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상시

-사는 이유 / 최영미 -

경호... 2015. 7. 13. 02:56

사는 이유 / 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 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시 > 영상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따뜻한 얼음 / 박남준  (0) 2015.07.13
자경(慈經)  (0) 2015.07.13
쓸쓸한 건배 / 복효근  (0) 2015.07.13
낡은 집. 북쪽 / 이용악  (0) 2015.07.13
悲歌 28번 / 김춘수  (0) 2015.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