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미혹과 깨달음은 마음이다 (강의 - 3. 마음의 종지를 잃으면 생멸의 고통을 받는다)

경호... 2011. 9. 29.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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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미혹과 깨달음은 마음이다 (강의 - 3) 위에서 말한 육식(六識)의 모습은 전체가 신구의 삼업(三業)을 이루는 문이었다. 육식 자체가 깨달음으로 바꾸어지지 않은 중생의 지위에서 번뇌의 흐름을 따르고 경계에 끄달리는 것은 더러운 법의 종자를 발아시켜 생사의 근원을 맺게 하는 것이다. 오직 오개(五蓋)와 십전(十纏)을 일으켜 단지 고통과 고통의 원인만을 얽히고 설키게 하는 것이다. 청정한 깨달음의 성품을 등지고 십팔계(十八界)와 십이처(十二處)의 허망한 티끌번뇌에 계합한다.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담벼락을 세우고 태란습화(胎卵濕化)의 사생(四生)으로 흘러가는 파도의 물결을 일으킨다. ‘위에서 말한 육식(六識)의 모습은 전체가 신구의 삼업(三業)을 이루는 문이었다.’ 육식(六識)은 제6의식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 여섯 개를 말합니다. 이 육식이 삼구의 삼업을 이루는 문이라는 거죠. ‘육식 자체가 깨달음으로 바꾸어지지 않은 중생의 지위에서’ 이랬는데, 원문에는 미전의중(未轉依中), 이라는 말을 씁니다. 전의(轉依)는 구를 전(轉)자에 의지할 의(依)자인데, 아주 중요한 말이에요. 전의는 의지처를 바꾼다는 말인데, 식을 전환하여 지혜를 얻는다,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전의라고 얘기 합니다. 여기서 식(識)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가지 감각과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을 얘기 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전의가 일어나는 것은 의식인데, 의식이라는 의지처가 묘하게 관찰하는 지혜, 묘관찰지(妙觀察智)로 바뀝니다. 그 다음에 말나식이 평등성지(平等性智)로 바뀌고, 그 다음이 아뢰야식인데, 아뢰야식이 근본이에요. 보통 전의라는 말을 쓸 때 아뢰야식을 가지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 아뢰야식이 대원경지(大圓鏡智)로 바뀝니다. 대원경지로 바뀜과 동시에 제일 마지막으로 바뀌는 게 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바뀌고 전오식[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은 성소작지(成所作智)로 바뀝니다. 의식이 묘관찰지로 바뀌는 게 제일 먼저에요. 왜 그러냐 하면, 의식이 바탕의 주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말나식을 전환 시키는 데, 의식이 이공관(二空觀)을 닦습니다. ‘이공관’이라는 것은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타파해서 이공(二空 : 我空, 法空)을 닦아가는 관(觀)을 얘기 합니다. 그러면 다시 이 묘관찰지를 계속 닦아가지고 이 묘관찰지가 말나식을 전환 시킵니다. 이렇게 되면 평등성지로 바뀌면서 말나식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의식이 바로 수행 주쳅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말나식은 자체가 자기 스스로 닦을 힘이 없어요. 그리고 역시 아뢰야식을 전환 시키는 것이 바로 묘관찰지예요. 그래서 전의(轉依), 전식득지(轉識得智)라는 게 의식을 전환해서 지혜를 얻는다, 바탕을 바꾼다 이 말이죠. ‘육식 자체가 깨달음으로 바꾸어지지 않은 중생의 지위에서’ 라는 것은 바탕이 바뀌지 않는 것, 쉽게 말해서 수행자가 아닌 지위죠. 이런 지위에서 ‘번뇌의 흐름을 따르고 경계에 끄달리는 것은 더러운 법의 종자를 발아시켜 생사의 근원을 맺게 하는 것이다.’ ‘더러운 법의 종자’ 라는 것은 물들어 있다는 말이고 종자는 정보죠. 그러니까 안에 있는 안 좋은 정보가 발아가 되어서 그것 때문에 죽고 사는 거예요. ‘오직 오개(五蓋)와 십전(十纏)을 일으켜 단지 고통과 고통의 원인만을 얽히고설키게 하는 것이다.’ 오개(五蓋), 주석(註釋)에 보면 오개(五蓋)는 탐(貪)과 진(瞋)과 치(癡)와 도회(悼悔)와 의심(疑心)을 말한다. 그랬습니다. 오개(五蓋), 다섯 오(五)자 덮을 개(蓋)자 를 쓰는데 다섯 개의 심리가 마음을 덮어버린다는 겁니다. 여기 도회(悼悔)라는 것은 슬픔으로 인해서 마음이 동요가 생기고 분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십전(十纏)이라는 말은 열 십(十), 묶을 전(纏), 열 가지 자기를 묶는 것인데 주석(註釋)에 보면 십전(十纏)은 무참(無慚)과 무괴(無愧)와 질(嫉)과 간(慳)과 회(悔)와 면(眠)과 도거(掉擧)와 혼침(昏沈)과 분(忿)과 복(覆)을 말한다. 무참(無慚) 무괴(無愧)는, 뉘우칠 참(懺)자, 부끄러워할 괴(愧)자, 안으로 뉘우치는 것이 참(懺)이고, 밖으로 부끄러워하는 게 괴(愧)인데,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에도 뉘우침이라든가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 요즘 말하면 얼굴에 철판 깐 사람이죠. 질(嫉)은 미워할 질자, 투기하고 시기하고 질투 하다, 간(慳)은 아낄 간자, 남의 것은 탐내면서 자기 것은 아끼는 것, 회(悔)는 분하게 생각하고 한을 남기는 것을 회라 하고, 면(眠)은 잠재성향을 면이라 그럽니다. 그리고 도거(掉擧)는 마음이 들뜨는 것, 혼침(昏沈)은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거예요. 꾸벅꾸벅 졸듯이 명료함이 떨어지는 거죠. 분(忿)은 분노심을 얘기하고 복(覆)은 뒤집힐 복, 뒤집히고 무너지고 망하다, 이렇게 열 가진데, 열 가지 얽매임을 일으키는 거죠. 그래서 이것은 단지 고통과 고통의 원인만을 얽히고설키게 한다 이런 거예요. ‘청정한 깨달음의 성품을 등지고 십팔계(十八界)와 십이처(十二處)의 허망한 티끌번뇌에 계합한다.’ 십팔계 십이처는 지난 시간에 얘기 했습니다.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담벼락을 세우고 태란습화(胎卵濕化)의 사생(四生)으로 흘러가는 파도의 물결을 일으킨다.’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담벼락을 세운다 했는데 욕계(欲界)는 오욕락(五慾樂)의 세계, 이 욕계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몸이 텅 비어 지는 것, 몸의 안과 밖이 투명해지고 형상이 없어지는 게 욕계의 마지막 모습이에요. 이것을 욕계삼매라 그럽니다. 색계(色界)는 물질이 청정한 세계를 얘기 합니다. 몸이 텅 비어질 때는 물질이 깨끗해져가는 거죠. 그렇게 수행해 들어가면 색계에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이 있고, 그 다음에 무색계(無色界)는 정신만 남은 세계에요. 자아를 무한대로 확대한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그 확대된 공의 세계까지도 없어져 어떠한 인식도 존재하지 않는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다시 더 나아가 어떠한 관념도 갖지 않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생각이 전혀 없지도 않고 아주 미세한 생각, 극미(極微)한 생각만 남아 있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얘기 합니다. 정(定)자를 넣는 것은 선정(禪定)에 의해서 무색계 경계를 얻는다는 거죠. 그래서 다 합하면 사선팔정(四禪八定)인데 욕계삼매까지 하면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 합니다. 아홉 단계 선정의 세계가 욕계, 색계, 무색계를 나눠서 얘기 하는 겁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는 의식의 영역이기 때문에 여기에 선정을 세간의 선정이라 그래요. 수행을 열심히 해서 여기서 벗어나는 게 멸수상정(滅受想定), 수(受)와 상(想)이 멸해버린 선정에 들어갑니다. 그 다음이 오는 게 멸진정(滅盡定)입니다. 멸진정은 완전히 의식과 의식의 부차적으로 일어나는 심리가 다 소멸한 것을 얘기 합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를 넘어버리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성문, 연각, 보살, 부처의 경지는 전부다 윤회를 벗어난 거죠. 그래서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담벼락을 세우고 태란습화(胎卵濕化)의 사생(四生)으로 흘러가는 파도의 물결을 일으킨다.’ 태(胎)에서, 알에서, 습한 데서 태어나는 중생, 변화해서 생기는 중생, 이것은 네 가지 생명이에요. ‘사생(四生)으로 흘러가는 파도의 물결을 일으킨다.’ 그 중심이 육신입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하고 의식 여섯 가지가 욕계, 색계, 무색계를 이루고 태란습화(胎卵濕化)의 사생(四生)을 다 해주는 거예요. ‘파도의 물결을 일으킨다’ 『능가경』에서는 ‘경계의 바람이 불면 일곱 개의 마음[전오식, 의식, 말나식]이 피부의 땀구멍 털구멍을 통해가지고 파도를 친다’이랬어요. 경계의 바람이라는 것은 보이는 이 세계에요. 쉽게 얘기하면, 누군가 길을 지나가다가 한 마디 합니다. ‘아이고, 되게 못생겼네.’ 이런 말을 하면 남자라면 덜 한데 여자가 그 소리를 들었다면 자존심 상해서 발끈하죠. 여기서 ‘되게 못생겼다’하는 게 경곕니다. 이렇게 경계의 바람이 불어가지고 의식에 영향을 주니까 자존심이 억수로 상해가지고 ‘당신 뭐라 그랬어?’이러면서 달려들죠. 이런 경우 있죠? 이런 칭찬이나 비난도 경곕니다. 그러나 이런 육식의 모습도 수행으로 바뀐 깨달음의 자리에서 진여에 명합하고 잘못된 흐름을 돌이키는 것이다. 지혜를 따라 행하는 수행으로 무루선(無漏善)을 성취한다. 도(道)의 진리에 섭수되는 것으로 바른 이치에 상응하는 것이다. 묘관찰심을 나타내어 사생(四生)의 흐름을 만드는 의심의 그물을 결단한다. 성소작지가 되어 청정한 신구의 삼업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근원을 일으킨다. 만약에 마음을 궁구한다면 티끌번뇌의 노고로움이 보리의 미묘한 작용이 되나, 마음의 종지를 잃는다면 항상 생멸의 고통을 달게 받아야 하는 것이다. ‘수행으로 바뀐 깨달음의 자리’ 이 말은 식(識)이 변화해서 지혜로 바뀌었다는 거죠. 그렇게 바뀌어 지면 ‘진여에 명합하고 잘못된 흐름을 돌이키는 것이다.’ ‘진여에 명합한다’는 말은 우리 본연의 마음을 진여라 그러는데 우리 본래 마음은 대상이 없고 주객이 없기 때문에 허망하지 않아요. 참다운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모습은 안 바뀐다는 말이에요. 명합한다는 것은 그윽이 계합을 한다, 그래서 진여에 딱 계합을 하고 ‘잘못된 흐름을 돌이키는 것이다.’ 잘못된 흐름이라는 것은 보이는 대상이 전부 아뢰야식이 만든 세계죠. 한 번 복습해보죠. 몸은 아뢰야식의 한 부분이라 했죠, 그럼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뭐에요? 역시 아뢰야식의 한 부분이라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여기 찻잔이 있는데 마음이 대상, 찻잔을 인식하는 겁니까? 아니죠, 마음이 마음을 인식하는 겁니다. 찻잔도 알고 보면 자기 마음인 거죠. ‘잘못된 흐름을 돌이키는 것이다’ 이 말은 내 밖에 따로 뭐가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 이것은 찻잔이다, 이것은 책상이다, 이렇게 인식을 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이런 것들은 전부 잘못 된 흐름이에요. 대상 따라서 내 마음이 바깥으로 흘러가는 것은 잘못 된 흐름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대상은 전부다 내가 만든 것이지 내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구나, 이렇게 알면 자기 자신 안으로 돌이키게 되죠. 이것을 지혜라 그럽니다. 그래서 ‘지혜를 따라 행하는 수행으로 무루선(無漏善)을 성취한다. 도(道)의 진리에 섭수되는 것으로 바른 이치에 상응하는 것이다. 묘관찰심을 나타내어 사생(四生)의 흐름을 만드는 의심의 그물을 결단한다.’ 무루선은 없을 무(無), 샐 루(漏), 샘이 없는 선(善)을 성취한다는 거죠. 항아리에 조그만 구멍이 있어서 물이 졸졸 흘러나오면 샌다고 하죠. 인간도 새는 게 있는 거예요. 인간에 구멍이 몇 개인지 아세요? 많습니다. 기본적인 구멍[눈, 귀, 코, 입]하고 수많은 땀구멍이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눈구멍을 통해서 바깥 경계에 따라 흘러가고 귓구멍을 통해서 소리 따라 가고, 콧구멍을 통해서 냄새 따라 가고, 혀를 통해서 맛을 추구하고, 피부에 수많은 구멍을 통해서 접촉으로 일어나는 감촉에 딸려가고 이러는 거예요. 이런 것을 유루(有漏)라 그럽니다. 그런데 모든 게 매순간 변하고, 실체도 없고, 자아도 없고, 내 밖에는 아무것도 없구나, 이렇게 알아서 지혜가 생기면 사물을 봐도 보는 게 아니고 들어도 듣는 게 아니에요. 볼 때는 보는 것만 있고 들을 때는 듣는 것만 있는 거예요. 맛 볼 때는 맛보는 것만 있고 느낄 땐 느끼는 것만 있는 것이지 거기에 감정과 생각이 붙어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좋으니 나쁘니, 이런 분별력이 없는 거예요. 이것을 무루(無漏)라 그럽니다. 그래서 무루선(無漏善)을 성취한다 그랬죠. 이때 착할 선(善)은 이렇게 대상 따라 흐르는 마음이 없으면 이런 사람은 하는 것 마다 착한 생각을 하는 거죠. 말을 해도 부드럽게 하고, 어려운 사람 있으면 도와도 주고, 그래서 착할 선자를 쓰는 겁니다. 저는 가끔 가다가 못된 말도하고 성도내고 그러는데 이런 것은 아직까지 번뇌가 있어서 그렇거든요. 여러분은 절대 그런 것을 따라하면 안 됩니다.ㅎㅎㅎㅎㅎ 그래서 착한 일을 하면 복덕을 받는데, 이 복덕은 깨달음으로 이끌기 때문에 무루선이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도(道)의 진리에 섭수되는 것으로 바른 이치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때 도(道)는 도제(道諦)를 말합니다. 사성제(四聖諦)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 중에 도제는 수행 방법인데, 여기 무루선을 성취한다 것은 수행방법에 소속되는 거예요. 그래서 ‘묘관찰심을 나타내어 사생(四生)의 흐름을 만드는 의심의 그물을 결단한다.’ 묘관찰심은 제6의식이 묘관찰지로 전환된 것을 얘기합니다. 묘하게 관찰하는 마음을 나타내어, 사생(四生), 태란습화(胎卵濕化)로 태어나는 이 윤회의 흐름을 딱! 끊어버린다 이거죠. ‘성소작지가 되어 청정한 신구의 삼업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근원을 일으킨다.’ 대원경지를 이루면 성소작지가 생긴다 했죠. 감각이 성소작지가 되는데 이 성소작지는 중생 구제하는 지혭니다. ‘만약에 마음을 궁구한다면 티끌번뇌의 노고로움이 보리의 미묘한 작용이 되나, 마음의 종지를 잃는다면 항상 생멸의 고통을 달게 받아야 하는 것이다.’ 마음의 종지, 마음의 최고의 뜻이 뭘까. 불교에서는 첫 번째 뜻,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마음의 종지라 그럽니다. 명추회요는 종경록에서 나왔죠. 종경록에서 종지는 뭐냐 하면, 바로 마음입니다. 이 마음도 종경(宗鏡)의 마음이에요. 이렇게 거울을 비유하는 마음을 각체(覺體)라 그럽니다. 깨달을 각(覺)자, 몸 체(體)자, 깨달음의 바탕은 거울 같고 허공 같이 비어 있는 거죠. 그래서 종지가 되는 거예요. 이런 마음의 종지는 열반이기도 하고 불생불멸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현상계로 나타날 때는 연기의 모습으로 인연 따라 나타나는 거예요. 이런 진리를 잃어버리면 ‘항상 생멸의 고통을 달게 받아야 하는 것이다.’ 생사윤회를 한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