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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사 최고봉, 동의보감 400년 ①②③④

경호... 2013. 3. 22. 01:55

조선 방문한 중국 사신들 '이 책' 꼭 챙겨가

 

생명과학연구 필독서…동의보감은 살아있다

한의학사 최고봉, 동의보감 400년 ① 왜 지금 동의보감인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동의보감』과 책에 실린 인체 그림. [사진 국립중앙도서관]

 

 

올해는 동아시아 과학사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이 되는 해다.

『동의보감』이 나온 이후 우리 전통의학은 한 차원 다른 세계로 업그레이드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를 계승하고 증보하는 ‘신(新)동의보감’ 프로젝트도 추진되고 있다. 400년 전 『동의보감』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돌아본다.

조선후기 호학(好學) 군주 정조(1752∼1800)는 자신의 저술을 모은 『홍재전서』(弘齋全書·1814)에서 이렇게 말했다.

 

“의학도 유술(儒術)의 일단이다. 고금의 의서들 중에 우리나라에 적합한 것은 오직 양평군 허준의 『동의보감』이다.”

 2006년 흥미로운 홍콩발 외신이 전해졌다. 청나라 강희제(1654~1722)가 소장했던 『기하학 원본』(유클리드 기하학의 만주어판) 표지에 ‘東醫寶鑑(동의보감)’이란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프랑스 국가과학연구센터 소속 과학사 전문가가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도서관에 있는 『기하학 원본』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동의보감』의 존재가 확인된 것이다.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이 1995년 방한해 국회 연설에서 “17세기 편집된 『동의보감』은 양국 문화교류사에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던 언급이 근거 없이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다.

 올해는 그 『동의보감』이 발간된 지 400년이 되는 해다. 경희대 한의학과 김남일 교수는 “『동의보감』은 단순히 옛 책이 아니라 오늘의 임상 현장에서도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최승훈 원장은 “『동의보감』은 전통 지식과 천연자원을 소재로 한 생명과학 연구에서 반드시 참고해야 할 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했다. 400년 세월을 지속해 온 필독 스테디셀러인 셈이다.

 이런 가치를 존중해 유네스코는 2009년 『동의보감』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의학서로는 최초다. 또 2013년을 유네스코 공식 기념의 해로 지정했다.


◆400년 스테디셀러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동의’라는 이름으로 우리 의학의 체계를 새롭게 정립했다.

 

 

『동의보감』은 전쟁의 참상 속에서 피어났다.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된 가운데 제때 치료를 못해 고통받는 백성이 점점 늘어날 때였다. 1596년 선조 임금은 기존 의학서를 집대성한 책을 펴낼 것을 지시한다.

허준(1539~1615)은 선조와 광해군 시대 어의(御醫)였고, 그가 시대를 뛰어넘는 『동의보감』 편찬에 앞장섰다. 그는 1608년 선조의 타계로 잠시 유배생활을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1613년 마침내 내의원 목활자본으로 25권 25책의 『동의보감』을 간행한다.

발간 직후부터 『동의보감』은 베스트셀러였다. 중국에서만 20여 차례 간행됐다. 강희제가 보았던 『동의보감』은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으레 『동의보감』을 챙겨 갔다고 한다.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동의보감』이 너무 비싸 사지는 못하고 서문을 베껴왔다. 1763년 중국에서 처음 간행된 중국판 『동의보감』의 서문은 “『동의보감』을 보급하는 것은 천하의 보배를 나누어 갖는 것”이란 내용이다.

『동의보감』은 우리 전통 의학과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한 당대 최고의 ‘의학 백과사전’으로 꼽힌다. KAIST에서 과학사를 가르치는 신동원 교수는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동의보감』의 위치는 최고봉”이라며 “최고 수준의 의학지식을 가려 뽑아 일일이 출전 근거를 밝히며 처방을 제시한 작업은 당시로선 비교 대상이 없다”고 평가했다.

『동의보감』에는 비싼 약재 대신 누구나 일상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가 소개돼 있다. 당시 일반인도 알 수 있게 향약(鄕藥:우리나라 자생 약재) 637종을 한글로 적어 놓은 것이다. 어려운 용어가 난무하는 오늘의 의학계 현실과 비교해 보아도 획기적인 일이다. 전쟁 속에서 고통받는 가난한 백성들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한(漢)’의학에서 ‘한(韓)’의학으로

『동의보감』이란 책 제목부터 남달랐다. 허준은 “우리나라는 동방에 위치해 있으나 의약의 도(道)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며 우리의 의학을 ‘동의(東醫)’라고 명명했다. 중국 의학계에 존재하는 ‘북의’ ‘남의’ 등과 대등한 의학을 의미했다. ‘보감(寶鑑)’이란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뜻이다.

한의학의 한자 표기는 1986년 이전까지는 중국 의학이란 의미의 ‘漢醫學’이었으나 86년 국민의료법 8차 개정에서 우리 의학이란 의미를 담은 ‘韓醫學’으로 바뀌었다. 우리 의학이라고 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400년 전

『동의보감』의 존재가 없었다면 ‘한(漢)’에서 ‘한(韓)’의로의 변화는 더 많은 세월이 걸려야 했을 것이다.

허준이 세운 ‘동의’의 깃발은 조선 말기 동무(東武) 이제마(1838~1900)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으로 이어진다. 김남일 교수는 “『동의보감』이 중국 의학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의학을 섭렵하며 ‘韓醫學’의 이론 체계를 처음으로 정비했다면, 『동의수세보원』은 이를 바탕으로 ‘韓醫學’의 기반을 더욱 튼튼히 해 놓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도교 양생학 영향

『동의보감』의 구성 방식부터 눈여겨볼 만하다. 내경편(4권), 외형편(4권), 잡병편(11권), 탕액편(3권), 침구편(1권) 등 크게 다섯 편으로 나뉘었고 목록(2권)이 별책으로 포함됐다. 이전의 의서들에선 발견할 수 없는 편집이다.

몸속 세계를 다룬 ‘내경편’은 『동의보감』의 세계관과 인체관을 보여준다. 사람의 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우주의 형성·운용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 나아가 건강을 유지하며 장수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순응해야 한다는 양생관을 제시한다. 동아시아 전통 철학의 특성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겠으나 구체적 용어를 보면 그 이상이다.

『동의보감』에서 인체의 내부를 구성하는 생리적 요소로 정(精)·기(氣)·신(神)이 제시된다. 정(精)·기(氣)·신(神)을 우리 몸의 바탕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도교에서 쓰이는 전문 용어다.

정(精)은 생명의 원천을 의미하고, 기(氣)는 몸의 기운이며, 신(神)은 정신활동을 가리킨다. 이들의 원활한 순환을 건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전통 도교의 호흡법이 주요 건강법으로 소개된다. 『동의보감』 편찬에 참여한 고옥(古玉) 정작(1533~1603)이란 인물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유학자이면서 의술을 겸비한 유의(儒醫)였고 당대 도교 계통의 저명인사였던 북창(北窓) 정렴(1506~1549)의 동생이다. 북창과 고옥의 아버지가 우의정을 지낸 최고위 양반 집안인 데다 『동의보감』 작업이 시작된 1596년 무렵 고옥의 나이가 이미 64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동의보감』 편찬의 협력자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도교사를 연구한 김낙필 원광대 교수는 “『동의보감』의 철학적 기초는 도교와 밀접히 연관된다. 북창 정렴과 고옥 정작으로 이어지는 한국 도교 혹은 선도(仙道)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내 몸의 주인은 나 … 통하면 아프지 않다

 

한의학사 최고봉, 동의보감 400년 ② 동의보감, 삶의 총체적 모델
내 안의 생명력 일깨우는 양생술
탐욕·분노·어리석음이 질병 원인

 

경남 산청군에 조성중인 동의보감촌 속 힐링 타운.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에 맞춰 오는 9월 6일~10월 20일 ‘2013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가 이곳에서 열린다. 『동의보감』의 국제적 위상 정립을 목표로 하는 국제아시아전통의학대회도 예정돼 있다. 산청 지역은 허준과 그의 스승 류의태 선생이 의술을 펼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동연 기자]

 

『동의보감』을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허준의 명성 또한 ‘범국민적’이다. 『동의보감』과 허준이라는 기호는 한국인의 문화적 원형에 가깝다.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한 이해는 참 ‘썰렁한’ 편이다. 『동의보감』은 만병통치의 비서(秘書), 허준은 불치병을 고치는 전설적 명의, 이게 고작 아닐까. 물론 모두 틀렸다.

『동의보감』은 유교·불교·도교의 ‘삼교회통(三敎會通)’에 기반한 비전(vision) 탐구서이고, 허준 역시 명의이기 이전에 학자다. 허준이 ‘허준이 된’ 까닭은 『동의보감』이라는 저술을 남겼기 때문이다. 명의는 허준 말고도 아주 많았다. 하지만 동의보감 같은 대작을 남긴 의사는 허준뿐이다. 동아시아 의학사, 아니 세계 의학사에 비추어 보아도 분명 독보적인 작업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진면목은 거의 가려져 있다.

 

『동의보감』에 실려 있는 인체 그림. 신형장부도(身形藏府圖)라고 불린다.

 

 

『동의보감』을 직접 탐구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그 단적인 증거다. 그저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떠받기만 할 뿐, 우리네 삶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여기는 전통의학의 문제를 넘어서서 의학 자체에 대한 편견이 자리한다. 의학은 전문가의 몫이고, 따라서 보통 사람들은 전문가의 지시에 따르면 그뿐이라는. 현대 병리학이 유포한 대표적인 편견 가운데 하나다.

의사들은 말한다. ‘조기 검진’, ‘정기 검진’만이 살길이라고. 그 다음엔? 전문가와 상담하라. 그 다음엔 수술 아니면 투약! 마치 주문처럼 반복되는 이런 말들을 듣고 또 그런 코스를 밟다 보면 검진과 상담만이 유일한 의료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믿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기 몸의 주인이 ‘자기’라는 것, 자기 몸을 스스로 탐구한다는 건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 결과, 몸과 마음, 몸과 삶, 몸과 자연, 몸과 사회 등이 모두 어긋나 버렸다.

이 간극과 소외가 바로 질병의 원천이다. 보다시피 현대인들은 한편으론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다른 한편으론 암과 각종 면역계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지금 시급한 건 병원과 의료서비스 이전에 ‘자기 몸과의 진정한 소통’이다. 『동의보감』의 지혜를 불러내야 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동의보감』은 동아시아 의학사의 집대성이자 분류학의 결정판이다. 이 방대하면서도 명쾌한 저서를 가로지르는 의학적 키워드는 다름아닌 양생술이다.

양생이란 무엇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생명의 정기를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병을 막고 세균을 몰아내는 것을 위주로 하는 위생담론과는 아주 다른 차원이다. 헌데, 양생술을 탐구하려면 먼저 생명과 존재의 근원을 알아야 한다. 하여, 동의보감의 첫 장인 ‘내경편’은 ‘정기신(精氣神)’에서 시작한다.

우주의 근원은 ‘기(氣)’고, 기의 생리적 변환이 ‘정기신’이다. ‘정’은 물질적 원천, ‘기’는 그 원천을 흐르게 하는 에너지, ‘신’은 그 흐름에 방향을 부여하는 무형의 벡터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오장육부가 형성되고, 오장육부는 다시 이목구비, 뼈와 근육, 살과 힘줄 등과 연동된다. 그뿐인가. 이 네트워크는 그 자체로 우주다. ‘내경편’의 첫페이지를 장식하는 말이다.

“천지에서 존재하는 것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중하다. 둥근 머리는 하늘을 닮았고 네모난 발은 땅을 닮았다. 하늘에 사시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지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중략)

하늘에 십이시(十二時)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십이경맥이 있다. 하늘에 이십사기(二十四氣)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24개의 수혈이 있고, 하늘에 369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365개의 골절이 있다. 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고, 하늘에 밤과 낮이 있듯이 사람은 잠이 들고 깨어난다.(중략) 이 모든 것은 사대(四大)와 오상(五常)을 바탕으로 잠시 형(形)을 빚어 놓은 것이다.”

요컨대, 생명과 우주는 ‘대칭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양생술이란 이 대칭적 고리를 회복함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생명력을 일깨우는 기술이다.

핵심은 순환이다. 통즉불통(通則不痛/痛則不通)- 통하면 아프지 않다. 혹은 아프면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동의보감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다. 순환이란 단순히 건강이나 체력의 향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반드시 삶의 지혜가 요구된다. 이를테면, 생리적 순환에 문제가 생기면 판단과 행동도 뒤엉키게 마련이다. 그러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관계들에 파열음이 생겨난다. 이것은 다시 몸에 엄청난 스트레스로 되돌아온다. 그러니 지혜가 없이 건강하게 잘 산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양생술의 관점에서 볼 때, 질병의 원천은 ‘탐진치(貪瞋癡)’다.

탐욕은 ‘정’을 소모시키고, 진심(분노)은 ‘기’의 흐름을 어그러뜨리고, 치심(어리석음)은 ‘신’을 어지럽힌다. 쉽게 말해 ‘몸붕’과 ‘멘붕’은 하나다! 이 악순환으로부터 탈주하는 것, 치유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생사의 이치를 탐구하는 수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자면 삶과 죽음은 하나다. 그 원리를 터득하지 않고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다. 또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는 한 자유와 행복 또한 불가능하다. 결국 양생술이란 생리와 윤리, 그리고 영성(spirituality)이 하나로 통하는 ‘삶의 총체적 기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환기해야할 사실 하나. 이때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라는 것. 허준이 동의보감을 편찬한 의도도 거기에 있었다. 허준은 이렇게 말했다.

 

“환자가 책을 펼쳐 눈으로 보면 허실, 경중, 길흉, 사생의 조짐이 거울에 비친 듯이 명확하니 함부로 치료하여 요절하는 우환이 거의 없게 한다”.

 

여기서 주어는 의사가 아니라 환자다. 즉, 아픈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름하여, ‘호모 큐라스(cura는 라틴어로 care라는 뜻)’ 혹은 ‘자기배려의 달인’이 그것이다.

바야흐로 힐링과 치유가 넘쳐나는 시대다. 하지만 그에 비례하여 상처와 폭력도 함께 증식된다. 힐링과 상처의 기묘한 공생! 이 ‘불편한’ 사슬을 끊고 자기 몸의 탐구자,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는 비전을 탐구해야 할 때다. 400년의 시공을 가로질러 동의보감의 ‘진면목’과 대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고미숙<고전평론가>

◆고미숙=60년생. 고려대 국문학 박사. 지식인공동체 ‘수유+너머’를 거쳐 지금은 ‘감이당’에서 활동. 전통 고전을 소재로 몸과 삶의 관계를 인문학적으로 탐색하는 글을 써오고 있다. 저서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동의보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등.

 

 

 

 

 

중국·일본서도 “동의보감은 천하의 보물”

 

한의학사 최고봉, 동의보감 400년 ③ 허준과 동아시아 과학사

 

 

『동의보감』은 간행 직후부터 한·중·일 삼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사진은 세 나라에서 나온 다양한 『동의보감』 중의 일부. 가운데 놓인 책이 원본. 왼쪽은 일본에서 인쇄된 『동의보감』을 1890년 중국에서 번각(종이를 대고 그대로 옮김)한 책. 오른쪽은 1917년 상하이에서 출간된 중국판 『동의보감』. [사진 국립중앙도서관]

 

 

지난 달 나는 생면부지의 프랑스 학자로부터 문의 이메일을 받았다. 중국 청나라 때 윈난(雲南)성에서 이뤄진 의학 지식 유통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자신이 본 두 책에서 『동의보감』이 인용되어 있다면서, 17세기 조선 책이 중국 서남쪽 변방에까지 등장하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다.

『동의보감』은 1613년 간행 직후부터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주목받았다. 1724년 일본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막부 차원에서 『동의보감』을 펴냈다. 의학의 표준을 얻고자 함이라 했다. 중국에서는 이보다 42년 늦은 1766년 출간됐다.

중국판본 서문에서 “천하의 보물을 마땅히 천하와 더불어 하고자 함”이라 했다. 1780년 연행사(燕行使·청나라에 파견된 사신)의 일원이던 연암(燕巖) 박지원이 베이징 서점가 류리창(琉璃廠·유리창)에서 본 『동의보감』이 바로 이 책이다. 중국에서는 이후 30여 종 이상의 다양한 판본이 나왔다.

나는 지금도 베이징 출장 때면 대형서점에 들러 현대 간체자로 인쇄된 최신 『동의보감』이 꽂혀 있는 걸 확인하곤 한다.

『동의보감』의 명성에 비해 저자 허준에 관한 정보는 정확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허준(1539~1615)은 권세 있는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경전·역사·글짓기 등의 교육을 잘 받았다. 『의림촬요』 같은 기록에는 그가 총명한 자질을 타고 났다고 하며, 여러 학문 중 특히 의학에 밝았다고 씌어 있다. 허준의 벼슬길은 승승장구, 서자 출신의 의원으로는 전례가 없던 1품의 관록까지 생전에 누렸다. 임진왜란 때는 피난길의 선조 건강을 잘 돌본 공으로 공신에 들기도 했다. 그의 이름 앞에 따라다니는 양평군은 그가 받은 공신 녹호이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그 책임을 물어 벌을 받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떤 곡절도 없이 순조롭게 끝났을 터이나, 그의 성공을 배 아파하던 양반 관료의 미움을 받아 유배 길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배 생활이 『동의보감』 집필을 완성할 시간을 주었으니, 그는 전화위복의 방법을 아는 인물이었다. 지지부진하던 『동의보감』 집필을 유배지 의주에서 불과 2년 정도 만에 끝냈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있던 1596년 어느 날, 선조는 허준에게 의학서적을 편찬하라는 왕명을 내린다. 전란의 피폐함을 의학으로 극복하려는 의도였다. 선조는 올바른 의학이론에 우수한 처방을 가려내는 것 이외에도 약을 쓰지 않고도 건강을 관리하는 법, 국산약 활용을 특별히 강조했다.

허준은 궁중 내외의 쟁쟁한 의원인 양예수·정작·김응탁·이명원·정예남 등 5인과 함께 편찬 작업을 시작했으나 이듬해 정유재란으로 일이 중단되었다. 공동 편찬자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1601년 무렵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동의보감』의 단독 편찬을 맡겼다. 하지만 나이 일흔을 앞둔 그가 궁중의 으뜸 의원으로 너무 바빴기 때문에 일을 잘 진척시키지 못했다. 선조의 임종 무렵까지 채 절반도 끝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유배가 없었다면 『동의보감』은 출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의사와 환자 모두 간절하게 소망하는 건 모든 병의 원인·증상·예후 판단을 정확히 알아내는 것이다. 16세기 중반 인물로 의학에 밝은 사대부인 묵재(默齋) 이문건(1494~1567)의 『묵재일기』를 보자. 병증 파악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대목이 여럿 보인다.

“아, 병증을 제대로 보았다면 병이 악화하지 않았으련만!”

그릇된 처방 후의 탄식이다.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의 『퇴계전서』에도 자신과 가족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옛 처방집을 뒤적이나 신통치 않은 경우가 여럿 실려 있다. 두 사람 다 허준보다 약간 앞선 시기의 인물이다.

이런 상황에 등장한 『동의보감』은 동아시아 의학이라는 큰 산을 올라가는 길을 표시한 나침반이었다. 허준은 여러 선현이 앞서 그린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삼고, 자신이 얻은 경험과 정보를 종합해 전인미답의 새 지도를 그려냈다.

“환자는 자신이 앓는 병이 무엇인지, 그게 몸에 허해서 생긴 것인지 삿된 기운이 지나쳐서 생긴 것인지, 곧 나을 병인지 아닌지, 예후가 좋아질지 나빠질지, 살게 될 것인지 죽음에 이를 것인지 명확히 알게 되리라.”

 

이같은 허준의 말처럼 『동의보감』은 가까이는 묵재와 퇴계 같은 이들을 위한 책이었다. 나아가 “천하의 보물을 마땅히 천하와 더불어 하고자 할 것”이라는 중국판 편찬자의 말처럼 멀리는 세계인을 위한 것이었고 실제 그렇게 되었다.

연세대 의대 여인석 교수는 서양의 내과학 분야 교과서로 100여년 이상 군림해온 해리슨의 『내과학』이란 책이 한 역할을 한의학에서 『동의보감』이 해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어떤 이들은 『동의보감』이 중국 의서를 짜깁기한 것이라고 혹평한다. 교과서란 원래 기존의 모든 연구 성과를 자신의 식견으로 잘 소화하여 정리해낸 것임을 모르는 오해의 소치다. 『동의보감』에는 모든 인용 문헌이 일일이 다 밝혀져 있으니 표절과도 거리가 멀다.

허준이 만약 조선적 특수성, 지역성만 강조했다면 해외에서 인기를 그처럼 얻진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인정한 것은 의학 전체를 관통하는 저술의 수준이다. 이런 자부심으로 허준은 동의(東醫)라는 표현을 썼다. 이를 중국의학과 차별되는 별도의 조선의학을 세운 것으로 오해말기 바란다. 허준은 중국에 우뚝한 남의(南醫), 북의(北醫)에 견줄만한 당시 세계의학의 한 축으로서 동의를 내세운 것이다.

신동원 카이스트 교수

 

 

 

 

 

17세기 조선의학의 판정승, 21세기에도 유효

 

한의학사 최고봉, 동의보감 400년 ④ 한국 한의학의 새 출발

 

『동의보감』에 실린 인체 그림. 해부학이 발달하지 않은 17세기였음에도 심장·폐장·간장·비장·신장(왼쪽부터) 등 장기 모양을 나름 정교하게 그려 놓았다. 한의학 관련 설명을 빼고 그림만 놓고 보면 언뜻 추상적 디자인을 보는 듯하다. [사진 경희대 한의대]

 

『동의보감』은 한국 한의학을 대표하는 고유명사다. 한국인은 어떤 음식이나 약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것이 『동의보감』에 있다고 하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검증된 것으로 믿곤 한다. 그만큼 『동의보감』은 우리 민족 정서에 깊숙이 각인돼 있다. 이 같은 신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한의학을 가르치는 필자가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왜 400년 전에 만들어진 『동의보감』에 여전히 기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질문의 배경엔 400년 전의 건강 코드가 오늘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깔려 있을 게다. 이는 『동의보감』을 과거 유산으로만 여기고 400년 동안 진행된 한의학의 역사를 정체적(停滯的)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동의보감』이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현대 한의학의 임상 치유에까지 연결되는 이유는 지난 400년간의 진화 과정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동의보감』은 400년 전의 일회성 이벤트로 그친 것이 아니다.

『동의보감』이 나오기 전에 형성되어 있던 조선 의학의 저력도 간과해선 안 된다(『동의보감』은 1610년 완성돼 1613년 처음 간행됐다). 『동의보감』의 출간 이전에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인간의 질병을 통괄하게 하는 ‘종합 의서’(모든 진료과목을 총망라하는 의학서적)가 별로 없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당시는 각종 치료술이 의학 유파에 따라 난무하는 가운데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이 시대적으로 요청되던 상황이었다. 이때 한의학의 역사를 종합하며 미래를 전망할 능력을 세계에 과시한 것이 『동의보감』이니, 그야말로 『동의보감』의 출현은 당대 조선 의학의 판정승이라 할 만하다. 조선 초기인 세종시대에 이미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 같은 방대한 의학 서적이 편찬된 바 있다. 이렇게 축적된 경험의 바탕 위에 조선의 의학 역량은 최고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동의보감』 이후에도 수많은 논쟁과 비판이 이어졌다. 이른바 ‘동의보감 학파’라고 부를 수 있는 한의학의 거대한 산맥이 형성됐다. 구체적 인물을 꼽아보면 먼저 허준과 동시대를 살며 『동의보감』의 교정 과정에 참여한 윤지미(생몰년 미상, 명나라 왕응린과 나눈 문답집 『답조선의문(答朝鮮醫問·1717년)』편찬), 그리고 동의보감 학파의 서막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 주명신(1650~?, 『의문보감(醫門寶鑑·1724년)』 편찬)을 들 수 있다. 이어 강명길(1737~1801, 『제중신편(濟衆新編·1799년)』 편찬), 이이두(1807∼73, 『의감산정요결(醫鑑刪定要訣)』 편찬) 등을 거쳤다.

20세기에 들어서도 한병연(생몰년 미상, 『의방신감(醫方新鑑·1914년)』 편찬), 이준규(1852∼1918, 『의방촬요(醫方撮要·1918년)』 편찬), 이영춘(생몰년 미상, 『춘감록(春鑑錄·1927년)』 편찬), 김홍제(1887~?, 『일금방(一金方·1828년)』 편찬), 김정제(1916~88, 『진료요감(診療要鑑·1974년)』 편찬) 등으로 이어졌다. 정조대왕(1752~1800)이 직접 지었다는 『수민묘전(壽民妙詮)』도 기억돼야 할 것이다.

이들은 『동의보감』에 의학적 근거를 두면서도 단순히 『동의보감』을 묵수(墨守)하지 않았다. 비판도 하면서 시정에 힘썼다. 비판이란 대체로 『동의보감』의 내용이 너무 많아서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데로 모아진다. 그 대안으로 『동의보감』의 요체를 후대의 저자들 나름대로 요약 정리하면서 당시에 유행하던 질환에 맞춰 내용을 증보하는 형식으로 새로운 의서를 만들어냈다.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조선시대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도 의학 관련 내용이 전해지는데, 궁중 의학 처방 기록들은 대체로 『동의보감』을 근거로 한다. 또 민간에서 만들어진 각종 필사본 의서들도 대부분 『동의보감』을 발췌한 것이다.

‘생긴 대로 병이 온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형상(形象) 의학’이란 학파가 있다. 현재 한국 한의계에서 활용되는 학문 방법론의 하나인데, 『동의보감』의 진단 방식에서 비롯됐다. 오늘의 한의계에서도 『동의보감』의 영향력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실제 치료에 활용하고 있는 한의사들만도 수천 명을 헤아린다.

『동의보감』을 부양론(扶陽論)의 관점에서 계승하는 학파도 오늘날 한의학계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규준(1855∼1923)에 의해 계승된 부양론은 양기(陽氣)를 기르는 것이 인체의 생명활동을 영위하는 기초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이뿐 아니다. 현재 한국에 있는 12개에 달하는 한의과대학, 한의학전문대학원 등에서 활용하는 교과서의 기초도 『동의보감』이다. 한의사들에게 임상의 바탕으로 삼는 책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동의보감』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2009년 7월 30일 카리브해의 섬나라 바베이도스에서 제9차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결정하며 다음 같은 심사평을 내놨다.

“『동의보감』은 그 내용이 독특하고 귀중하며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중요한 유산으로 세계 의학사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00년 동안 꾸준히 계승·발전시켜온 『동의보감』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동의보감』에 대한 창조적 계승은 21세기에도 이어진다. 한국한의학연구원(원장 최승훈)이 추진하는 ‘신(新)동의보감 프로젝트’다. 400년전 『동의보감』의 21세기형 업그레이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남일(경희대 한의대 교수)

◆김남일=1962년생. 경희대 한의대 졸업, 경희대 한의학 박사. 현재 경희대 한의대학장. 한국한의과대학학장협의회 회장. 저서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 『한 권으로 읽는 동의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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