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상시

능금 / 김춘수

경호... 2015. 7. 19. 04:38

 

 

화가 윤병락 씨의 ‘녹색 위의 붉은 사과’.

 

 

 

 

능금 / 김춘수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머물은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며는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꽃을 위한 서시 /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부재(不在) / 김춘수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없이 져버렸다.

 

차운 한 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청석(靑石)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일없이 세월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 ‘능금’

 

책상에 놓인 새 전시 도록을 무심히 펼쳐드는데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금방이라도 데굴데굴 굴러 내릴 듯한 먹음직스러운 사과들이 나무 궤짝마다 그득 담겼다. 햇볕에 그을린 흔적과 살짝 멍든 자국까지 진짜보다 생생하게 빛깔 고운 사과를 그린 화가는 윤병락 씨다. 어디서나 사과나무가 보이던 경북 영천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과수원을 헤집고 다니던 어린 향수와 기억을 사과로 재현한 이래로 ‘사과화가’라 불린다.

 

김춘수 시인은 이미지의 미술 대신 언어의 마술로 그리움에 익어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사과의 빛깔과 향기를 우리 눈앞에 불러낸다. 자연의 결실을 매개로 삼아 내면적 성숙으로 스스로를 채워가는 과정을 표현한 시는 생명의 충만함과 존재의 경이로움에 대한 찬가이기도 하다.

 

언제부터 잃어버렸을까.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딸기 복숭아 포도 등 갓 수확한 제철 과일을 마주하며 ‘이제 봄이 왔구나’ ‘여름이 훌쩍 갔네’ 하며 계절 변화를 떠올리던 순수의 시대는….

동네 마트에서 한 해 내내 사과를 사먹게 되면서 우리는, 시장에 처음 얼굴 내민 햇사과를 집어 들어 가을을 비로소 가을답게 맞이하고 미각으로 가을을 확인했던 그날의 행복을 빼앗겨 버렸다. 아마도 요즘 아이들에게 제철 과일의 분류는 일상이 아니라 교과서를 통해 배워야 하는 골치 아픈 학습의 대상일 게다.

 

구체적인 것은 점점 사라지고 추상화되어 간다. 내 호주머니 속 스마트폰 분실 신고는 잊지 않아도 제철 과일의 추억에 대한 실종 신고는 없다. 자연 생태계와 모든 동식물이 오직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우겨대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인간은 스스로를 외계인으로 만들고 있으면서, 외계인의 존재를 궁금해한다.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우주의 시계는 어김이 없어, 처서를 지났나 했더니 오늘이 백로다. 밤 기온이 내려가 이슬이 맺혀 한마디로 가을의 완연한 도래를 알려주는, 오래된 절기 구분이다. 명절 연휴를 앞두고 한뼘 한뼘 얼굴 붉히며 다가오는 가을의 첫 손님을 어제 출근길 도심 임시장터에서 우연히 만났다.

연둣빛 사과와 빨강 사과. 벌써 맛이 들어 달콤할까, 아직 풋사과라 새콤할까. 드높은 하늘 아래 신선한 사과 한 알을 골라 한입 크게 깨물었다. 와삭!

 

 

 

'#시 > 영상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똬리 다섯 개 / 이상국  (0) 2015.07.22
그대에게 가는 길 / 박시교  (0) 2015.07.19
물시 / 문정희  (0) 2015.07.19
가을비 - 박문옥  (0) 2015.07.19
수작酬酌 / 박제영  (0) 2015.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