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 시인의 시 5편
이갑수 시인
1959년 경남 거창 출생
서울대 식물학과 졸업
199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1991년 제15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시집 <신은 망했다> <현대적>
자연과학 전공자라는 학력 때문에 민음사에 픽업돼 '92년부터 과학전문 출판기획자로 활동함.
대중화의 수준을 넘어선 깊이 있는 기획으로 100여종의 책을 내고 아인슈타인이나 호킹 같은 스타중심의 천체물리학에 치우쳤던 과학출판의 영역을 확장시킴
‘사이언스 북스’ ' 민음사' 편집부장 역임
궁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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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생放生 / 이갑수
한 번이라도 오줌 누어 본 이라면
실감하면서 동의하리라
내가 화장실의 안팎을 구별하여 주면
오줌은 내 몸의 안팎을 분별하여 준다
따지고 보면 그게 얼마나 기특한 일인지
어떤 때 나는 소변 쏟다 말고 쉬면서 잠깐
오줌붓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한다
콜라를 부어도 막걸리를 넣어도
정수되어 말갛게 괸 오줌은
몸 속 욕망의 바위틈을 지나오면서
얼마나 무겁게 짓눌리고 시달렸는지
맨 마지막 구멍으로 헤엄쳐 와서는
나오자마자 거품 물고 하얗게 까무라친다
내가 잠깐 방뇨하면
오줌은 오래 나를 방생한다
빈집 / 이갑수
쓰고 버린 농약병처럼 쓰러져 있는
시골 빈집에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제비집이 제비를 기다리는
텅빈 집에
구식 금성 라디오 한 대
혼자 뒹굴고 있다
어귀로 나가 꼬부랑길을 맞아들이는
메아리 마을에 거미 나라의 날씨와 소문을
제비나라의 날짜와 연속극을 전해주던
소식통이 그만 먼지통이 되어 있었다
언제였더라 이웃을 소리하여
땀에 젖은 얼굴을 흥으로 가꾸던
라디오 속의 건전지 힘 잃고 닳아졌듯
잔치의 주인은 다녀가고 없고
잔칫날의 주인공은 떠나가고 없는
가파른 동네
누가 있어 스프링 스위치를 눌러준다면
잊었던 음성 손자처럼 달려 나와
쿵쿵쿵 울릴 것만 같아서
코스모스 맨발로 서 있는 마당에서 눈을 옮기니
헤어진 이 그리워 늙은 호박은
헝클어지게 머리 풀어 젖힌 채
지붕에서 그대로 내려오질 않고 있다.
神은 망했다 / 이갑수
神은 시골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회를 건설했다
神은 망했다
>
요약 / 이갑수
모든 일은 시작하는
순간에 반으로 요약된다
배부름은 첫술에 요약되어 있다
어떤 술도 그 맛은 첫잔과 마주한 사람
이 나누어 좌우한다
귀뚜라미는 소리로서 그 존재를 간단히 요약한다
평행한 햇살을 요약하여
업은 잎사귀 하나 아래로 처지고 있다.
방향은 가늘게 요약되어
동쪽은 오로지 동쪽임을 묵묵히 담당한다
요란한 것들을 집합시켜 보면
사소한 것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물질은 한 분자에 성질을 전부 요약하여 담는다
한 방울 바닷물이 바다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서해는 서해를 찾아드는 모든 강의 이름을 요약한다
목숨은 요약되어 한 호흡과 호흡 사이에 있다
파란만장한 생애는 굵고 검은 활자로 요약되어
부음란에 하루 머무른다
하루살이는 일생을 요약하여 하루에 다 산다
너는 모든 남을 요약하여 내게로 왔다
머리카락은 기억을 먹고 자란다 / 이갑수
머리카락은 기억을 먹고 자란다
내가 기억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머리카락이 머릿속으로 다시 갈 수 없는 것과 같다
기억처럼 어두운 검은 머리칼
온 과거를 향하여 안테나같이 뻗는다
나는 무엇이었을까
몸을 때리고 나간 빛이 공중에 있기에
실같은 빛 한 가닥을 잡아 끌어내리면
과거의 실마리가 주르르 풀릴 것도 같아
더듬더듬 공중을 더듬어 물으니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라네,
그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시게,
밑으로 도로 내려보낸다
아래에서 발이 전진하는 만큼
위에서 치렁치렁 솟아 넘치는 기억
기억을 담은 머리카락은 흙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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