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 가는 길 / 이상국
1
물은 산을 내려가기 싫어서
못마다 들러 쉬고
쉬었다가 가는데
나는 낫살이나 먹고
이미 깎을 머리도 없는데
어디서 본 듯한 면상(面相)을 자꾸 물에 비춰보며
산으로 들어가네
어디 짓다 만 절이 없을까
아버지처럼 한번 산에 들어가면 나오지 말자
다시는 오지 말자
나무들처럼
중처럼
슬퍼도 나오지 말자
2
만해(萬海)도 이 길을 갔겠지
어린 님을 보내고 울면서 갔겠지
인제 원통쯤의 노래방에서
땡초들과 폭탄주를 마시며
조선의 노래란 노래는 다 불러버리고
이 길 갔겠지
그렇게 님은 언제나 간다
그러나 이 좋은 시절에
누가 그깟 님 때문에 몸을 망치겠는가
내 오늘 세상이 같잖다며
누더기 같은 마음을 감추고 백담(百潭) 들어서는데
늙은 고로쇠나무가 속을 들여다보며
빙긋이 웃는다
나도 님이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
3
백담을 다 돌아 한 절이 있다 하나
개울바닥에서 성불한 듯 이미
몸이 흰 돌멩이들아
물이 절이겠네
그러나 이 추운 날
종아리 높게 걷고
그 물 건너는 나무들,
평생 땅에 등 한번 못 대보고
마음을 세웠으면서도
흐르는 물살로 몸을 망친 다음에야
겨우 저를 비춰보는데
나 그 나무의 몸에 슬쩍 기대 서니
물 아래 웬 등신 하나 보이네
4
그러나 산은 산끼리 서로 측은하고
물은 제 몸을 씻고 또 씻을 뿐이니
저 산 저 물 밖
누명이 아름다운 나의 세속
살아 못 지고 일어날 부채(負債)와
치정 같은 사랑으로 눈물나는 그곳
나는 누군가가 벌써 그립구나
절집도 짐승처럼 엎드려 먼산 바라보고 선
서기 이천년 첫 정월 설악
눈이 오려나
나무들이 어둠처럼 산의 품을 파고드는데
여기서 더 들어간들
물은 이미 더할 것도 낼 것도 없으니
기왕 왔으면 마음이나 비춰보고 가라고
백담은 가다가 멈추고 멈추었다 또 가네
연민 / 이상국
흐르는 강이 나이를 자시면
무엇이 되는지
양양 남대천 물너름에 와서 보아라
한때는 살을 내줄 것 같던 사랑이나
몸을 내던지며 울던 슬픔도
생의 굽이굽이를 돌며 치이고 닳아
이제는 모래처럼 순해졌으니
산그림자 속으로 새들 돌아가고
저무는 강둑에서 제 몸 비춰보는 저것,
자식낳이 다한 어머니처럼
거대한 자궁을 열어놓고
혼잣노래 하는
저 오래된 연민을 보아라"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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