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상시

백담 가는 길 / 이상국

경호... 2012. 1. 30. 14:50

 

 

 

 

 

백담 가는 길 / 이상국

 

1

물은 산을 내려가기 싫어서

못마다 들러 쉬고

쉬었다가 가는데

나는 낫살이나 먹고

이미 깎을 머리도 없는데

어디서 본 듯한 면상(面相)을 자꾸 물에 비춰보며

산으로 들어가네

 

어디 짓다 만 절이 없을까

 

아버지처럼 한번 산에 들어가면 나오지 말자

다시는 오지 말자

나무들처럼

중처럼

슬퍼도 나오지 말자

 

 

2

만해(萬海)도 이 길을 갔겠지

어린 님을 보내고 울면서 갔겠지

인제 원통쯤의 노래방에서

땡초들과 폭탄주를 마시며

조선의 노래란 노래는 다 불러버리고

이 길 갔겠지

 

그렇게 님은 언제나 간다

그러나 이 좋은 시절에

누가 그깟 님 때문에 몸을 망치겠는가

내 오늘 세상이 같잖다며

누더기 같은 마음을 감추고 백담(百潭) 들어서는데

늙은 고로쇠나무가 속을 들여다보며

빙긋이 웃는다

나도 님이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

 

 

3

백담을 다 돌아 한 절이 있다 하나

개울바닥에서 성불한 듯 이미

몸이 흰 돌멩이들아

물이 절이겠네

그러나 이 추운 날

종아리 높게 걷고

그 물 건너는 나무들,

평생 땅에 등 한번 못 대보고

마음을 세웠으면서도

흐르는 물살로 몸을 망친 다음에야

겨우 저를 비춰보는데

나 그 나무의 몸에 슬쩍 기대 서니

물 아래 웬 등신 하나 보이네

 

 

4

그러나 산은 산끼리 서로 측은하고

물은 제 몸을 씻고 또 씻을 뿐이니

저 산 저 물 밖

누명이 아름다운 나의 세속

살아 못 지고 일어날 부채(負債)와

치정 같은 사랑으로 눈물나는 그곳

 

나는 누군가가 벌써 그립구나

 

절집도 짐승처럼 엎드려 먼산 바라보고 선

서기 이천년 첫 정월 설악

눈이 오려나

나무들이 어둠처럼 산의 품을 파고드는데

여기서 더 들어간들

물은 이미 더할 것도 낼 것도 없으니

기왕 왔으면 마음이나 비춰보고 가라고

백담은 가다가 멈추고 멈추었다 또 가네

 

 

 

연민 / 이상국

 

흐르는 강이 나이를 자시면

무엇이 되는지

양양 남대천 물너름에 와서 보아라

한때는 살을 내줄 것 같던 사랑이나

몸을 내던지며 울던 슬픔도

생의 굽이굽이를 돌며 치이고 닳아

이제는 모래처럼 순해졌으니

산그림자 속으로 새들 돌아가고

저무는 강둑에서 제 몸 비춰보는 저것,

자식낳이 다한 어머니처럼

거대한 자궁을 열어놓고

혼잣노래 하는

저 오래된 연민을 보아라"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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