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오식(五識)과 팔식(八識)은 현량(現量)이다 (강의)
문 : 모든 식(識)이 두루 반연하여
헤아리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구별하겠습니까.
‘모든 식(識)’은 전오식,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 여덟 가지죠.
‘두루 반연하여 헤어린다’는 것은
대상을 인식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죠.
이것을 헤아린다, 변계(遍計)라 그럽니다.
유식삼성(唯識三性)에는 지난 시간에도 공부했는데,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 세 가지가 있습니다.
변계소집성은, 변계는 두루 헤아린다, 소집은 집착하는 바,
두루 헤아려서 있다고 집착하는 성품이 있고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품, 의타기성이 있고
원성실성이라는 것은 진여 자체의 성품이 있는 거죠.
이렇게 마음을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 ‘시각’부터 시작해서 ‘아뢰야식’까지 여덟 개의 마음 중에서
경계하는 마음은 뭐고, 두루 헤아리는 마음은 뭐고,
헤아리지 않는 마음은 무엇이냐, 이걸 얘기하는 거예요.
정리를 해 드리죠.
유식삼성(唯識三性), 오직 마음뿐이라는 것에는 세 가지 성품이 있는데,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 있어요.
실성(實性)을 원만히 이루는 것을 진여(眞如)라고 얘기해요.
의타기성은, 우리 여덟 개의 마음이 타(他)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것은 식(識)에 대한 거고,
변계소집성은 모양, 상에 대한 얘기에요.
여기서 두루 헤아려 집착한다는 것은 대상을 집착하는 겁니다.
대상을 집착하는 마음이 뭐냐,
우리가 말을 할 때,
시각부터 아뢰야식까지 여덟 개의 마음이 있는데
이 중에서 두루 헤아려 집착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 마음은
제6의식, 이것이 헤아리는 거죠.
그런데 변계소집성에는 의식만 있을까?
말나식이 있죠.
이 말나식[자아의식]은 변계하는, 두루 헤아리는 성질이 있는 거예요.
제6의식은 옳고 그름, 아름답고 추함을 따지고,
상을 집착하고 분별하는 게 분명한데,
말나식은 분명하지 않아요.
대상 인식하는 것이 잠자는 것처럼 표가 안나요.
그런데도 남녀, 어른과 아이, 좋고 싫음, 아름답고 추함을 다 구분해요.
헤아린다는 거죠.
그래서 변계소집성에 해당하는 것은
여덟 개의 마음 중에 두 가지 제6의식과 말나식이에요.
그래서 여기 보면,
‘모든 식(識)이 두루 반연하여
헤아리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구별하겠습니까.’ 이랬는데
구별하는 방법을 알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그죠?
답 : 옛스님은 “오식과 팔식은 집착이 없이 인연으로서 변하기 때문에
오직 현량(現量)이다”고 하였다.
집착이 되는 것은 반드시 억지로 생각하고 헤아림으로서 집착이 있게 되는 것이다.
오직 제육식과 제칠식만 두루 헤아리고 분별하기 때문에
육식과 칠식에 집착이 있는 것이다.
‘옛스님은 “오식과 팔식은 집착이 없이 인연으로서 변하기 때문에
오직 현량(現量)이다”고 하였다.’
현량(現量), 나타날 현(現)자, 헤아릴 량(量)자,
나타나는 것만 인식하는 게 현량[直觀]이죠.
오식(五識: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은 감각인데, 직관만 있는 거예요.
여기에 팔식은 여덟 개의 마음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제8아뢰야식인데, 이것 역시 현량[直觀]입니다.
그러면 여덟 개의 마음 중에서 제6의식하고 제8아뢰야식을 빼면 뭐가 남죠?
제6의식과 제7말나식이 남죠?
이 두 가지는 현량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물론 제6의식에도 현량이 있긴 있는데 약합니다.
제7말나식도 직관 하긴 하는데 현량이 아니고 아닐 비(非)자 비량(非量)을 써요.
인식하는 것마다 오류에요.
그래서 다음 얘기가 나옵니다.
‘집착이 되는 것은 반드시 억지로 생각하고 헤아림으로서 집착이 있게 되는 것이다.
오직 제육식과 제칠식만 두루 헤아리고 분별하기 때문에
육식과 칠식에 집착이 있는 것이다.’
맞죠?
이렇게 되면 의식하고 말나식[자아의식],
이것이 집착이 있고, 두루 헤아리는 게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죠.
이럴 때 대상을 연기(緣起)로 보지 못하고 고정된 것으로 보는 거예요.
그 다음에 봅시다.
또 두루 반연하여 헤아리는 것은 네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두루 반연하나 헤아리지 않는 것으로 제육식의 독두의식(獨頭意識)이다.
두루 일체에 반연하나 헤아려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헤아리나 두루 반연하는 것이 아니니 제칠식이다.
오직 아뢰야식만을 반연하여 헤아리는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셋째는 두루 반연하기도 하면서 헤아리는 것이다.
제육식의 인(因) 가운데에 두루 반연하여 헤아리는 것이 있다.
넷째는 헤아리는 것도 아니며 두루 반연하는 것도 아니니 오식이다.
오직 오진(五塵)만을 반연하여 헤아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전오식(前五識)은 흐름에 맡겨져 경계를 증득하며 명언(名言)을 동반하지 않는다.
오직 현량이기 때문이다. 제팔식도 또한 그렇다.
‘또 두루 반연하여 헤아리는 것은 네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두루 반연하나 헤아리지 않는 것으로 제육식의 독두의식(獨頭意識)이다.
두루 일체에 반연하나 헤아려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두의식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동반하지 않고
홀로 작용하는 의식입니다.
전번 시간에 얘기 했죠.
독두의식에는 꿈속에서의 몽중의식, 선정 중에 있는 정중의식,
다섯 가지의 감각과 동반하지 않는 깨어 있을 때 의식인 독산의식,
이렇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 의식은 꿈속에서도 대상을 반연하고
선정 가운데 있으면서도 이 의식이 작용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작용은 하지만
반연은 하는데 헤아리지 않는다, 이렇게 얘기 합니다.
이렇게 반연은 하지만 헤아리지 않는 의식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둘째는 헤아리나 두루 반연하는 것이 아니니 제칠식이다.
오직 아뢰야식만을 반연하여 헤아리는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말나식은 헤아리기는 하지만 두루 반연하지 않는다 이거죠.
두루 반연하지 않는 다는 것은 딱 한 가지만 생각한다는 겁니다.
독두의식은 이것저것 다 반연하면서 헤아리지는 않지만,
제7말나식은 딱 하나 아뢰야식만을 반연해서 헤아리는 거예요.
이 말나식은 아뢰야식의 견분[주관]을 인식 대상으로 삼고 반연하여 헤아리는 거예요.
이렇게 헤아릴 때 ‘저것은 내다, 저것은 내것이다’ 이렇게 반연하는 겁니다.
아뢰야식의 정체가 무엇인줄 모르고 하는 거죠.
‘셋째는 두루 반연하기도 하면서 헤아리는 것이다.
제육식의 인(因) 가운데에 두루 반연하여 헤아리는 것이 있다.’
여기에 제육식이라는 것은 의식인데,
이 육식이 인(因) 가운데에 두루 반연하여 헤아리는 것이 있다는 것이죠.
의식이 원인이 되어서 두루 반연해서 헤아린다는 것인데,
그것은 독두의식에서 말하는 정중의식하고는 다르죠.
반연도 하고 헤아리기도 하고,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의식이죠.
이것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동반하기 때문에
자기감정과 생각이 덧붙여지는 거죠.
그래서 ‘헤아린다’하는 말을 하는 겁니다.
감각을 동반하지 않는 의식을 독두의식이라 하죠.
이것은 두루 반연하기는 하는데 헤아림이 없어요.
그런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동반 된 이 의식은
대상을 반연도 하면서 옳고 그름을 헤아린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因) 가운데에 두루 반연하여 헤아리는 것이 있다’이러는 거죠.
‘넷째는 헤아리는 것도 아니며 두루 반연하는 것도 아니니 오식이다.
오직 오진(五塵)만을 반연하여 헤아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식(五識)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고,
오진(五塵)은 색·성·향·미·촉을 얘기 합니다.
눈은 형색을 반연하지, 소리나 냄새를 반연하는 게 아니죠.
오직 한 가지만 반연하는 거죠.
이렇게 반연하기는 하는데 헤아리지는 않아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
‘오직 오진(五塵)만을 반연하여 헤아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반연만 하지 헤아리지 않는다, 이런 얘깁니다.
헤아리는 것은 의식만 한다 그랬죠.
그래서
‘전오식(前五識)은 흐름에 맡겨져 경계를 증득하며 명언(名言)을 동반하지 않는다.
오직 현량이기 때문이다. 제팔식도 또한 그렇다.’
‘흐름에 맡겨져’라는 것은 그때그때 대상을 보고 그냥 인식만 하는 거죠.
이렇게 인식만 해서 경계를 증득한다, 경계를 아는데,
헤아려서 아는 게 아니고 느낌으로 안다 이거죠.
그래서 여기에는 ‘명언(名言)’, 이름과 언어를 동반하지 않는다, 이런 말이에요.
그것은 개념이라는 뜻이 첨가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여기에 중요한 게 있습니다.
전오식은 왜 현량일까,
흐름에 맡겨져 경계를 증득하며 왜 명언(名言)을 동반하지 않는가.
몸으로 아는 걸 감각이라 그럽니다.
의식이 반연해서 아는 것보다
몸으로 아는 것이 훨씬 큽니다.
하지만 단점이 있어요.
현량이기 때문에 반조(返照)하는 힘도 없고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술 하는 사람이라든지 과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보면 몸으로 알고 있는 명료(明瞭)를 키우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어떤 실험을 하느냐 하면,
춤을 추는 무용수들에게 긴 막대기를 몸에 부착하게하고 춤을 추게 합니다.
계속 추다 보면 그 막대기가 마치 자기 수족과 같이 불편함이 없어진답니다.
그러면 몸으로 알고 있는 것 중에서 여러분들이 느낄 수 있는 것,
자동차 운전할 때, 자동차 전체가 감각의 명료 속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자동차가 서로 교행할 때도 약간의 접촉이 생기면
자기 피부가 아는 거예요.
또 타이어에 작은 돌이 하나 끼어도 안다는 거죠.
몸의 영역이 그렇게 큰 겁니다.
상상력이 아주 풍부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상상력은 감각의 소재를 통해가지고 일어나는 겁니다.
이런 감각에서 느껴지는 게
대체적으로 흙, 물, 불, 바람, 허공 다섯 가지의 원소가 있어요.
우리가 책상을 접촉하면 딱딱함이 느껴지는데 이것은 흙의 요솝니다.
그 딱딱함이라는 것은 접촉하는 감각에서 오는 거죠.
자기 팔을 잡으면 부드러움이 오는데 이 역시 흙의 요소에요.
이런 감각의 소재가 상상력을 일으켜서 영상이 생기죠.
여러분들 몇 년 전 학창시절 생각하면
학교 건물이라든지 교복 입은 모습이 나타나죠.
그 학교 건물은 딱딱하니까 흙의 요소고,
교정의 비어 있다면 허공의 요소고,
이렇게 영상 속에서 흙, 물, 불, 바람, 허공이 다 나오는 거예요.
흙을 주물락 거려서 무슨 모양을 만든다면 촉감이 오죠,
이처럼 냄새를 맡는다든지 차 맛을 본다든지
이런 걸 즐기는 사람은 상상력이 풍부해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들은 다르다는 거죠.
이런 사람들은 이 감각적인 활동을 잘 안하는 사람들입니다.
학교 다닐 때 오직 공부만 하고
만지는 거나 듣는 거를 잘 안하는 거죠.
수학문제만 열심히 풀고, 달달 외우고해서 점수는 높은데
실생활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는 거죠.
예를 들면,
문 손잡이가 문 중앙에 있으면 열고 닫기 불편하죠?
그래서 열리는 쪽 가장자리에 달려있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아는데
실생활에서는 왜 그것이 가장자리에 달려 있는지 어리둥절한 거예요.
그것이 중앙에 있어야 보기도 좋고 한데 왜 가장자리에 있나,
이해가 안 되는 거죠.
그와 마찬가지로 학교 점수는 높은데
몸으로 접촉함이 없는 사람은 상상력이 빈곤하다 이런 겁니다.
그래서 오식이라는 것이 현량은 현량이지만
임의대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을 분명히 얘기하는 거죠.
제가 왜 이 얘기를 하느냐 하면,
수행하는 데 있어서 상상력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이 상상력이 잘 안 되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아주 곤란해요.
그 정도만 얘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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