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상시

가장 / 이정록( 어머니 학교)

경호... 2013. 2. 5. 01:53

 

 

 

 

가장 / 이정록


높은 데 꾸역꾸역 몸 올려놓지 마라.

뭐든 잡아먹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놈하고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흘깃거리는 것들이나

꼭대기 좋아하는 거여, 상록회장에

이장만 안 했어도 십 년은 더 사셨을 거나.

대통령한테 마을 밤나무단지 하사금 타내려다가 시비가 붙어

코뼈가 가라앉은 것도 책임 떠맡은 죄 때문이 아니냐?

남자는 가장 하나만으로도 허리가 휘고 그늘 벗을 날 없는 겨.

가장 힘들어서 가장인 거여.

 

 

 

나비수건 / 이정록


고추밭에 다녀오다가

매운 눈 닦으려고 냇가에 쪼그려 앉았는데

몸체 보시한 나비 날개, 그 하얀 꽃잎이 살랑살랑 떠내려가더라.

물속에 그늘 한 점 너울너울 춤추며 가더라.

졸졸졸 상엿소리도 아름답더라.

맵게 살아봐야겠다고 싸돌아다니지 마라.

그늘 한 점이 꽃잎이고 꽃잎 한 점이 날개려니

그럭저럭, 물 밖 햇살이나 우러르며 흘러가거라.

땀에 전 머릿수건 냇물에 띄우니 이만한 꽃그늘이 없지 싶더라.

그늘 한 점 데리고 가는 게 인생이지 싶더라.


 

 

사그랑주머니 / 이정록 

 

노각이나 늙은 호박을 쪼개다 보면 

속이 텅 비어있지 않데? 지 몸 부풀려

씨앗한테 가르치느라고 그런 겨.

커다란 하늘과 맞딱뜨린 새싹이

기죽을까봐, 큰 숨 들이마신 겨.

내가 이십 리 읍내 장에 어떻게든

어린 널 끌고 다니 걸 야속게 생각 마라.

다 넓은 세상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여.

장성한 새끼들한테 뭘 또 가르치겄다고

둥그렇게 허리가 굽는지 모르겄다.

뭐든 늙고 물러 속이 텅 빈 사그랑주머니*를 보면

큰 하늘을 모셨구나! 하고는

무작정 섬겨야 쓴다.

 

*사그랑주머니: 다 삭은 주머니라는 뜻으로, 속은 다 삭고 겉모양만 남은 물건을 이르는 말.

 

 

 

거울 / 이정록


산해진미만 먹어도 목구멍에 가래가 끼고,
독경소리만 듣고 살아도 귓밥이 고봉밥인 거여.
어미가 맘 조리 잘못하고 너한테 쌍소리해서 미안하다.


꽃향기만 맡으며 사는
선녀 콧구멍에도 코딱지 가득할거여.
하물며 어미는 똥밭에 구르는 쇠똥구리 아니냐?


먹고 싸고 숨 쉬는 게, 도 닦는 거여.
향기도 꿀도 다 찌꺼기가 있는 법이여.
아무 곳에다 튀튀 내뱉으면 어린애지 어른이냐?


자식만 한 거울이 어디 있겄냐?
도 닦는 데는 식구가 제일 웃질인 거여.

 

 

 

시 / 이정록

 

시란 거 말이다.
내가 볼 때,
그거 업는 애기 삼 년 찾기다.
업는 애기를 왜 삼 년이나 찾는지 아냐?


세 살은 돼야 엄마를 똑바로 찾거든
농사도 삼년을 부쳐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며
이 빠진 옥수수 잠꼬대 소리가 들리지.


시 깜냥이 어깨너머에 납작하여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너를 엄마! 하고 부를 때까지
그냥 모로쇠하며 같이 사는 겨


세쌍동이 네쌍동이 한꺼번에 둘러업고
젖 준놈 또 주고 굶긴 놈 또 굶기지 말고
시답잖았던 녀석이 엄마! 잇몸 내보이며 웃을 때까지.

 

 

 

주전자 꼭지처럼 / 이정록


어비 아비가 되면 손발 시리고

가슴이 솥바닥처럼 끄슬리는 거여.

하느님도 수족 저림에 걸렸을 거다.

숯 씹는 돼지처럼 속이 시커멓게 탔을 거다.

목마른 세상에 주전자 꼭지를 물리는 사람.

마른 싹눈에 주전자 꼭지처럼 절하는 사람.

주전자는 꼭지가 그중 아름답지.

새 부리 미운 거 본 적이 있냐?

주전자 꼭지 얼어붙지 않게 졸졸졸 노래해라.

아무 때나 부르르 뚜껑 열어젖힌 채

새싹 위에다 끓는 물 내쏟지 말고.

 

 

 

가물치 / 이정록


자고로 사내란

사타구니에 두더지 한 마리씩 키우지.

어떤 사내들은 장터루 방목도 다니고 방생도 헌다지만

아버지 두더지는 텃밭을 벗어난 적 없어야.

두더지보다두 아버지가 평생 공들인 건

오른팔 적삼 속에다 키운 가물치 한 마리여.

난생처음 예당저수지루 낚시질 갔다가

눈먼 가물치를 비료푸대에 담아 왔는데

이 사람 저 사람 짬날 때마다 어찌나 호들갑 떨던지.

그 가물치가 해마다 두어 뼘씩은 자라서 나중에는

팔뚝만으론 설명할 길이 없는 거라, 허벅지까지 걷어붙이고는

딱 한 번 잡아먹은 비린 것 자랑이 이만저만 아녔는데

당신이 그 가물치를 잡지 않았으면 배가 뒤집힐 텐데

덕산고등학교 조정선수들이 어찌 노를 저을 것이냐.

막걸리 사발이나 비워댔지. 남자는 풍이 좀 걸쭉해야 사내답지.

그 왕가물치가 꼬리지느러미로 저수지 바닥을 때리면

집채만 한 너울이 일어 예당평야에 물난리가 났을 것이라고

흰소리 늘어놓더니, 간경화에 설암까지 겹쳐 허벅지를 꺼냈을 땐

가물치두 그 옛날 비료푸대로 되돌아간 듯 시름시름 비척대더구나.

가물치가 사타구니 쪽으로 자꾸 주둥일 치대니까

아버지 두더지는 어느 구멍으로 사라졌는지

막내 낳기도 전에 소금 맞은 거머리처럼 가뭇없어졌는데

엊그제 선산에 올랐더니만 글쎄 아버지 무덤 가운데다

기똥차게 가르마를 터놨더구나. 그나저나

가물치가 여자한테 아무리 좋다 한들

두더지 내뺀 뒤에 뭔 소용이것어.

 

 

시집<어머니 학교> 

 

 

 

어머니의 화엄 시학

 

황현산黃鉉産(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이정록의 시집『어머니 학교』는, 시인의 말을 믿는다면, 시인과 시인의 어머니가 함께 쓴 시집이다. 이렇게 쓰면서 나는 시인의 어머니와 시인 가운데 누구를 먼저 말해야 할지 조금 망설인다. 그래서 ‘이 시를 쓰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하는 일은 무엇인지도 묻게 되고, 더 폭을 넓혀서 ‘시 쓰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무엇인지도 묻게 된다. 조금씩 모양을 바꾼 질문들이 더 떠오른다.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어머니에게 학교의 교사인 아들은 무엇인지, 고급 지식을 머리로 천착해온 아들에게 세상을 몸으로 배우고 몸으로 살아가는 어머니는 무엇인지, 무른 어머니학교와 단단한 아들의 학교가 무엇으로 서로 차별을 짓고 무엇으로 서로 보충하는지, 아니 차별이나 보충이라는 말이 가당한 것인지…… 그런데 나는 이렇게 차례차례 또는 한꺼번에 질문을 떠올리면서, 저 무른 학교의 가르침을 추스르는 일보다는 두 학교의 관계에서 시가 무엇이며, 시 안에서 두 학교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 묻는 일에 먼저 모아진 초점을 쉽게 이동하지 못한다. 이는 내가 아들의 글로 전해지는 어머니의 경전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지혜로운 말에서 하나의 시학을 보려 할 때만 그 가치를 가장 깊이 이해하게 된다고 암암리에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집의 서문에서 시인은 어느 날 새벽 몸이 이상해서 살펴보니 오른손을 제외한 온몸이 어머니와 한 몸이 되어 “침대와 천장 사이를 날고 있었다”고 말한다. 몸이 이상하게 크게 변화했다는 것은 그의 주체가 반나마 허물어져 다른 존재를 받아들였다는 것이고, 몸이 떠서 날고 있었다는 것은 그렇게 변화된 존재가 예전의 존재보다 더 고양되고 활기찬 상태를 경험했다는 것이며, 오른손이 “채 어머니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존재의 두 상태를 조종하고 비평하는 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의식이 “쏟아지는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 적었다. 시인은 이 창작의 정황에 대해 ‘시마’와 ‘빙의’를 모두 부정하고 있지만, 그러나 또한 이 부정은 어떤 마력에 휘둘리는 것과 같은 특이한 열정의 체험과 강력한 외부적 정신의 개입이 없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이에 대한 시인의 성찰은 다소 엉뚱하게 끝난다.

 

“서른 편쯤 쓰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나를 나으신 어머니가 수천수만임을.”

 

어머니의 존재가 그렇게 많다는 것은 아들이 그만큼 여러 번 다시 태어났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이『어머니 학교』는 하나의 성장 서사가 된다. 이때 내가 쓰는 “하나의”라는 말은 여럿 중에서 우선 “특별히 기록하고 기념해야 할 하나”라는 뜻이지만, “온전하고 일관성을 지닌”이란 뜻도 포함된다.

 

아들이 늘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은 그에게 긍지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다. 부족함은 물론 인간의 숙명이며, 그 숙명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오만에 해당한다. 오만은 긍지가 아니며, 차라리 그 반대다. 오만은 모든 긍지를, 저 자신의 긍지까지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긍지란 떳떳함인데, 떳떳함은 떳떳함과 만나서 떳떳하지만, 오만한 자는 어떤 것과도 만나려 하지 않는다. 떳떳한 만남을 두려워하고 저주하는 오만은 필연적인 고립을 피하기 위해 저 자신을 제도로 만든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이렇게 되어 있다거나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만나는 대신에 지배한다. 제가 무엇을 하는지 묻지 않는 관료 조직이 그렇고, 온갖 이데올로기가 그렇고, 무엇보다도 지식의 체계가 그렇다.

어머니는 이 지식의 체계를 비롯한 모든 체계의 비밀을 안다. 「메주」를 “어머니학교”의 철학이라고 불러 마땅한 것은 그것이 음식 맛의 비법일 뿐만 아니라 지식의 존재론에 닿아 있으며, 빈틈없는 두서를 자랑하는 것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너는 누구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들의 앞뒤 두 끝을 한꺼번에 쥐고 그 머리와 꼬리가 서로 만나게 하는 탁월한 방법론의 예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메주를 왜 네모나게 만드는지 아냐?

굴러떨어지면 데굴데굴 흙먼지 묻을 것 아니야.

묶어 메달기 편해서도 그러겄지만

각지게 만든 게 장맛이 더 좋아야

각진 놈은 둥그러지고 싶고

둥근 놈은 각 잡고 싶지 않겄냐?

맛이 무슨 군인이라고 혓바늘 세워

각 잡고 군기 세우고 그러겄냐?

맛은 두루뭉술 넘어가는 목넘이가 좋아야지

그래서 둥근 노깡 샘보다

네모난 대동샘 물맛이 더 좋은 거여.

 

 

지식은 저 자신이 무한한 세상의 한 귀퉁이를 몇 개의 네모꼴로 잘라서 편하게 사용하기 위한 잠정적 수단임을 알지 못할 때 오만한 권력이 된다. 지식은 크고 둥근 것을 다 말할 수 없어서 작고 네모난 것으로 말한다. 구불구불 움직이는 것들을 한꺼번에 말하기 어려워 그것들을 직선 위에 세워놓고 말한다.

내력이 습관을 만들지만, 습관은 내력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습관이라고 불린다. 메주와 샘은 왜 제가 네모난 것으로 멈춰 있는지를 기억한다. 그것이 어머니의 기억이다. 그러나 또한 어머니는 네모가 네모인 것을 축하한다. 조각난 네모와 정지된 직선에 길든 습관은 제가 크고 둥글고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생각이 바야흐로 권력이 된다는 것을 어머니는 알기 때문이다. 네모와 직선은 저를 비우고 최초의 의도를 다시 불러오기 위해서만 거기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자신을 작은 네모로 자각하는 네모를 축하한다.

「전망」에서 말하는 것처럼, “둥지에서 내다보는”것이 아니라 “있는 힘 다해, 날개 쳐 올라가서 보는”것이 “진짜 전망”인 이유도 이와 같겠다. 가진 힘을 다 모아 자리를 옮겨보는 새는 제가 보았다고 생각한 것을 부정하고, 그렇게 부정해야 할 것으로 이루어진 저 자신의 주체를 깨뜨린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 학교’의 철학은 시학이 된다. 모진 것에서 둥근 것으로, 둥근 것에서 좀 더 커진 모진 것으로 재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 때 자주 성공하는 것이 시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력에 대한 기억이 이 재빠른 이동을 늘 가능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기억의 시간들이 제 차례를 지키며 일렬로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오히려 어떤 순간에, 아니 그보다는 어떤 장소에 한꺼번에 모여든다.「검은 눈물」에서 “성난 새끼” 추스르기 위해 어머니가 가장 신령한 새의 날갯짓으로 곡진한 마음의 춤을 추는 시간이 그렇고,「눈물둑」에서 “숨보”를 막지 않기 위해 “눈물둑이 무너져라” 넋 놓고 울게 될 시간이 그렇고,「중심」에서 “허기”가 행동의 예각으로 모이는 시간이 그렇다. 「몸과 맘을 다」에서 장맛을 만드는 “묵은 시간”은 한 장소의 깊이를 만드는 그 시간들의 종합처럼 보인다.

 

 

장독 뚜껑 열 때마다

항아리 속 묵은 시간에다 인사하지

된장 고추장이 얼마나 제맛에 골똘한지

손가락 찔러 맛보지 않고는 못 배기지

술 항아리 본 적 있을 거다.

서로 응원하느라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입술들,

장맛 술맛도 그렇게 있는 힘 다해 저를 만들어가는데

글 쓰고 애들 가르치는 사람은 말해 뭣 하겄냐?

그저 몸과 맘을 다 쏟아야 한다

무른 속살 파먹는 복숭아벌레처럼

턱만 주억거리지 말고

 

 

“몸과 맘을 다”하는 시간은 한 존재에게서 그 행위의 의지와 조건이 서로를 이끌며 만나는 시간이다. “있는 힘 다해 저를 만들어”간다는 말은 쉬운 말이지만 단순한 말이 아니다. 생명이, 또는 생명의 형식을 지닌 모든 것이 있는 힘을 다하는 일은 제 숨은 능력의 개화를 향해 매진하는 과정이지만, 그 밀도 높은 시간은 제가 자기 자신임을 가장 완전하게 자각하는 계기이기도 하지 않는가. 복숭아벌레처럼 눈앞에 쌓인 것을 파먹는 일이 그 삶 전체인 생명에게는 그 계기의 순간이 없다. 생명으로서의 제 존재를 온전하게 느낄 시간이 없는 그 생명은 생명조차도 아니다. 모든 시간이 동일한 순간의 반보일 그 생명에게는 기억이 없으며, 기억 속에 축적될 시간도 없다.

 

어머니학교의 윤리적 품위와 시적 재능의 비밀도 필경 생명에 대한 이 온전한 체험과 자각에서 비롯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머니의 말이 늘 기운생동의 묘를 얻는 것은 그 삶이 공간적으로 사물과의 관계를 운동의 형식으로 누리고, 시간적으로 최다의 기억이 지금 여기의 일점을 향해 용솟음치기 때문이다. 말과 함께 관계가 바뀌고, 말과 함께 기억이 다른 또 하나의 성질을 획득한다. 추억담이건 감정의 토로건, 범상하게 시작했던 말이 독자의 진부한 예상을 어김없이 깨뜨리고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으로 선회하여 뜻밖의 자리에서 반전하면서도 그 일관성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는다. 길다고 할 수 없는 한 편 한 편의 서술이 요약하기 어려운 말의 곡절을 그렇게 담아낸다.「주전자 꼭지처럼」은 어미아비 노릇의 고달픔에 관해서 먼저 말한다. 그 가슴이 끄슬려 솥바닥과 같다.

만인의 부모인 하느님도 “수족 저림”에 걸렸을 것이고, “숯 씹은 돼지처럼 속이 시커멓게 탔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속이 타면서도, 실은 탈수록, 세상에 보시하는 기능으로서의 “목마른 세상에 주전자 꼭지를 물리는” 일은 극히 은혜로운 일이며, 주전자 꼭지와 주전자 꼭지처럼 생긴 것은, 새 부리가 그렇듯, 대부분 아름답다. 그래서 “주전자 꼭지 얼어붙지 않게 졸졸졸 노래해”야 한다. 그러나 마지막 말이 남아 있다.

“아무 때나 부르르 뚜껑 열어젖힌 채/새싹 위에다 끓는 물 내쏟지 말고”.

베풀기에서 중요한 것은 베풀려는 성급한 욕망이 아니라 그 정성이란 뜻이겠다. 논리의 복잡한 곡절을 담고 있는 이 시는 서양의 소네트에도 못 미치는 12행이다.「물」은 티브이에 연결된 접시 안테나를 눕혀놓으면 새의 물그릇으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엉뚱한 발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에어컨에 결로현상이 불러온 의문으로 끝난다.

“뭐가 그리 슬퍼서 울어쌓는다니? / 남의 집 것도 그런다니?” 그런데 사실은 이런 예시가 부질없다.

『어머니학교』일흔 두 편 가운데 어느 편도 같은 방식으로 거론되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사물의 관계가 관계를 개선하여 또 하나의 관계를 들어 올리고, 기억이 기억에 개입하여 또 하나의 기억을 편집한다. 관계와 기억이 말의 활기를 타고 약동하여, 끊임없이 움직이는 평화 하나를 고루 펼친다. 이 평화는 늘 우미하고 때로는 장엄하다.

 

『어머니학교』는 에로스의 학교인데, 다른 말로 하면 도의 학교다. 범우주적 생명력으로서의 에로스는 생명과 생명을, 생명 아닌 것과 생명을 연결한다. 그 몸이 학교인 어머니는 세상이 바위와 나무와 짐승으로 구별되지 않는 아이의 시선과 바람결 하나에도 만물의 표정이 바뀌는 과학자의 시선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차별 없는 세상에서도, 빈틈없는 차이로 가득 메워진 세상에서도, 이 모서리와 저 모서리를 연결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물처럼 바람처럼 어디에나 스미듯, 어머니의 시선이 또한 그러하다. 섬세하게도 소의 햇빛 받는 쪽 등허리에 얹어야 할 그림자를 생각하고, 굵게는 조국의 통일을 염려한다. 작은 배려도 큰 근심도 둘이 아니다. 생명과 드잡이하고 사귀는 모든 사물은 저마다 동일한 몸의 노고를 요구하며 세상의 크기만큼 몸을 연장해준다. 몸과 세상은 둘이 아니다. 몸이 내가 아니라면 세상도 내가 아니다. 사랑이 세상에서 노고하게 하고 분열된 자아를 하나로 복원한다. 사물과 노고하여 사귈 때마다, “수천수만” 어머니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나는 그때마다 다시 이름 붙여야 하는 도이다.

 

그러나 슬프다. 어머니학교의 어머니가 벌써 수의를 준비했을 연세에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채 실현되기도 전에 사라지고 나서만 파라다이스로 기억되는 모든 파라다이스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화엄도 그것이 위기에 처했기에 화엄의 빛이 밝게 드러난다고 생각하면 슬프다. 우리는 이제 몸의 척도로는 가늠할 수 없는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지 벌써 오래다.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다만, 기억 없는 삶을 향해 줄달음치는 이 세상에서도 기억을 쟁취하려는 정신들은 어디에나 있다. 기억은 용감한 정신들의 미래다. 시는 기억의 재능이며 미래에 대한 믿음이다. 기억집중의 기술을 가르치는 어머니학교는 시인의 학교이며 시인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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