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상시

블랙홀 / 오탁번

경호... 2012. 1. 20. 00:28

 

 

 

 

 

 

            

 

              

 

 

            

 

 

 

 

 

 

 

 

 

블랙홀 / 오탁번

 

 

같은 동네에 사는 이종택과 함께

백운지(白雲池) 아래 방학리(防鶴里)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김종명이네 집에 놀러 갔다

멍석에 널린 고추가 뙤약볕 같이 따갑고

함석지붕에는 하양 박이 탐스러웠다

누렁이 한 마리가 마당에서

제 똥냄새 맡다가 꼬리를 쳤다

찰칵! 한 장 찍고 싶은

우리 농촌의 옛 풍경 속으로

재작년 추석 무렵에 무심코 쑥 들어갔다

 

안방에서 머리가 하얀 안노인네가 나왔다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나는 어른들께 답작답작 큰절을 잘 했다

그러면 친구 어머니가 씨감자도 쪄두고

보리쌀 안쳐 더운밥도 해주곤 했다

종명이 어머니가 여태 살아계시는구나!

나는 얼른 큰절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몇 만분의 1초의 시간이 딱 멈추었다

종명이가 제 어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우주에서 날아오는 초음파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 임자! 술상 좀 봐!

초등학교 동창 마누라에게 큰절할뻔 한 나는

블랙홀에 빠진 채 허우적거렸다

 

머리가 하얀 초등학생 셋은

무중력 우주선을 타고

저녁놀 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 방학리(防鶴里)에 왔으니 학(鶴) 한 마리 잡아다가

안주로 구워먹자 씨벌!

종택이와 종명이는 내 말에 장단을 맞췄다

- 그럼 그렇지 말고지, 네미랄!

광속(光速)보다 빠르게 블랙홀을 가로지르는

학(鶴)을 쫓아가다가

그만 나는 정신을 잃고

종택이 경운기에 실려 돌아왔다

 

 

 

 

              

 

 

 

 

 

 

 

 

 꽃모종을 하면서 / 오탁번

 

 



따뜻한 봄날 꽃밭에서 봉숭아 꽃모종을 하고 있을 때

유치원 다니는 개구장이 아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놀다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모종삽을 든 채 나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아빠 아빠 쉬도 마렵지 않은데 왜 예쁜 여자애를 보면 꼬추가 커지나?

아들은 바지를 까내리고 꼬추를 보여주었다 정말 꼬추가 아주 골이 나서 커져 있었다
꼬추가 커졌구나 얼른 쉬하고 오너라

 

생전에 할머니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자에게 말씀하시던 일이 생각나

나는 목이 메었다 손자의 부자지를 쓰다듬으시던 할머니는

무너미골 하늘자락에 한 송이 산나리꽃으로 피어나서

지금도 손자의 골이 난 꼬추를 보고 계실까


오줌이 마렵지 않은데 예쁜 여자애 알아보고

눈을 뜬 내 아들의 꼬추를 만져보며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그렇구말구 아빠 꼬추도 오줌이 마렵지 않아도 커질 때가 있단다

 

개구장이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구슬소리 영롱하게 짤랑대면서 골목으로 달려나갔다

조그만 우리집 꽃밭에 봉숭아 꽃모종을 하려고 나는 다시 허리를 구부렸다

 

 

 

 

 

 

 

 눈물 /  오탁번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었던 나이가
그러한 맹랑한 자유가
흔하디 흔한 눈물만일 줄 알았다
쓸데없는 배설인 줄만 알았다

 

어젯밤 사랑하는 여자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도
울 수 없었을때
툭툭털며 그냥저냥 일어섰을 때
눈물이 숨기고 있던 크나큰 자유를
순수를 알았다 

 

울고 싶을 때 울 수 없는 나이가 되면서
이 시대의 밤은 높기만 했다
죄를 짓고도 죄인 줄 모르는
개똥같은 지성을 미워했다
눈물을 기구하며
개 처럼 하루 한낮을 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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