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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따르는 일상이 신통 / 성재헌이 쓰는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경호... 2012. 12. 18. 15:05

성재헌이 쓰는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46. 찻집 할머니, 신통을 부리다

 

찻잔에 조심조심 차 따르는 일상이 신통

 

신통력이란 말에 놀란 스님들

찻집 노파 일상심으로 깨우쳐

희한한 언행으로 혹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신통과 무관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몇 년 전, 한 해가 저무는 이맘 때였다. 찬바람에도 아침마다 아버지를 찾아오시던 갈말 할아버지가 하루는 대뜸 나에게 말을 거셨다.


“자네, 내 올해 토정비결 좀 봐주게.”
“저, 그런 거 모르는데요.”
“불교공부를 했다면서 그것도 몰라!”

 

재작년 여름, 첫 손자를 본 이모가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애기 이름 좀 지어줘라.”
“손자 이름은 할머니가 정을 담뿍 담아 지어줘야지. 아님 아버지가 짓든지.”
“제대로 지어야지. 관운에 재운까지 팔자가 술술 풀리게.”
“나 그런 거 모르는데.”
“그것도 모르면 도대체 네가 안다는 건 뭐냐!”

 

작년, 제법 큰 식당을 운영하면서 목에 힘 좀 주던 친구가 어느 날 우거지상을 하고 물었다.
“요즘 통 장사가 안 되네. 어떤 장사로 바꾸면 좋을까?”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돈 버는 일이면 네가 더 잘 알잖아.”
“밥장사는 내 사주에 안 맞나봐. 사주에 맞아야 운도 따른다던데.”
“나 그런 거 모르는데.”
“뭔 신통력이 좀 있나 했더니, 너도 별 수 없네!”

 

지난 달, 제법 깊은 인연을 맺었던 보살님이 간만에 전화를 했다.
“우리 아이가 결혼하려고 여자를 데려왔어요.”
“벌써 며느리 보시네요. 축하드립니다.”
“축하는요, 결혼시켜도 좋을까 걱정이 앞서네요.”
“왜요? 며느릿감이 맘에 안 드세요?”
“아뇨, 애는 얌전하고 참 착하던데….”
“애들이 서로 좋다고 하고, 시부모가 보기에도 참하면 됐죠. 뭐가 걱정이세요.”
“잠깐 좋아서 들뜨는 건 쉽지만 궁합이 안 맞으면 서로 힘들고 오래 못가잖아요. 그래서 전화 드렸어요.”
“궁합요? 저 그건 거 모르는데.”
“법사님이 그걸 모르시면….”

 

점잖은 체면에 “순 엉터리”란 소리를 대놓고 할 수도 없고, 초점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교는 그런 게 아니고~”  하며 관심사 밖의 얘기를 주절주절 풀어놓을 수도 없으니, 이럴 때마다 난감해지긴 그나 나나 마찬가지다.


신통(神通), 이도저도 못할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척! 하니 해결할 신통방통한 묘수를 찾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허나 다들 하늘에서 돈벼락이 치게 하고 마당에서 금덩이를 캐게 할 혹! 하는 신통에만 눈길이 쏠려있으니, 그게 문제다. 설령 로또에 당첨된다 해도 골머리 지끈지끈할 일은 다시 생기기 마련이니, 그런 건 평온한 행복을 영원히 누리는 신통방통한 묘수가 되진 못한다.


신통, 경전과 어록에 수없이 등장하는 단어이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한 순간에 거두어주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공포를 한 순간에 쓸어버리고, 미쳐 날뛰는 자의 뜀박질을 한 순간에 멈추게 하고, 삶의 무게에 지쳐 쓰러진 자를 벌떡 일으켜 세우셨으니, 불법을 배우는 자들이 자신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허나 삼계의 대도사로 존경받으려면 손가락질로 황금이 묻힌 곳을 찾아내고, 손길 한번으로 난치병을 치유하고, 공중부양쯤은 방귀뀌듯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니, 그게 문제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놓으면 보따리 내놓으라 하는 법이다. 설령 벼락부자로 만들어주고 다 죽어가는 사람 살려냈다 해도 그는 다시 찾아와 울트라 캡 짱 벼락부자가 되고 싶다며, 사람이 백년은 살아야하지 않겠냐며 애걸복걸할 것이니, 그런 건 반복되는 고통의 수렁에서 영원히 건져주는 묘수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선정과 지혜를 닦으면 마술사가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월창거사가 편집한 ‘선학입문(禪學入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선정을 닦을 때 신비한 현상에 혹하게 되면 귀신이 따라붙는다. 그러면 귀신의 힘으로 인해 갑자기 지혜가 날카로워지고 말솜씨가 유창해지기도 하며, 길흉사를 척척 알아맞히고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런 기적을 보이면 사람들이 감동해 성현이라 칭송하고 무조건 그에게 복종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여전히 삼독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는 중생일 뿐이다. 탐욕과 분노에 휩쓸려 마음도 삿되고 행위도 거짓된 그는 귀신의 권속이지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다.”

 


이것만 보아도 희한한 언행으로 사람들의 눈을 혹하게 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신통(神通)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 불법에서 말하는 신통은 과연 뭘까? ‘전등록’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스님 세 분이 목을 축이러 길가 허름한 찻집에 들었다.

찻집 주인은 웃음이 푸근한 호호 할머니였다. 공손한 합장으로 스님들을 맞은 할머니는 정성껏 다린 차와 찻잔 세 개를 소반 위에 올리고서 차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스님들, 불법을 배웠다면 모름지기 신통을 갖춰야하지 않겠습니까? 신통력을 가지신 분만 차를 드십시오.”


세 스님은 멀뚱멀뚱 서로 쳐다볼 뿐, 감히 찻잔에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 늙은이가 신통을 부려볼 테니 구경하십시오.”


그리고는 찻잔을 들어 스님들 앞에 차례차례 놓고 조심조심 차를 따랐다.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능력을 보여 달라고 조르는 제자에게 숭악(嵩嶽) 혜안국사(慧安國師)는 윙크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 순간, 그 제자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돌아볼 일이다. 눈짓, 이게 어떻게 일어나는 일일까?

찬찬히 돌아보면, 거기엔 나고 없고 내 것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되니 말이다. 이렇다 할 실체가 없는데도 천태만상의 현상이 펼쳐지는 인연의 신비로움에 절로 입이 떡! 벌어질 것이니 말이다. 그러면, 찻집 할머니처럼 일상의 행위 속에서 이고 진 고단한 짐을 단박에 내려놓는 또 내려놓게 하는 묘수를 부릴 테니 말이다. 

 

 

 

 

45. 협산(夾山), 다리 뻗고 자다

 

도는 세치의 얄팍한 혀에 있지 않다

 

불법 이치는 누구나 알아도

실천 없으면 공덕 입지 못해

 

말로 세상사람 지도하는 스님

뱃사공이 물속 처박아 깨우쳐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멀리서 벗이 찾아왔다. 욕망과 열정이 뒤엉킨 젊은 날을 함께 보내며 불교공부를 한 사이니, 보통 인연이 아니다. 공자님 말씀대로 기뻐해야 마땅할 텐데, 맘이 무거웠다.

깊게 패인 팔자주름이 미간에 여전하고, 억지웃음 너머의 씁쓸함이 입가에 여전했기 때문이다. 털어놓는다고 풀어질 근심이 아니란 걸 그가 잘 알고, 고단한 짐을 나눠질 역량이 없다는 걸 나 역시 잘 아니, 둘 사이에 특별한 기대란 있을 수 없다.


그래도 친구랍시고 멀리까지 찾아와주었으니, 한 잔 술이 빠질 수 없다. 우수수 지는 낙엽이나 함께 밟자며 연화지 근처 막걸리 집을 찾았다. 안주로 시킨 해물파전은 입심만 좋은 주인장을 닮아 밀가루 덩어리에 오징어다리만 서너 개 떠다니고, 찌그러진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는 인정에 굶주린 손님을 닮아 헤프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왔으니 즐거워야 하지 않겠는가? 둘은 홍상수의 ‘북촌방향’과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끄집어내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된 일상의 허접함을 논하면서 지기를 만난 즐거움을 억지로나마 만들어보려 애썼다. 그렇게 어두워지는 창밖으로 끌리는 눈길을 애써 거두면서 술잔을 부딪치다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친구가 잠든 방문을 열었다. 잠결에도 미간은 찡그린 채였고, 구들장이 뜨끈한데도 새우처럼 두 다리를 웅크리고 있었다. 가슴이 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친구가 부스스 눈을 떴다.

“더 안자니?”


만사가 귀찮을 친구에게 감히 한 마디 꺼냈다.


“오온(五蘊)이 공하다는 것 알지?”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쓰냐며 비웃지 않을까 두려웠다. 다행히도 친구는 가만히 눈을 감아주었다. 해서 또 용기를 내었다.


“반야심경 첫 구절에 ‘오온이 공함을 관찰하면 모든 고난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했잖아. 그걸 가슴 깊이 새겼으면 좋겠어. 그러면 그 허전함과 슬픔, 불안과 초조가 사라질 거야.”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불교공부를 했다면 삼척동자도 알 소리를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속삭였다. 왜냐고? 부처님 말씀은 뻔히 안다 해도, 지당하다며 고개로 절구질을 한다 해도, 좌우 위아래로 엮어 줄줄이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스스로 뼈저리게 되새기기 전엔 끝내 그 말씀의 공덕을 입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견(照見), 번민에서 벗어날 방법은 오직 그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등록’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경구(京口)에 선회(善會) 스님이 살고 있었다. 그는 용모도 걸출하고, 위의도 방정하고, 경율론 삼학에 두루 통달해 지혜와 언변이 탁월했던 탓에 젊은 나이에 한 회상의 주인이 되었다.

어느 날 저녁 그 절로 허름한 차림새의 노스님 한분이 지팡이를 질질 끌고 찾아왔는데, 마침 선회 스님이 상당하여 법문을 하던 참이었다.

한 스님이 일어나 선회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법신(法身)입니까?”

“법신은 모습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 법안(法眼)입니까?”

“법안은 티가 없습니다.”


눈빛을 반짝이는 학인들 앞에서 선회 스님은 목청을 높였다.

 

“눈앞에는 법이 없는데도 다들 마음이 눈앞에만 있습니다. 그건 눈앞에 있는 법이 아니니, 눈과 귀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대중 틈에서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슬그머니 끼어들어와 법문을 듣던 그 허름한 노스님이었다. 선회 스님이 법문을 멈추고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


노스님의 웃음은 그치질 않았다.


“화상이 출중하여 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지도하긴 하지만 아직 스승을 만나지 못했군요.

제중(中)의 화정현(華亭縣)에 가면 뱃사공노릇을 하는 스님이 한분 있을 게요.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고 싶거든 그분을 찾아뵈시오.”

 

말씀을 마치자마자 휙 하니 돌아서 떠나버렸으니, 그 노스님이 바로 약산(藥山)의 수제자 도오(道吾)선사였다. 선회 스님은 참 진중한 사람이었나 보다. 스승 노릇하던 체면 따윈 안중에도 없이 곧바로 회상의 제자들을 흩어버리고 화정으로 길을 나섰다.

과연 그곳에는 눈빛이 범상치 않은 뱃사공이 있었다. 그 뱃전에 올라앉자 사공은 허리가 휘도록 노를 저으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스님은 어느 절에 머무십니까?”


스승을 찾는 일이니 대답이 범상할 수 없다.

“절이란 곧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머문다면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비슷하고 비슷하지 않다는 그게 도대체 뭡니까?”

“눈앞에는 그것과 비슷한 것이 없습니다.”


강 한가운데서 노를 멈추고 사공은 혀를 찼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습니까?”


장부가 칼을 뽑았으니 물러설 수 없는 노릇이다. 선회는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에 힘을 더했다.

“귀와 눈이 미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자 사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한마디 딱 들어맞는 말이 만겁에 당나귀를 묶어두는 말뚝이랍니다. 천 길이나 되는 긴 낚싯줄을 드리운 것은 못 속 깊은 곳에 뜻이 있는 것이니, 세 치의 얄팍한 갈고리를 벗어나서 얼른 말해보시오, 얼른 말해봐.”


선회가 입을 열려고 하자, 곧바로 사공이 삿대로 밀어 물속에 처박아버렸다.

선회 스님은 이때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 후 협산(夾山)에 주석할 때 일이다. 어느 날, 자기는 왜 깨닫지 못한 채 못나고 부족하고 미련한 중생으로 사는 거냐고 투덜거리는 제자에게 이런 게송을 읊으셨다.

 

분명하구나, 분명해, 깨달을 법이 없나니/

법을 깨달았다고 하면 도리어 미혹한 사람/

두 다리 쭉 뻗고 자게나/

거짓도 없고 참도 없으니.


부디 비웃지 말길 바라며 친구에게 다시 한 번 말해 보아야겠다.

“오온은 공한 것이야”

두 다리 쭉 뻗고 잠들기를 바라며 간곡히 말해 보아야겠다.

“봐, 위선의 가면도 그 가면 너머 얼굴도 그 무도회에 참여한 나도 몽땅 꿈같고, 물거품 같잖아.”

 


성재헌

 

 

/ 법보

 

 

 

...

 

 

 

요즘 어떤 스님은 똥막대기를 들고 다니고

어떤 스님은 잘 생긴 얼굴에 부처님 화광을 쓰고 다니는데

 

윗글의 뱃사공이 보면 뭐라 할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