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問/古典

신영복의 고전강독 제4강 초사(楚辭)

경호... 2012. 2. 3. 01:47

 

제 4강 초사(楚辭)-1

 

‘초사(楚辭)’는 ‘시경(詩經)’과 함께 읽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만

시대적으로는 ‘서경(書經)’ 다음에 읽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초사는 한(漢)나라 유향(劉向.BC 77-6)이 굴원(屈原) 송옥(宋玉) 등의 작품을 모아 펴낸 책명을 말합니다.

이 책이 나온 이후로는 일반적으로 초(楚)나라의 시체(詩體)를 가리키는 것으로 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초사는 망실되고 현재 전하는 것은 왕일(王逸)의 ‘초사장구(楚辭章句)’ 총 17편입니다.

 

시경(詩經)이 북방 중원의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한 4언체(四言體) 운문(韻文)인데 비하여

초사는 이러한 북방 4언체를 혁신한 양자강 유역에서 발전한 남방문학입니다.

남방국가인 초(楚)나라의 시체로서 음악에 가까운 운문입니다.

특히 방언(方言) 무풍(巫風) 풍습(風習) 음운(音韻) 등 초나라의 뛰어난 문물과 풍부한 민요

특히 무풍(巫風)의 토양 위에 난숙하게 발전한 낭만문학(浪漫文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경이 사실적이고 노동과 삶과 보행의 정서로 이루어진 시세계(詩世界)임에 비하여

초사의 세계는 자유분방, 정열, 상상력, 신비, 환상 등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노래입니다.

초사는 중국문학사에 있어서 시는 물론 산문 소설 희곡에 이르기까지 중국문학 전반에 광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시경이 집단창작과 전승을 통하여 만들어졌음에 비하여 초사에서는 작자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굴원이 중국시인의 대표인 것도 작자가 초사에서 비로소 그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굴원의 ‘이소‘(離騷)가 초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힙니다.

‘이소‘는 흔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이소‘는 전쟁영웅의 대서사시가 아니라

장편 서정시라는 점에서 전혀 다른 시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테의 ‘신곡(神曲)‘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두 작품의 주인공이 하늘과 지옥을 여행한다는 점은 유사하지만

신곡에서는 그것이 인간이성의 구법(求法)여행임에 비하여 ‘이소‘에서는

그것이 실연한 여인의 구애(求愛)여행인 점이 판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소‘가 초사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3백74행이나 되는 너무 긴 시라서

여기서는 짧은 ’어부(漁父)‘ 한 편을 함께 읽기로 합니다.

 

 

 

漁 父 辭(어부사) .....屈原(굴원)

 

屈原旣放 游於江潭 (굴원기방 유어강담) 

       굴원이 이미 쫓겨나 강가와 물가에 노닐고

行吟澤畔 顔色樵悴 形容枯槁 (행음택반 안색초췌 형용고고)

      못가에서 시를 읊고 다니는데 얼굴색은 초췌하고 모습은 수척해라

漁父見而問之曰, 子非三閭大夫與 (어부견이문지왈 자비삼려대부여)

     어부가 보고 묻기를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니시오”

何故至於斯 屈原曰 (하고지어사 굴원왈)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르셨습니까 하니. 굴원이 말하길

擧世皆濁 我獨淸 (거세개탁 아독청 )

     세상이 다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衆人皆醉 我獨醒 (중인개취 아독성)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었네

是以見放 漁父曰 (시이견방 어부왈)

     이런 연유로 추방을 당했네, 이에 어부가 말하기를 

聖人 不凝滯於物 (성인 불응체어물)

     성인은 세상 사물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而能 與世推移 (이능여세추이)

     세상을 따라 변하여 갈 수 있어야 하오

世人皆濁 何不?其泥而揚其波 (세인개탁 하불굴기니이양기파)

     사람들이 모두 탁하면 어찌 흙탕물을 휘저어 물결을 일으키지 않으며,

衆人皆醉 何不飽其糟而?其? (중인개취 하불포기조이철기리)

     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으면 어찌 술지게미를 먹고 박주를 마시지 않으시오

何故 深思高擧 自令放爲 (하고 심사고거 자령방위)

     어찌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처신하여 스스로 쫓겨남을 당하시오

屈原曰 吾聞之(굴원왈 오문지)

     굴원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新沐者 必彈冠  (신목자 필탄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을 털어서 쓰고,

新浴者 必振衣 (신욕자 필진의)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安能以身之察察 受物之汶汶者乎 (안능이신지찰찰 수물지문문자호)

      어찌 맑고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녕부상류 장어강어지복중)

     차라리 상강의 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安能以皓皓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 (안능이호호지백 이몽세속지진애호)

     어찌 결백한 몸으로서 세속의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 쓴단 말이요

漁父 莞爾而笑 鼓?而去 乃歌曰 (어부 완이이소 고설이거 내가왈)

     어부는 빙그레 웃으며 노를 두드리고 떠나가면서 노래하기를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 끈을 씻고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

遂去不復與言 (수거불부여언)

     마침내 떠나가고 다시는 더불어 말하지 못했다.

 

三閭(삼려)-楚나라 왕실의 세 가문 昭, 屈, 景씨.

凝滯(응체)-막히고 얽매이다.

與(여)-어울리다. 더불다.

糟(조)-지게미.

?(철)-마시다.

?(리)-묽은 술. 그를 시.

高擧(고거)-高踏, 孤高함.

察察(찰찰)-결백한 모양. 깨끗한 모양.

汶汶(문문)-불결한 모양.

莞爾(완이)-빙그레 웃는 모습. (예, 설)-노.

滄浪(창랑)-漢水의 하류. 차고 푸른 물.

纓(영)-갓끈

 

 

‘어부’는 굴원이 오랜 유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한 고뇌(苦惱)와 울분(鬱憤)을 토로한

애국적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는 시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시입니다.

고등학교 한문2교재에 있습니다. 중요한 부분만 그 뜻을 새겨보기로 하지요.

 

전체의 구조는 어부와 유배된 굴원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의 구성을 그렇게 가지고 간 것이고 굴원의 자문자답(自問自答)으로 보아도 상관없습니다.

먼저 어부가 유배되어 초췌한 몰골로 호숫가를 거닐고 있는 굴원에게 유배당한 이유를 질문합니다.

굴원이 밝힌 유배의 이유는 다소 엉뚱합니다.

 

세상사람들이 죄다 부패한데 자기 혼자만 깨끗하였기 때문에 추방당하였고,

세상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해 있는데 자기 혼자만 맑은 정신이어서 추방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굴원이 자신의 결백과 정치적 주장을 굽히지 않은 면모를 그대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굴원의 이름은 평(平)으로서 전국시대 말(BC 345-295(?)) 초(楚)나라 왕족의 후예로서 뛰어난 학식으로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26세에 나라의 정사를 주관하는 좌도(左徒)에 오릅니다.

 

당시 합종연횡(合從連橫)의 시대에 강국인 진(秦)나라와의 연합을 반대하는 반진(反秦)주의자로서

줄곧 제초(齊楚)동맹을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친진파(親秦派)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모함을 받게 되고 유배(流配)와 해배(解配)를 거듭하다가

결국 강남으로 추방됩니다.

어쨌든 추방당한 이유가 부패한 친진파의 참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천하가 부패하고 술에 취해 있는데

함께 어울리지 못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라는 주장은 일단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굴원의 이유에 대하여 어부는 그러한 굴원의 비타협적이고 고고한 처세에 대하여 비판합니다.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사(世事)의 변화와 추이(推移)에 능히 어울릴 수 있어야 함을 들어

굴원의 심사고거(深思高擧)를 나무랍니다.

여기에 대한 굴원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이 구절은 명구로 지금도 회자됩니다.

 

新沐者必彈冠 (신목자 필탄관)

新浴者必振衣 (신욕자 필진의)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떨고 갓을 쓰는 법이며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떤 다음 옷을 입는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차라리 몸을 물에 던져 죽을지언정 깨끗한 몸을 더럽힐까보냐고 자신의 고고함을 선언합니다.

비타협적 기개를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러한 굴원의 비타협적 선언에 대하여 어부는 혼잣말처럼 노를 두드리며 노래하며 떠나갑니다.

 

이 노래가 이 시의 결론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어부가 읊조리는 노래로 되어 있습니다만

굴원이 스스로의 생각을 최종적으로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명구로서 암송되는 구절이지요.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지수청헤 가이탁오영)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지수탁헤 가이탁오족)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제 4강 초사(楚辭) - 2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구원(久遠)의 주제에 대하여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타협주의나 대중추수주의와는 구별되는 대응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획일적 대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초사를 여러분과 함께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물론 현실과 이상의 갈등을 노래한

굴원의 정신세계도 매우 의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나는 초사가 대표하고 있는 남방문학의 낭만주의적 정신세계가 갖는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낭만주의는 물론 시대와 나라에 따라서 매우 넓은 스펙트럼으로 나타납니다.

문학이나 미학적 영역에서부터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적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에,

또는 사회에 대한 소아병적 인식의 협소함 때문에,

그리고 동경이나 도피 또는 복고적 비탄이라는 실천의 허약함 때문에

그것의 긍정적 의미가 크게 훼손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과 같은 강고한 억압구조 속에서는 그 숨겨진 구조에 우리들이 문화적으로 길들여지는 것

즉 포섭됨으로써 발견할 수 없는 그 구조를 드러내는 초기 방식의 하나로 낭만주의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현대중국의 혁명과 건설이, 특히 인류사 최대의 드라마라고 하는 대장정이

이러한 낭만주의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심증(?)을 지울 수 없기도 합니다.

중국 역사에서는 남과 북이 싸우면 언제나 남쪽이 집니다.

중국의 전쟁사는 언제나 남의 패배와 북의 승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한 남방인들의 기질이

험난한 기후와 풍토에 단련된 북방의 기세를 당하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싸움에 지는 것을 ‘패배’라고 하고 그것을 ‘敗北’라고 씁니다. 북(北)에게 졌다(敗)고 쓰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남방이 북방을 물리친 정권이 바로 현대중국입니다.

호남성 장사(長沙)의 모택동이 이끈 중국공산당이 건설한 중화인민공화국이 곧 남방정권입니다.

현재의 강택민 주석의 측근들 역시 소위 상해파로서 남방 출신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서 중국권력을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가 갖는 의미입니다.

1972년 닉슨의 중국방문 때의 일입니다. 모택동이 닉슨에게 건넨 선물이 놀랍게도 초사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택동은 초사를 손에서 한시도 놓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장정(長征)때에도 손에서 초사를 놓지 않았다고 하지요.

흔히 조직(組織)의 유소기(劉少寄), 이론(理論)의 모택동이라고 하지요.

모택동 사상이 이러한 남방적 낭만주의가 갖는 자유로움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남방과 낭만주의와 창조적 정신영역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입니다.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넓고 긴 안목이 비록 초사의 세계나 남방적 낭만주의와 무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처하고 있는 공고한 체제적 억압과 이데올로기적 포섭기제를 드러내어야 하는

당면의 과제와 한 번쯤 연결시켜보는 것도 매우 유의미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굴원은 동정호 남쪽에서 방황하다 BC. 295년 5월 5일 멱라수(汨羅水)에 돌을 안고 투신하여 59세로 일생을 마칩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단오절인 이 날을 ‘시인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