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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그림 사색] 야심성유휘 .책상. 의자. 석과불식.

경호... 2015. 7. 13. 03:40

[신영복의 그림 사색] 야심성유휘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

 

“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난다.”

이 말은 밤하늘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어둔 밤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난다는 사실은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위로입니다.

 

몸이 차가울수록 정신은 더욱 맑아지고
길이 험할수록 함께 걸어갈 길벗을 더욱 그리워합니다.


맑은 정신과 따뜻한 우정이야말로
숱한 고뇌와 끝없는 방황에도 불구하고
그 먼 길을 함께하는
따뜻한 위로이고
격려이기 때문입니다.

 

2012.05.18

 

 

 

 

 

책상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마지막 부분에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학교를 떠나는 존 키팅 선생과 책상 위에 올라서서 선생을 배웅하는 학생들의 모습입니다.

공부란 무엇인가? 공부란 책상 앞에 앉아서 텍스트를 읽고 밑줄을 그어 암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상 위에 올라서서 더 멀리, 더 넓게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공부입니다. 책상은 그것을 위한 디딤돌일 뿐입니다.

모든 시대의 책상은 당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장치입니다. 책상 위에 올라서는 것은 ‘독립’입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변화와 저항입니다. 그리고 “저항이야말로 창조이며, 창조야말로 저항입니다.”

2012.03.09

 

 

 

 

 

의자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떠올랐던 기억 속의 그림입니다. 그러나 교실 복도에서 이러한 벌을 받던 기억을 가진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입니다. 머리 위로 의자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은 참으로 역설적인 그림입니다.

어릴 때는 의자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을 궁리하기에 급급하였지만 그러나 지금은 ‘머리 위의 의자’야말로 우리들의 초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의자를 만든 까닭은 그 위에 편히 앉기 위함입니다. 그러한 의자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있다는 것은 사람과 의자의 처지가 뒤바뀐 거대한 역설입니다. 거꾸로 된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만든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있으며, 자기가 선임한 권력으로부터 억압당하고 있으며, 그리고 채워도 채워도 가시지 않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갈증에 목말라하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위상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2012.02.10

 

 

 

 

 

정본

 

 

 

 

논어 안연편(顔淵篇)에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政者正也)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무엇을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인가. 뿌리(本)를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뿌리란 무엇인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뿌리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을 거름으로 삼아 다른 것을 키우고 있는 형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정치가 해야 할 일의 전부입니다. 엽락(葉落) 체로(體露)에 이어 뿌리를 바르게 하는 정본(正本)과 뿌리를 거름하는 분본(糞本)이 곧 정치의 근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은 다른 어떠한 가치의 하위(下位)에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애정과 신뢰 그리고 저마다의 역량을 키우는 것은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정치(政治)란 그 아름다움을 완성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2012.02.17

 

 

 

 

 

 

 

 

석과불식

 

 

 

 

주역(周易) 산지박(山地剝)괘의 그림입니다. 절망과 역경(逆境)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나뭇잎 모두 떨어지고 나목의 가지 끝, 삭풍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과실을 씨과실이라 합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이란 이 씨과실(碩果)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먹지 않고 땅에 심어서 새봄의 싹으로 돋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해야 할 우리의 몫이며,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석과를 새싹으로, 다시 나무로 키우고, 숲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장구한 세월, 수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먼 여정은 무엇보다 먼저 엽락(葉落)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잎을 떨어뜨려야 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환상을 청산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체로(體露)입니다. 잎을 떨어뜨리면 뼈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이 뼈대를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는 뼈대를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본(糞本)입니다. 뿌리를 거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뿌리가 곧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역경을 극복하는 길이라는 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실패하고 있지 않은지 새해의 시작과 함께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성공회대 석좌교수

 

2012.01.27

 

 

/ 한겨레 훅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