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권정일] 검정 구두

경호... 2012. 1. 31. 23:48

검정 구두

 

 

권정일

 

 

 

 

이제 너에 대한 예의를 지킬 때가 되었다

너는 나를 끌고

내 행선지를 줄줄 외우고 다녔다

수상한 데를 둘러볼 때나

깡통을 걷어찰 때나

음악에 맞춰 까딱까딱 흥겨울 때도

노련하게 내 표정에 밑줄을 그어주었다

까치발을 세우고 남자를 훔쳐 볼 때도

가지런히 뒤꿈치 모으고 내숭을 떨 때도

반짝반짝 나를 빛나게 해 주었다

철없는 발자국에도 눈이 있다고

너는 나보다 먼저 젖었고 먼저 똥을 밟았고

먼저 달려가 악수를 했고 먼저 집에 데려다 주었다

너는 나보다 나중에 밥을 먹었고 나중에 잠을 잤고

뜬 눈으로 밤을 새기도 했다

너는 표정 없는 나를 터벅터벅 읽어내기로 했고

그래, 살다보면 높은 벽도, 깊은 수렁도 만나는 거야

그렇다고 기죽지 말라고

내 과거를 편집해 아침마다 페이지를 넘겨주었다

나를 깁듯 너를 기워 노쇠한 너를 따라 다녔다

이제 나는 너에게 예의를 갖추려고 한다

무거웠던 나의 아픔을 털어내고

나를 내려놓으라고 이른 아침,

평생 한 번 빛(光)나는 화장을 해 주었다

수거함 앞에 정중히 내다놓았다

 

 

 

 

  —시집『수상한 비행법』(북인, 2008)

'#시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생放生 외 / 이갑수   (0) 2012.01.31
[이갑수] 소문   (0) 2012.01.31
이사/김나영  (0) 2012.01.31
'문득'이라는 말/박창기  (0) 2012.01.31
이갑수   (0) 2012.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