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구두
권정일
이제 너에 대한 예의를 지킬 때가 되었다
너는 나를 끌고
내 행선지를 줄줄 외우고 다녔다
수상한 데를 둘러볼 때나
깡통을 걷어찰 때나
음악에 맞춰 까딱까딱 흥겨울 때도
노련하게 내 표정에 밑줄을 그어주었다
까치발을 세우고 남자를 훔쳐 볼 때도
가지런히 뒤꿈치 모으고 내숭을 떨 때도
반짝반짝 나를 빛나게 해 주었다
철없는 발자국에도 눈이 있다고
너는 나보다 먼저 젖었고 먼저 똥을 밟았고
먼저 달려가 악수를 했고 먼저 집에 데려다 주었다
너는 나보다 나중에 밥을 먹었고 나중에 잠을 잤고
뜬 눈으로 밤을 새기도 했다
너는 표정 없는 나를 터벅터벅 읽어내기로 했고
그래, 살다보면 높은 벽도, 깊은 수렁도 만나는 거야
그렇다고 기죽지 말라고
내 과거를 편집해 아침마다 페이지를 넘겨주었다
나를 깁듯 너를 기워 노쇠한 너를 따라 다녔다
이제 나는 너에게 예의를 갖추려고 한다
무거웠던 나의 아픔을 털어내고
나를 내려놓으라고 이른 아침,
평생 한 번 빛(光)나는 화장을 해 주었다
수거함 앞에 정중히 내다놓았다
—시집『수상한 비행법』(북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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