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
나무하러 간 왕질, 동자들 바둑 구경하다 시간가는 줄 몰라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중국 남조 시대 제나라의 조충지(祖?之: 429~500)가 저술한 중국 고대 소설집인 <술이기(述異記)>에서 비롯된 속담이다.
옛날 진(晉)나라 때 왕질(王質)이라는 사람이 나무를 하러 석실산에 들어갔다가 두 명의 동자가 바둑을 두는 것을 보았다. 그 중 바둑을 두던 한 동자가 왕질에게 대추씨 같은 것을 주었다.
왕질은 그것을 먹고는 지니고 있던 도끼를 내려놓고 앉아서 정신없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윽고 동자가 왕질에게 "네 도끼 자루가 썩었구나(汝斧柯爛矣)"라고 하였다. 왕질이 일어나서 보니 과연 자기의 도끼 자루는 이미 다 썩어버렸다. 정신을 차려 집에 돌아왔으나 자기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 고사에서 '도끼'는 한자로 '斧(부)', '자루'는 '柯(가)', '썩다'는 '爛(문드러질 란)'자로 표현되어 있다. 斧(부)는 도끼 중에서도 아비(父) 도끼, 즉 큰 도끼를 나타낸다.
이런 까닭에 이 고사는 줄여서 爛柯(난가) 전설이라 하며, 난가는 비유적으로 '바둑'을 뜻한다. 그 신선들이 바둑을 둔 산은 난가산(爛柯山)이라 불렀고, 왕질이 본 신선들이 둔 바둑을 기록한 <난가도(爛柯圖)>가 송나라 이일민(李逸民)이 지은 <망우청락당집(忘憂淸樂堂集)>에 수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한다.
청대(淸代) 화가 정관붕(丁觀鵬)의 <난가선적(爛柯仙迹)> 수권(手卷)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안동에 있는 청량산의 풍혈(風穴) 입구에는 두 개의 판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고운 최치원 선생이 바둑을 두던 판이라고 한다. 최고운은 지리산에서도 바둑을 두었던지 그와 관련된 바둑전설은 위 난가 전설과 흡사하다.
두 명의 동자 대신 신선인 진감선사(眞鑑禪師)와 최고운이 등장하는 것이 다르며 지리산에 사는 나무꾼 또한 구경하다가 도낏자루가 썩었고 대추씨 대신 준 것은 솜조각 같은 것이다. 집에 돌아온 나무꾼은 자기가 죽은 지 3년이 되었다하며 3년상 제사 준비를 하고 있는 아내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처럼 바둑은 시간가는 것을 잊을 만큼 타임머신적 재미를 주는 오락인 것 같다. 요즈음의 바둑 판세를 보면 예전과는 달리 일본은 지는 태양이고 중국 기사들이 질적으로도 숫적으로도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이다.
섬(?)
송나라 서긍 "도(島)보다 작은 서(嶼), 서보다 작은 섬(?)"
아직 그 숨은 곳을 알 수 없는 상주본 훈민정음. 6월 7일 대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도 해결을 위한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상주본은 간송미술관에 있는 국보 제70호 <訓民正音(훈민정음)> 해례본과 동일한 판본이라니 이제부턴 국보70호는 구분을 위해 안동본으로 불러야 할 상황이다.
집에 소장하고 있는 해례본을 넘기다가 유독 한 글자에 시선이 멈춘다.
'셤(島)'이다. 섬은 옛날엔 복모음 셤이었다.
얼마 전 <고려도경>을 보기 전까진 '셤'이 고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뎔(절: 寺)'이 '데라(てら)'가 되듯 늘여져 '시마(しま)'가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한자어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의 저자는 송나라 사람인 서긍(徐兢: 1091~1153)이다. 어려서부터 고금의 전적을 섭렵하고 서예와 그림에 능통했던 그는 1123년 고려를 방문하는 국신사의 일원이 된다. 국신사 일행은 고려와 송의 중간에 위치한 금나라 때문에 육로가 아닌 바닷길을 이용해야만 했다.
서긍은 권34 해도(海道) 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물결이 흘러 소용돌이치고, 모래흙이 이루어지고, 산석(山石)이 우뚝 솟는 것 따위에 있어서는 또한 각기 그 형세가 있다.
바다 가운데의 땅처럼 사람들이 가히 모여서 취락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주(洲)'라 한다.
洲보다 작지만 또한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은 '도(島)'라 말한다.
島보다 더 작은 것은 '서(嶼)'라 한다.
嶼보다 작지만 초목이 있는 것은 '섬(?)'이라 말한다.
?과 嶼와 같지만 그 바탕이 순수하게 돌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은 '焦(초: 암초)'라 한다."
지구 표면적의 약 3/4을 차지하고 있는 바다. 그 바다 위에 떠있는 땅은 사실 모두 섬이다. 그런데 서긍은 크기별로 명칭을 달리 하여 '주(洲)>도(島)>서(嶼)>섬(?)'을 제시하고 있으니 그 중 '?'자에 눈이 번쩍 뜨인다.
서긍은 뱃길로 예성항을 향하여 올라가면서 보물 같은 고려의 섬 이름들을 일일이 기록하였다.
백갑섬(白甲?), 궤섬(??), 춘초섬(春草?), 보살섬(菩薩?), 고섬섬(苦??), 자운섬(紫雲?), 알자섬(軋子?).
섬은 '?'이다!
거덜(巨達) 나다
보물 실은 말 넘어져 거달의 일에 이상이 일어나는것
나라라고 하는 배를 원만하게 순항토록 하는 핵심은 경제이다. 경제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4자성어인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이며, 세상을 구하는 구세주와도 그 의미가 통한다. 따라서 가정이든 국가든 간에 경제가 거덜 나면 큰일이다.
'거덜 난다'는 말을 살펴보자. '
남비'가 '냄비'로 바뀌듯 '거덜'은 '거달(巨達)'이 모음변형된 말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 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은 태복시(太僕寺: 또는 '사복시')라는 관아가 있었다. 그 태복시 소속으로 거달(巨達)이라 불리는 하급 마부들이 있었는데 궁중의 말을 돌보고 관리했다. 거달은 종으로서 직급은 낮았지만 '巨(클ㆍ중대할 거)'라는 글자에서처럼 그 하는 일은 중대했다.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을 이어(移御)라고 하는데, 그 때는 어보(御寶)인 국새를 꼭 가지고 간다. 국왕과 국새는 한 몸이라 함께 이동한 것이다. 국새를 옮길 때 왕의 가마에 함께 실으면 걸리적거려서인지 보석으로 장식한 상자에 담아 왕궁의 다른 말에 싣고 갔는데 그런 일을 거달이 맡았다.
1718년 3월 숙종 임금의 병이 오래 되어 이어하는 거둥이 있었다. 그 때 국새를 싣고 가던 말이 넘어져 국새를 담은 상자가 손상되는 일이 벌어졌다. 큰 일이 난 것이다.
당시의 거달이 임무의 중대성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일을 회피한 탓에 국새 이동에 경험이 없는 다른 요원을 마부로 대체한 때문이었다. 그 일로 담당 관료인 내승(內乘)이 파직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왕실 보물을 싣고 가는 말이 흔들거리거나 넘어져 '거달(→거덜)의 일에 이상이 일어나다'를 줄여 '거덜 나다'라고 한다. '거덜 나다'는 후에 의미가 확대되어 재산, 살림이나 하려던 일 따위가 여지없이 허물어지거나 결단 나는 것 또는 옷, 신 같은 것이 다 닳아 떨어지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최근 기름값, 공공요금, 식탁물가 등이 연일 치솟으면서 안그래도 옹색한 서민 살림을 더욱 흔들거리게 하고 있다. 나라빚 또한 448조에 달해 적자성 채무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하니 나라와 가정 경제가 거덜 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보리동지와 멍첨지
보리 바치고 벼슬 얻는 사람에 놀림조로 사용
바야흐로 선거철이 다가왔다. 선거철에는 금품선거라 하여 불미스러운 일이 종종 있어왔다. 그런데 보리를 바치고 벼슬을 얻은 사람을 이르는 ‘보리동지’란 말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그런 일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동지(同知)는 조선 시대 종2품의 관직인 동지사(同知事)의 줄임말이다.
삼군부, 돈녕부, 의금부, 경연, 춘추관, 중추부 등에 각각 약간 명을 두었는데, 직함을 표시할 때는 소속된 관청 이름 앞에 ‘동지’를 붙이고, 관청 이름 끝에 ‘사(事)’를 썼다.
예를 들면, 동지중추부사, 동지삼군부사 따위이다.
동지의 본딧말인 동지사 또한 준말이며 조선의 세조 1466년 이전에는 동지원사(同知院事)였다.
여기서의 院(원)은 관공서를 뜻하며 事(사)는 관직을 의미한다. 즉, 동지원사는 동지원의 관직이란 말이다. 동지원사에서의 同知(동지)는 ‘함께 동, 알 지’자로 ‘함께 안다’는 말이다.
관직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정(正)과 부(副) 둘을 임명한다.
정에 사고가 생겨 일이 스톱되면 안 되니까 정을 보좌하는 부를 임명함으로써 평소 일을 함께 알도록 하는데, 동지는 부직(副職)으로서 송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비료와 냉장고 등의 개발로 먹을거리의 혁명이 일어난 현대에 비해 옛날은 식량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곡식은 매우 중요했고 조정에서는 곡식으로 급여를 주기도 하였는데 곡식을 바치고 벼슬아치가 된 이들이 있었다. 곡식과 벼슬을 거래한 것이다.
사람들은 보리를 바치고 벼슬을 얻은 이를 보고 놀림조로 ‘보리동지’라 일렀다.
콩을 바치고 벼슬을 산 사람은 ‘콩동지’라 불렀다.
한자로 ‘조’는 粟(속)이라 하는데, 조를 바치고 벼슬을 얻은 이에 대해선 ‘納(바칠 납)’자를 맨 앞에 붙여 ‘납속동지(納粟同知)’라 조롱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돈은 있었다. 그러니까 곡식이 아니라 돈을 바치고 벼슬을 얻은 이도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멍첨지’라 놀려댔다.
본래 ‘멍첨지’는 멍가 성을 가진 첨지라는 뜻으로, 멍멍멍 짖는 ‘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었는데, 관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행태를 보면서 백성들이 이를 비꼬는 말로 개에 비유하여 ‘멍첨지’라 한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최첨단 모바일 선거운동의 모바일 동지는 가하되 금품 선거로써 현대판 보리동지나 멍첨지들이 출현하지 않기를 바란다.
/ 주간한국
明.張以寧.《爛柯山圖》
청말근대 화가 원배기(袁培基)의 <난가선혁도(爛柯仙奕圖)> (1895年作)
근현대 중국화가 부유(溥儒)의 <유음공혁도(柳蔭共奕圖)>
현대 중국화가 진동양(陳東陽)의 <관기도(觀棋圖)> (2004年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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