서 느낀 것입니다만 수입 전자제품은 네팔 사람들로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고가(高價)인 반면에,

  엄청난 수고가 담겨 있는 수공예품은 그 값이 거저나 다름없었습니다.

  외국환율제도와 함께 시장가격 역시 고도의 수탈시스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자가 물론 오늘날의 외환제도나 가격시스템을 전제로 이야기한 것일 리는 없지만 화(貨)의 가격이 등귀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는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언급되는 심(心)과 복(腹), 지(志)와 골(骨)의 대비에서도 이러한 관점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腹)과 골(骨)을 강하게 하라는 것이지요. 심(心)과 지(志)는 버리고 복과 골을 튼튼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자가 대비시키고 있는 심지(心志)와 복골(腹骨)이라는 두 그룹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위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복골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심지(心志)가 타율신경계(他律神經系)인 데 비하여 복골(腹骨)은 자율신경계(自律神經系)라는 것이지요.

  不見可欲의 욕(欲)도 심지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부구조(上部構造)보다는 하부구조(下部構造)를 튼튼히 하여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정치학입니다.

  한 사회의 물적 토대를 튼튼히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근간입니다.
  IMF사태 때 우리 사회의 허약한 토대가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경제학 강의가 아니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만

  IMF사태는 한마디로 자립적 토대가 허약하기 때문에 겪은 환란이었지요.
  일제 식민지시대의 유산이면서 동시에 해방과 건국과정에서도 그대로 온존되고

  그 후 3공 시절의 소위 산업화과정에서 그 허약성과 종속성이 급속하게 강화되고 구조화됩니다.

  IMF는 이처럼 허약한 체질에 그 원인이 있었지요. 복과 골이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습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IMF극복 방식이 복과 골의 강화를 외면하고 임시 미봉책으로 일관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IMF 이후에 자주 듣고 있는 구조개혁이나 구조조정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조개혁이나 구조조정이 아니지요.

  토대의 개혁이 아니지요. 같은 돌에 두 번 세 번 넘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자는 백성들이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무욕은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무엇보다 욕망(慾望) 그 자체를 양산(量産)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체제입니다.
  수많은 화(貨)를 생산하고 그 화(貨)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입니다.

  내 경우에도 무엇을 사지 않기가 그렇게 힘이 듭니다.

  여간한 결심이 아니고서는 CF나 쇼우 윈도우 앞에서 무심하기가 어렵습니다.

  순간순간 결의를 다져야하는 흡사 전쟁을 치르는 심정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 상품생산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서입니다. 지식사회라고 하여 예외는 아닙니다.

  지식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접속만 하면 되는 것으로 선전됩니다. 나는 그것이 지식상품의 CF라고 생각합니다.
  지식도 상품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식도 상품의 형태로 생산되고 유통됩니다.

  언어도 상품이 아니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은 언어가 가장 마진이 높은 상품입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지식도 정보도 상품의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품 이외의 소통방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상품형태를 취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시장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설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상품화한 거대한 시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무지할 수도 없고 무욕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구조를 깨닫는 것 그것이 노자의 재조명이라고 생각하지요.
  
  노자는 또 지자(智者)들로 하여금 함부로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자들이 벌이는 일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일들을 지자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지요.
  현(賢)을 숭상하고, 난득지화(難得之貨)를 귀하게 여기게 하고 욕망 그 자체를 생산해내고,

  심지(心志)를 날카롭게 하는 등 작위적(作爲的)인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지자(智者)들이지요.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지요.
  노자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작위(作爲)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대처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물을 옷처럼 덮어 기르면서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衣養萬物而不爲主 34장)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혼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爲無爲 則無不治) 나아가서 천하는

  무사(無事)로서 얻을 수 있으며(以無事取天下 57장),

  감히 천하에 앞서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67장)고 합니다.
  이 장의 성인(聖人)이나 지자(智者)는 적절한 비유는 못됩니다만 오늘날 정치인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사람이며, 무언가를 하겠다고 공약하는 사람이지요.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나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노자적(非老子的) 성향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향(靜香) 선생님은 해방 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투표하신 적이 없다고 실토하신 적이 있습니다.

  투표하시지 않은 이유가 매우 특이합니다. 이유인즉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나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찍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삼고초려를 하더라도 선뜻 나서지 않아야 옳다는 것이지요.

  하물며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서 남을 낮추어 말하고 스스로를 높여서 말하는 사람을 찍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지역의 어른이시고 자연히 사람들의 이목이 있기 때문에 투표일에는 투표소를 휘익 한바퀴 돌고 오신다는 것이었어요.
  아마 노자에게 선거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투표하러 가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노자의 정치학이 이와 같습니다.
  
  노자의 정치학이 그 표현에 있어서 절정에 달한 것이 바로 ‘생선 굽는’ 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治大國若烹小鮮 60장)는 것이지요.

  작은 생선을 구울 때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지요.
  생선의 비유는 일상생활의 비근한 예를 들어서 친근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이나 소위 국가와 사회를 경영하는 방식을 반성할 수 있는 정문일침의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가에서는 이 제3장을 근거로 하여 노자사상은 우민사상(愚民思想)이며 도피사상(逃避思想)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무지(無知) 무욕(無欲) 그리고 무위(無爲)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위(無爲)는 무행(無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무위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방법론입니다. 실천방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목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난세의 극복’(無不治)입니다.

  따라서 이 장은 은둔(隱遁)과 피세(避世)를 피력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적극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세(改世)의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그 방식이 유원하고 근본을 경영하는 일에 관하여 진술하고 있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면 있을 따름입니다.
  

 

제8강 노자(老子) - 7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8장)
  
            上善(상선) : 최고의 선
            處衆人之所惡(처중인지소오) :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하다.
            幾於道(기어도) : 幾는 近. 도에 가깝다. (道無水有 故曰幾也--왕필주)
            居善地 心善淵. . . . : 善은 형용사, 부사, 동사로 각각 해석할 수 있다.
            與(여) : 더불어 사귀다, 施, 予(帛書)
            仁(인) : 人 또는 天(帛書)
  
  노자 철학을 한 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도무수유(道無水有)라고 했지요.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물의 성질과 운동을 통하여 도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내가 제8장을 여러분과 같이 읽으려고 하는 것은 연대(連帶)의 논리입니다. 연대는 우리의 당면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논의는 우선 본문을 해독한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장은 매우 유명한 장입니다. 특히 ‘상선약수(上善若水)’는 그야말로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이 경우 최고의 선은 현덕(玄德)이며 도(道)입니다.

  물이 비록 현덕(玄德)이 아니고 도(道) 그 자체가 아니지만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현상형태라는 것이지요.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善)이라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3가지입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로(雨露)가 되어 만물을 생육하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생명의 근원입니다.
  친구 중에서도 물 같은 친구를 가장 좋아하지 않나요?

  필요한 경우 언제나 찾아가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벗이 바로 물 같은 친구지요.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는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소극적인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투어야 마땅한 일을 두고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도피주의(逃避主義)나 투항주의(投降主義)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다툰다는 것은 어쨌든 무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순조롭지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목표설정에 무리가 있거나 아니면 그 실천방법에 무리가 있는 경우를 쟁(爭) 즉 ‘다툰다’고 합니다.
  주체적 역량이나 객관적 조건이 미성숙(未成熟)한 상태에서 무엇을 추구하는 경우에는

  그 진행과정이 순조롭지 못하고 당연히 다투는 형식이 되는 것입니다. 무리(無理)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지요.

  쟁(爭)이란 그런 점에서 위(爲)입니다. 작위(作爲)이지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못되는 것을 노자는 쟁(爭)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에 ‘전국위상 파국차지’(全國爲上 破國次之)라 하였지요.
  나라를 깨트려서 이기는 것은 최선이 못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전국(全國) 즉 나라를 온전히 하여 취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이지요.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작위(作爲)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자’ 마지막 장인 제81장의 마지막 구가 “天地道 利而不害 聖人之道 爲而不爭”입니다.

  천지의 도는 이로울지언정 해롭지 않고, 성인의 도는 일하되 다투는 법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낮다는 것은 반드시 그 위치가 낮다는 물리적 의미가 아닙니다.

  비천한 곳, 억압받는 곳, 피지배 계급 등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나는 이 구절을 노자의 정치학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읽습니다.

  물론 노자사상이 민초들의 정치적 해방을 위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명시적 진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은 근본에 있어서 민초들의 정치학입니다.
  그러나 ‘노자’는 근본에 있어서 고도의 제왕학(帝王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도가의 무리는 대개 사관(史官)에서 나왔으며

  이는 인군(人君)이 나라를 다스리는 술수(術數)를 기술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소위 ‘무위(無爲)의 통치’는 군주의 비밀정치론이라는 것이지요.

  “도는 항상 하는 일이 없지만 하지 못하는 것도 없다. 후왕이 만약 그것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그렇게 될 것이다.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제37장)는 것을 근거로 들기도 합니다.
  
  이 경우의 무위(無爲)는 핵심적 권력의 장악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핵심적 권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못할 것이 없다’(無不爲)는 것이지요.

  백성을 무지무욕(無知無慾)하게 한다는 것은 곧 우민화이며, 백성들의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게 한다는 것은

  동물처럼 배만 부르게 하고 머리는 비게 한다는 것이지요.

  의지를 약하게 만들고 뼈를 튼튼하게 한다는 것은

  비판의식을 제거하고 힘든 노동에 견딜 수 있도록 육체만 튼튼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군주는 핵심적 권력만을 장악하는 것(抱一)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그 하나(一)가 설령 도(道)라고 하더라도 ‘대도(大道)’는 매우 주관적인 것으로서

  군주의 통치권(統治權 : 행정권이 아닌)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노자사상은 전제군주의 비밀정치를 옹호하는 사상이라고 주장되기도 합니다.

  노자사상의 소위 공평무사(公平無私)는 물론 법가(法家)가 계승하게 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권력을 극대화하고 권력의 소재를 은폐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지요.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도 노자를 계승한 것이며 비판적 의견을 봉쇄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하지요.
  노자사상에 대한 이와 같은 부정적 평가는 노자철학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자’는 중국 사상사에서 최고의 철학적 담론임에 틀림없습니다.

  백보를 양보하여 ‘노자’를 정치사상이나 이데올로기라고 하더라도, ‘노자’의 정치학은 철저하게

  민초들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무한경쟁의 소용돌이로 치닫는 시대입니다. 부국강병의 방법론을 두고 수많은 이론이 속출하게 됩니다.

  직접 일하지 않고 패자(覇者)에게 기생하여 지식을 팔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사사로운 이해를 도모하는

  지식인계층이 사회적으로 확대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노자는 패권경쟁을 반대하고 그에 기생하는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면서도 노자는 자신의 주장을 사회학과 정치학의 차원을 넘어 철학적 논리로 승화시킵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최고의 철학적 체계를 완성합니다.

  여기에 시대를 초월하고 있는 ‘노자’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는 자신의 철학적 논리로 패권경쟁을 둘러싼 일체의 행위를 반자연의 무도(無道)한 작위(作爲)로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자’의 이러한 철학적 내용 때문에 또 ‘노자’를 고답적인 피세(避世)의 철학으로 단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자’를 피세의 철학으로 단정하거나, 제왕학(帝王學)이라고 성격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쟁과 하극상으로 점철된 살벌한 상황 속에서 패권경쟁을 반대하고, 그에 편승한 지식인들을 질타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결단이 요구되는 실천적 행위로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대의 희생자인 민초들을 위하여 반전(反戰) 중명(重命)사상을 설파하고 약한 자가 이긴다는 희망을 선포하고

  그들의 전술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서도 노자의 입장이 분명하게 표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춘추전국시대라는 천하대란을 당하여 모든 억압과 착취가 최종적으로는 가장 약한 민초들의 부담으로 전가됩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과 재산을 잃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이산의 고통은 결국 민초들의 몫입니다.
  이러한 민초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노자’의 곳곳에 피력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지배자들이 세금을 많이 걷어 먹기 때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제75장)

  그러나 우리가 ‘노자’에 주목하는 것은 민초의 전략과 전술을 ‘노자’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하는 것이며, 가장 약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민초(民草)가 그렇습니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이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제78장)

  이 78장에서는 물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는 까닭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 以其無以易(변함없음)입니다. 이 구절 이외에는 모두 선언적인 것입니다.

  유약(柔弱)이 사직(社稷)의 주인이 된다거나, 천하의 왕이 된다는 메시지만 선언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안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어내어야 하는 것은 왜 그러한 힘이 약한 것에 있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몫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가장 다수이기 때문입니다. 강자의 지배력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자보다는 피지배자가 그 수에 있어서 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을 지배하여 휘하에 부리는 경우에 비로소 그 힘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강자의 능력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地位)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지요.
  약한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2가지 점에서 결정적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노자가 밝히고 있는 유일한 이유인 以其無以易之가 그런 의미입니다.
  다수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흐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물보다 나은 것이 없는 까닭은 물은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낙수(落水)가 댓돌을 뚫는 이치가 그렇습니다. 쉬지 않고 흐를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다수여야 합니다.

  양적으로 우세하여야 합니다.
  
 둘째 다수(多數)는 곧 정의(正義)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 원리입니다.

  불벌중책(不罰衆責) 많은 사람이 범한 잘못은 벌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신호등은 철거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소수의 선동가에 의하여 다수의견이 왜곡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도언론의 막강권력에 의하여 여론이 조작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다수라고 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약한 사람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수이기 때문이며 다수(多數)는 반드시 낮은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산(山)을 바라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낮은 곳이 많습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양은 적어집니다. 정상은 품이 작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방금 이야기하였듯이 산정(山頂)은 산록(山麓)이 받쳐주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요.

  강자의 능력과 힘이란 다름 아닌 다수의 약자에서 나온다는 것이지요.
  
  이야기를 좀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이 도에 가깝다고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 낮은 곳에 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노자의 정치학이라고 하였지요. 민초들의 전략전술이라고 하였습니다.
  낮은 곳에 약한 사람들이 살고 또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정리하여야 할 것인가?

  현상황에서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이 바로 ‘노자’의 이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8강 노자(老子) - 8
  
  이야기를 바꾸어서 질문을 하나 하지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무엇입니까?
  
  얼른 대답을 못하지요?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제66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江海所以能爲百谷王子 以其善下之
  바다(江海)가 모든 강(百谷)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 구절의 선(善)은 well이 아니라 more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대국자하류 천하지교 천하지빈(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61장)
  대국은 자신을 낮추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천하가 만나는 곳이 되며, 모든 가능성의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노자’가 민초의 전략전술이며 정치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노자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곧 우리의 당면한 문제의식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변혁운동의 문제점은 전체 역량이 부문별로 또는 정파 단위로 분열, 분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운동진영의 당면한 과제는 단연 연대(連帶)문제라는 데에 이견이 없습니다.
  사회교육원 노동대학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였습니다만 나는 연대(連帶)의 이유를 ‘노자’에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노자’의 정치론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는 의미에서 그 강의안의 일부를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고전강독에서 다소 벗어난 이야기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노자’의 생환(生還)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변혁운동에 있어서 연대문제가 당면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변혁 역량이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취약하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전체 변혁 역량이 취약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중심 역량인 노동운동 역량 역시 취약한 수준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역량의 강약을 평가하는 기준은 크게 2가지입니다. 양적(量的) 기준과 질적(質的) 기준이 그것입니다.
  양적 역량이란 것은 수량적 개념이기 때문에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질적 역량입니다.
  
  질적 역량은 역량의 조직성(組織性)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조직 역량은 비록 그 규모가 작다고 하더라도 특정의 역사적 상황에서 엄청난 증폭(增幅)의 핵(核)이 됩니다.

  따라서 질적 역량은 역량의 조직성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하는 것은 질적 역량을 조직 내부의 단결과 결속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질적 문제를 조직 내부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이지요.
  질적 역량을 조직 내부문제로 가두는 경우에는 2가지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하나는 조직이 경직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발상 자체가 관계론적 패러다임이 아니라 존재론적 패러다임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적 패러다임은 기본 구조에 있어서 자본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앞에 내거는 기치에 관계없이 이러한 방식은 근대사회의 틀을 답습하는 것입니다.

  조직을 최우선 단위로 하는 존재론적 논리는 필연적으로 좌우편향을 낳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개량주의적 경향으로 후퇴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모험주의적 경향으로 치닫기도 합니다.
  존재론적 논리는 결국 강철(鋼鐵)에 대항하여 또 하나의 강철을 만들어 내는 모순입니다.

  ‘노자’의 전략전술과는 정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적 역량을 조직 내부문제로 가둘 경우에 나타나는 두 번째의 문제는

  그러한 질적 역량은 양적 증폭의 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경우에는 연대문제가 성급한 견인론(牽引論)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러한 집단이기주의가 지지기반을 약화시키기 때문이기도 하며 더러는 선진성(先進性)이 대중성(大衆性)을

  밀어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보수주의적 경향입니다. 개량주의보다 더욱 경계해야 할 우편향(右偏向)입니다.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보수주의적이라는 모순을 안게 됩니다.

  역량이 취약하고 조건이 미성숙한 단계에서 숱하게 경험한 역사적 교훈입니다.

  당면 과제인 연대문제가 내부의 조직문제로 후퇴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현 단계 우리 사회의 역량이 그 양적 측면에서나 질적 측면에서 매우 취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객관적 상황에 있어서도 수세적 국면으로 밀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고민해야 할 실천적 과제가 바로 연대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연대는 물론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실천적으로는 약한 자의 방법론입니다.
  이러한 방법론과 철학이 바로 ‘노자’이지요. 노자(老子)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이 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고 설파합니다. 노자에 있어서 최선은 최강(最强)의 의미로도 쓰여지고 있습니다.
  
  노자사상은 기본적으로 민초(民草)들의 전략전술입니다.

  부국강병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춘추전국시대에

  가장 약한 자들이 어떻게 대응하고 실천할 것인가에 관한 귀중한 담론을 노자에서 읽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유능제강(柔能制剛) 즉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방법론이 노자사상입니다.

  약한 물이 강고한 것을 이기는 힘을 노자는 무엇보다 낮은 곳을 지향하는 물의 특성에서 찾습니다.
  낮은 곳으로 향하는 물의 특성 때문에 물은 반드시 모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낮은 곳을 향하고 그리고 수많은 물들이 모이기 때문에 결국 바다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물의 철학은 한마디로 하방지향(下方指向)의 연대성에 있습니다.

  모든 물을 받아들임으로써 ‘바다’가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열려 있다는 뜻이지요.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받아들인다는 것 그리고 하방지향의 연대는 그 아픔에 다가가서 그것을 공유한다는 의미로,

  그야말로 열린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도 많지만 내가 평소에 갖고 있는 기준의 하나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부류는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비굴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오만한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반대로 ‘강자에게 당당하고 약자에게 관대한 사람’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강자에게 당당하고 약자에게 오만하다거나 강자에게 비굴하면서 약자에게 관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연대의 원칙은 낮은 곳, 약한 것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처럼.
  강한 것, 높은 곳을 지향하는 것은 연대가 아닙니다. 그것은 추종과 타협입니다. 결국 흡수되거나 복속(服屬)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노동운동이 연대해야 할 방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안으로는 대기업 노동현장보다는 중소의 열악한 현장과 연대하고, 여성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과 연대하여야 합니다.
  밖으로는 역량이 취약한 부문과 연대해야 합니다.

  비조직 사회운동부문, 농민, 실업자, 빈민, 소시민 등과 사회적 연대를 강화해야 합니다.

  물처럼 하방지향적 연대에 충실해야 합니다.”
  
  위에서 소개한 글은 연대문제에 관한 강의안의 일부입니다.

  연대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방금 살펴본 ‘노자의 물’ 외에 여러 가지 문제를 함께 논의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목표와 과정’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있어서의 가치실현의 문제’

  ‘화동(和同)과 공존(共存)’에 관한 논의들을 함께 다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치경제학 강좌’에서 다루는 게 옳습니다.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이 구절도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우선 문법적으로 선(善)을 형용사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는 부사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地) 연(淵) 인(仁) 신(信) 치(治) 능(能) 시(時)를 동사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느 경우든 문법 상으로는 하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전 독법의 요체는 일관성입니다. 전체의 의미맥락에 따라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시도하고 있듯이

  그것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관점에서 읽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민초들의 연대론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전위조직의 과학적 실천방법에 관한 강령적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문장의 주어는 물론 물입니다.
  居善地는 현실에 토대를 둔다는 의미입니다.

  민중들과의 정치적 목표에 합의하는 현실노선과 대중노선을 토대로 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心善淵은 마음을 비운다(虛靜)는 의미입니다. 사사로운 목표나 과정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與善仁의 與와 仁은 인간관계을 의미합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조직하든 그 인간관계를 동지적 애정으로 결속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言善信 그 주장(言)이 신뢰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正善治의 正은 政입니다. 바로 잡는 것 즉 개혁, 변혁입니다. 그 방법이 治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평화로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영도방식이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습니다.

  政의 방법이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강제나 독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최대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이끌어 낸다는 의미입니다.
  事善能은 전문적인 능력으로 일을 처리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動善時는 그 때가 무르익었을 때에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은 웅덩이(科)를 만나면 건너뛰는 법이 없고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나아가는 것이지요(盈科後進).
  주체적 역량과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제시한 실천방식은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과학적(科學的) 방법(方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이란 싸우지 않는 것(不爭)이며 따라서 오류가 없는 것(無尤)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唯不爭 故無尤
  오직 다투지 않음으로써 허물이 없다.
  ‘노자’를 물의 철학이라고 하는 이유와 그것의 현대적 의미에 대하여 우리는 결코 무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얼마 전 남대문 시장에 갔었어요. 거기 좌판에 피켓을 꽂아 두었는데 뭐라고 썼는지 아세요?
  “싸다고 물로 보지마!”라고 썼습니다. 파는 것이 ‘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T셔츠였지요

 

제8강 노자(老子) - 9
  
        三十輻共一? 當其無 有車之用
        ?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利 無之以爲用(11장)
  
            輻(복): 바퀴 살.
            ?(곡): 바퀴 살이 모이는 통.
            ?埴(선식, 연치) : 찰흙을 이기다.
            鑿戶(착호) : 門을 뚫다.
            ?(유) : 窓門.
  
  이 장도 널리 알려진 장입니다. 먼저 대강의 뜻을 풀어서 이야기하지요.
  
     서른 개의 바퀴 살이 모이는 바퀴 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하여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약간의 해석상의 논란이 있습니다만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역시 노자철학의 주제인 무(無)와 유(有)의 관계입니다.
  수레의 곡(?)은 바퀴 살이 모이는 통(hub)입니다. 이 곡에 축을 끼웁니다.

  곡에 축(軸)을 끼움으로써 수레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릇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기고,

  방의 빈 공간이 방으로서의 쓰임이 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노자의 관점은 그런 자명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 자명한 사실의 구조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나 수레를 타고, 그릇을 사용하고, 방에서 생활하지만 그것은 수레나 그릇이나 방의 있음(有)에만 눈이 앗기어

  막상 그 있음의 배후(無)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지요. 숨어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즉 유(有)의 배후로서의 무(無)를 드러내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고 이 장의 의미입니다.

  현상을 있게 하는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찻잔 한 개를 고를 때 무엇을 보고 고르지요? 모양이나 질감, 색상, 무늬 등을 보고 고릅니다.

  말하자면 유(有)를 보고 고르는 셈이지요.
  
  나는 이 장이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현상의 저변을 주목해야 한다는 메시지로서 읽히기를 바랍니다.

  한 개의 상품(商品)의 있음(有)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의 소모(消耗)와

  비효용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엉뚱하기 짝이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노자'의 이 장을 읽으면서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에서 보았던 '환희의 동상'을 떠올립니다.

  최초로 금광(金鑛)을 발견한 조지 헤리슨이 금광석을 움켜쥔 손을 높이 쳐들고 환호하는 동상입니다.
  남아프리카가 캐낸 것이 전 세계의 금과 다이아몬드의 70%라는 엄청난 양이라고 합니다.

  그 엄청난 양을 생각하면 그 환희의 크기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상을 지나 바로 골드리프시티 광산의 지하갱도에서 그 환희의 반대편을 목격하고는

  처연한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용암이 솟아오르지 않을까 두렵기 짝이 없는 지하 3천3백m,

  숨막힐 듯한 갱도에서 섭씨 60도의 고열 속에서 금광석을 캐고 있는 흑인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하갱도의 흑인 소년과 '환희의 동상'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환희가 다른 누군가의 비탄이 되고 있는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을 환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참으로 처연한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의 이러한 연상이 '노자'를 매우 천박하게 읽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물론 모르지 않습니다.

  현학(玄學)을 사회학(社會學)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가치란 바로 소유(所有)와 소비(消費)라는 유(有)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有)의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유지되는가?

  그리고 이 유(有)의 세계가 어떠한 것을 축적하고 어떠한 것을 파괴하고 있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치열한 실천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장으로부터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이끌어내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소유의 예찬은 자칫 사회의 억압구조를 은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진 장삼 한 벌과 볼펜 두 자루만 남기고 입적하신 노스님의 모습은 무소유에 대한 무언의 설법입니다.

  욕망의 바다에서 소유의 탑을 쌓고 있는 중생들에게 무소유의 설법은 매우 중요한 각성의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소유 없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노스님의 무소유는 사찰종단의 거대한 소유(所有)구조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요.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무소유(無所有)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소유(所有)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지요. 노자의 역설입니다.

  나는 무소유와 무의 가치를 예찬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사회가 숨기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무(無),

  숨겨진 억압구조를 드러내는 관점에서 이 장을 읽어주기를 원합니다.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 몇 년째 화두(話頭)처럼 걸어놓고 있는 나의 '데미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닮고 싶은 인간상(人間像)이지요.
  나의 가까운 선배 중에 매우 조용한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없는 듯이 존재하는 분입니다.

  모임에서도 발언하는 일조차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모임이 끝난 후에 누구 한 사람 그 분이 참석했는지 참석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분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 분이 참석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그가 참석치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신통할 정도입니다.
  참석했을 경우에는 눈에 뜨이지 않고, 결석했을 경우에는 그 자리가 큼직하게 텅 비어버리는 그런 분입니다.

  아마 눈에 뜨이지 않는 자리에서 이것저것 꼭 필요한 일들을 거두거나 거들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됩니다.

  없는 듯이 있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을 위하여 한 줄기 바람이 되리라."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우리들이 일하는 방식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이 장을 읽을 수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기 바랍니다.

 

제8강 노자(路子) - 10
  
        太上 下知有上 其次 親之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
        故信不足焉 有不信焉
        悠兮 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曰 我自然 (17장)
  
             太上(태상) : 최고의 정치. 無治, 德治(王道),
             悠(유) : 유유하다. 그윽하다.
             猶(帛本, 簡本) : 오히려. 머뭇거리다. 조심하다.
             功成事遂(공성사수) : 일이 성취되다.
             自然(자연) : 스스로 그러함.
  
  이 장 역시 노자의 정치론입니다. 특히 지도자론(指導者論)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군주(君主)에 관한 설명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정치 즉 태상(太上)의 정치는 백성들이 다만 위에 임금이 있다는 사실만 아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간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력하유어아재(帝力何有於我哉)
  임금의 권력에 내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할 정도로 백성들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임금입니다.
  그 다음이 백성들이 친애하고 칭송하는 임금입니다.

  물론 임금이 백성들을 자상히 보살피기 때문에 백성들이 친애하고 칭송하겠지만

  이러한 임금은 없는 듯이 존재하는 임금만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이 두려운 임금입니다. 권력을 행사하고 형벌로써 다스리는 패권정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려운 임금보다 못한 임금이 바로 백성들이 업신여기는 임금입니다. 멸시의 대상이 되는 임금이지요.

  이를테면 임금을 풍자하는 바보시리즈가 유행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구절이 故信不足焉 有不信焉입니다. 언(焉)으로 강조하여 매우 단정적인 선언을 합니다.

  백성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불신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요컨대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품성은 백성 즉 민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뢰함으로써 신뢰받는 일입니다.

  백성들을 믿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태상(太常)의 정치이며, 이를테면 무치(無治)입니다.

  무치가 가능하기 위해서 임금은 백성을 신뢰하고 백성은 임금을 신뢰하는 관계가 성립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다음 구절인 悠兮 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曰 我自然입니다.
  명심해야 하는 것(悠兮)은 첫째 귀언(貴言)입니다. 즉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2장의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와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의 불언(不言)은 말없음으로써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간섭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간섭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간섭하지 않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카메라만 잡아도 요구가 많습니다. 더구나 정치권력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자면 불가피하게 간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정치권력은 처음부터 간섭하기 위한 것입니다.

  노자가 불간섭을 요구한다는 것은 권력의 사당적(私黨的) 성격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공(功)을 세우고 일을 성취하더라도 그 공로(功勞)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그 공로(功勞)를 차지하지 않아야 하는 것(功成而弗居 제2장)은 물론입니다.
  공명(功名)을 이루었더라도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功成名遂 身退 天之道 제9장)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百姓皆曰 我自然 즉 모든 성취는 백성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믿게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간섭하지 않고 백성들이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은 표현은 다르지만 다름아닌 민주주의 사상입니다.

  이 장에서 이야기하는 노자의 이상적 정치와 바람직한 지도자상이 이와 같습니다.
  좌전(左傳)의 “太上 有立德 其次 有立功 其次 有立言”이 이 장(章)을 부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80장에서 노자의 이상국가론(理想國家論)이 다시 언급됩니다.
  
  이 장에서 우리가 좀 더 논의해야 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신뢰의 문제입니다. 정치가는 진심으로 백성들을 신뢰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정치적 목표는 백성들이 결정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그러한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요.
  백성들의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인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도달한 결론이라는 것이지요.

  충분한 임상학적 과정을 거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결론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백성들에게 과연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가?

  백성들이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처지에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CF광고는 물론이며 문화와 예술, 교육에 이르기까지 압도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막강한 권력(勸力)을 생각한다면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 속에 매몰되고 지배담론에 포섭되어 있는 백성들이

  과연 독자적이고 지혜로운 결정을 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망적이기까지 하지요? 나 역시 여러분만큼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믿어야 합니다. 신뢰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이야기는 여러분과 한번쯤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고전강독은 1, 2학년에게는 수강신청이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1학년 2학년의 정서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다 겪은 시절이지요.

  1,2학년은 고3터널을 겨우 빠져나온 직후의 짧은 반동기(反動期)이기도 하지만

  한마디로 대중문화와 상품미학에 깊숙히 포섭되어 있습니다. 특히 의상과 헤어스타일과 음악에서 찬란한 자기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3, 4학년이 되면 어떻습니까? 분명히 달라져 있습니다.

  나는 해마다 신입생 몇 사람을 점찍어 놓고 그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분명히 변화합니다.

  여러분도 인정하지요? 그런데 변화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생활이 그대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삶의 골목에서 현실에 부딪치고 그 충돌을 통해서 현실의 벽을 몸으로 터득해 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는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실도 하나의 골목이기를 바라지요.

  여러분들이 걸어가는 한 개의 골목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언젠가 삶의 결론으로서 여러분이 자신의 사상을 정돈하게 되는 작은 계기로서 여러분들에게 다가가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이 장에서 좀 더 논의해야 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자연(自然)입니다.
  노자의 자연(自然)은 ‘Nature’가 아닙니다. 서구적 개념의 자연은 문명 이전의 야만(野蠻)상태를 의미하기도 하고,

  광물이나 목재를 얻는 자원(資源)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對象)으로서의 존재입니다.
  노자의 자연은 이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self-so’정도가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며 다른 외부(外部)를 가지지 않은 존재입니다. 독립적 존재입니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상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항상적 존재입니다. 최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최대한의 개념이 바로 노자의 자연입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서 구비구비 흘러가고 있는 한강을 생각해봅시다.

  한강의 그러한 모양은 수많은 세월을 겪어오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북한산의 모양 역시 수천만 년의 풍상을 겪으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지요.

  수많은 임상실험을 거친 가장 안정된 형태라고 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연의 질서는 가장 안정된(stable)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재난을 가져오는가에 대하여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에이즈만 하더라도 원래 에이즈 바이러스(virus)는 침팬지에게 안정적(stable)으로 서식하던 바이러스라고 합니다.

  그것이 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옮겨오면서 결정적인 질병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지요.
  에이즈뿐만 아니라 지구 도처에서 나타나는 소위 바이러스 브레이크(virus break)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생물의 세계뿐만이 아니지요. 생태계의 질서가 엄청난 규모로,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파괴되고 있는 것이 바로 현대사회입니다.
  자연의 질서에 대한 거대한 간섭인 것이지요.
  치산치수(治山治水)에서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삶에 대하여서도 개입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정치라는 것이지요.

  백성들의 삶은 한강이나 북한산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수많은 패배와 환희로 점철된 것입니다.

  장구한 역사를 겪어 온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믿어야 하고 그것을 존중하여야 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노자의 도(道)이고 노자의 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8강 노자(老子) - 11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靜勝躁 寒勝熱 淸靜爲天下正 (45장)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아주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잘 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이상이 대강의 뜻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왕필본에는 躁勝寒 靜勝熱로 되어 있지만 교재에서는 진고응(陳鼓應)의 설을 취한 것입니다.

  노자사상이 그러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장의 핵심적인 개념은 '대(大)'입니다. 대성(大成) 대영(大盈) 대교(大巧) 대변(大辯)에서 알 수 있듯이

  대(大)는 최고 수준, 최고 형태를 의미합니다.
  성(成) 영(盈) 직(直) 교(巧) 변(辯)의 최고형태는 그것의 반대물(反對物)로 전화하고 있습니다.

  곧 결(缺) 충(沖) 굴(屈) 졸(拙) 눌(訥)이 그것입니다.
  변증법적 구조입니다. 질적 전환에 대한 담론입니다.

  노자는 이러한 변증법적 논리를 통하여 사물에 대한 열린 관점을 제시합니다.
  
  인위적(人爲的)이고 상투적인 형식을 부정합니다.

  획일주의를 반대하며(反劃一主義), 형식주의를 반대합니다(反形式主義).

  이것은 인위(人爲)를 배격하고 무위(無爲)를 주장하는 노자의 당연한 논리입니다.
  결론적으로 대(大)의 기준, 즉 최고(最高)의 기준은 '자연(自然)'입니다. 자연스러움이 최고의 형식이 되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형식에 대해서는 원초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노자입니다.
  대성약결(大成若缺)과 대영약충(大盈若沖)은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겉으로는 별로 없는 듯이 차리고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허수룩하게 차려입어도 개의치 않지요.

  많이 아는 사람도 겉으로는 어리석게 보이기도 하지요.
  의상(衣裳)의 경우에 대성(大成)의 경지, 즉 최고의 완성도는 잘 모르기는 하지만 최소한 정장차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자유롭고 헐렁한 코디네이션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최고의 완성도를 보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지만

  이를테면 앙드레 킴의 패션은 헐렁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왕필은 '사물에 맞춰서 채우되 아끼거나 자랑하지 않으므로 비어 있는 듯하다.'고 주를 달았습니다.

  '장자(莊子)'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부어도 차지 않고 떠내어도 다하지 않는다(注焉而不滿 酌焉而不竭)는 것은

  어떤 획일적 형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닳거나(弊) 다함(窮)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대직약굴(大直若屈)에 대해서 왕필은 '곧음이란 한 가지가 아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직(大直)을 대절(大節) 즉 비타협적인 절개(節槪)와 지조(志操)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대교약졸(大巧若拙)에 대해서는 내가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마 서도(書道)에 있어서만큼 졸(拙)이 높이 평가되는 분야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서도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교(巧)가 아니라 졸(拙)입니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전에 쓴 봉은사의 현판 '판전(板殿)'의 글씨는 그 서툴고 어리석은 필체로 하여

  최고의 경지로 치는 것이지요. 서도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還童)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일체의 교와 형식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법(法)까지도 미련없이 버립니다.
  대변약눌(大辯若訥)은, 최고의 웅변은 더듬는 듯하다는 뜻입니다.
  언(言)은 항상 부족한 그릇이지요. 말로서는 그 뜻을 온전히 담아내기가 어렵지요. 名可名 非常名이지요.
  언이 부족한 표현수단인 것은 이해가 가지만 어째서 눌변(訥辯)이 대변(大辯)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짐작합니다만

  예를 들어 '맷돌'이라는 단어를 놓고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맷돌이란 단어에서 무엇을 연상합니까? 아니 어디에 있는 맷돌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습니까?

  생활사 박물관이나 청진동 빈대떡 집에 있는 맷돌을 연상하는 것이 고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밖에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외갓집 장독대 옆에 있었던 맷돌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언어는 소통의 수단입니다.

  소통은 화자와 청자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멧돌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경험세계의 소통이 없이는 결코 전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화자의 연상세계와 청자의 그것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 정확한 의미의 소통은 시간적으로 지체되게 됩니다.

  더듬는 말처럼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언어란 불충분한 표현 수단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언어를 적게, 그리고 느리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라이브 콘서트는 노래 중간중간에 가수가 엮어나가는 이야기가 청중을 사로잡고 있었어요.

  그 때 느낀 것입니다만 가수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압권이었습니다.

  배경음악을 깔고 낮은 조명 속에서 이따금씩 말을 더듬는 것이었어요.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것을 찾느라고 가끔씩 말이 끊기는 것이었어요.

  말이 끊길 때마다, 나도 그랬었지만, 청중들이 그 가수를 걱정해서

  각자가 적당한 단어 한 개씩을 머리 속으로 찾아보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뜸을 들이던 가수가 찾아낸 단어가 우리가 생각해낸 것보다 한 수 위였어요.

  그 순간 청중은 언어감각에 있어서 가수보다 한 수 아래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었어요.

  가수에게 패배하는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아마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더듬는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 말더듬음은 청중들을 지배해 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대변(大辯)이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눌변(訥辯)이 청자의 연상세계를 확장해준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고요함이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가 더위를 이긴다는 것.

  그리고 고요한 것이 천하의 올바름이라는 것은 역시 노자사상의 당연한 진술입니다.
  천하의 올바름이란 바로 자연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요함이란 작위(作爲)가 배제된 상태를 의미함은 물론입니다.  

 

제8강 노자(老子) - 12
  
        小國寡民 使有什伯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民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 不相往來 (80장)
  
           什伯之器(십백지기) : 많은 기계. 또는 열 사람 백 사람의 몫을 하는 기계.
           重死(중사) : 畏死, 생명을 아끼다.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다.
           復結繩(복결승) : 결승문자로 되돌아가다. 문명비판으로 읽는다.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다. 많은 기계가 있지만 사용하지 않으며,

   백성들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하고 멀리 옮겨다니지 않도록 한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그것을 탈 일이 없고, 무기가 있지만 그것을 벌여놓을 필요가 없다.

   백성들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 이전의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며,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며, 풍속을 즐거워한다.
   이웃나라가 서로 바라볼 정도이고 닭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워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내왕하지 않는다."
  
  노자의 이상국가론(理想國家論)입니다.

  규모가 작은 국가. soft-technology, 반전평화. 삶의 단순화 등이 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결승(復結繩)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으로 쓰여졌습니다만

  반드시 복고적 주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간디는 "진보란 단순화이다(Progress is Simplification)"라고 했지요.
  
  노자의 예제 강독을 마치겠습니다. 예제의 양이 부족하기도 하고 또 내용이 매우 어렵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노자'가 더 어려워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자'에는 인간 노자에 대한 묘사가 단 한 줄도 없습니다.

  노자 강의를 끝내면서 만약 여러분이 인간 노자의 풍모를 상상할 수 있다면 대단한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의 친구 중에서 노자 비슷한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면 나는 대단한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노자에 대한 최고의 이해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제8강 노자(老子) - 13

 

 2) 노자의 사상
  
  (1) 노자사상의 핵심은 무(無)와 무위(無爲)입니다. 무(無)는 인식론으로서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무위(無爲)는 실천론으로서의 정치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有)보다는 무(無)를 우위에 두고 만물의 본체는 무(無)이며 무에서 유(有)가 나오는 체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는 유(有) 그 자체의 의미를 왜소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용지용(無用之用)에서 볼 수 있듯이 무(無)와 유(有)를 통일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노자의 체계는 통일적 체계입니다.
       노자의 체계는 부단히 변화하는 동태적 체계입니다. 고정 불변하거나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발뒤꿈치를 들고 오래 서 있을 수 없으며(企者不立), 강풍은 아침 내내 불 수 없고 폭우는 하루 종일 내릴 수 없습니다.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23장)
  
       이러한 통일적 관점과 동태적 체계는 당연히 가치판단에 있어서 상대주의(相對主義)로 나타납니다.

       유무상생(有無相生), 난이상성(難易相成), 장단상교(長短相較) 등에서부터 미추(美醜), 선악(善惡), 화복(禍福)에

       이르기까지 노자의 개념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리만큼 상대주의적인 관점에 서 있습니다.
       화 속에 복이 있고 복 속에 화가 엎드려 있는(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58장)체계입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 체계입니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관점은 나아가 가치관(價値觀)의 전도(顚倒)로 나타납니다.

       반어적(反語的)이고 역설적(逆說的)인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이지 않는 것, 버린 것, 돌보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반문화적(反文化的) 가치를 조명해 내고 있습니다.
  
  (2) 노자는 강한 것보다 약한 것을 더 신뢰합니다. 노자철학은 약자(弱者)의 편에 선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유능제강(柔能制剛)에서 분명하게 피력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실천론은 약자의 실천론이며 민초(民草)들의 정치학입니다.
       그러한 실천론의 핵심이 바로 위무위(爲無爲)입니다.

       위무위의 실천론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이 꾸준히 몸을 낮추어 이윽고 바다에 이르는 유장한 호흡을 의미합니다.
       '노자'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한 가닥 위로는 강자는 반드시 소멸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爲者敗之 執者失之(29장)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약한 것이 반드시 이긴다는 사실입니다.
       비단 강한 것보다 약한 것을 더 신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자'는

       動보다는 靜을, 滿보다는 虛를, 進보다는 歸를, 巧보다는 拙을, 雄보다는 雌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 체계입니다.
  
  (3) 노자사상은 마치 수학에서 '0'의 발견이 갖는 의미와 공헌을 중국사상에 기여하였다고 평가합니다.
       노자사상은 장자(莊子), 열자(列子) 등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계승되었습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유가(儒家) 측에서도 도가를 계속 읽고 해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노자사상의 탁월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가사상의 관대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노자사상은 중국사상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데에 매우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노자사상은 상당 부분이 법가(法家)사상으로 계승되기도 합니다. 상선약수를 설명하면서 언급하였습니다만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도 사실은 노자를 계승한 것이라고 평가됩니다.
       '노자'는 도교(道敎)의 기본교리로 경전화되기도 하고, 불교사상의 정착과 송대(宋代) 성리학(性理學)의 본체론(本體論)과

       인식론(認識論)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입니다.
       그 이외에도 문학(文學), 회화(繪畵), 예도(藝道), 무도(舞蹈) 그리고 무위(無爲)의 관조적(觀照的) 삶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야에 걸쳐서 깊이와 다채(多彩)를 더하였다고 평가됩니다.
       한비자(韓非子)의 통어술(統御術), 병가(兵家)의 허실전법(虛實戰法)도 노자의 영향 하에서 발전하였음은 물론입니다.
  
  (4) 노자의 철학은 근본을 높이고 말단을 줄이는(崇本息末) 철학입니다. 귀본(歸本)의 철학입니다.

       본(本)은 도(道)이며 자연(自然)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하였듯이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체계가

       노자의 세계입니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25장).
       자연을 궁극적 가치로 하여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자연이 대상세계(對象世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자연은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self-so)'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연은 최고의 독립성(獨立性)과 최대의 안정성(安定性)을 갖춘 시스템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노자'의 사상영역은 최대의 포괄성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남농 허건, 금강산 보덕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