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미혹과 깨달음은 마음이다 (강의 - 2. 身口意로 하는 교화)

경호... 2011. 9. 29.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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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미혹과 깨달음은 마음이다 (강의 - 2) 『불지경』에 나오는 얘깁니다. 몸으로 하는 교화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통력을 나타내서 교화하는 것이다. 둘째는 중생구제를 위하여 중생구제 원력으로 중생의 몸을 받아 나타나서 교화하는 것이다. 셋째는 업에 대한 과보를 나타내서 교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유식공부를 해왔는데 갑자기 ‘미혹과 깨달음은 마음이다’ 이게 왜 나왔느냐하면, 수행의 주체는 의식이에요. 감각으로 하는 게 아니고 의식이 수행을 하는 겁니다. 감각은 지속성이 없고, 제7 말나식은 관찰에 힘이 없기 때문에 안 되고, 아뢰야식은 당연히 불가지(不可知),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안 되고, 수행하는 마음은 의식이 하는 겁니다. 그래서 미혹이라든지 깨달음을 얘기할 때는 전부다 의식으로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자아관념, 자아의식을 전환 시키는 데 있어서 제7 말나식을 평등성지, 지혜로 바꾸려면 말나식이 하는 게 아니고 의식이 하는 겁니다. 의식이 아공(我空), 법공(法空)에 빠져가지고 제7 말나식을 평등성지로 바꾸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잘못 오해해서 의식이 별 볼일 없으니까 깡그리 없애버린다, 이런 식으로만 생각 하면 곤란하다 이 말입니다. ‘몸으로 하는 교화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통력을 나타내서 교화하는 것이다.’ 신통력을 나타내서 교화하는 것은 근기가 있는 사람은 말 몇 마디 하면 탁, 알아듣고 하는데 무지해서 말로 해서는 알아듣지 못 하는 경우에는 물 위로 걷는다든지, 공간이동을 한다든지, 이렇게 신통력을 보여 가지고 교화를 한다는 거죠. 그 다음은 ‘둘째는 중생구제를 위하여 중생구제 원력으로 중생의 몸을 받아 나타나서 교화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보디사트바(bodhisattva), 보살들이 많이 하는 겁니다. 보통 아라한(阿羅漢, arhat)은 적멸(寂滅)에 들어가면 안 나옵니다. 그렇지만 보살은 중생 구제하기 위해서 적멸에서 오는데 그 징표로는 원력으로 다시 중생 몸을 받고 온다는 겁니다. ‘셋째는 업에 대한 과보를 나타내서 교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업을 지으면 이런 과보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줘서 그 두려움에 무지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거죠. 우리나라에도 이런 예가 있습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절에 불사를 하려고 원력을 세웠는데, 마침 어느 머슴이 자기 전 재산을 다 털어서 보시를 했어요. 그런데 보시를 하면 출세를 한다던지, 오래 산다던지, 병이 난다든지 이래야 되는데, 이 머슴이 보시를 하고는 얼마 되지 않아서 몸이 불편했든가 병이 들어가지고 죽었어요. 이것을 보고 스님이 화가 나서 보시를 했으면 잘살던지 건강하던지 해야 되는데 일찍 죽다니, 부처님 못 믿겠다면서 도끼로 불상을 찍어버렸어요. 그 스님은 불상 머리에 도끼가 찍힌 채로 놔두고 떠나버렸어요. 그리고는 절이 폐허가 되어 버렸죠. 그런데 이 머슴이 원력이 있었는지, 다시 부잣집 아들로 환생을 해가지고 과거까지 급제를 하고 절이 있던 그 마을로 지나가게 되었던 거예요. 지나가다가 기분이 뭔가 좀 그래서 그랬는지 폐허가 된 절에 들려서 도끼에 찍힌 불상을 보게 된 겁니다. 그동안에는 누가 빼려 해도 안 빠지던 도끼가 그 고을 원님이 빼니까 그냥 빠지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 전생을 알게 된 겁니다. 그 전생을 알고 보니까 자기가 일찍 죽은 게 전 전생에 악업을 많이 지었는데 불사에 보시를 많이 해서 다음 생에 받을 악업을 이생에 미리 받아 일찍 죽은 거예요. 그리고 또 그 공덕으로 금생에 좋은 집 자제로 태어나서 과거 급제도 하고 그렇게 됐다는 겁니다. 다음에 말로 중생을 교화하는 것에 또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축하하고 위로하는 말로 교화하는 것이다. 둘째는 방편으로 하는 말로 교화하는 것이다. 셋째는 사물의 이치를 지혜로 정확히 가려주는 말로 교화하는 것이다. 첫째나 둘째는 문장 그대로 이해하시면 되고, 셋째 사물의 이치를 지혜로 정확하게 가려주는 말로 교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가 많이 쓰는 방법이에요. ‘찻잔’이 어떻고, 분석하고 분해시키고, ‘봐라, 실제가 없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사물의 이치를 분석하고 분별해서 얘기하는 방법입니다. 다음에는 신구의(身口意) 중에서 마지막으로 뜻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것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옳고 그름을 결택하는 뜻으로 교화하는 것이다. 둘째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상황을 만들어 나가는 뜻으로 교화하는 것이다. 셋째는 구도심을 일으키기 위한 뜻으로 교화하는 것이다. 넷째는 상대방 질문의 뜻을 받아들여 해결하여 교화하는 것이다. ‘첫째는 옳고 그름을 결택하는 뜻으로 교화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선택해서 봐라, 이건 옳고 이건 그르지 않느냐, 이렇게 얘기해서 교화하고, ‘둘째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상황을 만들어 나가는 뜻으로 교화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을 만들어서 교화하는 거죠. 부처님 당시 마가다국 빔비사라(Bimbisāra)왕의 왕비였다가 출가한 케마(Khemā)왕비 얘긴데, 빔비사라왕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면서 불교를 믿지 않았습니다. 빔비사라왕은 아내의 이 같은 태도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죠.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을 기회를 주려고 부인을 죽림정사에 심부름 보냈어요. 부처님께서는 왕비가 오는 것을 알고는 하늘여자, 아주 아름다운 여인을 부채를 들려서 양 옆에서 부치게 한 거예요. 이때 왕비가 시녀를 거느리고 부처님 계신 곳으로 옵니다. 그런데 자기도 미색이라면 남 뒤지지 않는데, 자기보다 몇 배나 아름다운 여인 둘이 부처님 옆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까 깜짝 놀란 거예요. 그런데 그 순간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중년으로 바뀌면서 중년에서 노인으로 바뀌더니 이내 고꾸라져서 죽어버리는 거예요. 왕비가 그것을 보고 깨우치는 바가 있었어요. ‘아무리 미모가 출중하더라도 늙고 병들고 죽음에는 피해갈 수 없구나’ 이렇게 생각한 거죠. 그로인해서 왕의 재가를 받고 출가를 하게 됩니다. 출가한 후 지혜 제일의 비구니가 되었는데 치한에게 습격당했을 때 두 눈을 빼내 치한에게 보이며 치한들의 욕정을 잠재웠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셋째는 구도심을 일으키기 위한 뜻으로 교화하는 것이다.’ 구도심을 일으키게 하는 방법은 괴로움에 대한 자각을 일으키게 하는 거예요. 이것은 옛날에 우리 스님들이 많이 하는 방법 중에 하나에요. 노스님들이 “너희가 공부를 하려면 죽는 모습을 봐야 된다. 저기 화장터에 가서 사람들 죽는 모습부터 봐라.” 이렇게 얘기 합니다. 그러면서 인생이 고달픔을 보고, 중생의 고통스러움을 보여줘서 괴로움을 자각 시켜서 구도심을 일으키게 하는 방법입니다. ‘넷째는 상대방 질문의 뜻을 받아들여 해결하여 교화하는 것이다.’ 상대가 질문하는 뜻을 잘 알아차려가지고 거기에 맞춰서 해결해 주는 방법입니다. 다음에 상대방 질문의 뜻을 받아들여 해결하여 교화하는 것 가운데에 사기(四記)라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는 묻는 자의 질문에 변할 수 없는 결정적인 답변으로 의문을 해결해 주는 일향기(一向記)를 말한다. 둘째는 묻는 자의 질문에 상대하여 경우를 따져 분별하는 답변으로 의문을 해결하여 주는 분별기(分別記)다. 셋째는 묻는 자의 질문에 대하여 질문의 의도를 되물음으로써 질문 자체를 반성하도록 하여 의문을 해결하여 주는 반문기(反問記)다. 넷째는 묻는 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고난 후에 희론을 조장할까 염려하여 침묵으로 답변하는 묵치기(黙置記)다. ‘상대방 질문의 뜻을 받아들여 해결하여 교화하는 것 가운데에 사기(四記)라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 했을 때 대답해주는 방법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묻는 자의 질문에 변할 수 없는 결정적인 답변으로 의문을 해결해 주는 일향기(一向記)를 말한다.’ 결정적인 답변, 이런 것은 결정적인 한 방에 그냥 마음을 팍! 깨우쳐주는 선문답하고 비슷한 거예요. 선문답 얘를 들면, 제자가 스승인 운문스님에게 묻습니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는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수미산이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놓아 버려라." 또 다른 얘기는 스승과 제자가 배를 타고 가는데 제자가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그냥 제가를 물에 빠뜨려가지고 나오지 못하게 누르면서 “한 번 일러봐라!” 물을 꼴깍꼴깍 마시면서 숨 쉬기도 바쁜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럴 때 위기상황에서 관문을 뚫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깨달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둘째는 묻는 자의 질문에 상대하여 경우를 따져 분별하는 답변으로 의문을 해결하여 주는 분별기(分別記)다.’ 상대가 질문하면 거기에 경우를 따져서 낱낱이 분별해서 하나하나 풀어서 설명해주는 거죠. ‘셋째는 묻는 자의 질문에 대하여 질문의 의도를 되물음으로써 질문 자체를 반성하도록 하여 의문을 해결하여 주는 반문기(反問記)다.’ 부처님 당시 얘긴데 일전에도 한 얘깁니다. 어떤 촌장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님, 당신은 굉장히 자비스러운 분이시죠. 그런데 왜 차별을 하십니까? 당신네 제자들은 높은 법문 해주시고, 우리 같은 촌부들은 왜 낮은 법문을 하십니까. 당신은 자비스러운데, 왜 그리 합니까?” 이 촌장이 하는 논법은 양두논법(兩頭論法)입니다. 뱀이 머리가 두 갠데 뱀 머리를 치면 다른 머리 뱀이 무는 거죠. 부처님 당신은 평등한데 우린 왜 차별합니까, 이런 얘기거든요. 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이 “옥답이 있고 중간 답이 있고 자갈밭이 있다면, 당신은 어떤 밭부터 갈겠습니까?” 그 촌장은 농부니까 당연히 “그야 옥답을 먼저 갈지요.”라 대답을 합니다. 이렇게 상대방이 질문을 하면 묻는 의도를 되물어서 대답하게 해서 질문 자체를 반성하게 하는 겁니다. “그럼 옥답이 없으면요?” “중간 답을 갈지요.” “중간 답이 없으면요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자갈밭을 갈 수 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부처님 하시는 말씀이 “나도 그와 같다. 나의 제자들은 옥답이고 신자들은 중간 답이고, 외도는 자갈밭과 같다. 그러니 당연히 옥답인 내 제자들에게 심도 있는 법문을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 부처님이 말씀을 그렇게 잘하세요. 세 번째 얘기가 이런 얘깁니다. ‘넷째는 묻는 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고난 후에 희론을 조장할까 염려하여 침묵으로 답변하는 묵치기(黙置記)다.’ 이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독 묻은 화살을 비유한 『전유경(箭喩經)』에 보면 나옵니다. 사위성(舍衛城) 사람으로 후에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여 6신통을 얻은 만동자(鬘童子)가 있어요. 어느 날 부처님 찾아가서 “이 세상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는가? 이것을 답 해주시면 계속 수행을 할 것이고 답변을 안 해주시면 俗退(속퇴) 하겠습니다.” 이렇게 질문을 하니까, 부처님께서 꾸짖으시고는 침묵만 지키신 겁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부처님께서 독화살을 비유 들어서 말씀을 하시는 거죠. “어떤 사람이 전장에서 화살을 맞았는데 동료가 빼려하니까, ‘나는 먼저 화살을 쏜 그 사람이 어떤 성 어떤 이름 어떤 신분이며, 키는 큰가 작은가, 살결은 거친가 고운가, 얼굴빛은 검은가 흰가, 혹은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가, 찰리족인가 혹은 바라문 거사 공사의 종족인가, 동방 서방 북방 어느 쪽에 사는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이런 걸 알기 전에는 뽑지 말라고 그런다는데, 그러면 어찌 되겠느냐?” “죽습니다.” “마찬가지다. 쓸 데 없이 죄가 영원하지 않은가 영원한가, 끝이 있나, 끝이 없나, 이런 것을 논하다가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일찍 죽는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이런 것을 묵치기(黙置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사무기(十四無記)라는 말이 있는데, 부처님이 대답을 거부하고 침묵한 열네 가지 질문을 얘기합니다. 이렇게 침묵으로 답변하는 이유는 선가에서는 이렇게 얘기하죠. 입만 벙긋하면 혀가 잘린답니다. 이 말은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지만 입을 벌리는 순간 하나의 생각이 일어났다 이거죠. 한 생각만 일어나도 하늘과 땅이 현격하게 달라져 버리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진리라고 하는 것은 말과 생각을 떠나 있는데 그 자리를 언어로 표현하려면 되겠어요? 생각은 내적 언어기 때문에 표현하기 전에 한 생각이 일어나도 어긋난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런 자리를 우리는 화두라는 말을 쓰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