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世上萬事

탱자나무 / 박상진의 나무 이야기

경호... 2015. 7. 4. 03:57

 

 

나라를 지켜준 강화 갑곶돈대 탱자나무

 

 

강화도 출신의 이건창(1852~1898)은 구한말의 강직한 선비이며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명미당 문집(송희준역)에는 이런 시 한 구절이 실려 있다.

 

'대포로 쳐서 큰 선박을 부러뜨려 /

양놈의 살갗을 저며 육포로 만들었네 /

요기(妖氣)가 확 틔어 바다의 기운이 맑아지니 /

백성들은 편안하고 즐겁게 누에치며 밭을 갈았네.'

 

신미양요 때 강화도 민관군이 힘을 합쳐 미군을 물리친 기쁨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강화도는 멀리는 몽고 난 때 수도까지 옮겨서 저항한 곳이며 가까이는 19세기 말에 일어난 병인.신미양요의 현장이기도 하다. 서울의 관문이란 지리적인 특성은 강화도가 항상 침략자의 첫 표적이 되기 마련이다.

 

 

 

 

 

강화대교를 건너면서 바로 좌회전하여 갑곶돈대 광장 앞에 차를 세운다. 1977년에 개장한 강화역사관을 잠시 둘러보고 나오면 갑곶돈대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역사관과 돈대 사이, 옛 성터로 추정되는 경사지의 가장자리에 수 백 년 풍상을 몸으로 견디면서 자라고 있는 탱자나무 고목 한 그루를 만날 수 있다.

나무는 4.2m의 자그마한 키에 뿌리목 둘레 1m, 가지 펼침은 동서 7.9m, 남북 8.3m로서 거의 둥그스름한 모양을 하고 있다. 뿌리목에서 세 갈래로 크게 갈라지고 올라가면서 또 여러 갈래가 된다. 줄기에는 세로로 깊게 주름이 패어있어서 지나온 세월이 짧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왜 이 자리에 하고많은 나무 중에 하필이면 탱자나무가 심겨져 있는가?

여기에는 선조들의 깊은 뜻이 들어있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철저히 왜군에게 당하고 인조 22년(1644)에는 제물진을 설치하는 등 때늦게 강화도 방위에 관심을 갖는다. 이후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성을 다시 쌓았다는 여러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진다. 숙종 5년(1679)에는 강화도의 해안선을 따라 이곳 갑곶돈대를 비롯한 53개의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 돈대란 일종의 방위시설로서 성곽이나 방어 요지에 구축한 진지를 말한다.

외적을 막는 기본적인 수단으로 성을 쌓아야했으며, 탱자나무는 성을 튼튼히 해주는 보강 재료로 널리 쓰였다. 성 아래에 탱자나무를 촘촘히 심어 가시 울타리를 만들었다.

손가락 길이만한 험상궂은 가시가 사방으로 빈틈없이 내밀고 있어서 특별한 장비를 갖추지 않으면 탱자나무 가시를 뚫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일이 녹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성을 탱자성이란 뜻으로 지성(枳城)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성은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이다.

 

 

 

 

 

 

 

탱자나무를 언제 누가 심었는지 기록은 없으나, 돈대를 설치할 당시인 숙종 때 심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탱자나무는 약 330년이 되는 셈이다. 성벽을 따라 수많은 탱자나무를 심었을 것이나 세월이 지나면서 모두 없어지고, 천연기념물 79호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와 함께 갑곶 탱자나무도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탱자나무가 천연기념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조상들이 외적의 침입에 철저하게 대비한 실증적 증거로서 역사성을 가진 유물임이 첫 번째 이유다. 그 외 지정당시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원래 탱자나무는 따뜻한 남쪽지방에 자라는 대표적인 나무인데, 이곳이 살아남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으로 알려져서다. 그러나 최근 자료를 보면 북한 개성시 판문군 동창리에는 1945년에 심은 탱자나무가 북한 천연기념물 382호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다. 동해안으로는 양양까지 탱자나무가 자라니 강화도가 자람 터의 북쪽 한계선이라는 학설은 이제 접어야 하게 되었다. 모두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다.

 

 

 

 

 

 

 

 

 

 

 

 

 

 

 

 

 

 

 

 

박상진의 나무 이야기

 

탱자나무로 꽁꽁 둘러싼 형벌 '위리(圍籬)안치'

 

탱자나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시나무의 대표 나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날카로운 가시가 가지마다 빈틈없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달려 있다. 약간 모가 난 초록색 줄기는 길고 튼튼하고 험상궂다.

 

탱자나무는 중국에서 들어왔다. 귤나무와는 사촌쯤 되는 가까운 집안이고, 따뜻한 곳을 좋아해 남부와 섬지방에 주로 자란다. 이런 특징을 가진 탱자나무는 역사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열매가 여린 탱자나무 

열매가 여린 탱자나무

 

 

죄인을 다스리는 형벌의 하나인 안치(安置)가 대표적인 예다. 안치는 왕족이나 고위관리에게만 적용한 유배형인데, 죄의 경중에 따라 고향에 두는 본향(本鄕)안치, 먼 변방에 두는 극변(極邊)안치, 섬에 두는 절도(絶倒)안치, 위리(圍籬)안치 등이 있다.

 

‘위리안치’는 집주위에 울타리를 쳐서 둔다는 뜻이나, 사실은 멀리 귀양을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탱자나무를 집 주위에 촘촘히 둘러 심어 외부와 차단하는 형벌이다.

 

촘촘히 심은 탱자나무 탓에 집 안에서는 오직 하늘을 바라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안에 갇힌 사람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위리안치를 더욱 엄하게 해 죄인이 거처하는 방 앞에다 탱자나무를 또 심어 격리하는 천극안치를 하기도 했다.

 

 

탱자나무 울타리 

탱자나무 울타리

 

 

탱자나무는 적의 침입을 막는 국토방위의 첨병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때늦게 강화도 방위에 관심을 갖게 된 조정은 목책(木柵)을 만들고 성을 다시 쌓았다. ‘일성록’을 보면 정조 13년(1789년)에 비변사가 이렇게 말했다.

 

“강화는 본래 천연의 요세지로 조정에서 돈대를 설치하고 성을 쌓아서 방어했고, 해마다 탱자나무를 심었습니다.”

 

강화도의 천연기념물 78호와 79호 탱자나무는 외적의 침입을 저지할 목적으로 강화성 아래에 심은 것이다. 옛사람들은 사방을 둘러 높은 성벽을 쌓고, 해자라고 해서 깊은 도랑을 파고 물을 채웠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으면 성 아래에 탱자나무를 촘촘히 심어 가시 울타리를 만들어 보강했다.

 

가시가 사방으로 빈틈없이 내밀고 있어서 특별한 장비를 갖추지 않으면 탱자나무 가시를 뚫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일이 녹록치 않다. 이런 성을 탱자성이란 뜻으로 지성(枳城)이라 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성은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이다.

 

 

탱자나무 가시 

탱자나무 가시

 

 

탱자나무는 이처럼 험상궂은 외모와 달리 늦봄에 피는 하얀 꽃은 향기가 그만이다. 가을에 만나는 동그랗고 노란 탱자열매는 친근하다. 문경 장수황씨 종택, 부여 석성동현, 익산 이병기 생가 탱자나무 고목은 꽃과 열매를 감상하기 위해 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