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 오탁번
같은 동네에 사는 이종택과 함께 백운지(白雲池) 아래 방학리(防鶴里)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김종명이네 집에 놀러 갔다 멍석에 널린 고추가 뙤약볕 같이 따갑고 함석지붕에는 하양 박이 탐스러웠다 누렁이 한 마리가 마당에서 제 똥냄새 맡다가 꼬리를 쳤다 찰칵! 한 장 찍고 싶은 우리 농촌의 옛 풍경 속으로 재작년 추석 무렵에 무심코 쑥 들어갔다
안방에서 머리가 하얀 안노인네가 나왔다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나는 어른들께 답작답작 큰절을 잘 했다 그러면 친구 어머니가 씨감자도 쪄두고 보리쌀 안쳐 더운밥도 해주곤 했다 종명이 어머니가 여태 살아계시는구나! 나는 얼른 큰절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몇 만분의 1초의 시간이 딱 멈추었다 종명이가 제 어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우주에서 날아오는 초음파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 임자! 술상 좀 봐! 초등학교 동창 마누라에게 큰절할뻔 한 나는 블랙홀에 빠진 채 허우적거렸다
머리가 하얀 초등학생 셋은 무중력 우주선을 타고 저녁놀 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 방학리(防鶴里)에 왔으니 학(鶴) 한 마리 잡아다가 안주로 구워먹자 씨벌! 종택이와 종명이는 내 말에 장단을 맞췄다 - 그럼 그렇지 말고지, 네미랄! 광속(光速)보다 빠르게 블랙홀을 가로지르는 학(鶴)을 쫓아가다가 그만 나는 정신을 잃고 종택이 경운기에 실려 돌아왔다
꽃모종을 하면서 / 오탁번
유치원 다니는 개구장이 아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놀다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모종삽을 든 채 나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아빠 아빠 쉬도 마렵지 않은데 왜 예쁜 여자애를 보면 꼬추가 커지나? 아들은 바지를 까내리고 꼬추를 보여주었다 정말 꼬추가 아주 골이 나서 커져 있었다
생전에 할머니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자에게 말씀하시던 일이 생각나 나는 목이 메었다 손자의 부자지를 쓰다듬으시던 할머니는 무너미골 하늘자락에 한 송이 산나리꽃으로 피어나서 지금도 손자의 골이 난 꼬추를 보고 계실까
눈을 뜬 내 아들의 꼬추를 만져보며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그렇구말구 아빠 꼬추도 오줌이 마렵지 않아도 커질 때가 있단다
개구장이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구슬소리 영롱하게 짤랑대면서 골목으로 달려나갔다 조그만 우리집 꽃밭에 봉숭아 꽃모종을 하려고 나는 다시 허리를 구부렸다
눈물 / 오탁번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었던 나이가
어젯밤 사랑하는 여자와
울고 싶을 때 울 수 없는 나이가 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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