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世上萬事

다산의 기록과 천주교 발상지

경호... 2007. 9. 24. 04:04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천진암(天眞菴)이라는 옛날의 절터가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라고 확정하고, 1979년에 200주년을 기념하는 커다란 비를 세워 그곳이 천주교 발상지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대대적인 성당 건축에 들어가 공사가 진행 중에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입니다.
 
1984년 봄에 간행한 『한국사회연구』제2호(한길사 간행)에 「정약용, 그의 시대와 사상」이라는 글을 필자가 발표했습니다. 그 글은 1988년 봄에 간행한 필자의 졸저 『다산기행』(한길사 간행)에 재수록하여 많은 독자들이 읽은 바 있습니다.

다산 형제, 이승훈 북경 다녀온 1784년에야 천주교서적 처음 읽어

그 글의 ‘다산과 천주교 문제’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천주교측은 천진암이 천주교 발상지라는 근거로 다산의 글 205자의 원문(한자)을 비석에 새겨 넣었지만, 그 205자의 내용은 그곳이 천주교 발상지라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조목조목 설명하여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20년이 훨씬 넘도록 천주교 쪽에서는 그 글에 대한 반론이나 변명 한 마디 없이 성당 짓는 일만 계속하고, 모든 기록에서 그곳이 천주교 발상지라고 확정하여 세상의 신자들은 물론 많은 지식인들까지 모두 그렇다고 의심의 여지없이 믿게 되어버렸으니 참으로 황당무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빗돌에 인용된 다산의 글, 「녹암권철신묘지명」의 “옛날 기해년(1779) 겨울 천진암과 주어사(朱魚寺)에서 강학하자 눈 속에 이벽(李檗)이 밤에 와서 촛불을 켜놓고 경학을 담론하였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에서의 ‘담경(談經)’은 경학, 즉 사서오경(四書五經)에 대한 담론이지 성경에 대한 담론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1779년의 5년 뒤인 1784년 봄에야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다산 형제들도 천주교에 대한 책을 읽었다니(그해 4월 15일) 그 강학회에 참석했다는 명확한 기록이 있는 다산의 중형 정약전도 마찬가지로 4월 15일에야 처음으로 천주교에 관한 책을 읽었다는 분명한 기록이 있습니다. 다산이나 그의 셋째형 정약종은 강학회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물론, 정약종은 그 2년 뒤인 병오년(1786)에 자기 형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하여 듣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는 명확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신유년 옥사의 국청에서 정약종은 분명히 그렇게 밝혔습니다.
 
빗돌에 인용한 다산의 「선중씨 정약전 묘지명」의 “일찍이 어느 해(1779) 겨울 주어사에서 임시로 거처하면서 강학하였는데 모인 사람은 김원성·권상학·이총억 등 몇 사람인데, 녹암 권철신이 손수 규정을 마련하여 새벽에 일어나 얼음물로 세수하고 양치질한 뒤 「숙야잠(夙夜箴)」을 외우고, 해가 뜨면 「경재잠(敬齋箴)」을 외우며, 정오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외우며, 해가 지면 「서명(西銘)」을 외우게 하였다. 장엄하고 공손함이 규칙이나 법도를 잃지 않게 하였다. 그러던 무렵에 이승훈도 온 힘을 다하여 학문연구에 스스로 노력을 다하였다”라는 70여 글자의 한문 원문이 새겨 있습니다. 숙야잠·경재잠·사물잠·서명은 송나라 이후 정통유학의 높은 사상을 표현한 유학이론일 뿐입니다. 이런 글의 어디에 천주교의 성경을 연구했다는 내용을 찾아낼 수 있습니까.
 
또 다른 인용문은 다산의 시 두 편입니다. 형제들과 천진암에 놀러가서 지은 시와 이벽이 죽어 그를 애도하는 만사(輓詞)인데, 그런 시의 어디에도 그곳에서 1779년 겨울에 녹암 권철신과 그 제자들이 모여 천주교를 연구했던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승훈, 정약종, 정약용은 참석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는데, 그들이 모두 참석했다고 그냥 역사를 기록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경기도 광주와 여주, 양평의 세 지역에 연결된 앵자봉이라는 산이 있고, 광주에는 천진암, 여주에는 주어사가 있었기에 거리는 멀지 않아 그곳을 옮겨 다니면서 강학회를 열었던 것이며, 특히 천진암보다는 주어사에서 강학회를 더 많이 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하필이면 천진암이 천주교 발상지라고 확정한 이유도 알 길이 없습니다. 엄격한 규율을 정하고 강학했던 곳은 명확하게 주어사라고 다산은 밝히고 있지 않았는가요.
 
다산 기록의 천진암 강학회는 유학경전 학습모임

필자는 1984년의 글에서 다른 기록을 찾아서 그곳이 발상지라고 말하는 것은 모르지만, 다산의 기록으로 그곳이 천주교의 발상지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역사의 왜곡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뜻있는 분들은 이점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 더 참고할 사항은, 억울하게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다산이 4년 뒤에 저술한 자신의 일대기인 「자찬묘지명」이나, 「권철신 묘지명」, 「정약전 묘지명」은 그 저술 목적이 그들의 일생의 업적을 밝히려는 뜻도 있지만, 가장 큰 목적은 자신이나 권철신 및 정약전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고, 정치적 당파싸움에 몰려 억울하게 탄압받고 죽음을 당했다는 내용을 밝히려는 뜻에서 기술한 글인데, 그 글에서 인용하여 천주교 발상지의 근거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권철신이나 정약전은 그처럼 엄격한 규정을 정해놓고 독실하고 공손하게 전통적인 경학공부에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을 말했는데, 그런 구절이 천주교 연구라고 말한다면 자가당착도 유만부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 훌륭한 강학회가 그 7년 뒤인 을사년(1785)의 천주교 사건 때문에 다시는 열릴 수 없었다고 애석해하면서, 7년 전의 강학회는 천주교와는 무관함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 1785년(을사년) 명례방(서울 명동)에 있는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집회를 하다가 형조의 금리들에게 적발된 사건. 천주교가 최초로 문제된 사건)
 
천주교 쪽의 “강학모임은 이론적인 학술연구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수도생활을 겸한 모임이었으니, 권철신 자신이 직접 만든 생활시간표나 규정에 의해서, 이른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서 얼음을 깨고 찬물로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는 새벽 기도문을 바치고, 해가 뜬 다음에는 오전 기도문을 바치고, 정오에는 낮 경문을 외고, 해가 지면 다른 경문을 바쳤다”라고 엉뚱한 해석을 해서 그곳이 천주교 발상지가 되었으니 세상에 이런 엉터리 역사가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다시 분명히 말합니다. 다른 기록을 인용하거나, 새로 찾아낸 내용을 근거로 한다면 모르지만 다산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그곳이 천주교 발상지라고 한다면, 다산을 연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혀 둡니다. (인터넷에서 ‘천진암’을 검색해보면 그곳이 한국천주교 발상지라고 확정돼 있기에 밝혀 보았습니다.)
 
※ 1985년 12월에 간행된 졸역 『다산산문선』(창작과 비평사)에는 다산의 「자찬묘지명」,「녹암권철신묘지명」,「선중씨 정약전 묘지명」이 완역되어 있으니 참고하면 전모를 아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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