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금강경(우룡스님 강설)을 나무아미타불 카페에서 퍼왔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스님께서 강설하신 내용에서 약간의 문체와 틀리는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함께 읽고 수행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若人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 以用布施하면 是人의 所得福德이 寧爲多不아 須菩提言하되 甚多니다 世尊하 何以故오 是福德이 卽非福德性일세 是故로 如來說福德니多이다 若復有人이 於此經中에 受持乃至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其福이 勝彼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一切諸佛과 及諸佛 阿?多羅三?三菩提法이皆從此經出이니라 須菩提야 所謂佛法者는 卽非佛法이니라. 8. 법에 의지하여 나타남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칠보(七寶)를 가득히 쌓아 두고 보시 한다면 그 사람이 받을 복덕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대답 하였다. 『매우 많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의 성품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四句揭)만 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에게 말하여 주면 그 복덕은 저 七보를 보시한 복덕 보다 더 수승(殊勝)하리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수보리야, 여러 부처님들과 부처님들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 모두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니라.』 無得無說分 第七에서는 無爲法에 의거하여 보면 얻었다고 할 것도 설 하였다고 할 것도 없음을 밝혔고 이제 依法出生分 第八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법에 의지하여 생겨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물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참으로 귀하게 여기는 金, 銀, 유리 수정, 산호, 마노, 진주의 7가지 보배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세계의 백억 배나 되는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울 만큼 보시를 하였다면 그 사람이 받게 될 복덕의 과보가 얼마만큼 이나 많겠느냐?” 이 질문에 대하여 수보리 존자는 “매우 많겠나이다.” 라는 당연한 답을 한다. 그런데 그 다음의 말이 아주 묘하다.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의 성품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 속에 담긴 뜻이 무얼까? 소년소녀 가장을 돕거나 모르는 사람의 수술비를 마련해 주는 일만 하여도 신문이나 TV에 소개되고 칭찬을 받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이 우주에 가득 찰 만큼의 칠보를 가지고서 남에게 베푼다면 그 사람이 존경 받고 앞으로 얻게 될 복덕이 어떠할 지는 가히 상상 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복덕은 복덕성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복덕의 성(性), 동양철학에서는 이 性을 불변의 본질로 보고 있다. 아무리 주변 환경이 바뀌어도 결코 변하지 않는 근본 되는 것을 “性” 이라는 글자로 표현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 性은 無性이요, 空性이다. 無性이고 空性이기 때문에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맛도 없으며,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없는 것 또한 아니기에 그냥 “性”이라는 이름 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낄 수도 없는 이 性의 자리에는 그 어떤 것도 붙을 수가 없다. 칠보로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울 만큼 보시를 하였더라도 이 性의 자리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단순한 보시의 인과응보는 性 밖에 윤회 하는 세계를 맴돌 뿐 참 된 성품과는 무관 하다는 것이다. 정녕 우리의 보시가 性의 자리로 통하려면 집착이 없는 無住相의 보시라야만 한다. 無住相의 보시가 되면 性의 자리로 통 할 수 있지만 물질의 보시는 물질적인 복덕으로 끝날 뿐, 성(性)의 자리, 법(法)의 세계, 진리의 세계, 정신세계의 원천으로 나아가게 하지를 못한다. 미혹 속에서 고난과 함께하며 살아가는 우리 衆生들에게 진실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윤회 속의 행복인가? “아니다.” 언제나 변함없는 性의 자리, 언제나 깨어 있는 法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질의 복덕은 끝이 있지만 그 性의 자리, 법성의 세계에 깃 든 복덕은 끝이 없다. 쓰고 또 쓰고 하여도 줄지 않는다. 진정 우리 불자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이 性의 자리이며 꼭 하여야 할 일은 그 속에 무궁한 복덕을 개발하여 뭇 衆生들과 더불어 사용하는 일이다. 이 福德性의 자리는 우리에게 있는 보배 창고이다. 참으로 우리가 현명한 이라면 “나” 밖에 있는 보배를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보배 창고를 찾아서 열고 창고 속의 다 함 없는 보배를 사용 할 줄 알아야 된다. 그 무궁무진한 보배를 일체 衆生과 더불어 사용하는 것이야 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요긴한 일이다. 그럼 윤회의 삶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가 무엇을 통하여 불변의 본성을 찾고 “나”의 보배 창고를 열 것인가? 그것은 法이다. 모든 집착을 뛰어 넘는 진리에 의지하여 찾아 들어 갈 수 있다. 그렇다면 그 法은 무엇인가? 모든 집착을 놓게하는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이루게 하여 주는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강조 하셨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四句揭)만 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에게 말하여 주면 그 복덕은 저 七보를 보시한 복덕 보다 더 수승(殊勝)하리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수보리야, 여러 부처님들과 부처님들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 모두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니라.” 이것은 法施(법시)의 복덕이 財施(재시)의 복덕 보다 더 크다는 말씀이다. 물질의 복이나 물질의 공덕보다는 진리의 복과 공덕, 법의 복과 공덕이 더 크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우리 불자들이 흔히들 동참하는 불사와 연결시켜 보시하는 마음가짐에 대하여 언급해 보자. 불사에 시주를 하면 복이 깃든다고 한다. 그래서 복을 받기 위해서라도 시주를 즐겨 한다. 그런데 시주를 할 때 참으로 이상한 경우가 있다. 그것은 불상을 모신다고 할 때 돈 많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 이다. “부처님을 모시는데 필요한 경비는 저 혼자 모두 내겠습니다, 스님! 절대로 다른 사람의 돈을 받으시면 안 됩니다..” 화장실을 만들거나 길을 닦거나 계단을 만들 때에는 보시를 하고자 하지 않으면서 불상을 모시는 대는 왜 혼자 독차지 하려는 것인가? 바로 복덕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조성하여 길이길이 축복을 받으며 잘 살아 보겠다는 바로 그 욕심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보시에도 복덕은 뒤따른다. 하지만 끝이 있는 복을 지을지언정 자신의 깨달음과는 전혀 무관 하다. 오히려 복덕을 독차지 하고자 하는 그 욕심에 대한 과보는 “나”의 몫이 된다. 따라서 참으로 잘 보시를 하고자 하면 평소에 정성껏 축원을 하며 모은 돈이나 물질로 시주를 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나를 자주 찾아오는 한 사람의 예를 들어 보겠다. 박봉의 남편 월급으로 아들, 딸 넷을 기르며 살았던 보살은 절에는 다니고 있었으나 보시를 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어느 해 정월 대보름날 보살은 서울 성북동의 정법사에 갔다가 한 신도가 부처님 전에 쌀 두 가마니를 기부 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도 부처님께 바치고 싶다!” 하지만 쌀 한 되 따로 살 형편이 되지 않았던 보살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 이었다. 그런데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가족의 아침밥을 하고 저녁밥을 지을 때 쌀 한 숟가락 씩 만 덜어 내어 다로 모으자. 그것을 부처님께 바쳐야지” 그날부터 보살은 밥을 지을 때마다 쌀 한 숟가락씩을 덜어 다른 봉지에 담으면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축원을 올렸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 씩 절에 가지고 가서 쌀 봉지를 부처님께 바쳤다. 그런데 묘한 일이 일어났다. 그 이후로는 양식 때문에 고생하는 일이 없어졌고 남편 일도 잘 풀리고 자식 들은 모두 대학을 나와 결혼하고 아들, 딸 낳고 아무런 탈 없이 잘 살게 된 것이다. 그 뒤 보살은 꾸준히 쌀을 모으면서 염 한 축원과 보시 공덕의 체험담을 주변의 신도들에게 들려주며 권했다. “내가 그렇게 해보니 참으로 영험이 있습디다, 한번 해 보세요, 정말 기대 이상의 가피가 따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주변의 사람들도 그 보살처럼 축원하고 훌륭한 결실을 맺었다는 것이다. 이 보살처럼 정성이 깃든 공양미, “나”의 축원이 깃든 공양미를 부처님 전에 올릴 때 복덕이 함께 갖추어 진다. 복덕은 물질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성이 깃들어야 된다. 돈이 있다고 하여 佛事에 마구 돈을 희사하기 보다는 정성이 깃들고 축원이 깃 든 돈을 바쳐야 된다. 오히려 평소에 佛事에 쓸 돈을 모으십시오. 가족이 셋이면 셋, 넷이면 넷, 한 사람 당 오백원도 좋고 천원도 좋다. 형편대로 쉽게 할 수 있는 액수를 정하여 저금통에 넣어라. 그런데 절대로 그 돈을 그냥 넣지 마라. 남편 몫으로 돈을 넣으면서 남편을 축원해 드리고, 아들 몫으로 돈을 넣으면서 아들을 축원해 주고, 딸의 몫으로 돈을 넣으면서 딸을 축원해 주고, 내 몫으로 돈을 넣으면서 내 축원을 해라. “부처님! 이 돈은 000의 몫입니다. 000가 항상 건강하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하옵소서.” 하루, 이틀 생각하다가 말고 답답하면 하는 축원이 아니라 매일매일 꾸준히 하는 축원이라야 결실을 맺는다. 거듭거듭 끈기 있게 밀고 나가는 축원이라야 힘이 모이고, 힘이 모여야 능히 어려움과 장애를 돌파 할 수 있는 것이다. 간절히 축원을 해라. 그리고 모은 돈으로 불사를 해라. 스님에게 드려서 불사에 쓰도록 하여도 좋고 법공양에 사용하여도 좋고 가난한 이웃에게 주어도 좋다. 특히 법보시에 사용하면 그 복과 공덕은 더욱 커진다. 왜냐하면 법보시를 통하여 서로의 깨달음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법보시야 말로 서로를 근원적으로 살리고 근원적으로 복덕을 쌓게 해 주는 진정한 佛事라는 것을 잊지 마라. 하지만 또 한 가지 기억 할 것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이 법보시에 대한 집착 까지도 허락 하지 않으셨고 그 집착을 비우기 위하여 말씀 하셨다. “수보리야,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니라.” 법이란 그 이름이 법일 뿐 절대로 집착하지 말라는 뜻에서 이렇게 가르치신 것이다. 그럼 이제까지 공부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자. 금강경의 대의는 철두철미하게 대우주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절대 空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금강경의 법문은 현재 우상과 계급과 착각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을 철저히 부정하여 털어내고자 한다. 곧 우상과 착각이라는 病을 치유하기 위하여 끝없는 부정의 법문을 펼치는 것이다. 가만히 자신을 되돌아보자. 우리는 언제나 상대적인 생각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다. 있다, 없다, 부처다, 衆生이다, 스님이다, 신도다, 깨쳤다, 미했다, 안다, 모른다, 영리하다, 둔하다, 좋다, 나쁘다, 등등의 두 극단에 사로잡혀 살아 가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인 세계에 사로 잡혀있는 이상에는 대우주의 보편타당한 진리를 체험 할 수도 없고 절대적인 자유나 행복도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상대적인 세계에 빠져있는 인간의 집착을 모두 놓아 버릴 것을 가르치고 있다. “無住相 하라” “無爲法으로 살아라” “身相은 身相이 아니다” “佛法이라는 것은 佛法이 아니다” 정녕 금강경을 공부하는 우리는 부처님에 대한 모습의 집착도 내가 아는 불법에 대한 집착도 넘어 서서 살아야 된다. 그리고 마침내 “나”와 진리에 대한 집착까지 완전히 놓아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상에 집착함이 없는 무주상을 실천하고 봄바람과 같은 무위법을 쓰며 살아야 된다. 봄바람은 “저 나무의 꽃을 붉게 만들어야겠다, 노랗게 만들어야겠다, 는 생각이 없다. 그냥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나무들에게 따스한 바람을 안겨 준다. 금강경을 공부 하는 우리도 이 봄바람처럼 되어야 된다. 아들이니까 이렇게 해 주고 딸이니까 저렇게 해 준다는 차별적인 생각을 놓아 버리고 “내 자식이다, 내 남편이고 내 아내다”는 집착을 놓아 버리고 봄바람처럼 해 주어야 된다. 정성을 다하는 봄바람이 되어 아들은 아들대로, 딸은 딸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 대로, 각각 자기의 본성에 따라 계발을 할 수 있도록 해 드리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하냐? 처음부터 “나”의 쪽에서 상대에 대한 희망과 관념을 만들어 놓고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이렇게 하는데 우리의 실천이 어떻게 바를 수가 있나?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하고 위한다면 봄바람처럼 해 줄 뿐 “나”의 관념이나 희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으면서 기도하고 절하고 매달리면서도 뜻과 같이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 누가 이 문제를 풀어야 하나? 열쇠를 쥔 사람이 풀어야 하며 그 열쇠를 쥔 사람은 바로 “나”이다. 열쇠!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을 확 풀어 버리면 된다. 얽히고설킨 나의 마음을 풀고 봄바람이 되는 것, 봄바람이 되어 모두 함께 살아나는 것, 이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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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소리는 아침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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