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問/古典

신영복의 고전강독 제2강 시경(詩經)

경호... 2012. 2. 3. 01:49

 

제2강 시경(詩經)-1

  

    지난 시간에는 동양사상의 특징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특징'이라는 것에 관해서 입니다. 특징이라는 것은 비교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비교할 대상이 없다면 특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징은 반드시 비교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차이가 특징의 내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동양사상의 특징이라고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서양사상과의 비교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서양 사람의 얼굴의 특징이라는 것은 동양 사람의 얼굴과 비교한 것입니다.

  따라서 동양사상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경우 그 특징이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 규정된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반드시 밝혀져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주로 관계론적인 내용을 동양사상의 특징으로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양사상의 존재론적 특징과 비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근대사회를 그 기본적 구조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꾸어내는 담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서론부분에서 그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하면서도 막상 빠트린 것이 많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추후에 첨부하겠습니다.
  
  오늘은 ‘시경(詩經’)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어떠한 논의이든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일관된 관점을 견지하는 일입니다.

  그 관점이 자의적이거나 경우에 따라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경우는 논지가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시경에 관해서도 숱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선 3백여 편이 넘는 시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주(註)가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시경에 대하여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寫實性)에 있습니다.

  이야기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시경은 민요이며 민요는 개인 창작이 아닙니다. 집단 창작입니다. 그리고 그 전승과정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여러 사람이 공감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그 노래가 계속 불려지고 전승될 리가 없습니다.
  
  시경의 정수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실성(眞實性)과 진정성(眞正性)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이 지극히 불안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진정성 그리고 사실성의 문제는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소위 상품미학과 사이버 세계, 그리고 바로 여러분들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신세대들이 매몰되고 있는

  자본주의 문화 일반에 대하여 그 허구성, 가공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반성적 시각을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시경의 독법은 바로 그러한 시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시경의 시 한 편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지요.
  
  

  우선 전체의 뜻을 새겨보지요.
  
  
<여강 둑에서>
  
  “저 강 둑길 따라 나뭇가지 꺾는다.

   기다리는 님은 오시지 않고 그립기가 아침을 굶은 듯 간절하구나.

   저 강 둑길 따라 나뭇가지 꺾는다.

   저기 기다리는 님 오시는 구나.

   나를 멀리하여 버리지 않으셨도다.

   방어꼬리 붉고 왕실을 불타듯 하도다.

   비록 불타듯 하지만 부모가 바로 가까이에 계시는구려.“
  

  주(註)를 보면 대강의 의미는 짐작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에서 먼저 이 시가 보여주는 그림을 여러분들이 그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첫 연에서 그려볼 수 있는 그림은 이렇습니다. 길게 흐르는 여강과 그리고 그 강물과 함께 뻗어있는 긴 강둑.

  그리고 그 강둑에서 나뭇가지 꺾으며 기다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입니다.
  
  전쟁터로 나갔거나, 또는 만리장성 축조 같은 사역에 동원되었거나 벌써 몇 년째 소식이 없는 낭군을 기다리는 가난한 여인의 모습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땔감으로 나뭇가지 꺾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병역이나 사역에 동원될 리가 없지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요.
  
  두 번째 연에서는 기다리던 낭군이 돌아오는 그림입니다. 자기를 잊지 않고 돌아오는 낭군을 맞는 감격적인 장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는 돌아온 낭군에게 하는 다짐입니다. 그 내용이 지금의 아내나 지금의 부모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먼저 시국에 대한 인식입니다. 방어의 꼬리가 붉다는 것은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방어는 피로하면 꼬리가 붉어진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왜 피로한 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방어는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왕실여훼’란 중앙정치가 매우 어지럽다는 뜻이지요. 권력투쟁을 둘러싼 정변이 잦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다음 구절입니다. 왕실이 불타는 듯 어지럽더라도 그러한 전쟁이나 정쟁에 일체 관여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지요.
  
  관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부모가 바로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부모를 모시고 있는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근심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내의 논리지요. 가정의 논리입니다.
  
  그것이 곧 아내의 정치학이 되고 있지요. 정치학이라기보다는 소박한 민중의 삶이며 소망입니다.
  
  나는 이 ‘여분’이란 시를 참 좋아합니다. 그 시절의 어느 마을, 어느 곤궁한 삶의 주인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시이기 때문입니다.

  궁금하기는 이 노랫말에 어떤 곡이 붙었을까, 매우 궁금합니다.
  
  원래 시경에 실려 있는 시들은 가시(歌詩)였다고 합니다. 악가(樂歌)지요. 辭(시) + 調(노래) + 容(춤)이었다고 전합니다.
  
  즉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정의(情意)가 언(言)이 되고 언(言)이 부족하여 가(歌)가 되고 가(歌)가 부족하여 무(舞)가 더해진다(毛詩 大序)고 하였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말로써도 부족하고 노래로써도 부족하고 춤까지 더해서 그 뜻의 일단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악곡(樂曲)은 없어지고 가사(歌辭)만 남은 것이지요.

 

제2강 시경(詩經)-2

  
  앞에 소개한 ‘여분‘은 국풍(國風)에 속하는 시입니다.

  시경에는 모두 3백5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많은 것이 각 나라에서 수집한 민요인 국풍입니다. 전체 수록 편수의 절반이 넘는 양입니다.
  
  국풍(國風)은 각국의 채시관(採詩官)이 거리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백성들의 노래를 수집한 것입니다.

  수집된 노래는 태사(太師)에게 바쳐졌고 태사는 다시 이 가운데서 음률에 맞는 것을 골라 천자에게 바쳤다고 전합니다.
  
  採詩(채시,채시관)→ 獻詩(헌시,사대부가 천자에게)→ 刪詩(산시,공자)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전해집니다.

  공자가 산시(刪詩)했다는 설은 믿을 수 없지만 시경을 교육 관점에서 접근한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처럼 백성의 노래를 수집하는 주(周)나라(BC 1026-403)의 전통은 한(漢) 이후에도 이어져

  악부(樂府)라는 관청에서 백성들의 시가를 수집하게 됩니다.
  
 이렇게 수집 정리된 시경은 약 3천여 년 전의 시로서 세계 최고(最古)의 시입니다.

  은(殷)말 주(周)초인 BC 12세기 말부터 춘추(春秋)중엽인 BC 6세기까지 약 6백년 간의 시(詩)와 가(歌)를 모아

  BC 6세기경에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周)나라 초에(기원전 10세기) 이미 시경이 편찬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시경은 중국의 사상과 문화의 모태가 되고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합니다.

 시경은 제후국간의 외교 언어로 소통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공통언어가 성립되고

 나아가 중국의 문화적 통일성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기강이 어지러워지고 민중적인 정신이 피폐해지면 고문(古文)운동, 신악부(新樂府)운동 등

  시가(詩歌)혁신운동을 벌여 시경의 정신으로 돌아가 민중에게 다가서자고 호소합니다.
  
  시경의 이러한 사회시(社會詩)로서의 성격은 문학예술의 사실주의적 전통으로 이어졌으며

  동시에 고대사회를 이해하는 귀중한 사료로 시경의 가치가 인정되기도 합니다.
  
  다음 시 한 편을 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해석은 제가 번역한(공역입니다만) ‘중국역대시가선집’의 역문을 그대로 읽어드립니다.
  
  
<모과>
  
  “나에게 모과를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뜻깊은 만남을 위해서라오.

   나에게 복숭아를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변함 없는 우정을 위해서라오.

   나에게 오얏을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을 위해서라오.“
  
  경거(瓊 ), 경요(瓊瑤) 경구(瓊玖)는 2절 3절에서 단조로운 반복을 피하려고 변화를 준 것입니다.

  오늘날의 노래가사도 마찬가지지요. 경거, 경요, 경구 어느 것이나 아름다운 패옥으로 풀이해도 됩니다.
  
  그리고 永以爲好也는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정도가 어울리는 해석입니다.

  역시 단조로운 반복을 피하기 위하여 만남이나 우정으로 번역하여 변화를 주려고 한 것이지요.
  
  모시서(毛詩序)에서 이 시는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기린 시라 하였으나 완벽한 연애시라 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남녀간의 애정표시로서 과일을 던지는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전합니다.
  
  이 시는 남녀가 편을 나누어서 화답(和答)하는 노래, 또는 메기고 받는 노래(독창 + 衆唱)로 추측됩니다.

  이 시에서는 남녀간의 애정표현의 자유로움뿐만이 아니라 놀이의 풍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시 역시 위(衛)나라에서 수집한 민요 즉 국풍입니다.
  
  민요시인 국풍 이외에 궁중에서 연주된 의식곡도 있으며 무용곡(舞踊曲)도 있습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시경의 분류에 관하여 이야기를 조금 더 하지요.
  
  시경은 그 내용에 따라 풍(風), 아(雅), 송(頌), 표현기법에 따라 흥(興), 비(比), 부(賦)로 분류합니다.

  이 6가지를 시경(詩經) 육의(六義)라 합니다. 풍(風)은 위에서 소개한 ‘여분‘과 ‘모과‘에서 설명하였듯이

  황하를 중심으로 한 각 지방<주남(周南) 소남(召南) 용( ) 패( ) 회(檜) 조(曹) 빈(?) 등 15개 제후국>에서 수집한 민요이며

  국풍(國風)이라고 합니다. 160편이 실려 있습니다.
  
  아(雅)는 1백5편이 실려 있는데 궁중에서 연주된 의식곡(儀式曲)으로 대아(大雅-饗宴의 노래) 31편과

  소아(小雅-제후가 천자를 뵐 때 연주하는 노래) 74편이 전합니다. 대부분 귀족들의 작품입니다.
  
  송(頌)은 용(容)과 같은 의미입니다. 종묘(宗廟)의 제사 때 연주된 노래로서 무용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송(周頌) 31편, 노송(魯頌) 4편, 상송(商頌) 5편 총 40편이 전합니다.
  
  이에 비하여 흥(興), 비(比), 부(賦)는 표현기법에 따른 분류입니다.

  흥(興)은 읊으려는 것을 연상시키는 사물을 먼저 끌어들여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桃之夭夭 灼灼其華 之子于歸 宜其實家는 “복숭아 무성하고 그 꽃 붉고 붉도다. 큰애기 시집가네 그 집에 복덩이 들어가네“ 이런 뜻입니다.

  먼저 복숭아꽃을 끌어들여 노래한 다음 본론으로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주자어록에는 어떤 물건을 빌어서 시작하지만 실상 본론은 그 다음 구절에 있다(借彼一物 以引起事 其事常在下句)고 합니다.
  
  비(比)는 읊으려는 것을 비유로 표현하는 방식이며, 대창(對唱)의 한 형식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부(賦)는 읊으려는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직서법(直敍法)으로서 독창(獨唱)에 적합한 형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흥→ 비→ 부의 발전단계를 거친 것으로 추측합니다.
  
  너무 딱딱한 이야기였습니다. 시경의 세계가 노래의 세계이며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만

  한대(漢代) 이후 경전화(經典化) 되는 과정에서 시경은 문학성이 상실되고 민중성이 왜곡됩니다.

  대부분의 전(傳), 서(序)에서 애정(愛情)을 충성(忠誠)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경의 독법은 사실성(寫實性)과 진정성(眞正性)에 있습니다.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 (詩三白篇 一言以蔽之思無邪)
  
  ‘사무사(思無邪)‘는 ‘거짓 없음‘입니다. 사(思)는 조자(助字)로 해석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사실성이 시경의 정신입니다.
  
  학문이든 예술이든 있는 것을 사실대로 드러내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2강 시경(詩經) - 3

 

다음 시는 정(鄭)나라에서 수집한 시입니다.

정풍(鄭風)입니다. 음탕하다고 할 정도로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裳(鄭風)  (건상)

 

子惠思我 ?裳涉溱 子不我思 豈無他人 狂之狂也且

子惠思我 ?裳涉洧 子不我思 豈無他士 狂之狂也且

 

?裳(건상)-치마를 걷다. 惠思(혜사)-사랑하고 사모하다.

溱(진),洧(유)-하남성 密懸부근에서 합류하는 鄭나라의 강.

 

 

<치마를 걷고서>

 

“당신이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치마 걷고 진수라도 건너가리라.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남자가 그대뿐이랴.

 바보 같은 사나이 멍청이 같은 사나이.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치마 걷고 유수라도 건너가리라.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내가 그대뿐이랴.

 바보 같은 사나이 멍청이 같은 사나이.“

 

 

이 정도의 번역은 상당히 점잖게 새긴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편만 더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 역시 국풍입니다.

시경을 사실성의 관점에서 읽다보니까 국풍만을 읽게 됩니다.

 

 

陟 岵(魏風)  (척고)

 

陟彼岵兮 瞻望父兮 父曰 嗟予子 行役夙夜無已 上愼?哉 猶來無止

 

陟彼?兮 瞻望母兮 母曰 嗟予季 行役夙夜無寐 上愼?哉 猶來無棄

 

陟彼岡兮 瞻望兄兮 兄曰 嗟予弟 行役夙夜必偕 上愼?哉 猶來無死

 

 

岵(호), ?(기), 岡(강)-푸른 산, 민둥산, 산등성이. 瞻望(첨망)-멀리 바라봄.

夙(숙)-이를 숙, 새벽. 無已(무이)-쉬지 못함. 上-尙과 같은 뜻. 부디.

?(전)- 之焉의 준말. 之와 같은 뜻.

 

 

위(魏)나라는 순(舜), 우(禹)가 도읍 했던 땅으로 유명하지만 강국(强國)인 진(秦), 진(晋)과 접하여

잦은 전쟁과 토목공사로 이산(離散)의 아픔을 많이 겪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는 전쟁터에 징병되었거나 만리장성 축조에 강제 징용된 어느 젊은이가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마 당대에 가장 보편적인 이산의 아픔이었다고 짐작됩니다.

감옥 속에서 내가 이 시를 읽었을 때의 감회가 생각납니다만 생각하면 이산의 아픔은

산업사회와 도시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보편적 정서이기도 합니다.

고향을 떠난 삶이란 뿌리가 뽑힌 삶이지요. 나는 사람도 한 그루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의 정서는 3천년을 격한 옛날의 정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산에 올라>

 

“푸른 산에 올라 아버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아버님 말씀이 들리는 듯. 오! 내 아들아.

 밤낮으로 쉴 새도 없겠지.

 부디 몸조심하여 머물지 말고 돌아오너라.

 잎이 다 진 산에 올라 어머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어머님 말씀이 들리는 듯.

 오! 우리 막내야.

 밤낮으로 잠도 못 자겠지.

 부디 몸조심하여 이 어미 저버리지 말고 돌아오너라.

 산등성이에 올라 형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형님 말씀이 들리는 듯.

 오! 내 동생아.

 밤이나 낮이나 단체행동 하겠지.

 부디 몸조심하여 죽지말고 살아서 돌아오너라.“

 

 

만리장성에 올랐을 때 이 시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책에도 이 시를 소개했습니다.

 

나는 관광지로 유명한 팔달령(八達嶺)으로 가지 않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 사마대(司馬臺)로 갔었습니다.

팔달령은 관광목적으로 개축하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감회가 덜 할 것 같았지요.

반면에 사마대는 단 한 명의 관광객도 없는 쓸쓸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눈까지 내려 그 엄청난 역사(役事)에 감탄하기도 하고 벽돌 한 장, 한 장에 담겨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에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리장성은 동쪽 산해관에서 서쪽 가욕관에 이르는 장성입니다만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은 산해관의 망루에서 1km정도 떨어진 발해만의 노룡두인데

이곳에 맹강사당(孟姜祠堂)이 있습니다.맹강녀의 한 많은 죽음을 기리는 사당입니다.

 

맹강녀(孟姜女)의 전설은 이렇습니다. 진시황 때 맹강녀의 남편 범희양이 축성노역에 징용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편지 한 장 없는(杳無音信) 남편을 찾아 겨울옷을 입히려고 이곳에 도착했으나

남편은 이미 죽어 시골(屍骨)마저 찾을 길 없었지요.

당시 축성노역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죽으면 시골은 성채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맹강녀가 성벽 앞에 옷을 바치고 며칠을 엎드려 대성통곡하자 드디어 성채가 무너지고 시골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맹강녀는 시골을 거두어 묻고 나서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는 것이지요. 맹강녀 전설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성채가 무너지고 시골이 나오다니 전설은 전설입니다.

 

그러나 사실과 전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시경의 시가 바로 이러한 진실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민간에서 불려지는 노래를 수집하는 까닭은 이러한 진실의 창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민심을 읽고 민심을 다스려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채시관들이 조직적으로 백성들의 노래를 수집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공자도 그 나라의 노래를 들으면 그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다고 하였지요.

악여정통(樂與政通)이라는 것이지요. 음악과 정치는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공자가 오늘의 서울에 와서 음악을 듣고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를 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제2강 시경(詩經) - 4

 

모시(毛詩. 毛亨의 시경 주해서)에서는

‘위정자(爲政者)는 이로써 백성을 풍화(風化)하고 백성은 위정자를 풍자(諷刺)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초상지풍초필언(草上之風草必偃),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것이지요.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민요의 수집과 시경의 편찬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백성들 편에서는 노래로써 위정자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이지요.

草上之風草必偃 구절 다음에 수지풍중 초부립 誰知風中草復立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이라는 구절을 첨부하는 것이지요.

시경에는 그러한 풍자와 비판과 저항의 의지가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석서(碩鼠)의 구절입니다.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보리 먹지 마라. 오랫동안 너를 섬겼건만 너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구나,

 맹세코 너를 떠나 저 행복한 나라로 가리라. 착취가 없는 행복한 나라여. 이제 우리의 정의를 찾으리라.“

 

매우 직설적이고 저항적입니다.

그러나 ‘伐檀’(박달나무 베며)은 고도의 문학성과 저항성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절만 소개하지요.

 

영차 영차 박달나무 찍어내어 물가로 옮기세.

 아! 황하는 맑고 물결은 잔잔한데 심지도 거두지도 않으면서 어찌 곡식은 많은 몫을 차지하는가.

 애써 사냥도 않건만 어찌하여 뜨락엔 담비가 걸렸는가. 여보시오 군자님들 공밥일랑 먹지마소,“

 

‘중국역대시가선집’의 서문에서 밝혔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중국시가의 전통이 잘못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배계층인 양반의 시각과 계급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시가 선별적으로 소개되어 왔었다는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음풍영월이 시의 본령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전통과 선입관 때문에 우리는 매우 귀중한 정신세계를 잃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세계와 시적 정서, 나아가 시적 관점은 최고의 정신적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경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삶과 정서의 공감을 기초로 하는 진정성에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시와 시경에 대한 재조명은 당연히 이러한 사실성과 진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을 통하여 현대사회의 분열된 정서가 반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삶과 유리된 정서에 매몰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미학, 가상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의식입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소외이며 분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지평(認識地平)을 넓히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시적 관점이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視角)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동서남북의 각각 다른 공간에서 바라보게 하고 춘하추동의 각각 다른 시간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결코 즉물적(卽物的)이지 않습니다. 시적 관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다이내믹한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關係網)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시적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안도현의 ‘연탄‘이란 시가 있습니다.

연탄이란 하나의 대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를 여러분이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연탄이란 대상을 여러분은 어떤 시각에서 바라봅니까?

제가 정확한 시구를 암기하고 있지는 못합니다만, 이러한 내용입니다.

“연탄재 발로 차지 마라. 너는 언제 한번 남을 위해서 가슴 뜨거워본 적이 있느냐?“

 

정호승의 시에 ‘종이학‘이 있습니다. 비에 젖은 종이는 내려놓고 학만 날아간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시각을 우리가 연마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실 나는 소설 읽을 시간은 없는 편입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읽어야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요.

그러나 솔직히 “물배 차서“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 많은 글들을 읽고 나서 생각하면 핵심적인 요지는 시 한 편과 맞먹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시는 읽는 시간도 적게 들고 시집은 값도 비싸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시를 읽도록 권합니다.

물론 오늘의 현대시는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한 둘이 아니지요.

시인이 자신의 문학적 감수성을 기초로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감수성이 주로 도시정서에 국한되어 있는 협소한 것이라는 것도 문제이지요.

문학인이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잘 모르는 시인입니다만 해방정국에서 대단한 문명을 떨친 임화라는 시인이 있었지요.

‘네거리 순이‘라는 시로 유명합니다만 임화는 항상 두보 시집을 가지고 다녔다고 전해지지요.

임화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부분의 시인들은 문학적으로 호흡하는 세계가 매우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까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모시서(毛詩序)의 구절을 소개하였습니다만

이 구절이 김수영의 시에 계승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김수영의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의 이미지가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마 잘 아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입니다.

그 시의 핵심은 바로 한 송이 국화가 피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서리가 내리고, 천둥이 친다는

광활한 시공간적 연관성에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시상이 백낙천(白樂天)의 ‘국화(菊花)‘에 있지요.

간밤에 지붕에 무서리 내려 파초잎새 이울었는데도

추위를 이기고 동쪽 울타리에 금빛 꽃술 환히 열고 해맑게 피어난다

(一夜新霜著瓦輕 芭蕉新折敗荷傾 耐寒唯有東籬菊 金粟花開曉更淸)는 내용입니다.

 

시상의 핵심은 미당이 여기서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누가 누구를 모방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시 세계를 열어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부단히 열어나가고 뛰어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시경의 세계는 그 시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절한 애환을 보여줍니다.

 

거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매몰되고 있는 허구성입니다. 미적 정서의 허구성입니다.

시경은 황하유역의 북방문학입니다. 북방문학의 특징은 4언체(言體)라는 것입니다.

4언체의 보행리듬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노동이나 생활의 리듬으로서 춤의 리듬이 6언체인 것과 대조를 보입니다.

시경의 정신은 이처럼 땅을 밟고 걸어가는 듯이 확실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땅을 밟고 있는 확실함,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 삶의 실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실상은 물 속에서 발이 땅으로부터 떠있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 자신이 지향해야 할 확실한 방향을 잃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경의 정서가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