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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의 발전과 특징분석 -4층 지반정침과 6층 인반중침, 8층 천반봉침을 중심으로-

경호... 2015. 7. 9. 05:21

한국민족문화 48, 2013. 8,

 

나경의 발전과 특징분석*

-4층 지반정침과 6층 인반중침, 8층 천반봉침을 중심으로-

 

 

박 정 해**

 

 

1. 서론
2. 중국 나경의 발전과 특징
3. 한국 윤도 및 나경의 역사
4. 나경의 특징분석
5. 결론

 

<국문초록>

 

본 연구에서는 나경의 발전과 함께 4층 지반정침과 6층 인반중침 그리고 8층 천반봉침의 모습과 활용에 나타난 특징적인 모습을 문헌고찰을 통해 살펴본다.

 

나경은 역사적으로 많은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논리성과 합리성의 발전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할 것이나, 시대적 요구와 상황인식, 논리의 변화에 기인한 바도 크다고 할 것이다. 특히 나경의 가장 큰 특징이 반영된 정침과 중침 그리고 봉침의 차이가 발생한 배경에는 지구 자기장의 축이 지구 자전축에서 약 11.3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정침과 봉침의 원리와 측정기준을 정확히 제시하였는데 해 그림자를 통해 동지 무렵에 자오선을 춘분과 추분에 동서방향을 측정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중침은 정침과 봉침의 중간을 정하였다는 것도 아울러 확인되면서 정침과 중침 봉침이 어떻게 정해졌는지에 대한 중요한 근거를 밝혀냈다.

 

* 주요어: 나경, 윤도, 정침, 중침, 봉침

 

* 본 논문은 한양대 풍수대토론회에서 발표한 것을 수정·보완하였음을 밝혀둔다.
**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강사, 건축학 박사

 

 

 

1. 서론

 

나경은 풍수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包羅萬象 經綸天地’에서 유래한 말이다. 즉, 우주의 삼라만상을 포함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나경을 허리에 차고 다닌다 해서 패철이라는 말도 같이 쓴다.1)

 

이기론과 함께 중요하게 활용되는 것이 나경패철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적게는 수십개에서 수백개에 이르는 각 풍수단체들이 있고 각자가 나름의 영역에서 풍수를 연구하고 실천하고 있다. 또한 각 단체의 특징을 반영한 나경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 활용성을 최대로 높이기 위한 노력들이 진행중이다. 뿐만 아니라 이를 판매하는 쇼핑몰이 등장하여 여러 나경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판매하고 있다. 물론 중국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나경도 수입되어 그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으나, 단지 제품을 구입하여 진열하고 판매하다보니 정확한 사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특이한 형상과 크기만을 추구하는 경향도 일부 보이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나경은 일반적으로 5층이었으나 현재는 9층 나경이 많이 사용 중이다. 이를 경쟁적으로 층수를 늘려 이제는 36층 54충 나경이 나오고 있으나 그 활용성은 담보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나경의 층수를 경쟁적으로 늘려가는 것에 비례해서 그의 대한 논리적 근거와 이론적 배경의 연구도 진행되어야 하며 좀 더 발전적인 논리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단지 충수만을 늘려가는 현재의 나경의 제작에는 문제는 없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문제제기만이 능사는 아니겠으나 제품의 발전에 버금가는 논리적 발전도 아울러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히 풍수인들이 풀어가야만 하는 숙제이다.

 

그러나 이기론의 운용에 있어서 절대적인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나경패철에 관한 자료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언제부터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역사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자료부족은 연구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이론적 배경과 논리의 구성을 설명한 풍수서는 거의 없고 단지 사용법만을 묘사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래도 중국의 경우에는 청대에 출간된 ?羅經透解?를 통해 그 일단을 드러내고 있으나 우린 그마저도 없다. 그렇다고 풍수의 역사를 연구하지 않을 수는 없다. 여기에는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의 일상 속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풍수와 관련한 기록이 부족하고 우리만의 풍수서가 전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부인키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거의가 중국의 풍수서에 의존하는 수준이고 단지 전설적인 비결서만이 남아있어 학술적 가치를 가지는 풍수서는 찾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나경에 대한 연구는 매우 소략한 실정이다.2)

 

1) 정경연, ?정통풍수지리?, 평단, 1998, 127쪽.

2) 이상호, 구층 나경연구 , 원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그림 1> 나경의 구조

 

 

이상호는 구층 나경연구 를 통해 중국과 한국 나경의 역사를 살펴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조인철은 조선후기에 제작된 輪圖에 관한 연구 : 규장각 소장 윤도의 구성방식과 논리체계를 중심으로 3)를 통해 24층 윤도의
구성 원리를 밝혀보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중국 나경의 발전과정과 우리나라 나경의 역사를 문헌고찰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나경의 가장 큰 특징을 가진 4층 지반정침과 6층 인반중침 그리고 8층 천반봉침의 차이점이 갖는 의미와 특징적인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3) 조인철, 조선후기에 제작된 輪圖에 관한 연구: 규장각 소장 윤도의 구성방식과 논리체계를 중심으로 , 한국문화 55,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1, 159~195쪽.

 

 

2. 중국 나경의 발전과 특징

 

『羅經透解』 羅經序에는 “나경은 軒帝가 創始하였고 周公이 그 법을 지켰다.”4)고 하여 나경의 역사를 전설속의 인물인 軒轅皇帝와 연결시키고 있다. 즉, 軒轅皇帝와 蚩尤天王의 전쟁을 통해 指南車가 처음 등장했다고하는 전설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그러면서 “指南針 방위를 나누어 정함에는 先天에는 다만 十二支神만 있었다.

漢의 張良이 八干四維를 배열하니 地盤이 되었다. 楊賴二公은 또 兩層을 나누어 더하니 天盤이라 하여 三才를 이루었다.

그 중에는 별자리 전체도수를 갖추어 자세하게 나열하고 河洛오행의 깊은 顯藏을 붙였으며 복희와 문왕 괘의 기이하고 정밀한 體用변화의 무궁함을 꿰뚫어 통달하였다.

萬象을 망라하여 포괄하고 天地에 순서를 세워 바르게 다스리니 위로는 天運과 星度輪回를 연구하고 아래로는 山川 방위의 吉凶을 분별할 수 있으며 가운데로는 인간의 陰陽兩宅을 정할 수 있으니 萬事에 利用되는 지극한 보배”5)라고 하였다.

이는 나경의 발전과정과 활용성 그리고 당시의 나경에 대한 인식까지를 아우르고 있다.
중국의 나경은 역사적으로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게 되는데, 시대별 특징을 살펴보면 <표 1>과 같다.

 

4) [淸]王道亨, ?羅經透解?, 羅經序中國: 文聯出版社, 2008, 1쪽. “軒帝創其始 周公遵其法.”
5) [淸]王道亨, 앞의 책, 羅經序, 1쪽.

“指南針方位分定 然天只有十二之神

漢張良配至八干四維 羅列于內 名爲地盤  楊賴二公又加中  外兩層 號曰天盤 合成三才.

其中全度星宿備載羅列 衍寓河 洛五行之奧 顯藏羲 文以卦之奇 體精用宏 變化無窮

洞哉包羅萬象 經緯天地. 上可以格天運星度輪回 下可以辨山川方位吉凶 中可以定人間陰陽兩宅 而萬事利用之至寶也.”

 

 

<표 1> 중국 나경의 시대적 변화비교

 

    時代     나경의 명칭          비고
  최초의 나반    司南    술사들이 풍수나 점을 치기위한 용도로 활용    
  漢代    ?盤   一種의 占卜盤으로 六壬과 奇門遁甲術의 六壬盤과 太乙九宮占盤으로 다양하게 사용     
  東漢, 六朝    24방위의 六壬盤        
  魏· 晋南北朝    24방위의 六壬盤    상용화    
  唐    天文??   양균송에 의해 내용과 층수의 증가와 발전 이룸      
  宋·元代    指南魚

  磁北과 眞北의 차이 인식, 본격적으로 나침반을 상용하는

  시기      

  明·淸代  三合盤, 三元盤, 綜合盤     「羅經頂門針」「欽定協紀辨方」「欽定羅經透解」「欽定羅經解定」이 출판되고 지금과 같은 모습의 나경 출현       

 

 

 

<그림 2> 司南

 

 

<그림 3> ?盤

 

 

고대에는 간단한 나경이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다. 『韓非子』有度篇에 “선왕은 조석으로 司南을 바르게 세웠다”6)고 하여 사남을 소중히 다룬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데, 『論衡』是應篇에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중국에서 최초로 나침반을 사용한 시기는 기원전 4세기로 추정된다. 당시 저술된 『鬼谷子』를 보면 길을 잃지 않기 위해 ‘司南’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많은 학자가 이것을 최초의 나침반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중국 최초의 指南鐵 모형은 司南이다. 사남은 천연자석을 돌로 갈아서 만들었는데 그 모양은 아래는 원형이고 그 위는 평평하고 미끄럽도록 만들어 숫가락 모양의 지반이 자유롭게 회전토록 하였다. 정지한 후에 자동으로 남쪽을 가리키도록 하였다.7)

즉, 사남은 일종의 쟁반인 ‘반’과 자석으로 된 국자 모양의 ‘지남기’로 이루어져 있다. 반위에 지남기를 올려놓고 돌리면 손잡이 부분이 남쪽을 가리킨다. 하지만 당시 나침반은 방향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술사들이 풍수나 점을 치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漢代의 ?盤은 一種의 占卜盤으로 六壬과 奇門遁甲術의 六壬盤과 太乙九宮占盤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하반은 방형인데 땅을 상징하여 地盤이라 부른다. 상반은 원형으로 하늘을 상징하여 天盤이라 부른다.

 

일찍이 중국의 나반은 方形이었으나 차츰 여러 요소들이 배치되면서 차츰 원형으로 발전하였다.

나반의 기본적인 방위는 24방위를 표시하여 원둘레는 360도이고 각15도는 한 개의 방위를 구성한다.

24방위는 후천팔괘의 4개 維卦8)와 8개 天干9), 12地支10)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방위의 파악과 구성에는 천문성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東漢시기와 六朝시기에는 24방위의 六壬盤이 실제로 출토되고 있는데, 魏晋南北朝 시기를 거치면서 상용되었다. 唐代에 이르러 나경의 내용과 층수가 증가하게 되는데, 楊筠松의 『靑囊奧語』와 『天玉經』그리고 복응천의 『雪心賦』는 모두 羅經의 용어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특히 先天盤에 後天을 더해 八干四維가 보충되는 등 훨씬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6) 『韓非子』, 有度篇. “先王立司南以端朝夕.”

7) 高友謙, ?中國風水文化?, 北京: 團結出版社, 2006, 179쪽.

8) 乾·坤·巽·艮
9) 甲·乙·丙·丁·庚·辛·壬·癸
10)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그림 4> 指南魚

 

 

<그림 5> 지남어(출처 : 바이두 백과)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방향을 찾기 위해 나침반을 사용한 시기는 11세기초 송나라 시대로 추정된다. 당시에 쓰인 『武經總要』11) 에는 나침반을 만드는 방법과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되었다는 것도 기록하고 있다. 또한, 沈括( 1031~1095)의 『夢溪筆談』에는 나침반이 가르치는 남쪽이 실제와 차이가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12) 이것은 획기적인 발견으로 眞北과 磁北의 차이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기록으로 남긴 최초의 저작물이라 할 수 있다.

 

항해에 사용할 수 있도록 방위가 표시된 나침반은 12세기 초에 와서야 모습을 드러내는데, 24방위(북쪽이 자 방향, 남쪽이 오 방향)가 표시된 나침반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이러한 24방위는『宅經』에도 보이는 데, 방위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파악하였다. 나경의 24방위는 乾·坤·
艮·巽 4維와 甲·乙·丙·丁·庚·辛·壬·癸의 8 천간 그리고 子·丑· 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12지지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戊己는 오행으로 土로 분류하며 중앙에 위치함으로써 방향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天干字임에도 불구하고 나경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戊己가 秦代에는 중앙에 표시되었으며, 한대 초기에는 戊를 남서와 북동방위에 己는 동남과 서북 방위에 배속한다. 또 다른 한대에 제작된 식반에서 戊己가 빠지고 없는 경우가 등장한다.13)

이는 시대변화에 따라 보다 논리적 틀 속에서 방위관이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11) 중국 송나라의 人宗이 1040년에 曾公亮 등에게 명하여 만들게 한 兵書. 北宋의 曾公亮과 丁度 등이 찬술하여 1044년에 완성한 군사상의 技術書籍으로, 1230년에 간행하였다. 모두 40권이다.
12) 『夢溪筆談』 卷24, 雜誌?. “方家以磁石磨針鋒 則能指南 然常微偏東 不全南也.”

13) 김혜정, 양택 풍수지리의 방위관: 「택경(宅經)」을 중심으로 , 「건축역사연구」 18-2(통권63호), 2009, 69~70쪽 참조.

 

 

宋代에 이르러 경제가 번영하고 해상문명이 크게 발전하면서 磁針羅盤은 비교적 크게 발전하였다는 것을 沈括의 『夢溪筆談』에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이때 만들어진 지남어는 길이 6.6cm, 너비 1.6cm 크기의 물고기 모양으로 강편의 중심부분에는 홈이 패어있어 물을 채운 그릇에 뜨게 되어 있다. 때문에 사남보다는 훨씬 마찰력이 낮았다. 지남어는 천연자석이 아닌 인공자성의 강편으로 만들었다.

송대에는 강편이나 철침을 천연자석과 마찰시켜 자성을 얻는 자화법이 사용되었으나 지남어의 자화법은 이와는 달랐다. 이러한 자화법은 여러 번의 실험을 거쳐 얻어진 것으로 오랜 자성을 유지할 수 있어 천연강편보다 기능면에서 훨씬 우수하였다.

 

 

<그림 6> 삼합반

 

 

<그림 7> 삼원반

 

 

<그림 8> 종합반

 

 

明·淸代에 이르자 나반은 새로운 층을 추가하게 되었고,『羅經頂門針』『欽定協紀辨方』등이 저술되었다. 『欽定羅經透解』『欽定羅經解定』등은 나경에 표시된 각 층의 용도와 활용성에 대한 설명에 대한 해설서이다. 이와 같이 나경은 훨씬 더 세분화되고 발전을 거듭하면서 지금과 같은 복잡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또한 三合盤14)과 三元盤15) 그리고 綜合盤16)이 나타나게 된다.17) 물론 나경에 대한 이론과 논리가 정립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14) 명·청 이후에 전해진 삼합반은 徽州 지역에서 가장 유행하였다. 그래서 徽盤 혹은 楊公盤이라고도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나라 때 양균송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나반은 3층 24방위로 구성되어 있는데, 즉 地盤正針과 人盤中針과 天盤縫針으로 구성되어있다. 다시 말해서 三盤三針이 서로 합쳐진 구성이다.
15) 三元盤은 卦盤 혹은 易盤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나경도 역시 양균송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명대에 이르러 蔣大鴻이 이를 가감하여 다시 새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蔣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주요 특징은 역괘 즉 64괘를 배치하고 정침의 24방위를 음양으로 구분하였다. 이는 삼합반과 다른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삼음과 삼양 사이에 天地人 三元을 배치하였다.
16) 종합반은 삼합반과 삼원반을 합쳐놓은 것으로 삼합반의 지반정침과 인반중침 그리고 천반봉침을 배치하고 삼원반의 역괘 즉 64괘를 아울러 함께 배치하였다.
17) 程建軍, 『中國風水羅盤』, 中國: 江西科學出版社, 2005, 1~11쪽.

 

 

3. 한국 윤도 및 나경의 역사

 

앞에서 살펴본 중국나경의 발전기록에 비해 우리나라의 나경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나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일부 기록물이 조선시대에 나타난다. 물론 이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 指南浮針이라는 단어가 徐兢(?-?)의 『宣和奉使高麗圖經』海道에 등장한다.

이 지남부침은 나침반의 일종으로 남북의 구분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다를 항해하면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날 밤에는 큰 바다 가운데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어서 다만 별을 살피면서 앞으로 가다가, 캄캄해지게 되면 指南浮針을 써서 남북을 헤아렸다.”18)고 하는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해상활동의 증가로 인한 발전과 괘를 같이 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나침반의 발전을 입증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그 후 나경에 대한 기록은 『宣祖實錄』19)을 비록해서 『正祖實錄』20)그리고 『承政院日記』21) 『湛軒書』『星湖僿說』『燕轅直指』『靑莊館全書』『弘齋全書』등에 나타난다.

특히 『宣祖實錄』에 따르면 선조 때까지만해도 나경이 우리나라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 33년에 “문통이 羅經이란 것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輪圖처럼 생겼으며, 단지 더 자세하여 내면과 외면에는 각양의 양식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말이 이것은 당나라 때부터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2)라는 말이 이를 입증한다.

그 후 이문통에게 나경을 똑 같이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얘기가 『宣祖實錄』에 나타난다. “우리나라는 지리에 대한 서적이 드무니 비결을 보여주어 그것을 베끼는 것을 허락해 주었으면 한다.’고 하고, 또 羅經을 똑같이 만들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23)라고 선조에게 윤근수는 보고한다.

따라서 이때까지는 중국의 경우와 같은 나경은 우리에게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런 역할을 하던 윤도가 있었다는 것은 확인된다.

 

18) 『宣和奉使高麗圖經』 卷34, 海道, 半洋焦: “是夜 洋中不可住 惟視星斗前邁 若晦冥 則用指南浮針 以揆南北.”
19) 『宣祖實錄』卷129, 33년 9월 21일(신유), 『宣祖實錄』卷129, 33년 9월 23일(계해), 『宣祖實錄』卷129, 33년 9월 30일(경오).

20) 『正祖實錄』 卷28, 13년 9월 8일(신묘), 『正祖實錄』卷33, 15년 12월 18일(무오).
21) 『承政院日記』고종 38년 3월 10일(병자).
22) 『宣祖實錄』 卷129, 33년 9월 21일(신유).

23) 『宣祖實錄』 卷129, 33년 9월 23일(계해).

 

 

이러한 윤도는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문헌상에 등장하는데,『戊午燕行錄』24)을 비롯해 『山林經濟』?25) 『星湖僿說』26) 『心田稿』27) 『燕行日記』28)『增正交隣志』29) 『海?日記』30) 『弘齋全書』?31) 『承政院日記』32)『宣祖實錄』33)『肅宗實錄』34) 『英祖實錄』35) 『正祖實錄』36)등이 있다. 그중에 『英祖實錄』에 따르면 영조 18년에 청의 오층 윤도를 모방하였다37)는 기록이 보인다. ?

 

그러나 이미 삼국시대에 윤도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윤도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천문학이 발달했었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를 보아도 당시에 음양오행사상이 널리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역법과 『周易』이 수입되어 신라에서는 박사와 조교를 두고 『周易』을 가르쳤다.

이렇게 주역과 천문학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시기에 이미 윤도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38) 고려시대에도 천문학과 주역의 연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주역과 천문학의 발전은 이루어졌다. 특히 풍수음양학은 천문학을 관장하는 서운관에 배속되었으며, 풍수에 밝은 오윤부 같은 사람은 벼슬을 하고 임금을 가까이 모시기도 한다. 이렇듯 윤도를 구성하는 천문학의 발달과 윤도의 기본이 되는 주역의 발달은 고려시대에도 윤도가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음양풍수학을 十學중의 하나로 삼아 과거를 통해 관리를 선발했고 풍수가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윤도의 사용도 늘어났다.39) 그래서 輪圖는 풍수가뿐만 아니라 선비들도 가지고 다녔다. 선비들의 독특한 휴대품이었던 윤도는 대개 소형으로 패철이라 불렀으며, 이것을 부채에 매단 것을 扇錘라고 하였다.40)

 

24) 『戊午燕行錄』卷4, 기미년(1799, 정조 23) 1월 9~25일.
25) 『山林經濟』 卷1, 卜居門路.
26) 『星湖僿說』 卷5, 萬物門乾靈龜.
27) 『心田稿』 卷2, 留館雜錄太學?雍記.
28) 『燕行日記』 卷2, 임진년(1712, 숙종 38) 12월 1일(경술).
29) 『增正交隣志』 卷5, 志私禮單.
30) 『海?日記』 2, 계미년 11월 9일(임술).
31) 『弘齋全書』 卷5, 雜著4.
32) 『承政院日記』, 인조 10년 6월 6일(임신), 인조 10년 6월 7일(계유), 고종 1년 1월 24일(병인).
33) 『宣祖實錄』, 卷129, 선조 33년 9월 21일(신유).
34) 『肅宗實錄』, 卷51, 숙종 38년 5월 15일(정유).

35) 『英祖實錄』, 卷56, 영조 18년 11월 20일(을해).
36) 『正祖實錄』, 卷30, 정조 14년 7월 11일(기축).
37) 『英祖實錄』, 卷56, 18년 11월 20일(을해).
38) 국립문화재연구소,『輪圖匠』,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3~4쪽.
39) 고재희, 『정통풍수지리교과서』 3, 문예마당, 2009, 10~11쪽.
40) 한국박물관연구회,『한국의 박물관』, 문예마당, 2000, 180쪽.

 

 

그렇다면 윤도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존재했는지 살펴볼 필요성이 대두된다. 윤도에 대한 기록은 『宣祖實』에 나경과 같이 등장한다. 그전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윤도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활용하고 있었던 것은 입증되었으나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활용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최근 조인철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 후기의 조선의 윤도는 24층을 하고 있었으며, 판본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상태이다. 또한 조선 후기에도 윤도가 다량 배포되고 있는 것41)으로 볼 때 적극 활용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星湖僿說』萬物門에는 윤도의 형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형상을 제시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41) 조인철, 앞의 논문, 161쪽.

 

"지금 指南針은, 木套 속에 뾰족한 기둥을 세우고 또 바늘허리에 오목한 구멍을 뚫어서 기둥 끝에다 걸어 놓은 다음, 유리로 막아서 기우러지고 빠지지 않도록 하며, 우리 옆으로는 干支와 四隅에는 또 卦名을 새긴다. 더러는 그 우리를 象牙로 만들기도 하는데, 그 제도가 지극히 교묘한 바, 예전에는 일찍이 이런 것이 있지 않았다.

沈括은, “磁石으로 바늘을 갈면 남쪽을 잘 가리킨다. 그러나 늘 조금씩 동쪽으로 치우치게 되고 완전히 남쪽만 가리키지는 않는다. 물에 떠다닐 때는 이리저리 흔들림이 많으므로, 매우 가는 고치 실을 골라서 芥子만큼의 밀[蠟]을 이용, 바늘 허리에 붙인 다음, 바람이 없는 곳에 달아 두면 그 속에서 저절로 갈려서 북쪽을 가리킨다.” 하였으니, 대개 그때는 輪圖가 없었던 것이다.

이른바, ‘조금 동쪽으로 치우친다.’는 것은 즉 術家에서 쓰는 正針인 것이다.
추측컨대, 그때는 하늘 度數의 子午를 표준함에 있어서, 縫針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지금 풍속에 南針을 표준하는 것과 같지 않았던 듯하다. 봉침과 정침 두 바늘은, 24위(位) 중에서 半方位쯤은 서로 차이가 있다.

堪輿家의 술법이 크게 행해진 지가 이미 오랜데, 봉침과 정침을 서로 비교하면, 길흉이 서로 바꿔지게 되니, 이는 과연 무슨 까닭인가?

물에 떠다니는 방법을, 지금 사람은 水靈龜라고 하는 까닭에 목투를 乾靈龜라고 일컬으며, 또 지금 사람은 지남침과 자석을 주머니에 넣어서 갈무리했다가 오랜 후에 내어 쓰는 바, 그 指南이란 것이 문득 指北으로 되어서 방향을 분별할 수 없고, 단지 바늘 끝을 갈아서 써야만 남북의 구별이 있게된다.

추측컨대, 바늘 끝에 남북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자석이 남쪽에서 생산되기도 하고 북쪽에서 생산되기도 하기 때문에, 남쪽 기(氣)를 받은 것은 남쪽을 가리키고 북쪽 기를 받은 것은 북쪽을 가리키는 듯하다." 42)

 

42) 『星湖僿說』, 萬物門, 乾靈龜.

“今之指南針 木套中立尖柱 又針腰作凹 掛在柱尖琉璃隔之 使不傾? 套傍刻干支及四隅掛名 或奪用象牙 其製極巧妙 古未始有也.

沈括云 以磁石磨針縫 則能指南 然常微偏東 不全南 水浮多搖蕩 取新?中獨繭 以芥子許蠟 綴針腰 無風處懸之 其中有磨而指北者 盖其時未有輪圖也.

所謂微東 則術家正針時也

意者此時 主天上子午以縫針 爲斷不如今俗主南針也 縫正二針 於二十位中差半位

堪輿家術大行 己以較之二針 吉凶互易此果何故乎

浮水之法 今人謂之水靈龜 故木奪者稱乾靈龜 今人以針和磁石 藏之經以後用之其 指南便時指北 未有其別若 但磨其縫 則有南北之異

意者針縫末定南北而石之生 有南北若襲其 氣南者南指襲 其北氣者北指耳.”

 

 

<그림 9> 輪圖 (출처 : 테마박물관)

 

 

『星湖僿說』萬物門을 통해 당시의 윤도와 현재의 윤도가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실학자인 성호 이익이 술법가들의 용어인 정침(지반)과 봉침(천반)의 차이까지를 이미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즉 정침과 봉침은 7.5도의 차이가 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또한 정침과 봉침의 사용법이 다른 것의 원인까지도 제시하고 있는데 굉장히 중요한 단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석 끝이 남북이 정해진 것이 아니고 남쪽 기를 받으면 남쪽을 가리키고 북쪽 기를 받으면 북쪽을 가르킨다’는 내용도 남극과 북극의 관점에서 논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상당히 앞선 논리로 현재 우리가 인식한 것과 별반 차이를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나경과 윤도가 구조나 사용법에서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필요에 따라 8위,16위, 24위, 32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확인시켜주는 기록이 『湛軒書』에 나타난다.

“8위로 나뉜 것도 있고, 16위로 나뉜 것도 있으며 24위로 나뉜 것도 있고 32위로 나뉜 것도 있습니다. 32위는 주로 항해하는 船舶에만 사용됩니다.”43)라고 하여 다양한 방위가 표시된 나경이 있었고 용도도 달랐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43) 『湛軒書外集』卷7, 燕記, 劉鮑問答. “有分八位者 有分十六位者 有分二十四位者 有分三十二位者。三十二位 只可用於海舶.”

 

 

4. 나경의 특징분석

 

나경의 다른 이름으로는 나반, 경반, 나침반, 자오반, 침반, 풍수나반,패철, 윤도, 침석 등이 있다.44) 나경은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하게 되는데 이때 다양한 의미와 특징을 반영하게 된다. 나경에 반영된 특징에는 무엇
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 의미와 배경을 살펴보는 과정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나경에 반영된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4) 조인철, 「풍수 향법의 논리체계와 의미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16쪽.

 

첫째, 나경의 자오선은 어떻게 찾았을까?
둘째, 나경의 정침과 중침 그리고 봉침의 7.5도 차이와 용도구분은 어떤 원리가 반영되었을까?
셋째, 나경의 층수배치는 어떤 인식을 바탕으로 하였는가?
넷째, 활용성의 측면에서 문화재의 좌향이 기록과 다른 문제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림 10> 子午線의 測定(冬至), 필자작도

 

 

<그림 11> 卯酉線의 測定(春·秋分)필자작도

 

 

 

<그림 12> 토규를 이용한 해 그림자의 측정 (출처 : wangchao.net.cn, 2013, 3, 21)

 

 

먼저 나경의 활용성은 남북과 동서의 방향을 측정하는 중요한 기능을 가지는데, 그렇다면 나경을 최초로 제작할 당시에 어떻게 남북과 동서의 방향을 정확하게 측정해서 나경에 반영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방향을 측정하였다고 해도 나경의 자침을 남북으로 고정시키는 일련의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단초를 『五洲衍文長箋散稿』人事篇에서 제시하였다.

 

나경의 “정확한 침의 기준을 잡고자 한다면 冬至前後 北極의 正南北 子午線의 본래 위치를 측정하며, 춘분과 추분일에 말뚝의 그림자로 동서 즉 卯酉의 방향을 측정할 수 있다”45)고 하였다.

즉, 南北과 東西의 방향을 정하는데 <그림 10> <그림 11> <그림 12>와 같이 해의 그림자를 통해서 측정하였으며, 춘분과 추분 그리고 동지에 측정하였다. 이는 낮과 밤의 길이의 차이와 해의 높낮이와 방향성을 고려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측정법이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정침과 봉침을 같은 방법으로 측정하였으며,46) 이를 바탕으로 중간을 중침으로 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정침과 봉침 그리고 중침의 기준점을 무엇으로 어떻게 정하였는지 알지 못하던 것에 대하여 뚜렷한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45)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磁石指南北辨證說.

“欲明針之準 則冬至前後 測北極以正南北之子午本位 春秋分日 測?影以準東西之卯酉正方可也.”
46) 위의 책, 人事篇, 磁石指南北辨證說. “針之縫、正二者 皆似有據 斷之以天上日影 則縫針似近正針者.”

 

 

한편, 정침과 봉침, 중침은 해 그림자를 이용하여 측정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는데, 문헌자료에 따라 다른 각도에서 논리적 배경을 설명한다.

먼저 『羅經透解』에서는 “中針 二十四山은 人盤이다. 地盤과 비교하면 조금 차이가 있어 天道는 健하고 地道는 順하여 人道는 平한 이치가 된다. 먼저 天地가 있은 후에 人이 있다. 그러므로 人盤은 天地盤의 가운데에 있다”47)고 하였다.

이는 천지인 삼합사상을 바탕으로 지반(정침)과 천반(봉침) 그리고 인반(중침)의 차이를 논한 것으로, 특히 4층 지반정침은 天元宮과 地元宮 人元宮으로 분류하여,48) 각각의 의미를 바탕으로 天地人 삼합사상을 실현하였다.

반면에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에는 “後天數의 이치에 따라 地支字로 시작해서 地支字로 끝나 左旋하는 침을 正針이라 하고, 先天數의 원리를 바탕으로 天干字로 시작해서 天干字로 끝나 右旋하는 침을 縫針이라 한다.

中針은 子午針이 正午를 가르치는 것이 없다. 즉 가운데가 ?여 정침과 봉침의 사이에 있다”49)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정침은 후천수의 원리를 바탕으로 지지자를 기준으로 좌선하며, 봉침은 선천수의 원리를 바탕으로 천간자를 기준으로 우선한다. 중침은 정침과 봉침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특징적인 모습을 바탕으로 정침과 봉침 그리고 중침의 논리구성의 차이점을 비교해 보면,『羅經透解』는 천지인 삼합의 논리에서 『五洲衍文長箋散稿』는 후천수와 선천수의 차이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중침은 정침과 봉침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으로 귀결시킨 점은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47) [淸]王道亨, 앞의 책, 第十二層: 中針人盤, 56쪽.

中針二十四山 卽人盤也. 較之地盤 少有參差 爲天道健 地道順 人道乎之理

先有天 地後有人 故人盤居天 地盤之中.”
48) 高友謙, 『理氣風水』, 北京: 團結出版社, 2006, 253쪽 참조.

“天元宮은 父母宮이라고도 부르며, 乾·坤·艮·巽을 포함한 4개의 陽山과 4개의 陰山인 子·午·卯·酉를 말한다. 地元宮은 甲·庚·丙·壬을 포함한 4개의 陽山과 辰·戌·丑·未 포4개의 陰山을 말한다. 人元宮은 子女宮이라고도 부르며 寅·申·巳·亥를 포함한 4개의 陽山과 乙·辛·丁·癸 4개의 陰山을 말한다.”
49)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磁石指南北辨證說.

“正針者 稟後天順數之理 而始於地支 止於地支 左旋針也 卽正針也

得先天逆數之理 而始於天干 止於天干 右旋針也 卽縫針也.

中針者 指子午而針無指正午 則只有折中於正, 縫兩針之間者也.”

 

 

둘째, 현재 사용하는 나경은 <그림 13>과 같이 중침과 봉침은 정침을 중심으로 중침은 7.5도 뒤에 봉침은 7.5도 앞에 위치한다. 이러한 특징적인 모습을 『羅經頂門針』 白話講解에는 영국의 저명 과학사가
Joseph Needham(1900~1995)의 주장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림 13> 중침과 정침, 봉침

 

 

"자편각의 각도는 정침, 봉침, 중침이 향하는 방향이 다른 원인이다.
정침은 8세기 초 가장 정확한 천문상의 남북이다.

봉침은 양균송이 살던 880년 전후에 관찰된 당시의 자편각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정침보다 7.5도 서쪽으로 이동시켜 이에 합당하도록 조정한 것이다.

12세기에 이르러 자편각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뇌문준이 7.5도 동쪽으로 이동시켜 재차 조절한 것이라고 한다. 50)"

 

실제는 지구 자기장의 축이 지구 자전축에서 약 11.3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나침반이 가리키는 磁北이 眞北과 차이가 있다. 자북은 현재 캐나다 북쪽 허드슨만 부근에 있으나 최근에 연 40km의 빠른 속도로 북서쪽
으로 이동하고 있어 50년 후에는 시베리아에 자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나침반을 사용하더라도 매년 위치에 따라 그 편차를 보정해 주어야 정확한 지리상의 북쪽인 진북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관측할 경우 자북은 진북에서 서쪽으로 약 7도 정도 치우쳐 있다.51) 이는 나경에서 정침과 중침 그리고 봉침이 7.5도 차이가 난 이유를 현대과학이 입증한 셈이다.

 

한편, 정침과 중침, 봉침은 각각 용도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정침은 좌향과 입수룡을 측정하고 중침은 사격을 측정하며 봉침은 물의 득수와 파구를 측정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정침은 子午에 正對하며 지반이라 하고,52) 6층 중침은 賴文俊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星宿五行을 통해 사격의 길흉을 판단하는데, 『賴公撥砂訣』을 판단근거로 활용한다.

8층 봉침은 양균송에 의해 정립되었으며 收水作用에 쓰인다. 봉침은 陽動하는 물의 來去와 池湖와 左右旋水의 得과 破를 측정하는데 사용되며 水法에 의한 혈의 길흉 화복을 가늠한다.53)

 

이러한 배경과 이유에는 각각의 자침이 의미하는 특징이 반영된 것으로 정침은 자오선이 지구 자기장의 방향을 취한 것이고, 중침은 북극성의 방위를, 봉침은 해 그림자를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중침이 7.5도 뒤에 오는 것은 땅이 陰靜하기 때문에 산봉우리의 靜寂을 상징한다면, 봉침은 하늘이 陽動하기 때문에 물의 유동성을 상징하고 물을 측정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물론 7.5도 앞에 배치되었다.

이를 음양의 논리로 설명하면 중침은 음에 해당하는 산을 측정하기 때문에 7.5도 뒤에, 봉침은 양에 해당하는 水를 측정하기 때문에 7.5도 앞에 배치하였다는 것이다. 즉, 중침과 봉침이 정침을 기준으로 7.5도 차이가 난 배경에는 산과 물로 대표되는 음과 양의 특성논리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50)『羅經頂門針』, 北京: 大衆文藝出版社, 2010, 3쪽.

51) 나침반의 발견, 네이버캐스트, 

52) [淸]王道亨, 앞의 책, 第十八層: 縫針天盤辨來去之水, 133쪽. “正針者 正對子午 名曰地盤.”

53) 박봉식, ?한국풍수이론의 정립?, 관음출판사, 2002, 217쪽.

 

 

<표 2> 각 나경(윤도)의 구성 비교

 

 

 

<그림 14> 先天八卦圖

 

 

 

 

                         복희팔괘 (선천)                                                    문왕팔괘 (후천)

 

 

셋째, 나경 층수배치의 차이를 살펴보면, <표 2>와 같이 관상감판본은 나경 1층에 太極을 배치하였다면 『羅經透解』는 先天八卦를 배치하였다.
淸代 輪圖는 天池指南針를 배치하였다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주로 사용하는 나경은 八曜黃泉殺을 배치하였다. 여기에는 인식의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관상감판본은 『羅經頂門針』의 “나경 가운데에 天池54)가 없으면 子午를 정하지 못하고 陰陽도 나뉘지 않는다.

天池는 太極”55)이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그림 14>와 같이 태극으로부터 四象을 거쳐 팔괘로 발전하는 과정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반면에 『羅經透解』는 선천팔괘에서 후천팔괘로 변환되는 과정을 體와 用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 것이다.

청대의 윤도는 天池指南針 즉 兩儀로 부터 先天八卦로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면, 현재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나경은 1층에 팔요황천살을 제시한 것은 활용성을 보다 부각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八曜黃泉殺은 龍上八殺 혹은 殺人大黃泉이라 하여『羅經透解』에서 ‘煞曜爲諸惡之首 造葬最忌’ 즉 ‘팔요황천살은 모든 악살 중에서도 으뜸이므로 조장 때 제일 먼저 피해야 한다’는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2층에 八路四路黃泉殺을 배치한 것은 팔로사로황천살에 대한 인식의 반영이다. 왜냐하면『林園經濟志』相宅志에서 “건축물을 지을 때는 절대 황천수를 피해야 한다”56)고 한 당시의 인식을 반영하였다는 논리는 설득력을 얻는다. 따라서 나경은 필요에 따라 혹은 중요성의 인식에 따라 각각의 용도에 필요한 내용을 층수를 달리하여 배치하였으며,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54) 天池라는 것은 물을 붓고 針을 띄워 사용하는 것이다. 둥글어 太極같다. 針을 놓으면 가운데가 나뉘어서 陰陽을 가른다. 그것은 반드시 子午를 가리킨다. 『羅經撥霧集』, 華成書局, 影印本.

“天池者注水浮針之用也. 圓若太極. 下針中分以判陰陽. 其必指子午者.”

55) 『羅經頂門針』 卷下, 北京: 大衆文藝出版社, 2010, 145쪽.

“羅經中無天池則子午無定陰陽不分 天池則太極.”
56) 서유구 지음, 안대희 엮어옮김,『산수간에 집을 짓고』, 돌베개, 2006, 114쪽.

 

 

넷째, 활용성에 있어서 일부 문화재 중에는 4층 지반정침으로 측정하면 기록과 맞지 않고 8층 천반봉침으로 측정하면 맞는 경우가 있는데57) 이에 대한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星湖僿說』萬物門에 보인다. “術家에서 方位를 정할 적에는 혹은 正針을 표준하기도 하고 혹은 縫針을 표준하기도 하니, 둘 다 근거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꼭 하늘 위의 해의 그림자로 판단한다면 봉침이 더 근사하다 하겠다”58)고 하여 정침(지반)과 봉침(천반)이 같이 활용되었다는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송대에는 자오침으로 정침이 아닌 봉침을 썼었다는 것과 현재는 정침을 쓴다는 점과 ‘하늘 위의 해의 그림자로 판단하면 봉침이 더 근사하다’는 표현은 당시에 봉침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활용성이 담보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즉, 문화재의 좌향 측정에 나타난 것처럼 봉침의 활용성은 보다 컸다는 것이 확인되는 셈이다.

또한 詩文門에는 “해 그림자로 縫針을 삼으니, 이는 천지의 縫合이 이에 있다는 것”59)이라고 하여 봉침은 해 그림자를 기준으로 하였다는 앞에서 제시한 『五洲衍文長箋散稿』의 주장과 같다.
이와 같이 성호는 나침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天地門詩文門萬物門등에서 정침과 봉침에 관련된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57) 『朝鮮王朝實錄』의 기록에 따르면 경복궁과 죵묘의 좌향은 壬坐丙向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좌향은 계좌정향이다. 동관왕묘의 좌향은 亥坐巳向이라 하였으나 실제는 壬坐丙向으로 나타난다. 또한 『弘齋全書』에 癸坐丁向이라 기록된 사도세자의 융릉은 丑坐未向이다. 숭릉도 둘레석에 새겨진 좌향과 실제의 좌향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외에 확인되지 않은 건축물과 능묘유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58) 『星湖僿說』 卷2, 萬物門指南針. “術家定方位 或主正針 或主縫針 二者皆似 有據要之斷之以 天上日影 爲縫針爲近之矣.”
59) 『星湖僿說』 卷28, 詩文門, 六合. “日影縫針爲天地之縫合.”

 

 

5. 결론

 

이기론의 운용에 있어서 절대적인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나경에 관한 문헌자료는 극히 적다. 언제부터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역사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자료부족은 연구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이론적 배경과 논리의 구성을 설명한 풍수서는 거의 없고 단지 사용법만을 묘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중국에서 최초로 나침반을 사용한 시기는 기원전 4세기로 추정되는데, 당시 나침반은 방향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술사들이 풍수나 占을 치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저술된 『鬼谷子』를 보면 길을 잃지 않기 위해 ‘司南’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최초의 나침반으로 보고 있다.

그 후 시대적으로 나침반에는 변화가 생기고 구성도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 대의 식반은 일종의 占卜盤이라면 동한시기와 육조시기에는 육임반이 활용되었다. 모형적인 모습은 천원지방의 원리가 반영되었고 방형에서 차츰 원형으로 바뀌어 간다. 당대에는 양균송에 의해 나경의 논리와 특성이 훨씬 다양해지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나경은 11세기 초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방향을 찾기 위해 나침반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당시에 쓰인 『武經總要』에는 나침반을 만드는 방법과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되었다는 것도 기록하고 있다.
또한, 沈括(1031~1095)의 『夢溪筆談』에는 眞北과 磁北의 차이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기록으로 남긴 최초의 저작물이라 할 수 있다.

 

明·淸代에 이르자 나반은 새로운 층을 추가하게 되었고, 『羅經頂門針』『欽定協紀辨方』등이 저술되었다. 『欽定羅經透解』『欽定羅經解定』등은 나경에 표시된 각 층의 용도와 활용성에 대한 설명서이자 해설서이다. 이와 같이 나경은 훨씬 더 세분화되고 발전을 거듭하면서 지금과 같은 복잡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또한 三合盤과 三元盤 그리고 綜合盤이 나타나게 된다.

 

우리나라의 나경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등장한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 指南浮針이라는 단어는 徐兢(?-?)의『宣和奉使高麗圖經』海道에 등장한다. 이 지남부침은 나침반의 일종으로 남북의 구분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나경에 대한 기록은 『宣祖實錄』을 비록해서『正祖實錄』그리고 『承政院日記』『湛軒書』『星湖僿說』『燕轅直指』『靑莊館全書』『弘齋全書』등에 나타난다. 특히 『宣祖實錄』에 따르면 선조 때까지만 해도 나경이 우리나라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이미 윤도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고려시대에도 윤도가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음양풍수학을 十學중의 하나로 삼아 과거를 통해 관리를 선발했고 풍수가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윤도의 사용도 늘어났다. 그래서 輪圖는 풍수가뿐만 아니라 선비들도 가지고 다녔다. 선비들의 독특한 휴대품이었던 윤도는 대개 소형으로 패철이라 불렀으며, 이것을 부채에 매단 것을 扇錘라고 하였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나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술법가들의 용어인 정침과 봉침의 차이까지를 이미 인식하였고, 정침과 봉침이 7.5도의 차이가 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침과 봉침의 사용법이 다른 것의 원인까지도 제시하고 있는데, 나경에 대한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나경의 자오선은 어떻게 찾았는지 『五洲衍文長箋散稿』人事篇에서 결정적인 단초를 제시하였다. 즉, 정남북 자오선은 冬至前後에 해 그림자로 측정하고 동서 방향 즉 卯酉向은 春分과 秋分日에 해 그림자로 측정하였다. 이는 낮과 밤의 길이의 차이와 해의 높낮이와 방향성을 고려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측정법이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나경의 정침과 중침 그리고 봉침의 7.5도 차이는 지구 자기장의 축이 지구 자전축에서 약 11.3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나침반이 가리키는 磁北이 眞北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진북과 자북의 오차를 양균송과 뇌문준에 의해 보정된 것으로 나경의 과학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한 천반(봉침)과 지반(정침) 그리고 인반(중침)으로 구분한 배경에는 천지인 삼합사상이 자리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4층 지반정침을 天元宮과 地元宮 人元宮으로 분류하여 또 다시 天地人 삼합사상을 실현하였다. 6층 인 반중침은 뇌문준이 창시한 것으로 星宿五行을 통해 사격의 길흉을 판단하는데,『賴公撥砂訣』을 판단근거로 활용한다. 양균송에 의해 정립된 8층 천반봉침은 收水作用에 쓰인다. 여기에는 산과 물로 대표되는 음과 양의 특성논리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즉, 각각의 자침이 의미하는 특징이 반영된 것으로 천지인 삼합사상과 음양의 논리 그리고 세월에 따라 변하는 자편각의 오차를 보정하는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자리한다.

 

셋째, 나경의 층수배치는 각각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관상감판본과 淸代 輪圖, 『羅經透解』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주로 사용하는 나경에 있어 층수별로 각각 전혀 다른 배치를 한다. 여기에는 인식의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나경은 필요에 따라 혹은 중요성의 인식에 따라 각각의 용도에 필요한 내용을 층수를 달리하여 배치하였으며,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넷째, 활용성의 측면에서 문화재의 좌향이 기록과 다른 문제에 대한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星湖僿說』萬物門에 보인다. 성호 이익은 ‘술가에서 방위를 정할 때 정침을 표준으로 하기도 하고 봉침을 표준으로 하였다’고 하면서 송대에는 자오침으로 정침이 아닌 봉침을 썼었다는 것과 현재는 정침을 쓴다고 하여 문화재의 좌향이 차이나는 이유를 정확히 제시한다. 즉 봉침이 보다 활용성이 높았다는 것을 입증시켜준다.

 

따라서 나경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역사적으로 많은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였다. 또한, 시대적 요구와 상황인식, 논리의 변화는 나경용도의 증가를 가져왔고 나경의 형상과 배치 층수의 증감을 통해 나경의 특징을 실현하였다.

 

 

 

참고문헌

 

『羅經頂門針』?
『湛軒書外集』?
『夢溪筆談』?
『宣祖實錄』?
『宣和奉使高麗圖經』?
『星湖僿說』?
『承政院日記』?
『英祖實錄』?
『五洲衍文長箋散稿』?
『正祖實錄』?
『韓非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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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n Analysis on the Progress and Feature of the Oriental Compass, Nakyeung

 Focus on 4th(地盤正針) and 6th(人盤中針), 8th(天盤縫針)

 

Park, Jeong-Hae

 

In this study, the progress of oriental compass, Nakyeung(羅經) is researched, and the feature and application of 4th(地盤正針), 6th(人盤中針) and 8th(天盤縫針) layer of it is analyzed by means of document research.

Nakyeung has been continuously developed and changed in history. The changes were resulted from logical change and demand of the times. Especially, the background of difference among the three layers which is the most remarkable feature on Nakyeung is because the magnetic field axis has an inclination of 11.3° from the rotation axis of the Earth. Besides, on the book, ?Oju y?nmun changj?n san'go (五洲衍文長箋散稿)? the principle and the measurement standard of the three layers is recorded. According to the record, at the winter solstice, the sun shadow of the East and the West is to be measured by the standard of meridian. And setting principle with how each layer is arranged on Nakyeung is also recorded.

 

*Key Words: Nakyeung(羅經), Ryundo(輪圖), True North, Magrnetic North, Feng Shui

 

 

ㆍ논문투고일: 2013년6월27일

ㆍ심사완료일: 2013년8월1일

ㆍ게재결정일: 2013년8월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