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우룡스님 강설)이 나무아미타불 카페에 있어 퍼왔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스님께서 강설하신 내용에서 약간의 문체와 틀리는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한자도 오타가 있기도 하고....) 함께 읽고 수행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생활 속의 금강경(우룡큰스님 강설-효림출판사)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須陀洹이 能作是念하대 我得須陀洹 果不아
須菩提-言하사대 不也니다 世尊하 何以故오 須陀洹은 名爲入流로대
而無所入이니 不入色聲香味觸法일새 是名須陀洹이니이다.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斯陀含이 能作是念호대 我得斯陀含 果不아
須菩提-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斯陀含은 名一往來로대
而實無往來일세 是名斯陀含이니이다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阿那含이 能作是念이면 我得阿那含果不아
須菩提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阿那含은 名爲不來로되
而實無不來일세 是故로 名阿那含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阿羅漢이 能作是念호대 我得阿羅漢道不아
須菩提-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實無有法- 名阿羅漢이니
世尊하 若阿羅漢이 作是念하대 我得阿羅漢道라하면 卽爲着我人衆生壽者니이다
世尊하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 最爲第一이라 是第一離欲阿羅漢이라 하시나
世尊하 我不作是念하대 我是離欲阿羅漢이라 하노이다
世尊하 我若作是念하대 我得阿羅漢道라 하면 世尊하 則不說須菩提- 是樂阿蘭那行者라 하시려니와
以須菩提-實無所行일새 而名須菩提 是樂阿蘭那行이라 하시나이다
9. 절대의 법은 존재가 아님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수다원(須陀洹)이 생각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을 이름하여 입류(入流)라 하나 들어간
바가 없으니,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수다원이라 이름하옵이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사다함(斯陀含)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사다함과를 얻었노라.」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이름하여 일왕래(一往來)라
하지만 실제로는 가고 옴이 없으므로 사다함이라 이름하나이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아나함(阿那含)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아나함과를 얻었노라.」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을 이름하여 불래(不來)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오지 않음이 없으므로 아나함이라 이름하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아라한(阿羅漢)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는 아라한과를 얻었노라」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아니옵니다.』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제의 진리에는 아라한이라는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아라한과를 얻었노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를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얻은 사람 중에 최고요 욕심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
이라고 하시지만, 제 스스로는 내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 수보리는 아란나행(阿蘭那行)을
즐기는 이라고 말씀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수보리의 행하는 바가 실로 없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이』라고 말씀하시나이다.
제8 의법출생분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복덕이 법에 의지하여 생겨 난다는 것을 일깨워 주셨고 여기
제9 一相無相分 에서는 수행의 어떠한 경지에도 집착됨이 없어야 함을 밝히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대승경전 가운데 금강경을 가장 먼저 설 하셨다. 곧 금강경은 부처님께서 소승의
수행자들이 범하는 잘못을 바로 잡아 대승의 길로 이끌어 들이기 위하여 설하신 최초의 경전인 것이다.
따라서 금강경에는 소승의 수행자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집착을 놓아 버리게 하는 법문들이 여러 곳에
수록 되여 있다. 이 一相無相分도 소승의 수행자가 성취하게 되는 네 가지 수행 도달점, 곧 四果를 설법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四果는 금강경의 본문에 보이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네 단계이다. 먼저 이들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을 한 다음에 경을 살펴보자.
소승 四果의 첫번째 도달점인 수다원(Srotaapanna)은 입류(入流), 예류(預流) 라고 번역하며
“미혹을 끊기 시작함으로써 성자의 흐름 속으로 들어간 사람” 이라는 뜻이다. 즉 불법을 닦아 영원한
평안의 경지로 나아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럼 보통의 사람과 수다원과는 어떻게 다른가? 보통 사람은 眼, 耳, 鼻, 舌, 身, 意의 六根으로 빛깔(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 법(法)의 6가지 대상(六境)에 집착하여 생사윤회의 세계를 흘러 다닌다.
그러나 불교를 믿고 생사윤회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겠다는 결심 하에 부지런히 정진하여 六根이 六境에
의하여 흔들리지도, 물들지도 않게 되면 수다원과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다원과를 성취하게 되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貪, 瞋, 癡)으로 인한 거칠고 무거운 번뇌들이
생겨나지 않게 되므로 다시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등의 몸을 받지 않게 된다.
소승 四果의 두번째인 사다함(Sakrdagamin)은 一來, 또는 一往來라고 번역하며 범어를 직역하면
“한번 되돌아오는 자” 이다.
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완전히 깨달은 성자라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한다.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한 사다함은 죽은 다음에 천상에 태어났다가 다시 인간의 몸을 받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게 되므로 一來,
또는 一往來라고 하는 것이다.
이 사다함의 경지에 이르면 잠시 되돌아보는 생각을 일으키기는 하나 그 생각에 집착을 하지는 않는다.
곧 스스로가 행 한 일이나 대상에 대하여 생각이 흔들리는 듯하다가,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다. 예를 들면
열심히 수행을 하다가 “내가 잘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며 멈칫하는 것이 그것이다.
소승 四果의 세번째 도달점인 아나함(Anagamin)은 不還(불환), 不來(불래), 出欲(출욕)등으로 번역하며 범어를
직역하면 “결코 돌아오지 않는 자” 라는 뜻이다.
이 아나함은 우리가 살고 있는 欲界의 번뇌를 모두 끊어 욕계를 완전히 벗어난 성자이기 때문에 “出欲(출욕)”
이라고 하며 죽은 다음 色界나 無色界에 태어 날 뿐 다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欲界로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不還(불환) 또는 不來(불래)라고 하는 것이다.
아나함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의 五欲을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바깥의 대상에 대한 욕심이 완전히 끊어져 마음이 결정코 흔들리지 않는 차원에 이르렀으므로 주춤 하거나
되돌아봄이 없이 한결 같이 향상의 길을 걷는다.
소승 四果의 마지막 도달점인 아라한(Arhat)은 應供(응공) 또는 無諍(무쟁)으로 번역 한다. 안과 밖이 항상
고요하여 다툼이 없으므로 無諍(무쟁)이라 하고, 모든 번뇌를 다 끊어 마땅히 공양을 받을만한 분이기 때문에
應供(응공)이라 한 것이다. 아라한의 차원에 이르게 되면 탐하는 마음과 성 내는 마음이 없고 더 이상 끊어야
할 번뇌가 없으며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어긋난다, 맞는다.”는 생각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아라한은 언제나 無諍三昧 속에 머무른다, 그렇다면 아라한이 머무르는 無諍三昧란 무엇인가?
나와 남, 주관과 객관이 다 비어있고 안과 밖이 항상 고요 할 뿐 아니라 언제나 근본 지혜가 밝게 비치는
속에 있는 것을 無諍三昧의 경지라고 한다.
그리고 無諍三昧를 이룬 아라한은 阿蘭那行(아란나행)을 실천한다.
阿蘭那行이란 무엇인가? 阿蘭那行은 寂靜行(적정행)이요, 無諍行(무쟁행)이요, 청정행(淸淨行)이다. 번뇌가
없는 寂靜行, 다툼이 없는 無諍行, 한없이 맑고 깨끗한 淸淨行을 실천한다.
실로 阿蘭那行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얻겠다는 마음(有所得心)이 없어야 된다. 결과를 기대하고 보답을
바라고 이익을 얻고자 한다면 자연히 마음이 흔들리고, 마음이 흔들리면 맞고 맞지 않음에 대한 다툼이
생겨나게 되며, 다툼이 심해지면 번뇌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럼 금강경의 본문을 보자.
이 一相無相分 에서는 부처님의 비슷한 질문에 대한 수보리 존자의 비슷한 답이 계속 된다. 그 질문과 답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스스로 그 경지를 이루었다고 집착하게 되면 그는 곧 수다원도 사다함도
아나함도 아라한도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과 수보리 존자가 이렇게 문답한 까닭은 어떠한 자리에 있더라도 집착이 없어야 하고 어떠한 경지에
이르렀더라도 相에 머무르지 않아야 함을 깨우쳐 주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수행자가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의 四相에 머무르고 있다면 그는 무조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이 아니다. 어떤 수행자가 스스로 깨달았음을 내세우는 아상에 빠져 다른 사람들을 경시하는 인상을
일으키고 잘잘못을 시비하는 衆生相이나 대접을 받고자 하는 수자상을 갖는다면 그는 결코 수행자가 아니다.
그는 오직 凡夫일 뿐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相에 집착하지 말아야 되고 자기가 있는 자리나 수행의 경지에
연연하지 말아야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절 집안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 많다.
수십 년 전 만해도 처음에 승려가 되면 세 가지를 반드시 절 집에서 가르켰다.
1)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섬길 줄 알아야 된다.
2) 스승을 부처님으로 섬길 줄 알아야 된다.
3) 대중을 부처님으로 섬길 줄 알아야 된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스승을 마음대로 바꾸는 제자가 있는가 하면 대중을 우습게 아는
승려가 허다하다. 수십 년 전만해도 주지 뿐 아니라 조실 스님까지도 “대중방에서 들어오시라 합니다.” 라고
하면 얼굴빛이 변 할 만큼 대중을 두렵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높은 직책을 가진 스님 가운데는 대중 위에 군림하는 스님을 쉽게 볼 수가 있다. 내가
주지요, 내가 스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지 쟁탈전도 벌어진다. 이렇듯 相에 취하여 있는 것이 우리 불교계의
바른 모습인가? 금강경의 一相無相分 第九 에서는 바로 이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우리는 相을 떠나 無諍三昧를 이루어야 된다. 차츰 번뇌와 욕망을 벗어 던지고 다툼이 없는 無諍三昧의 경지에
이르러야 된다. 우리라고 못 할 것이 없다. 매 생각마다 언제나 바르고 삿됨이 없는 경지, 한 조각의 번뇌도
집착도 없는 경지에 이르면 수보리 존자처럼 부처님으로부터 “최고의 無諍三昧人이요, 욕심을 떠난 제일가는
아라한” 이라는 인가를 받을 수 있다.
나아가서는 마땅히 아란나행을 즐길 줄 아는 참 된 불자가 되여야 한다. 남이 옳고 그른 것을 말하지 말고 어떤
결과를 기대 하거나 자리에 집착함이 없이 꾸준히 阿蘭那行을 닦아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짧디 짧은 인생살이에 우쭐거리고 따지고 다투고 집착 할 것이 무엇인가?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