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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풍수사상의 개요와 역사성

경호... 2015. 7. 4. 04:53

한국 풍수사상의 개요와 역사성

 

최창조(전 서울대 교수)

 

1. 자생풍수(自生風水)

 

(1) 뜻

 

고래(古來)로 우리나라에서 풍수라 함은 곧 오늘날의 지리학이다. 다른 점은 엄밀하게 말해서 풍수가 학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국토와 풍토에 대한 당시 거주민들의 지혜가 집적된 것이 체계를 갖추면 자생풍수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이제 고답적 의미의 학문으로 접근하거나, 풍수라는 용어 자체에 집착하여 당시 기록에 풍수라는 말은 없었다고 주장하면 할 말이 없다. 내가 말하는 자생풍수란 우리 민족이 지니고 있던 지리 지혜라는 것인데, 따라서 용어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다. 도선 풍수도 좋고 우리 풍수도 좋고 조선 풍수라도 좋다.

다만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만약 풍수라는 용례가 없기 때문에 자생풍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과학이나 생태, 환경 같은 용어들은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우리에게 그런 관념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2) 용어가 나온 연유(緣由)

 

이 말은 나의 풍수 편력을 소개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처음 나는 대부분이 그렇듯이 음택(陰宅) 위주의 발복풍수(發福風水)로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풍수라고 당연히 받아들였고 관심도 갔다. 재미도 있었다. 이론이 현장에서 확인될 때는 기쁨까지 느꼈다. 하지만 날이 가면서 음택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갔다.

아마도 많은 주검과의 대면 속에서 인간의 신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눈으로 확인하며 그런 곳에서 발복을 기대한다는 것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확인이란 것도 다분히 내 입맛에 맞게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것이 많았다는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내게 유리한 쪽의 증거들만 확인 작업에 끼어 넣었다는 뜻이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습관은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후회했다. 이게 아니었다.

 

성격 탓도 있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변수도 작용하여 낭만적이고 현실도피적인 도참(圖讖)적 풍수에 빠진 것이 다음을 이었다. 있지도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지 않을 유토피아를 찾았던 것이다. 당연히 거기서도 현실적 대안을 찾지 못했다.

 

대학을 나와 주로 생계를 위해 시작한 신문 연재는 마구잡이식의 주제와 소재를 가진 엄청난 답사였다. 소득은 많았다. 현장에는 풍수 전적(典籍)에는 없지만 우리나라에는 있는 부분들이 있더라는 점이다.

이론이 현장에 부합되는 것은,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없더라는 것도 깨달았다. 책과 이론이 딱 맞아떨어질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유치한 발상이었다. 이론이란 지극히 추상적인 것인데 그것을 실제에 적용하려 했으니 될 일이 아니었다. 고백하자면 혼란에 빠진 것이다.

 

여기서 많은 현지 주민들과 대화하면서 느낀 것은 그들이 풍수를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조차도 현실에 순응하며 지금 이곳을 명당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단적인 예가 공주 명당골에서 만난 정감록파(鄭鑑錄派) 노인의 술회였다.

 

“누군들 이런 궁벽(窮僻)한 산골에서 살기를 원하겠소. 자본만 있다면 도시에 나가 안락하게 살고 싶지요. 하지만 돈이 없으니 어찌 하겠소? 이곳이 바로 명당이라 여기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지.”

 

두 가지가 드러났다. 명당은 ‘당신 마음속에 있다’는 것과 ‘자본이 명당’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통의 풍수 사고와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그것은 마음공부가 즉 풍수공부라는 말이니 풍수 자체가 없어질 논리이고, 자본이 명당이라면 돈이 곧 명당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런 경험을 종합하여 풍수의 현대적 변용(變容)으로서의 자생풍수를 찾아내자고 생각했다. 그것은 삶의 현장, 도시에서의 명당 만들기라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풍수에서 어떤 정보(information)가 아니라 변용(transformation)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례는 우리나라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그것이 자생풍수를 마련하게 된 연유이다.

 

(3) 사례 세 가지

 

1)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정방산 성불사

 

정방산(正方山) 성불사는 글자 그대로 사각형 모양의 산지에 둘러싸인 분지(盆地) 중앙에 위치해 있다. 도선국사가 창건(898년)했다고 하지만 진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내용이 지금까지 전해진 것을 보면 이 절은 분명 자생풍수 계열의 승려에 의해 세워진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입지조건의 이해할 수 없음이다.

정방산에서 내려오는 물들은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게 되어있다. 실제로 정방산성 남문에는 곁에 수문(물구멍)이 뚫려있다. 방어가 목적인 산성에 물이 나갈 길을 훤히 뚫어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절 경내가 침수에 약하다는 뜻이다. 현지 관리인은 지금도 장마철에는 법당 마당까지 물이 찬다고 했다. 도선이나 그의 제자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이런 곳에 절을 입지시킬 수 없다.

목적은 두 가지. 하나는 상주하는 스님들을 홍수에 대비한 상비 노동력으로 쓰기 위한 것. 다른 하나는 땅을 어머님으로 보는 기본적인 사람들의 속성이다.

 

좋은 어머니(명당)는 그 자체로써 완벽 지향적이고 따라서 이상형이다. 현실에 완벽이나 이상이란 없다. 어떤 어머니라도 문제는 있다. 피곤하실 수도 있고 병이 들 수도 있고 성질이 고약할 수도 있다. 그런 어머니까지 정을 주고 효를 하라는 것이 이 절 입지의 교훈이다. 좋은 사람 잘해드리는 것이야 누가 못하겠는가. 이것이 자생풍수의 땅에 대한 사랑이다.

 

2) 고려 태조 왕건과 공민왕의 능(陵) 비교

 

태조는 개국자이다. 공민왕은 그로부터 사실상 고려가 끝나는 마지막 임금이다. 한데 태조릉[顯陵]은 평범하기 짝이 없고, 공민왕릉[玄陵]은 풍수 이론상 거의 완벽에 가깝다.

태조 당시는 중국의 이론풍수가 제대로 전해지기 전이다. 자생풍수가 지리학으로 여겨지던 때이다. 이는 고려 과거 시험 과목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반면 공민왕은 10년 넘게 북경에 머물면서 원나라 공주와 혼인을 했고 이름도 백안티무르였다. 게다가 그가 풍수(중국식)에 밝았고 거기에 변태적일 정도로 집착했다는 것은 여러 정황으로 확실하다고 본다. 문제는 태조릉 터가 너무 풍수 이론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주산은 좌우 산들보다 오히려 낮고 주변도 우리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경관이다. 내세울 것 없고 무지스럽다는 험담까지 들으며 살아온 우리들 어머니와 같은 풍경이다.

 

공민왕릉은 다르다. 사신사(四神砂)를 제대로 갖추었고 수국(水局)도 나무랄 데 없는 교과서적 명당이다. 남한의 풍수 전문가가 답사한다면 누구라도 천하명당으로 꼽을 것이다. 하지만 느낌은 다르다.

단적인 예 한 가지. 북한에서의 일정은 틀에 박힌 것이었다. 그런데 공민왕릉 답사를 끝낸 것이 12시 조금 넘어서였다. 당연히 거기서 곽밥(도시락)을 먹어야 하는데 굳이 왕건릉으로 가자는 것이다. 그곳을 보고 나니 오후 2시. 그때 점심을 먹었다.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 그냥 그랬다는 대답이다.

 

내 생각은 아니다. 공민왕릉은 너무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태라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편히 쉬기에는 부적당하다. 왕건릉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북한 안내원들은 느낌으로 그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내 의견을 듣고 모두들 수긍했다. 거기서 “봉건도배들의 터 잡기 잡술”로 정의 되던 풍수가 돌연 “민족 지형학”으로 둔갑을 해버렸다. 북한 고고학자 리정남의 표현이다.

 

3) 비보(裨補) 사례의 풍성함

 

이에 관한 연구는 충분하다. 더 이상 언급이 필요 없을 것이다. 중국 풍수 이론서에는 잘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그 의도하는 바 역시 땅으로부터 득을 보자기보다는, 땅을 고치고 다듬어 우리가 의지하기 편안한 곳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땅으로부터 빼앗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자는 공생(共生) 관계를 의도한 방법이다.

 

우리가 어머니인 땅이라고 했을 때, 그 어머니는 마냥 인자하기만한 분인가? 부모에게 자식은 축복이자 동시에 고난(苦難)이다. 당연히 땅은 부모이고 자식은 인간이다. 인간이 있음으로 해서 땅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축복이다. 자식을 키워본 부모들은 잘 알겠지만 출산의 기쁨은 잠깐이고 그 뒤는 간간이 끼어드는 행복을 빼고는 고난의 연속이다. 양육, 교육, 독립 보조, 이어지는 근심은 모두 견디기 힘든 고난이다.

 

그러니 우리가 땅에서 그 이상의 더 무엇을 바란다는 것은 마치 중환자실에 누워 계신 부모에게 손을 벌리는 파렴치한 짓이다. 이제는 늙고 병든 부모를 모셔야 할 때이다. 그저 방치하는 것은 효도가 아니다. 많은 환경 보호의 주장 속에는 은연 중 그런 함의(含意)가 있다. 제한적이고 계획적이며 자생풍수적인 개발 주장은 적극적 효도 관념이 담겨지게 된다. 무조건적인 개발 반대는 현실적이지도 않고 자생풍수적이지도 않다.

 

위의 세 가지 사례는 남한에도 부지기수이다. 그저 편의상 뽑은 예일 뿐이다.

 

(4) 어떻게 해야 하나

 

자생풍수에 대한 비판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내가 제안한 “자생풍수, 자연과의 조화, 대동적 공동체라는 매력적인 표현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땅에 대한 중심 논리는 결국 본능, 직관, 사랑이라는 것밖에는 없다.”, “지금 우리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합리적인 언어로 재정립해야 한다.”, “최대 약점은 땅의 질서와 논리에 대한 천착을 생략하고 풍수를 형이상학적인 마음의 차원으로 가져갔다.”, “신념의 대상으로서는 어찌되었든 간에 학설로서의 논증이 결여되어 있다.” 이런 것이 대표적인 비판의 골자일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나도 그런 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결실은 아직 신통치 못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침묵으로 대응해왔다. 그러나 오늘은 변명 겸 반론을 얘기해야겠다.

 

그 지적 중에는 나의 변화된 생각에 무관심해서 나온 것도 있다. 나는 형이상학을 모른다. 그러니 그런 주장을 펼 계제도 못되는 사람이다. 게다가 현장 답사 위주의 글로 거의 일관해왔고 이론적인 논문은 대학을 나온 후 발표한 것이 거의 없다. 신념 문제는 더욱 그렇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인문학자 정도로 불러주면 고마운 정도이다.

이 점은 20세기 지성의 거인이라 일컬어지는 자크 바전(Jacques Barzun)의 인문학에 대한 오해를 소개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본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자가 초래했다. 과학(science)과 겨루면서 자신도 과학의 반열에 오르고 말겠다는 의욕을 앞세우다가 인문학은 자기 무덤을 파고 말았다. 대학생에게 지엽말단적 사실을 추구하는 방법을 주입시키는 과정에서 인문학은 교양학문 본연의 미덕과 내용을 크게 잃어버렸다.

대학에서 인문학이 설 자리를 잃으면서 더욱 ‘연구’라는 말에 현혹되어 인문학자는 자신이 선택한 주제 안으로 파고들지 않고 주제에 대한 사실들만을 캐내는데 주력했다.”

 

 

말하자면 과학이 아니면서 과학의 흉내를 내다가 인문학의 특성인 균형 갖춘 시각과 총괄적인 입장 정리의 자세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풍수는 당대에는 과학이었지만 지금은 진정한 사이언스가 아니게 된 점을 사람들은 잊고 있다. 풍수는 인문학이다. 여기에 본능, 직관, 사랑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이다.

에릭 프롬이 “the art of loving”이라 했을 때 아트를 기술로 번역한 것은 잘못이다. 예술도 아니지만 “사랑을 하기 위한 그 무엇” 정도가 저자의 의도에 근접한 것이 아닐까. ‘그 무엇’이란 것은 논리적 사고나 정연한 학적 체계를 갖추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당연히 자생풍수는 그런 의미에서 사이언스가 아니라 아트에 가깝다. 명증(明證)한 언어로 당신의 주장을 내놓으라는 요구는 지나치다.

 

하지만 자생풍수의 인문적(人文的)인 방법론 제시는 가능하다. 인문적 방법론이란 경험과 자기 성찰, 그리고 직관을 비롯하여 동원 가능한 모든 인간적 본능들을 밑바탕으로 구체적이지는 않으나 각 부문에 방향과 아이디어, 혹은 영감을 줄 수 있는 것을 뜻한다.

 

그 골자는 “땅을 사람 대하듯 하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인류 출현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분야에서 관심을 기울이며 추구해 온, 일종의 만국(萬國), 인류의 온 역사를 통하여 공동 관심사이다. 수많은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아직 그에 대한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답안은 나오지 않았다. 그 답을 가장 근접하게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문학에 달려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느낌으로는 알고 있다. 그에 의지하여 땅과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을 평안케 하고 인간적으로 살게 하는 ‘삶터잡기’가 가능해 질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어떤 기준으로 그를 평가할까? 예컨대 맞선 볼 때를 생각해 보자. 우선 당사자는 상대방을 소위 객관적 기준으로 선택할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가족관계, 학벌, 장래성, 건강, 성품, 외모 같은 것들이 고려 대상의 예이다. 이런 것은 판단하기 어렵지 않다. 어려운 점은 이러한 조건들이 만족스러운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에게는 끌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왜?” 라는 주위의 질문에 당사자는 조리있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왜가 바로 자생풍수에서 터를 고르는 요체가 된다.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분명한 느낌은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런 경우를 수없이 만난다. 표현이 안 되면 엄연히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되지는 않는다. 자생풍수의 구체적 방법론을 얘기해달라는 사람들에게는 답답한 노릇이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자생풍수는 매우 주관적이고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객관성이나 논리적 체계화는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생풍수의 풍토 적응성이나 인간에의 천착은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논리체계를 갖추려 한다면 결국 자생풍수를 포기하고 잘 알려진 풍수의 기본논리 체계로 돌아가면 된다. 수없이 많은 풍수 서적들이 그 문제에 해답을 내놓고 있다. 나 역시 그 책을 통하여 이론을 배웠다.
그것들은 매우 중요하다. 책상에 앉아 공부할 때에는. 하지만 현장에 나가보면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책이란 그저 먼지로 돌아갈 뿐이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파우스트의 독백이다.

 

나는 답사를 통하여 도시의 재래시장이나 시골의 정기시장에 관하여 잘 알고 있었다고 믿었다. 대학을 사직하고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거기서 장사를 하여 생계 수단으로 삼으려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나는 내가 얼마나 시장의 가장 중요한 것들과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무지했던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구경꾼은 본질을 모른다. 답사를 해서 현장을 본다고 해결되지도 않는다. 오직 실전 경험만이 그 문제를 풀어줄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학문의 가치와 책의 가치를 극히 존중한다. 그 까닭은 그런 유한(有閑) 분위기 속에서 중요한 전기(轉機)를 마련할 수 있는 근거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공허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직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고 현실 속으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그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 무엇’을 알았을 때 자생풍수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명(自明)해진다.

 

(5) 마무리

 

내가 제안한 자생풍수는 아직 학문이 아니다. 나 스스로 자생풍수를 학문으로 인정해 달라고 한 적도 없다. 그러나 과학이 아닌 인문학, 이제는 대학에서도 사실상 버림받은, 으로서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인문학의 존재 이유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사실 풍수는 역사 속에서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지리학이다. 한번 써먹은 것을 재탕, 삼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실에 적응해야 하고 현재를 사는 사람에 부합해야 한다. 그 점에서 풍수의 한 갈래로 자생풍수를 무리가 가는 줄 알면서 주장한 것이다.

 

땅은 관람석에 않아 편안히 전문 해설가의 멘트나 들으면서 즐길 대상이 아니다. 여기서 해설가란 물론 풍수 전문가를 지칭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해설자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불편부당(不偏不黨)하게 경기를 풀어내기 위하여 선수 출신이 아닐 것을 요구한다. 실전 경험은 독선과 편협을 낳는다고 지레 짐작한다.

그래서 전문 해설가가 등장한다. 그들은 실제 뛰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보면 그냥 알 수 있는 것을 어려운 이론과 난해한 용어를 사용하여 진부화 시키기 때문에 듣는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 먼저 뛰어보고 남을 평가해야 현실 감각이 살아있는 재미있고 유익한 해설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축구, 농구, 야구 해설자 대부분은 비록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선수 출신들이다. 심지어 현역 유명 프로 선수가 해설자가 되어 인기를 끌기도 한다. 배움의 세계에서 인기나 재미는 거의 금기시되고 있다.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론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용어가 난해하면 난해할수록, 그 저변을 살펴보면 바로 그런 이론이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 자신이 경기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원되는 지적 사기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자생풍수를 이해하려면 현장에 나가서, 이해관계가 얽힌 입장에서 직접 경험해 보기를 권한다. 현장에는 자생풍수의 이론들이 무수히 널려있다. 마을 답사에서 흔히 느끼는 일이지만 주민들이 자신의 거주지를 명당으로 주장하는데도 풍수 이론상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곳이 많다. 자생풍수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그들이 그런 입지조건을 왜 풍수라고 했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게다가 자생풍수는 필시 도선 국사 혼자 천재성을 발휘하여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낸 독창적 지리 이론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쌓은 경험의 집적이 만든 지혜의 산물을 도선 국사란 상징 인물을 특칭(特稱)하여 내세운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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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감응과 풍수

 

조인철(자연과 건축대표)

 

최창조 선생님은 한국의 풍수를 발복(發福)의 풍수에서 생명의 풍수, 환경의 풍수, 문화의 풍수, 역사의 풍수로 거듭나게 하는데 많은 학문적 공헌을 하신 분으로 생각됩니다.
선생님께서 발표하신 내용 가운데 여러 가지 토론거리가 있는데, 그중 한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언젠가 선생님과 대화 중에 “묘자리 잘 쓰면 복받습니까?”하는 질문을 자주 받게 된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묘자리 발복은 풍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접근해야할 지를 고민하게 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과연 묘자리를 잘 쓰면 복을 받을 수 있을까? 묘자리를 잘못 쓰면 집안이 망하지는 않을까? 서구식 교육을 받고 서양 전래 종교에 몸을 담고 있는 분들에게 전혀 문제가 아닐지 몰라도, 많은 분들이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듯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번 발표문에서 뿐만 아니라 발표하신 많은 글에서 발복 풍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신 것으로 판단됩니다만, 이번 기회에 이 문제를 좀더 심도 깊게 다루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풍수에서의 발복 문제는 동기감응(同氣感應)의 이론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기감응이란 문자 그대로 같은 기운(氣運)끼리는 서로 감응(感應)을 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동기감응에 대한 이야기는 곽박(郭璞 :276~324)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풍수의 고전 금낭경(錦囊經)에 나오는 하나의 문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동산서붕(銅山西崩)에 영종동응(靈鐘東應)이라

 

이 말의 뜻은 서쪽에 있는 ‘구리광산’이 무너졌는데, 그 구리광산에서 나온 재료로 만든 동쪽 먼거리에 있는 ‘구리종’이 울린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함축된 여러가지 뜻이 있겠지만 풍수 발복의 바탕 논리로서 일면 과학적 설명을 하고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즉, 풍수에서 묘자리를 잘 씀으로써 받는 ‘복’은 여러 종교에서 기도(祈禱)에 의하여 응답되는 형식으로써 신(神)이 가져다주는 것의 일종인 그런 ‘복’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기감응의 원리는 소리굽쇠의 공진원리(共振原理)와 비유될 수 있다고 봅니다.

 

소리굽쇠와 같은 원리로 선친의 육신이 좋은 생기(生氣)를 공급 받음으로써 어떤 울림이 있게 되는데 구성성분이 가장 비슷한 뼈를 가진 자식에게 그 울림이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동기감응이 전달되는 것은 뼈끼리 서로 감응하는 것이므로 살아있는 뼈와 죽은 뼈 간에 이루어지는 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산자의 뼈나 죽은 자의 뼈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듯합니다.

동기감응상의 두 뼈는 단순히 주파수가 비슷한 소리굽쇠 ‘갑’과 소리굽쇠 ‘을’로 취급됩니다. 동기감응에 의한 울림을 발산하는 죽은 자의 뼈는 생명성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의 물체이며, 산자의 뼈도 울림을 받는 하나의 물체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기를 받은 죽은 자의 뼈가 지상파(地上波)로 그 울림을 발산하면 구성성분이 비슷한 물체에 가서 생기가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각 물질은 고유주파수 내지는 고유 진동수를 갖고 있다는 과학적 사고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죽은 자의 육신이 좋은 분위기를 타게 되면 그것이 산자에게 전달되어 마치 산자가 좋은 기운을 받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발복 이론의 요체로 생각됩니다. 결국 동기감응론의 관점에서 보면, 죽은 자의 몸(좀더 구체적으로 뼈 : 骨)은 생기전달(生氣傳達)을 위한 매개체인 것입니다.

산자는 생기(生氣)가 뭉쳐지는 곳[穴]에 죽은 자처럼 지속적으로 꼼짝하지 않고 있을 수 없으므로, 산자를 대신한 죽은 자의 육신을 통해서 생기를 공급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죽은 자의 뼈는 죽어서도 재활용되어 산자에게 적당한 세기의 생기(生氣)를 지속적으로 전달해주는 일종의 변압기(變壓器: Translator)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상에는 종교적 측면의 어떤 신적(神的) 존재도 개입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식상으로는 자연과학적 현상을 풍수논리에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발복한다는 논리는 종교적 힘을 빌리지 않고도 성립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동기감응과 관련된 이러한 의식들은 모든 세상이 기(氣)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나중의 태극사상과 연계). 이러한 사상은 인간을 자연의 여러 대상들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과 구분하여 생각지 않고 자연의 일부로써 합일되는 존재라는 도가적, 유가적 사상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자연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을 서구적 사고라 한다면, 자연과 인간을 일체로 보는 것을 동양적 사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복론을 비판적으로 본다고 해도 이러한 밑바탕의 이론까지 거부할 수는 없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풍수에서의 동기감응의 논리는 버려야 하는 이론일까요? 아니면 동기감응이론과는 별개로 발복(發福)에 대한 부분만 잘라내어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사실 묘자리 발복설을 믿기에는 논리적으로 허술한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생각나는 몇가지에 대해 언급하려고 합니다.

 

① 사람의 뼈만 동기감응의 대상이 되는가?


분명 금낭경의 내용을 모두 신뢰한다고 하면, ‘구리’라는 금속물체도 동기감응이 된다는 것인데 ‘동물의 뼈’는 왜 동기감응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요? 가끔 주인과 함께 명당에 묻힌 ‘말[馬]’의 무덤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개뼈다귀나 말뼈다귀는 동기감응의 대상이 되는지의 여부가 궁금해집니다. 요즘 개들이 사람못지 않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개발복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② 선대(先代)의 묘자리 중 어느 것이 동기감응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요?


자신과 가장 가까운 부모와 가장 센 동기감응이 있을 것 같은데 꼭 그렇지는 않은가 봅니다. 가끔 몇 대조(代祖)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 묘에서 발복했다고 하는 설명을 접하면 그런 의문이 생깁니다. 또한 선대의 묘 중 길한 묘와 흉한 묘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럴 때 길한 영향이 미치는지 흉한 영향이 미치는지, 아니면 서로 상쇄되는지가 궁금해집니다.

 

③ 또 장인 장모의 좋은 묘자리가 자식들의 발복과 연관되는지가 궁금해집니다. 또한 삼촌이나 이모의 묘는 어떨까요?


자식이 없어 양자(養子)로 들어온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경우에는 동기감응의 이론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때에도 발복이 되는지? 어떤 경우는 온전한 시신을 찾지 못해서 신체의 일부나 유품을 매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도 발복이 되는지?

 

④ 혈(穴)자리는 조금이라도 잘못 잡으면 길(吉)이 흉(凶)으로 바뀐다고 하는데 산줄기 하나에 종중묘(宗中墓)가 열지어 군(群)을 이루고 있는 곳은 어떻게 설명이 되어야 할 것인지?

 

도대체 풍수에서 발복한다고 할 때 복(福)은 무엇을 말하는지? 로또 복권에 당첨되는 것인지, 벼슬을 하는 것인지?
이러한 묘자리 발복에 대한 의문에 대해 납득할 수 있게 논리적 설명을 해주는 발복론자(發福論者)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묘자리 발복발흉론(發福發凶論)을 믿기엔 그 논리구조가 너무 허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도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묘자리 풍수발복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풍수발복론의 또 다른 강점(?)은 결과론적 해석을 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명당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묘자리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결과에 대해서는 장점에 빗대어 설명하면 되고, 나쁜 일에 대해서는 단점에 빗대어 설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결과론적 풍수논리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마다, 풍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곤 합니다. 풍수를 주제로 하는 인터넷 홈페이지 중에는 대통령 당선자를 미리 예측했다는 제목으로 경쟁하듯이 광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 결과론적인 해석으로 판단됩니다. 조상 묘자리를 보고 대통령 당선자를 예측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묘자리 발복론자로 분류될 수 있을 것입니다. 풍수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음택에 대한 공부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러다 보면 이러한 발복론자들의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풍수가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여러가지 이유 중에서 묘자리 발복의 부분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금낭경에서 비롯된 발복의식의 근거에는 ‘천인합일’의 사상을 비롯한 훌륭한 동양사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풍수가 현재에 재조명되고 가치를 인정받는 것도 결국은 이러한 훌륭한 사상적 배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풍수가 거듭나기 위해서 풍수의 부정적 요소를 어떻게든 걸러내어야 할 것인데, 풍수공부를 하고 있는 연구자로서 깊이 있게 연구하다 보면, 이러한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를 칼로 무 자르듯이 도려내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풍수연구자들 중에도(자칭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간혹) 묘자리 발복론자 또는 더나아가 발흉론자(發凶論者: 더욱 위험한 존재)가 아닐까하고 의심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비록 풍수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풍수 공부를 잘못한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선생님의 발표문 중에서 “발복을 바라는 이기적 음택풍수(陰宅風水, 즉 墓地風水)는 후대 사람들의 욕심이 만들어 놓은 잡술(雜術)일 뿐이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풍수 공부를 하는 후학들이 공부과정상 음택풍수를 공부하면서도 이러한 발복발흉론에 빠지지 않고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풍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좋은 말씀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국 풍수사상의 개요와 역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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