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 본원경에』“게으름이란 모든 허물의 바탕이다. 집에 있는 이가 게으르면 의식이 부족하고 사업이
부진해서 가난해질 것이다. 출가한 이가 게으르면 생사에 고통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좋은 일은 수행정진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니 집에 있는 이가 정진하면 의식이 풍족해지고 사업이 번창할 것이요, 출가한 이가 수행
정진을 하면 모든 법을 성취해서 마침내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나니 모두가 수행정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삼일수심은 천재보요, 백년탐물은 일조진이라고 하였습니다.
백년동안 모은 것도 숨 까딱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인생은 일장춘몽과 같습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갑니다.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에 힘써야 합니다. 모든 것은 현재에서 일어납니다. 현재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삶을 놓치는 것입니다. 현재를 놓치는 것은 내 인생을, 내 삶을, 내 생활을 놓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게으른데 다섯 가지 허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첫째는 재물을 마음대로 못쓰고,
두 번째는 나쁜 명성이 밖에 퍼지며,
세 번째는 가난한 이에게 보시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네 번째는 사부대중을 좋아하지 않고,
다섯 번째는 하늘 사람, 인간의 몸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것을 말해서 마음이 방일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첫째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고, 스님네를 생각하고, 계율을 생각하고, 보시를 생각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불자가 마음을 방일하지 않는다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출가 수행자들과 달리 재가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일상을 살아가기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생업에 종사
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주변에 닥쳐온 갖가지 일들을 해쳐나가면서 불법승 삼보를 찾고 가난한 이웃도 돌보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재가불자들의 삶은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께서는 재가 불자들이 일 년 365일 스님들처럼 수행처에서 수행 할 수 없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출가자
들의 삶에 정기적으로 동참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여 놓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재일입니다.
육재일은 매월 음력 3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입니다. 재라는 것은 범어 우포사타(uposadha)를 한역 한
것인데, ‘삼가다, 부정을 피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일정한 날에 계율을 지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재일은 재가 불자들이 단순히 부처님을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출가 수행자들의 수행을 체험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방편을 마련한 것입니다.
십재일은 육재일에다가 1일, 18일, 24일, 28일을 더한 것입니다. 또 날짜마다 각 재일에 특정한 불보살님들을
배정하여 의미를 부여 했습니다. 초하루 날은 정광재일이라고 해서 연등부처님께 기도하는 날, 8일은 약사재일,
14일은 보현보살, 15일은 아미타불, 18일는 지장재일, 23일은 대세지보살, 24일은 관세음보살,
28일은 비로자나불, 29일은 약왕보살, 그믐은 석가모니 부처님께 기도하는 날로 만들어 방편을 다양하게 들어
가지고 직접 출가의 삶을 본받아 정진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해서 악업을 짓지 아니하는
날로 정해서 재가불자들이 출가자들하고 함께하면서 배우고 익히고 실천 할 수 있는 덕목을 키워주게 하셨습니다.
『율장』에서도 팔관재를 실천하지 않으면 우바새가 될 수 없고, 우바이도 될 수 없다고 하여 재가불자들이
철저히 재일을 지켜 수행토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천을 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향을 가까이 하면 향이 베고, 비린내를 가까이하면 자연히 비린내가 베입니다. 종이에는 아무런 향내가
없지만 향을 싸두면 종이에도 향내음이 나는 것과 같이 범부중생들도 좋은 것을 가까이 하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나쁜 것을 가까이 하면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하고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달라져 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그것을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나를 변화 시킬 수 있는 힘, 우리를 변화시키고자하는 힘은 게으르지 아니함으로부터 시작됩
니다. 불방일로부터 출발해서 나아갈 때 마음의 허망하지 않는 진실한 모습도 거기서부터 출발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살았으면 합니다.
몸은 비록 말법시대에 태어났더라도 우리가 수행정신을 통해서 지혜의 덕목이 드리워지면 누가 있든 없던, 덥던
춥던, 배부르든 배고프던, 행복하던 불행하던 즐겁든 고통스럽든 늘 그가 하고 있는 그 여여하고 한결같은 그
모습이 그대로가 보살행일 것입니다. 물질적인 세계인 이 현상계에서도 탐, 진, 치의 삼독과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의 오욕락의 망상도 지혜가 있으면 약이요, 천하없는 계, 정, 혜 삼학도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독이
됩니다.
『빛과 그림자』라는 책을 보니까 “믿음은 불신에서 멀리 있지 않으며 사랑은 미움에서 멀리 있지 않더라.
희망은 의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으며 기쁨은 항상 눈물 곁에 있더라.”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글이었습니다. 여기에 또 견주어서 재미있는 글이 있습니다. 아이리스 머독이라는 여류작가가 한
소설에서 이런 글을 써놨습니다. “행복은 때때로 슬픈 얼굴로 다가온다. 나의 행복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너무 슬퍼서 오랫동안 나는 그것을 불행인줄 알고 내 곁에서 내 던져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그것이 내
곁에 아주 가까이 가까이 있었다.” 이글과 앞의 글과 연결해서 지어지는 생각이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멀리 나누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어둠과 밝음, 지혜와 어리석음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은 어리석은 것만큼 지혜가 없고, 지혜가 있으면 지혜가 있는 것만큼 어리석음이 없고, 밝으면 밝은 것
만큼 어둠이 없고, 어두우면 어두운 것만큼 밝음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 짊어져야 할 짐이라면 그동안 우리 내 어버이가 하셨던 것처럼 내 스스로 그 짐을 짊어지고 가고,
그 짐을 짊어 질수 있을 때 우리는 아마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주어진 자리에서 근본 잃어버리지 말고 자기도리 다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 정우스님 / 통도사 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