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상시

눈 내리는 저녁 / 홍윤숙

경호... 2015. 7. 14. 05:18

 

 

 

 

 

눈 내리는 저녁 / 홍윤숙

 

- 望鄕詞6

 

눈 내리는 저녁길엔

목화꽃 지는 냄새가 난다

할머니 옛날 목화솜 지으시던

물레 소리가 난다

한밤에 펼치시던 오색 조각보 속

사각사각 자미사 구겨지는 소리 나고

매조 송학 오동 사꾸라

유년의 조각그림 몇 장

떨어지는 소리도 난다

 

어디서 그 많은 이야기를 실어오는지

어디서 그 작은 소리들을 풀어내는지

 

눈 내리는 저녁길엔

눈 덮인 고향집 낮은 굴뚝담 위

굴뚝새 푸득푸득 날으는 소리 나고

한 필 삼팔명주 하얗게 삭아내린

매운 세월 넘어

어머니 젊은날 혼자서 넘으시던

오봉산 골짜기 눈에 묻힌 길

수묵으로 풀어내는 한오백년

쇠락한 歲寒圖가 있다

 

사십 년 걸어도 닿지 못한 나라

눈 내리는 저녁길엔

문득 그 나라 먼 길을 다 온 것 같은

내일이나 모레면

그 집 앞에 당도할 것 같은

눈 속에 눈에 묻힌 포근한 평안

더는 상할 것 없는

백발의 평안으로 잠들 것 같다

 

 

 

 

눈 내리는 길로 오라 / 홍윤숙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을 맞으며 오라

눈 속에 눈처럼 하얗게 얼어서 오라

얼어서 오는 너를 먼 길에 맞으면

어쩔까 나는 향기로이 타오르는 눈 속의 청솔가지

스무살 적 미열로 물드는 귀를

 

한자쯤 눈 쌓이고

아름드리 해뜨는 진솔길로 오라

눈 위에 눈 같이 쌓인 해를 밟고 오라

해 속에 박힌 까만 꽃씨 처럼

오는 너를 맞으면

어쩔까 나는 아질아질 붉어오는 눈밭의 진달래

석달 열흘 숨겨온 말도 울컥 터지고

 

오다가다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눈길 위에 자라온 꿈

삼십년 그 거리에

바람은 청청히 젊기만 하고

눈발은 따뜻이 쌓이기만 하고...

 

 

 

포플러 (겨울 포플러) / 홍윤숙 

 

나는 몰라

한 겨울 얼어붙은 눈밭에 서서

내가 왜 한 그루 포플러로 변신하는지

 

내 나이 스무 살 적 여린 가지에

분노처럼 돋아나던 푸른 잎사귀

 

바람에 귀앓던 수만 개 잎사귀로 피어나는지

 

흥건히 아랫도리 눈밭에 빠뜨린 채

침몰하는 도시의 겨울 일각(一角)

 

가슴 목 등어리 난타하고

난타하고 등 돌리고 철수하는 바람

바람의 완강한 목덜미 보며

내가 왜 끝내 한 그루 포플러로

떨고 섰는지

 

모든 집들의 창은 닫히고

닫힌 창 안으로 숨들 죽이고

눈물도 마른 잠에 혼불 끄는데

 

나는 왜 끝내 겨울 눈밭에

허벅지를 빠뜨리고 돌아가지 못하는

한 그루 포플러로 떨고 섰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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