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佛敎에關한 글

선문답의 장치와 해체 / 김영욱

경호... 2012. 12. 16. 23:53

大韓哲學會論文集

?哲學硏究? 第99輯, 2006.

 

 

선문답의 장치와 해체

 

김영욱(가산불교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논문개요]

 

선문답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는 의식 작용의 고착된 요소들을 포착하여 그 힘을 무력화시키는 데 있다. 이 목적을 적절히 수행하기 위하여 선사들은 문답 속에 일종의 함정을 파놓는다. 그것은 상대의 경직된 관념을 역으로 활용하는 장치이며, 이 장치로 상대를 유인한 다음 결국은 해체시킴으로써 그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 논문은 바로 이러한 ‘장치와 해체’라는 도구로써 선문답의 진실을 밝히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간화선의 종사들이 자신의 문답에 적용하는 기본적인 수단이며, 동시에 여타의 선문답을 분석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방법은 간화선의 수행법인 화두 공부의 핵심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장치는 공부 대상으로서의 화두와 그 기능상 일치한다. 종사들은 이 장치에 상대가 걸려들도록 하여 그들의 인식과 판단의 도구를 모조리 빼앗는다. 이와 같이 부단히 반복하여 화두에 대한 어떤 말과 분별도 통하지 않는 은산철벽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화두 공부가 극치에 이르러 만나게 되는 경계가 바로 이 은산철벽이다.

선문답에 實인 듯이 가장한 虛가 있다는 점은 장치와 해체라는 요소로 구성된 선문답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문답의 곳곳에서 이렇게 가장된 實을 포착해 내어 그 베일이 벗기면 선문답의 말 하나하나에서 虛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불성?마음?우주?진리 등과 같은 문답 속의 소재들은 그 어떤 것도 實이 있는 것처럼 주어지지만 그것은 낚시밥과 같아서 말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마음이 부처”라 해도 이것은 해답을 담은 명제가 아니라 虛한 장치인 것이다. 반대로 “마음은 부처가 아니다”라고 반대로 제시된 말 역시 마찬가지이다. 화두란 긍정의 형식으로 제시되건 부정의 형식으로 제시되건 분별을 쳐부수는 해체의 수단으로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두 가지 반대 규정 그 어느 편에도 의지하지 못하고 제3의 길도 차단되어 實한 점이라곤 전혀 없는 언어가 바로 화두이다. 이것이 인지 수단으로 포착할 수 없는 화두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마음’이라는 말과 개념은 불교 일반에서 가장 빈번하게 귀착시키는 안주처이다. 그러나 간화선에서는 이 마음 또한 화두 이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虛한 장치이자 마지막에는 해체될 그 무엇이다. “모든 것이 마음이
다”라는 일반적인 관념의 소굴을 해체할 목적으로 ‘마음’을 설정하여 비판적 소재로 삼는 것일 뿐이다. 마음이 화두인 이상 그것을 두고 있다거나 없다거나 혹은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하는 모든 형태의 범주에 의존하는 분별은 허용되지 않다. 이러한 분별과 인식의 무기가 박탈되어 더 이상 더듬을 여지가 없는 곤경에 몰리면 역설적으로 화두가 본래의 虛한 모습을 드러내어 본분의 소식을 듣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게 된다. 간화선의 종사들은 전해지는 여러 종류의 선문답에서 마음을 추출해 내어 하나도 남김없이 關門으로 전환시킨다. 이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實로 위장된 화두의 장치에 속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요건이다.

 

* 주제분야:불교철학, 수행론

* 주제어:간화선, 장치?해체, 虛?實, 銀山鐵壁, 화두, 마음, 선문답

 

 

1. 禪語의 장치

 

선문답의 곳곳에는 사람들의 헛된 분별을 낚아 올리기 위한 그물이 던져져 있다. 그 정체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는 선문답에서 제시된 낱낱의 언어가 착각을 촉발시키는 소재가 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선문답이
지향하는 근본적인 목적을 알 수 없게 된다. 이 그물은 實한 그 무엇이 있는 듯이 설정된 虛한 말들로 짜여졌으며 그것은 화두의 기능과 다르지 않다. 노련한 선사들은 그들이 드러내는 하나하나의 禪語와 행위에 이러
한 장치를 만들어 놓고 있다가, 그것이 實하다고 착각하여 걸려든 분별을 집어내어 쳐부수는 것이다.

 

여기서는 大慧宗?(1089~1163)를 전후로 하여 수행법의 본보기로 정착된 간화선의 관점에서 이러한 선문답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간화선의 화두 공부는 조사들의 문답에 숨어 있는 내적 맥락에서 주요한 계기를 얻었고, 다시 선대의 선문답으로 되돌아가서 그 모든 것을 다시 간화선의 토대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확보했던 것이다.

 

일반적인 문답에서는 일정한 질문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대답을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기대의 범위를 벗어났을 때 우리는 보통 그 대답을 수긍하지 않는 법이다.

예를 들면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대답했다면 기대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고 할 것이다. 반면에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동일한 질문에 대하여 “삼세 근”이라 한 洞山守初의 말이나, “마른 똥막대기”1)라고 한 雲門文偃의 대답을 듣는다면 질문의 의도를 빗나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들은 모범적인 해답을 주는 방식으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해답을 추구하는 모든 길을 가로막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1) 無門關 18則 大48 p.295b5. “洞山和尙, 因僧問, ‘如何是佛?’ 山云, ‘麻三斤.’ ” ;
같은 책 21則 大48 p.295c6. “雲門因僧問, ‘如何是佛?’ 門云, ‘乾屎?.’.”

 

 

"또한 보통 “다만 이 ‘삼 세 근’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상관이 없다.

그대가 만약 이와 같이 분별하며 동산수초가 제시한 구절에서 뜻을 찾는다면 미륵불이 하생할 아득한 미래까지 궁구하더라도 꿈에도 알지 못할 것이다."2)

2) 碧巖錄 12則 ?評唱? 大48 p.152c28.

“更有一般道, ‘只這麻三斤便是佛.’ 且得沒交涉.

爾若恁?去, 洞山句下尋討, 參到彌勒佛下生, 也未夢見在.”

 

구절에서 뜻을 찾는 것이 왜 불가능하다는 것일까? ‘삼 세 근’이라는 구절에 구체적인 어떤 뜻이 실재하는 듯이 제시되어 있지만 사실은 虛하고 무의미한 沒滋味의 화두이기 때문이다.

 

 

"이 공안(삼 세 근)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다만 씹기조차 어려워서 누구도 입을 댈 여지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담담하여 아무 맛도 없기 때문이다.3) ;

이 대답들(삼 세 근과 마른 똥막대기)은 대단히 곧게 다 드러난 것이어서 누구든 이 말에 생각을 몰두하려 하면 그것은 더욱 삐뚤어져 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법에는 본래 삐뚤어진 것이 없으나 배우는 자들이 삐뚤어진 마음으로 공부하기 때문인 것이다."4)

3) 碧巖錄 12則 大48 p.152c21.

“這箇公案, 多少人錯會, 直是難咬嚼, 無爾下口處. 何故? 淡而無味.”

4) 大慧語錄 권13 大47 p.863c3.

“又僧問洞山, ‘如何是佛?’ 山云, ‘麻三斤.’ 又僧問雲門, ‘如何是佛?’ 門云, ‘乾屎?.’

這箇?殺直, 爾擬將心湊泊, 他轉曲也. 法本無曲, 只爲學者, 將曲心學.”

 

 

이런 종류의 화두는 전혀 맛이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방식의 이해와 분별 또는 그 어떤 절묘한 언어나 개념으로도 그 맛을 우려낼 수 없다. 바로 이렇게 더 이상 추구할 여지가 없지만 그것은 눈앞에
모조리 노출되어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 선문답의 화두에 각인된 특징이다.

 

그러한 선문답의 요소를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이 글에서는 ‘장치와 해체’라는 잠정적인 구도를 해석의 틀로 활용하고자 한다. 또한 이 장치는 實이 있는 듯이 가장하는 특징을 가지므로 결국은 ‘해체될 장치’
인 것이다.
‘장치와 해체’는 선문답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宗師들이 구사하는 전략적인 언어에서 추출해 낸 것이다. 하나의 禪語를 제시하고 그것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과정에서 장치와 해체가 원환을 이루는 선문답의 일반적 구조는 문답의 당사자들을 서로 점검하고 단련시키는 풀무질과 같다.

 

종사들은 ‘말 길[語路]’을 따라 판단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사유 습관을 고의적으로 유도하여, 그 말이 가리키는 뜻을 잡도록 허용하고 결국은 포착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몰아붙인다. 이것으로써 사람들이 미리 준비하고 있는 인식과 판단의 도구를 모조리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무장해제가 되면 마치 고삐가 없이 맨손으로 야성이 살아 있는 소를 길들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것과 같이 된다. 그것은 화두 공부가 무르익어 銀山鐵壁에 이른 것과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이리저리 돌아가지 않고 촌철살인의 한 마디로 철벽을 만들어 주는 방법이 바로 화두 공부의 처음이자 끝이다.

 

 

"경계도 아니고 마음 또한 아니며, 부처라 생각하는 순간 땅밑으로 가라 앉을 것이다. 이 본분사 안에는 본래 점차적으로 올라가는 단계는 없으니, 단계가 없는 곳에서 결코 찾으며 돌아다니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러나 전혀 찾지 않아도 그 잘못은 찾지 않는 것보다 더욱 심각할 것이다."5)

5) 續傳燈錄 권18 ?佛鑑慧懃傳? 大51 p.588b28.

“不是境亦非心, 喚作佛時也陸沈. 箇中本自無階級, 切忌無階級處尋. 總不尋過猶深.”

 

 

단계적으로 밟아 올라갈 사다리를 모두 치워 없애고, 한 마디의 화두로 정상과 맞닿은 절벽에 곧바로 매달아 놓는 것이 간화선사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더 이상 잡고 올라갈 손잡이도 없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없으며 그 자리에 머물 수도 없는 이 상황이 바로 백척간두이다. 어떤 묘수도 없는 이곳에서 화두와 대결해야 하지만, 마음이 되었건 부처가되었건 그 밖에 어떤 도리로 모색하여도 이 백척간두의 소식은 통하지 않
는다. 그렇다고 하여 의식을 텅 비우기고 있어도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6) 이러한 방법에 따라 찾는 길도 찾지 않는 길도 모두 차단해 버리고 다른 어떤 선택의 가능성도 주지 않는 것이다. 화두로서의 모든 禪語는
이렇게 철저하게 숨통을 틀어막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종사들이 던지는 장치로서의 말에는 일정한 관념에 뿌리를 박고 그 뜻을 분별해도 건져낼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동시에 말 길에 홀려 헤아리지도 않고, 어떤 것도 포착할 길이 없어서 지극히 막막하게 되는 순간이 오히려 화두가 타파되기 직전의 상황에 이른 것이다.7) 이런 상태로 유도하는 장치가 되는 한 모든 禪語는 화두의 기능를 그대로 가지는 것이다. 몇 가지 선문답에서 이 장치를 더 살펴보자.

 

6) 大慧宗?는 분별과 아무 분별이 없는 양자를 모두 병통으로 여기고 그것을 각각 掉擧와 昏沈이라는 전통적인 禪病에 대응시켰다.

“만일 생각을 붙이고 분별하지[著意] 않으면 이번에는 마음을 모두 비워 버리는[忘懷] 잘못을 범할 것이다. 마음을 모두 비워 버리면 시커먼 산아래 귀신의 굴에 떨어질 것이니 교학에서는 그것을 혼침이라 한다.

생각을 붙이고 분별하면 心識이 산란하게 흩어지고 한 생각에 또 다른 생각이 이어져서 앞생각이 그치기도 전에 다음 생각이 이어질 것이니 교학에서는 그 것을 도거라 한다.”

( 大慧語錄 권17 大47 p.884c18.

若不著意, 便是忘懷.

忘懷則墮在黑山下鬼窟裏, 敎中謂之昏沈 ;

著意則心識紛飛, 一念續一念, 前念未止後念相續, 敎中謂之掉擧.)

7) “화두를 들 때 결코 허다한 방편으로 재주를 부릴 필요 없이 다만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곳에서 화두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며, 희?노?애?락이 일어나는 곳에서 분별을 내지도 마십시오.

항상 화두를 들고 꾸준히 주시하다가 이론으로 통할 길이 없고 아무 맛도 없다고 느껴지며, 마음이 뜨겁고 답답할 때가 바로 공부를 하는 당사자가 목숨까지 던져 승부를 낼 곳입니다.”

( 書狀 ?答宗直閣狀? 大47 p.933c1.

擧話時, 都不用作許多伎倆, 但行住坐臥處, 勿令間斷 ; 喜怒哀樂處, 莫生分別.

擧來擧去,看來看去, 覺得沒理路, 沒滋味, 心頭熱悶時, 便是當人放身命處也.)

 

 

"“부처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法華全擧는 “갈대 싹이 무릎을 뚫고 나온다.”라고 대답했다.8)

8) 法華全擧和尙語要 古尊宿語錄26 卍118 p.489b13.

“問, ‘如何是佛?’ 師云, ‘蘆芽穿膝.’”

 

법화전거의 말은 갈대 싹이 무릎 부위를 뚫고 나올 정도로 오랫동안 한 자리를 옮기지 않고 좌선하여 도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의미야말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 覺雲은 이와 같이 표
면적인 맥락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이 말을 “어떤 맛도 없는 대답”9)이라고 평가했다. ‘갈대 싹이 무릎을 뚫고 나온다’라고 한 대답은 아무런 뜻도 붙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이치와 개념으로도 그 맛을 볼 수 없는
沒滋味한 화두이자 장치인 것이다.

9) 禪門拈頌說話 1391則 韓5 p.894c4. “蘆芽穿膝者, 穿膝至?, 不覺移坐成道, 無味答話也.”

 

종사들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논리를 활용하기는 하지만 그 안에 깃든 의미를 결코 그대로 수긍하지 않는다. 그들의 긍정은 상대를 끌여들여 부정의 칼날을 휘두르기 위한 것이며, 상대의 입장에 호의를 베푸는 차원에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다. 投子義靑과 그의 제자가 주고받은 문답을 보면 서로 함정을 파서 상대를 시험하는 장치가 잘 드러나 있다. 또한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장치를 감파하는 ?悟克勤의 著語도 주목
할 만하다.

 

"어떤 학인이 投子에게 물었다.

①“모든 소리는 부처님의 소리라고 하는데, 맞습니까?” ②“그렇다.”

③“화상이시어, 그렇게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④이에 투자가 바로 때렸다."10)

10) 碧巖錄 79則 大48 p.205b29.

“擧, 僧問投子, ‘一切聲是佛聲, 是否?’ 投子云, ‘是.’

僧云, ‘和尙, 莫豚沸碗鳴聲!’ 投子便打.”

 

①모든 색과 소리가 깨달음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깨달음을 드러내는 장이 된다는 관념을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 이것이 장치인 까닭은 그 학인이 자신이 제기한 문제를 온전히 수긍하지 않은 채 투자의 반응을 엿보
고 있다는 점에 있다. 학인이 먼저 스승을 점검하고 있는 것이다. 원오는 그의 속뜻을 알아차리고 “호랑이 수염을 뽑을 줄 아는구나. 마른하늘에 천둥이 울린다. 자신의 똥은 냄새가 나는지 모르는 법이다.”11)라고 평가했다. 곧 그 학인은 투자의 경지를 ‘점검’하기 위하여 마른하늘에 울리는 천둥과 같이 虛한 장치를 함정으로 파 놓았던 것이지만, 투자에게 그 속뜻을 감파당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著語이다.

11) ①에 대한 著語. “也解?虎鬚. 靑天轟霹靂. 自屎不覺臭.”

 

②투자는 학인의 장치를 알고 있음에도 “그렇다”라고 대답하여 학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척함으로써 역으로 그를 점검하기 위한 장치를 만들어 낸 것이다. 투자는 학인의 장치를 수단으로 삼아 그대로 덫을 놓았다. 그래서 원오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을 몹시도 속이는구나! (투자는) 그대 (학인)에게 이미 몸을 팔아 버렸다. 집어서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으니, 어떤 생각에서 이러는 것일까?”12)라고 해설의 말을 붙였다. 스스로 감파한 뜻을 감추고서 학인을 점검하는 소재로 삼았던 것은 자기 자신을 값싸게 팔아먹은 것과 다름이 없는 투자의 친절한 가르침이다. 이것이 바로 학인의 말을 그대로 활용한 투자의 장치인 것이다.

12) ②에 대한 著語. “?殺一船人! 賣身與爾了也. 拈放一邊, 是什?心行?”

 

③학인이 앞서 제기했던 자신의 장치를 해체한 것을 중심 내용으로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학인은 자신의 장치에 투자가 걸려든 것으로 착각하고 “쓸데없는 소리”라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한 편에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한 투자의 말 자체가 ‘그릇에서 물이 끓는 소리[碗鳴聲]’와 같이 沒滋味한 화두라는 것을 학인이 감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원오는 전자의 해석을 택하여 “단지 송곳이 날카롭다는 것만 알았지, 끌이 모나게 생겼어도 예리한 구석이 있다는 것은 모르는구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인가? 예상했던 대로 자신의 잘못을 모두 토해 냈다”13)라고 평가했다. 투자가 “그렇다”라고 간명하고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상대의 의중을 찌르는 날카로운 점검의 기틀이 숨어 있었으며, 학인이 “쓸데없는 말”이라 한 것은 처음에 던진 자신의 질문이 장치였다는 것을 스스로 실토한 결과였다는 뜻이다.

13) ③에 대한 著語. “只見錐頭利, 不見鑿頭方. 道什?? 果然納敗缺.”

 

④투자의 장치를 감파한 학인의 안목이 가상하지만 그 상태에 안착하지 말고 더욱 향상하도록 이끌기 위하여 한 대 때림으로써 시종일관 분별의 가능성을 틀어막은 것이다. 원오는 이것을 두고, “딱! 잘 때렸다. 그 말 그대로 허용하면 안 된다”14)라는 착어를 달았다. 이 한방의 매는 학인의 안목이 탁월하더라도 철저하게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여 銀山鐵壁에 다가서도록 이끄는 장치인 셈이다.

14) ④에 대한 著語. “著! 好打! 放過則不可.”

 

 

陳操尙書와 資福이 주고받은 禪機에서도 활발한 장치를 엿볼 수 있다.

 

"진조상서가 자복선사의 경지를 살피려고 갔는데, 자복은 그가 오는 것을 보고

①손가락으로 허공에 圓相 하나를 그렸다. 진조가 말했다.

②“제자 가 이렇게 와서 아직 숨도 돌리지 않았는데, 게다가 원상 하나를 그리시면 어찌합니까?”

③자복이 방장문을 닫아 버렸다."15)

15) 碧巖錄 33則 大48 p.172a17.

“擧, 陳操尙書, 看資福, 福見來,

便?一圓相. 操云,

‘弟子恁?來, 早是不著便, 何況更?一圓相.’

福便掩却方丈門.”

 

원상(○)의 일반적 상징은 이 문답의 핵심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자체가 뚫을 수 없는 하나의 화두로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원오는 “허깨비라야 허깨비를 알아보고, 도둑이라야 도둑을 알아본다. 만일 여유로운 마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 사람의 의중을 알아차렸겠는가? 원상이 금강과 같이 견고한 울타리라는 것은 알고 있는가?”16)라고 하여, 이 원상에 담긴 장치를 읽어 낸 것이다.

자복은 상대의 마음을 훔쳐내는 탁월한 도둑으로서, 원상을 뛰어나가기 어려운 금강의 울타리17)와 같이 확고한 잠금 장치로 제기한 것이다.

16) ①에 대한 著語 “是精識精, 是賊識賊. 若不蘊藉, 爭識這漢? 還見金剛圈??”

17) 금강의 울타리[金剛圈]는 밤나무?가시나무?쑥대(栗棘蓬) 등과 함께 뛰어나가기 어렵고, 삼킬 수 없다는 뜻을 가지고 화두를 상징하는 관용적 용어이다. “옛 사람들은 일언반구만 하여도 그 속에 하나의 금강과 같이 단단한 울타리와 밤송이나 가시나무나 쑥대과 같은 화두를 설정해 두고 그대들로 하여금 삼키도록 하거나 뚫고나가 보도록 했던 것이다.”

( 大慧語錄권16 大47 p.880b25. 古人凡有一言半句,設一箇金剛圈, 栗棘蓬, 敎伊呑, 敎伊透.) ;

“바로 크나큰 용광로 속에 들어가 단련하는 것이 좋다. 다만 聖과 凡을 분별하는 생각을 철두철미하게 말끔히 없애도록 하고, 금강과 같이 견고한 울타리를 뚫고, 밤송이와 가시나무와 쑥대를 머금으면 번뇌망상이 모두 쉬고 그친 경지에 이를 것이다.”

( 密菴語錄 大47 981c28. 正好入大爐?中?煉. 直敎聖凡情量, 徹底淨盡, 透得金剛圈, 呑得栗棘蓬, 逗到大休大歇之場.”

 

②원상의 함정을 알아차린 진조는 원상을 슬쩍 옆으로 밀어 놓고 모르는 척 한 것이 다름 아닌 자복을 시험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원오가 그 속을 감파하고는 “오늘 졸고 있는 놈을 하나 만났구나. 이 도둑놈아!”18)라는 말에 그의 장치를 노출시켰다. 그를 폄하하는 말과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진조를 ‘도둑’으로 인정한 평가이다.

18) ②에 대한 著語. “今日撞著箇?睡漢. 這老賊!”

 

③자복은 진조의 말이 텅비어 그 어떤 알갱이도 없다는 것을 알고 방장문을 닫아 버렸다. 원오는 진조의 虛한 장치를 감파한 자복에 대하여 “도둑은 가난한 집은 털지 않는다. 이미 진조가 만들어 놓은 올가미에 걸려들었다.”19)라고 말했다. 자복과 진조가 서로의 虛한 언행이 상대에게 노출되어 더 이상 상대를 시험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19) ③에 대한 著語. “賊不打貧兒家, 已入他圈?了也.”

 

간화선사들은 경전이나 선대 조사들의 모든 문답을 關門으로 전환시킨다. 따라서 그것들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반드시 하나의 빗장을 쳐서 걸어 잠그는 것이다. 개별적인 한 마디 마다에 들어 있는 장치를 알아차리는 것과 관문이라 인지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鏡淸과 玄沙 사이에 나눈 다음 문답을 보자.

 

"경청이 현사에게 물었다.

“제가 총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으니 깨달아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들리느냐?”

“들립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라!”  "20)

20) 景德傳燈錄 권18 ?玄沙師備傳? 大51 p.347a28.

“問, ‘學人乍入叢林, 乞師指箇入路.’

師曰, ‘還聞偃溪水聲否?’

曰, ‘聞.’ 師曰, ‘是汝入處(從這裏入).’ ”

 

 

慧諶은 이 문답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옛 사람은 단지 들어가는 길이 있는 줄만 알았지 나오는 길이 있는 줄은 몰랐다.

설령 나오고 들어가는 길을 모두 갖추었더라도 또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들어가는 것도 아닌 하나의 길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럼 말해보라! 저 한 길이란 어떤 것일까?

잠깐 말없이 있다가 일렀다. “대나무 그림자 너울너울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바닷물을 뚫어도 파도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노라.”21)

21) 金榮郁, 진각국사어록역해 1 ?상당 11? p.78.

“古人只知有入, 不知有出.

直饒出入俱備, 更須知有不出不入底一路.

且道! 作?生是那一路?

良久云, ‘竹影掃?塵不動, 月光穿海浪無痕.’ ”

 

 

현사가 시냇물 소리 나는 곳으로 들어가라고 한 말은 경청을 가르치기 위하여 설정한 장치이다. 여기에 특정한 분별을 붙여서 이해하면 현사의 본의에서 벗어난다. 이를테면 “시냇물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진리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이다”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현사의 본의를 벗어나는 초보적인 착각인 것이다. 그래서 국사는 사람들이 ‘들어간다’는 겉말에 현혹될까 우려하여 ‘나온다’는 또 하나의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모두 갖추거나 두 가지 어느 것도 아닌 뜻을 동시에 제기한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에 “하나의 길”이라 하며, “대나무 그림자가~”라 한 말은 ‘들어가라’고 하건 ‘나오라’고 하건 그밖에 어떤 말을 들어 보이더라도 그 장치에 현혹되지 않는 無爲의 한 길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길이라는 이 말 역시 장치요 관문이기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22)

22) 위의 책 ?상당11? <해설> p.79.

 

선문답에서 종사들이 드러내는 하나하나의 기틀에는 이렇게 예상되는 논리와 관념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장치가 어디에나 설정되어 있다. 이 장치로부터 상대가 빠져 있는 헛된 분별의 근거지를 쳐부수는 것이 선사들
이 펼치는 근본적인 전략이다. 따라서 선문답의 골간을 잡아채기 위해서는 그 속에 감추어진 虛와 實을 잘 가려내야 한다.

 

 

2. 虛와 實

 

조사들의 문답이나 설법에 나타난 말들은 알찬 내용이 있거나 깊은 의미를 담은 듯이 포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말에 깃든 일반적 관념과 전혀 상관이 없거나 아무런 내용물도 없는 虛로 제시된 관문이다.“한 사람은 虛를 전했는데, 모든 사람이 그것을 오인하여 實이라 전한다”23)라고 하는 조사선의 상용구절은 선문답의 이러한 특징을 잘 나타낸 말이다. 주어진 말 길을 따라 實한 그 무엇을 포착하려 했던 사람들은 결국 어떤 시도도 통하지 않는 虛 앞에 서게 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23) 五祖法演語錄 권상 大47 p.650c8, 景德傳燈錄 권20 大51 p.368a21, 大慧語錄 권15 大47 p.876c4 등에 보인다.

 

 

" 백장이 법좌에 올라앉고서, 대중이 집합하자마자 주장자를 휘둘러 모든 대중을 한꺼번에 해산시켰다가 다시 “대중들이여!” 하고 불렀다. 대중들이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24)

24) 宗門拈古彙集 권8 卍115 p.608b14.

“百丈, 上堂, 衆方集, 以?杖一時打散, 復召曰, ‘大衆!’ 衆回首, 丈曰, ‘是甚??’ ”

 

 

이 상당법문 자체에서는 백장이 드러낸 언행의 귀착점을 알아차릴 수 있는 실마리가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익숙한 몇몇의 도리를 끌어들여 멋대로 천착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은 말에 대하여 본래의 자아 등과 같이 그 무엇을 불러내는 소리로 읽는다면 스스로 덫에 걸린 꼴이 되고 만다. 이 법문에 대하여 龍泉文喜(821~900)는 “강물에 드리워 놓은 姜太公의 곧은 낚싯바늘이요,장전한 養由基의 화살이로다.”25)라고 평가했다.

강태공26)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광경을 보고 물고기를 낚으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물고기가 물어도 걸리지 않는 곧은 낚싯바늘을 던져 놓고 있을 뿐이었다.이것이 물고기를 낚고 있는 척하는 강태공의 장치이다. 또한 백발백중의 명사수 양유기27)가 화살을 장전한 모습을 보면 틀림없이 목표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어떤 대상도 겨누지 않고 단지 허공에 대고 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사람들의 굳은 사고의 길을 활용하여 虛를 숨기고 무엇인가를 쏘아 맞추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양유기의 장치이다. 두 사람 그 누구의 행위에도 보통 지향하는 實은 없듯이 백장이 휘두른 주장자와 불렀던 소리 또한 그러했다고 보는 것이 용천의 안목이다.

 

25) 위와 같은 곳. “垂任公釣, 架由基箭也.”

26) “周나라 文王이 사냥을 나아갔다가 姜太公이 곧은 낚싯바늘로 낚시질하는 광경을 보고 이상히 여겨 ‘곧은 낚싯바늘로 어떻게 고기를 잡습니까?’라고 묻자 강태공은 말했다. ‘다만 목숨을 등지려는 물고기를 구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 從容錄 18則 ?頌 評唱? 大48 p.239a21. 周文王出獵, 見姜子牙磻溪之谷, 去水三尺, 直鉤釣魚. 王異之曰, ‘直鉤如何得魚?’ 子牙曰, ‘但求負命之魚.’)

27) “초나라에 양유기라는 사람은 활쏘기를 잘했다. 버드나무 잎으로부터 백보 거리에 떨어져 쏘아도 백발백중이었다.”( 戰國策 ?西周策?. 楚有養由基者, 善射. 去柳葉者, 百步而射之, 百發百中.)

 

 

백장이 주장자를 휘두르는 것을 보고 대중들은 해산하라는 의도로 알았지만 그것은 오해였고, 그가 부르는 소리에 대중들은 볼일이 있는 것으로 알고 돌아보았지만 이 또한 백장의 본의와는 상관이 없는 하나의 장치
에 불과했다. 대중들은 이 함정에 걸려들어 마치 고삐에 끌려 다니는 소나 말처럼 백장이 끄는 대로 움직였던 것이다. 백장이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한 말에 ‘그 무엇’이 진실로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용천은 간명한 비유로써 實이 있는 듯이 가장한 백장의 이러한 虛를 집어냈던 것이다. 宏智正覺은 백장의 장치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을 보여준다.

 

 

"사냥매를 풀어 비둘기를 잡거나, 곧은 낚싯바늘로 물고기를 낚는 것에는 각각 중생을 가르치고 이익 되게 하는 수단이 있다. 그러나 만약 건져 올리거나 가두려 해도 붙잡히지 않고, 불러도 고개를 돌려보지 않는 자
라면 어떻게 하겠는가?28)"

28) 宏智廣錄 권3 大48 p.27c21.

“下媒求?, 直鉤釣魚, 各有接物利生底手段. 若是箇撈籠不住, 呼喚不回底漢, 又作?生?”

 

 

‘잡으려 해도 잡히지도 않고, 불러도 돌아보지도 않는 자’29)는 백장이 설정한 장치가 虛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것이 實한 것으로 오인하여 걸려들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아무리 탁월한 선사의 가르침이라고 해도 그
대로 수긍하고 돌아보며 받아들이면 그 장치에 걸려 속박 당하는 것이다. 백장의 장치는 이렇게 돌아보지 않는 자를 만나는 순간 해체될 것이다.백장은 그 허한 장치에 자신의 속을 모두 쏟아 부은 것이며, 이 이상 감
추고 있는 별도의 장치나 들추어내어야 할 실한 뜻은 전혀 없다.

 

29) 宏智正覺은 다른 곳에서도 佛祖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자의 특징을 이 구절로 묘사했다.

“어느 장소에도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그 어느 시간에도 가두어 놓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말하기를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불러도 고개를 돌려보지 않으니, 옛 성인도 안배하지 못했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늘과 땅 어디에나 두루 돌아다녀 동서남북과 4유와 상하 어디에도 걸림이 없을 것이다.

요는 세상 어느 곳에도 비거나 빠짐이 없으니 곧 억지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가두려 해도 붙잡히지 않을 정도이니 불러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것이다.”

(宏智廣錄 권5 大48, p.65b2.

一切處收攝不得, 一切時籠?不下. 所以道, ‘勞籠不肯住, 呼喚不回頭, 古聖不安排, 至今無處所.’

若是恁?做底漢, 直是普天?地, 東西南北, 四維上下.

要且, 無空闕處, 便勞籠不肯住, 旣勞籠不肯住, 便呼喚不回頭.)

 

 

鄧隱峯이 南泉普願(748~834)의 함정을 처리한 솜씨에도 이러한 뜻이 잘 나타난다.

 

 

"등은봉이 남전에게로 와서 대중들을 모아 놓고 법문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남전이 물병을 가리키며 “물병은 경계이고, 물병 안에는 물이 있다. 경계를 움직이지 않고 나에게 물을 가져오라”라고 하였다.
등은봉이 물병을 들고 남전의 얼굴에 쏟아 부었다. 이에 남전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30)

30) 景德傳燈錄 권8 ?鄧隱峯傳? 大51 p.259b20.

“師到南泉, 覩衆僧參次,

南泉指淨?云, ‘銅?是境, ?中有水. 不得動著境, 與老僧將水來.’

師便拈淨?, 向南泉面前瀉, 南泉卽休.”

 

 

남전이 학인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고안한 장치를 등은봉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해체시켜 버렸다. 등은봉이 남전의 머리에 물병의 물을 쏟아 부은 것은 남전의 장치를 알아차리고 그것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경계를 움직이지 마라’라고 한 잠금 장치에 현혹되어 수수께끼를 풀 듯이 헤아리기만 해서는 남전의 말은 영원히 족쇄가 될 뿐이다. 남전이 움직일 수도 없고 가져 올 수도 없는 장치로 함정을 판 것에 대하여 등은봉
은 움직이기도 하고 가져오기도 하는 등 두 가지를 모두 시행함으로써 남전에게 응답했고, 남전도 그것을 수긍했던 것이다. 남전이 어두움 속에 모든 것을 철저하게 닫아 버리는 수단을 썼다면, 등은봉은 그 안의 내용
물을 밝은 곳으로 끄집어내어 산산이 찢어 분산시키는 편을 선택한 차이가 있지만,31) 장치를 설정한 남전이나 그것을 해체시킨 등은봉이나 두 사람 모두 虛의 활발한 교환 속에서 禪旨를 주고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龍翔士珪는 “남전이 물병을 가리키지 않았는데 등은봉이 어찌 물을 쏟아 부은 적이 있었겠는가! 敎를 따라 헤아리며 점을 쳐보아도 불법의 진수는 그 속에 없다.”32)라는 말로 그 虛를 드러냄과 동시에 분별로 집어낼 實이 없다는 뜻까지 보여준 것이다.

 

31) 남전은 把住, 등은봉은 放行의 수단에 해당된다.

32) 東林雲門頌古 卍118 p.809b14. “南泉不指淨?, 隱峰何曾瀉水! 從敎打瓦鑽龜, 佛法不在這裏.”

 

 

이와 같은 이해는 간화선의 대성자 대혜종고가 禪語로서의 화두를 이해하는 관점에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모든 화두가 포착할 실체가 있는 實法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선지식이 총명한 의식으로 사량분별하는 것을 벗어난 경지에서 본분의 바탕으로 보여주면 흔히 그것이 눈앞에 던져져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옛날부터 덕이 있는 성인들은 實法을 사람들에게 주었다”라고 착각한다. 가령 趙州의 放下著이나 雲門의 須彌山과 같은 종류의 화두가 그것이다."33)

33) 書狀 ?答曾侍郞狀? 第二書 大47 p.917b21.

“乍聞知識, 向聰明意識, 思量計較外, 示以本分草料, 多是當面蹉過,

將謂從上古德, 有實法與人. 如趙州放下著, 雲門須彌山之類, 是也.”

 

 

조주가 “내려놓아라(放下著)” 또는 “내려놓지 않으려거든 짊어지고 가라!”라고 던진 말34)에 대하여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생각까지 버려라”라고 하는 뜻으로 수용한다면, 화두 공부의 문턱에도 들어서지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운문 수미산의 화두35)를 두고 “허물이 수미산과 같이 크다”라는 뜻이었다고 판단하는 것도 착각에 불과하다. 방하착을 단지 방하착으로, 수미산을 단지 수미산으로만 남김없이 드러내었을 뿐이다. 이렇게 명백하게 드러나 더 이상 궁구하고 분별할 여지가 없도록 제시된 것이 화두인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화두에 다른 뜻을 군더더기처럼 덧붙여 실다운 것으로 헤아리려 하면 곧바로 미로 속으로 빠져든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도는 화두의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34) “엄양존자가 조주에게 물었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을 때는 어찌 합니까?’ ‘내려놓아라!’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또 무엇을 내려놓으란 말입니까?’

‘내려놓지 않으려거든 짊어지고 가라!’ ”

( 正法眼藏 卍118 p.10a6.

嚴陽尊者問趙州, ‘一物不將來時, 如何?’ 州云, ‘放下著!’

嚴云, ‘卽是一物不將來, 又放下箇甚??’
州云, ‘放不下 便擔取去!’)

35) “어떤 학인이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아도 허물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운문이 대답했다. ‘수미산!’ ”

( 雲門廣錄 권상 大47 p.547c1. 問, ‘不起一念, 還有過也無?’師云, ‘須彌山.’)

 

 

이 뜻을 살필 수 있기에 적절한 조주의 화두가 또 있다.

학인이 “달마가 서쪽으로부터 온 까닭”(선종의 종지)을 묻자 조주가 “뜰 앞의 잣나무”36)라고 한 대답이 그것이다. 조주가 대상 세계의 물상을 가지고 대답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학인이 재차 물었지만 조주는 또 다시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학인이 똑같은 질문을 다시한 것은 조주의 대답을 싱겁고 가벼운 것으로 여기고, 그 무엇인가 實한 것으로 자신의 의문을 채우려 했던 것이다. 조주가 두 번 같은 대답을 한 것은 무의미한 반복과 같이 보이지만 여기에는 나아가거나 물러나거나 그 밖의 어떤 운신도 할 수 없는 백척간두로서의 화두의 속성이 들어 있다.

조주의 의도는 이것으로 제자가 그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오로지 “뜰 앞의 잣나무” 앞에 얼어붙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36) 趙州語錄 古尊宿語錄13 卍118 p.307a17.

“時, 有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學云, ‘和尙莫將境示人.’

師云, ‘我不將境示人.’

云, ‘如何是祖師 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

 

보편적 진리로 귀결시키는 성향을 가진 이들은 “모든 것이 진리의 드러남이다. 잣나무인들 다르랴!” 생각하고 조주의 뜻을 알아차린 양한다. 그러나 잣나무는 다른 그 무엇의 드러남이나 상징물이 아니다.37)

조주는 잣나무를 잣나무로 어떤 여분도 없이 몽땅 드러낸 것일 뿐이다. “뜰 앞의 잣나무”라는 바로 이 말 밖에서 빌려오는 어떤 판단의 도구도 드러난 “그것”을 가리는 은폐물에 불과하다.

불성?마음?우주?진리 등 어떤 대단한 말도 뜰 앞의 잣나무가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을 더럽히는 오물과 같다. 따라서 조주의 잣나무만 남김없이 드러나도록 자신의 전체를 걸고 승부를 내며 자잘하게 달라붙는 그러한 생각들을 제거해야 된다. 조주는 조금도 남아도는 잉여물 없이 딱 들어맞는 언어를 구사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오인한 사람들이 마치 어떤 보편적인 진리가 있는 듯이 생각하여 조주가 설정하지도 않은 그 장치에 스스로 걸려드는 것이다.

 

37) 조주가 주변의 물상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드러낸 답변은 대상 경계의 진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화두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어떤 학인이 조주에게 물었다. ‘저의 본분사는 무엇입니까?’

‘나무가 흔들리니 새가 흩어지고, 물고기가 놀라 달아나니 물이 흐려진다.’ ”

( 趙州語錄 古尊宿語錄13 卍118 p.308a14.

問, ‘如何是學人本分事?’

師云, ‘樹搖鳥散, 魚驚水渾.’)

 

 

"어떤 학인이 방으로 들어와서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 화두에 대하여 가르침을 청하자 葉縣歸省이 말했다. “내가 너에게 말해 주지 못할 것은 없지만 내 말을 믿겠느냐?”

“화상의 소중한 말씀을 어찌 믿지 않을 수있겠습니까?”

“처마 앞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들리느냐?”

이 말을 듣고 그 학인은 자신도 모르게 “야!”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귀성이 “너는 어떤 도리를 알았느냐?”라고 물음에 그 학인이 게송으로 대답했다.
“처마 끝에 떨어지는 물방울, 똑똑 떨어지는 그 소리 분명하구나.

하늘과 땅을 때려부수고, 그 자리에서 마음을 쉬었도다.”

귀성이 듣고는 기뻐하였다.38)

38) 葉縣歸省語錄 古尊宿語錄23 卍118 p.463a8.

“因僧入室, 請益趙州和尙柏樹子話,
師云, ‘我不辭與汝說, 還信??’

僧云, ‘和尙重言, 爭敢不信?’

師云, ‘汝還聞?頭水滴聲??’

其僧豁然, 不覺失聲云, ‘口耶 !’

師云, ‘?見箇什?道理?’ 僧便以頌對云,

‘?頭水滴, 分明瀝瀝.

打破乾坤, 當下心息.’

師爲?然.”

 

 

온통 다 드러나 벌거벗고 적나라한 모습이 “뜰 앞의 잣나무”이며, 그 자리에서 들은 “물방울 소리”이다. 이 ‘분명한’ 소식에는 더 이상 들추어 낼 것이 남아 있지 않다. 단지 보고 듣는 그대로 분명할 뿐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과 같은 규격으로 주어진 화두를 타파하고 화두에 대한 이러니 저러니 하는 생각의 파편들이 모두 떨어져 나간 것이다.

 

조주의 이 화두가 實이 아니라는 뜻이 法眼文益과 光孝慧覺의 다음 문답에 나타난다.

 

 

" 光孝慧覺선사가 법안의 처소에 이르자 법안이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조주에서 옵니다.” “듣자하니 조주에게는 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가있다고 하던데, 맞는가?”

“그런 화두는 없습니다.”

“왕래했던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학인이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음에 조주가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했다고 하는데, 상좌는 어째서 없다고 하는가?”

“조주선사는 진실로 이러한 말씀을 한 적이 없었으니 화상께서는 선사의 뜻을 곡해하지 마십시오.”39)

39) 法眼文益語錄 大47 p.591a22.

“光孝慧覺禪師, 至師處, 師問, ‘近離甚處?’

覺云, ‘趙州.’ 師云, ‘承聞趙州有柏樹子話, 是不?’

覺云, ‘無.’

師云, ‘往來皆謂, 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趙州云, ?庭前柏樹子.? 上座何得道無?’

覺云, ‘先師實無此語, 和尙莫謗先師好.’ ”

 

 

혜각이 세상에 알려진 조주의 이 화두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 의도는 화두의 보편적인 속성과 관련된다. 조주가 ‘뜰 앞의 잣나무’라고 말한 ‘사실’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말이 實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보이고
자 한 것이다. 大慧宗?는 혜각이 ‘없다’고 한 대답의 虛한 뜻에 입각하여 간화선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화두로 전환시킨다.

 

"대혜가 말한다. “만약 이러한 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혜각의 뜻을 놓쳐 버릴 것이며,

이 말이 없었다고 생각한다면 또한 법안의 뜻을 놓쳐 버릴 것이고,

있다?없다는 양변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조주의 뜻을 놓쳐 버릴 것이다.

설령 이러한 세 가지 그 어떤 것도 아니고 별도로 꿰뚫고 나아갈 결정적인 하나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쏜살과 같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궁극적인 뜻은 무엇일까?”

拂子을 세우고 “조주의 참 뜻을 알았는가?”라 말한 뒤 한 소리 크게 내질렀다.40)

40) 大慧語錄 권8 大47 p.843b26.

“師云, ‘若道有此語, 蹉過覺鐵? ;

若道無此語, 又蹉過法眼 ;

若道兩邊都不涉, 又蹉過趙州.

直饒總不恁?, 別有透脫一路, 入地獄如箭射. 畢竟如何?’

擧起拂子云, ‘還見古人??’ 喝一喝.”

 

대혜는 있다?없다를 두고 전개되는 모든 분별의 가지를 다 잘라 내어 잡을 수 있는 근거를 철저하게 박탈했다. 이것은 상대적인 두 가지 반대 규정을 모두 부정하고 동시에 제3의 길도 차단하는 背觸關41)의 형식이며, 화두라는 관문을 설정하는 대표적인 방법인 것이다. 禪語들이 포착할 도리가 전혀 없는 虛인 까닭은 그것이 있다는 맛이나 없다는 맛이나 그 어떤 맛도 없는 沒滋味한 화두이기 때문이다.

 

41) 金榮郁, ?간화선의 화두공부와 그 특징? 제3장 ?背觸關의 특징과 기능?(伽山學報제9집, 2003년) 참조.

 

 

3. 마음이 부처인가?

 

禪 문헌에 마음 心자 이상으로 출현 빈도가 많은 글자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하여 난해한 선문답의 구절에 봉착하게 되면 마음으로 귀결시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맹신하는 것도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러나 조사들이 마음을 장치로 활용하는 솜씨를 보면 그러한 생각으로 선문답의 핵심을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마음도 ‘해체될 장치’로 활용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雲門文偃이 “한 구절에 딱 들어맞는 말은 나귀를 묶어 두는 말뚝과 같은 영원한 속박이다.”42)라고한 말은 ‘마음’과 같이 일정한 개념이나 인식 수단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악습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노련한 선사들은 사람들의 오염된 의식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장치에 걸려들게 유인한 다음 그것을 철저하게 해체함으로써 그에 대한 얽매임을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42) 雲門廣錄 권중 大47 p.562a7. “一句合頭語, 萬劫繫驢.”

 

 

1. 馬祖의 卽心卽佛

 

마조가 “마음이 곧 부처”라 한 말은 양의 머리를 점포 앞에 내걸고 양고기를 파는 척하면서 사실은 개고기를 팔아먹는 것과 같은 수법이다.43)

43) 密菴語錄 大47 p.965b8. “馬祖卽心卽佛, 掛羊頭賣狗肉.”

 

이것은 모든 佛祖의 언설을 처리하는 간화선사들의 안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겉모양에 속아서 마음 그대로 부처라거나, 마음이 성불의 뿌리라는 식으로 결정짓는다면 마조의 말은 死句로 전락할 것이다.

 

 

"어떤 학인이 馬祖道一에게 “부처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마조는 “마음이 곧 부처”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대하여 ?悟克勤은 평가한다.

고리없는 자물쇠가 4방 8면에서 영롱하게 빛난다.”44)

44) ?悟語錄 권19 大47 p.801a23.

“擧, 僧問馬祖, ‘如何是佛?’ 祖云, ‘卽心卽佛.’

無鬚鎖子, 八面玲瓏.”

 

 

원오의 평가는 마조의 대답이 속까지 분명하게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잠그거나 풀 장치가 전혀 없는 자물쇠처럼 어떤 분별도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마음이 부처’라고 분명하게 분별한 명제와 같이 보이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해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통과해야 할 화두라는 ‘관문’인 것이다. 마조의 말에는 특별한 이치나 원리가 담겨 있지 않다. 단지, 열지도 닫지도 못하는 통짜의 자
물쇠 그 자체가 숨김없이 드러나 있을 뿐이다. 원오는 마조의 말을 철저하게 간화선의 입장에서 수용한 것이다. 이것은 처리할 수단이 전혀 없지만 눈앞에 실현되어 있는 화두를 간결하게 상징하는 절묘한 비유라 할 수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 결정된 명제가 아니라는 것은 마조 자신이 그것과 더불어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제시한 말에서 나타난다.45)

45) 馬祖語錄 卍119 p.814a17. “近日又道. 非心非佛.”

 

‘非心非佛’은 卽心卽佛보다 고양된 형태로 발전한 인식이 아니라 이 또한 하나의 화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구절을 걸림 없이 사용하는 것이 조사선의 殺活自在한 방법이다. 그 어느 구절이나 열지도 못 하고 잠그지도 못 하는 고리 없는 자물쇠와 같다. 남전은 “마음은 부처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나 이 역시 마음과 부처가 서로 소통되지 않는 부정적 명제로 세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분별로 파고들 수없는 하나의 관문인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부처를 어깨에 매달고 다니다가 내가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 지혜는 도가 아니다.”라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곧바로 머리를 모아 서로 상의하며 그 뜻을 헤아리지만, 내가 한 말에는 그대들이 헤아릴
구석이 전혀 없다.

그대들이 만약 허공을 묶어 몽둥이를 만들고서 그것으로 노승을 때리려는 것이라면, 헤아리는 그대로 맡겨 두겠다.46)

46) 景德傳燈錄 권28 ?南泉普願傳? 大51 p.445a28.

“今時人, 擔佛著肩上行, 聞老僧言, ‘心不是佛, 智不是道.’ 便聚頭擬推, 老僧無爾推處.

爾若束得虛空作棒, 打得老僧著, 一任推.”

 

 

열린 듯이 보이지만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일정한 관념에 근거하여 헤아리려 시도하면 ‘마음은 부처가 아니다’ 또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반대편에 섬으로써 처음에 주어진 말을 잠가 버린다. 뒷말에
본래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의지하려 하면 이번에는 앞 편으로 돌아간다. 이와 같이 어느 편이나 하나의 장치이면서 동시에 상대의 말과 분별을 쳐부수는 해체의 수단이 된다. 임시 설정의 장치와 해체 수단을 상황에 적절하게 배치하여 관문에 또 관문을 설정하는 것이다. 五祖法演이 이 맥락을 밝힌다.

 

 

"“永嘉玄覺은 ‘취해도 안 되고 버려도 안 되며 그 중간에 집착해도 안 된다.

다만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했고, 마조는 ‘마음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했다.

대중들이여, 말해 보라! 이것은 무엇일까?” 이윽고 다시 말했다.

“강에 도달하니 吳나라 땅은 끝났는데, 언덕 저 편에 越나라 산이 첩첩이로다.”47)

47) 五祖法演語錄 古尊宿語錄20 卍118 p.422b7.

“永嘉道, ‘取不得, 捨不得, 不可得中,

只?得.’ 祖師道, ‘不是心, 不是物, 不是佛.’

大衆, 且道! 是箇什?? 乃云,

到江吳地盡, 隔岸越山多.”

 

 

마지막 구절은 조사의 말이 규정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첩된 관문이라는 뜻이다. 이 관문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틀로써 한겹씩 그 정체를 벗겨 내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卽心卽佛이 되었건,
非心非佛이 되었건 그 어떤 말이 던져져도 그것이 하나의 장치라는 점을 알아차리고, 동시에 그것은 더듬고 들어갈 통로가 전혀 없는 관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2. 달마의 安心 문답

 

"혜가가 달마에게 말했다. “저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제 마음을 편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가지고 오라. 그러면 네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리라.”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얻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구나.”48)

48) 景德傳燈錄 권3 ?菩提達磨傳? 大51 p.219b21.

“光曰, ‘我心未寧, 乞師與安.’

師曰, ‘將心來與汝安.’

曰, ‘覓心了不可得.’

師曰, ‘我與汝安心竟.’

” 여기서 ‘光曰’의‘光’은 神光 곧 달마가 개명해 주기 이전의 慧可를 가리킨다.

 

 

이것은 어느 한 편이 일방적으로 상대를 이끌어 가는 내용이 아니라, 달마와 혜가가 서로의 선적인 기틀을 드러내도록 돕고 있는 문답이다. 달마와 혜가는 처음부터 마음을 구하지도 않았고, 마지막에 마음을 편안하
게 한 것도 아니다. 혜가는 착각인 줄 알면서 달마의 속뜻을 끌어내고자 어리석음을 가장했고, 달마는 혜가의 착각에 또 다른 착각을 가지고 대해 줌으로써49) 서로의 의중을 시험해 본 것이다. 그들이 던져 놓은 말의 장치에는 불안한 마음이나 편안한 마음은 물론 어떤 분별의 수단도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이 두 사제의 뜻을 볼 수 있는 창이 아니라 겹겹으로 깔린 짙은 안개와 같은 장치인 셈이다. 편안하게 할 마음이 있다느니 그렇게 할 마음이 없다느니 하는 겉말들에 달마와 혜가의 몸이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겉말을 이정표로 삼아 더듬어 들어간다면 그것은 그들의 몸을 가리는 장막이 될 뿐이다.

廣靈祖는 마음이 있다(有心)는 분별이나 마음이 없다(無心)는 분별이나 모두 틀어막아서 헤아릴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함으로써 이 문답의 요지를 밝혔다.

 

49) 이 문답에 대한 蔣山法泉의 평가이다. 禪門拈頌說話 100則 韓5 p.104b3.

“蔣山泉拈, 且將錯就錯.” 이에 대하여, 같은 책 ?설화? p.107a22에서는 다음과 같이 푼다.

“장산이 ‘착각을 가지고 착각을 대한다’라고 한 말은 혜가가 내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고 한 말이 하나의 착각이요, 달마가 마음이 없다고 한 것이 또한 착각이라는 뜻이다.”

(蔣山, 將錯就錯者, 慧可 我心未寧, 是錯 ; 達摩無心, 又錯)

 

 

"법좌에 올라앉아 이 화두를 들고 말했다.

“여러분, 말해 보라! 마음이 있어야 편안하게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마음이 없어야 편안하게 할 수 있는가? 만일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혜가가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얻을수 없었다’(無心)라고 말할 것이며,

마음이 없다고 말한다면 달마가 ‘그대에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有心)라고 할 것이다.”50)

50) 禪門拈頌說話 100則 韓5 p.105a1.

“廣靈祖, 上堂, 擧此話云,

‘諸仁者, 且道! 有心可安? 無心可安?

若言有心, 二祖自云, ?覓心了不可得.?

若言無心, 達磨道, ?與汝安心竟.?’ ”

 

 

有心에 얽매이면 無心으로 쳐부수고, 無心에 집착하면 有心으로 해체하는 방식에서 이 화두에 제시된 ‘마음’이 모두 잠정적으로 설정된 장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은 처음부터 오를 수 없는 빙벽의 산이나 뚫
을 수 없는 철벽과 같은[銀山鐵壁] 언어로 주어진 것이며, 공부의 결과로 銀山鐵壁에 도달하는 것만은 아니다. 광영조는 유심과 무심이 모두 통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혜가의 말과 달마의 말을 銀山鐵壁의 화두로 풀고 있는 것이다. 유심과 무심 그 어느 편도 옳지 않지만 그 밖에 이 문답의 뜻을 해설할 다른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별도의 근거를 추구하며 분별한다면 銀山鐵壁을 맞이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로지 유심과 무심이라는 양단간에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그 자리에서 발생하는 沒滋味한 화두와 대결해야 할뿐이다. 이 문답을 읊은 智海本逸의 게송에서 살펴본다.

 

 

"팔을 잘라 내는 것이 눈 속에 선 것보다 어려우니,51) 마음을 찾을 도리가 없고서야 마음이 편해 졌노라. 만 이랑의 갈대 꽃밭, 그 곳곳에 낚시꾼이 낚싯대를 잡고 숨어 있음을 누가 알랴! "52)

51) 혜가가 눈이 무릎까지 쌓인 날 스스로 팔을 잘라낸 斷臂의 고사를 가리킨다.

52) 禪門拈頌說話 100則 韓5 p.104a3.

“智海逸頌, ‘斷臂難於立雪難, 覓心無處始安心.誰知萬頃蘆花境, 一一漁翁把釣竿.”

 

 

앞의 두 구절은 지해본일이 이 문답의 주된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마치 물고기를 꼬이게 하려는 떡밥과 같은 말을 던져 놓았을 뿐이다. 나머지 두 구절에서 ‘마음’으로 조합한 말은 낚시꾼의 미끼와 같다는 뜻을 알
수 있다. 이 두 낚시꾼은 떡밥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물고기와 같이 ‘마음’에 안착하려는 사람들의 헛된 관념을 잡아채려는 것이다. 지해본일은 달마와 혜가가 제시한 ‘마음’에서 장치를 읽어 냈다. 다시 말해서 찾을 도
리가 없는 마음과, 편안해진 마음이 모두 장치였던 것이다. 이 문답에서 두 선사는 그 뜻을 온전히 다 들어 보인 것이 아니라 슬쩍 내비친 것에 불과하다. 우거진 갈대밭에 은밀하게 몸을 숨긴 채 여기 저기 포진되어
있는 낚시꾼과 같이 그들이 내어놓은 말들은 물고기를 꼬이게 할 떡밥이며, 낚아 올리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다. 만약 그 ‘마음’을 덥석 물고 진실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메아리를 진짜 소리로 착각하는 것”53)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53)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중국에 온 것이 이미 쓸데없는 일이었고, 2조 혜가가 눈속에 서서 마음이 편해지기를 구한 것은 일생 동안의 굴욕을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메아리를 진짜 소리라고 잘못 알아듣는 것처럼 이것을 대단한 禪道와 불법이라고 여기니 이 모두가 자신의 머리를 잃어버렸다고 착각하고 저자거리를 광분하며 찾는 것과 같은 짓이다.”

( 竹原元菴主語 續古尊宿語要5 卍119p.104a7.

達磨西來, 已是多事 ; 二祖立雪安心, 一生受屈. 後來承虛接響, 將謂多少禪道佛法, 盡是迷頭狂布.)

마지막 부분 ‘자신의 머리를 잃고’ 이하의 구절은 楞嚴經권10 大19 p.154c1에 나오는 비유로서, 거울에 비친 머리를 본래의 자기 머리라고 오인하여 찾아 헤매인다는 演若多의 이야기를 가리킨다.

 

이상의 내용은 화두 공부의 주요한 방법과 일치한다. 간화선사들은 ‘마음’을 근본이 되는 그 무엇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몰자미한 화두로 수용한다. 이러한 화두를 제시하여 공부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것에서 촉발되는 여러 가지 분별을 붙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장치를 설정한 다음 결국은 어떤 분별도 그 화두에 붙을 수 없으며, 유심이건 무심이건 모조리 철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바로 이 순간을 가리켜 “마음으로 헤아릴 길이 끊어졌다”(心路絶)54)라고 한다. 이 것이 바로 關門으로서의 화두이며, 그것을 통과하는 첫째 조건은 유심과 무심 등의 인식 무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관세로 바치고 포기하는 것이다.

54) 無門關 1則 ?評唱? 大48 p.292c22. “參禪須透祖師關, 妙悟要窮心路絶.”

 

 

3. 혜능의 心動

 

선종의 6조 혜능은 ‘마음이 움직인다’라고 하면서 잘 이끌어 준 듯하지만 이 역시 해체될 것으로 설정한 장치이다. 혜능이 ‘마음’이라 한 것은 호의적으로 던져 준 결정된 답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때 바람이 불어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한 편에서는 “바람이 움직인다.” 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깃발이 움직인다.”라고 하며 두 학인의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혜능이 그 광경을 보고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바로 당신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소리에 모였던 대중들이 놀라워했다.55)

55) 宗寶本 壇經, p.349c10.

“時有風吹幡動, 一僧云, ‘風動.’ 一僧云, ‘幡動.’ 議論不已,

慧能進曰, ‘不是風動, 不是幡動, 仁者心動.’

一衆駭然.”

 

 

혜능의 말을 듣고 대상 경계에서 촉발된 모든 판단은 마음이 움직여서 만들어 내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면 화두를 보는 안목이 아니다. 혜능은 갈 길을 친절하게 지시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이 가리킨 곳에 함정을 파 놓았다. 혜능은 “마음! 마음!” 하고 외치는 사람들의 집요한 주문을 잡아채어 점검의 기틀로 활용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마음이라는 혜능의 말을 철석처럼 믿고 편안히 등을 기대려다가는 나자빠지고 만다. 그렇게 말했던 순간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도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반대로 생각하거나 그 마음을 아무리 정연한 논리와 교설로 풀어도 단단히 잠가진 이 관문을 여는 비장의 열쇠는 주어지지 않는다. ‘마음’이라는 소를 부리면 어디건 통과할 수 있는 듯이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늘 이것에 올라타고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 혜능이 철벽과 같이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이다.

 

無門慧開는 이 화두를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56)라고 푼다. 그러나 이 말 자체도 관문으로 설정된 것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움직인다’라는 말과 다른 입장을 보인 주장 명제는 아니다. 이러한 뜻이 海印超信의 다음 게송에도 나온다.

 

 

"바람도 깃발도 움직이지 않고 마음만 움직인다고 하니, 한 마디 말을 어찌 두 갈래로 했을까?

지켜보지만 못했던 혜능은 거리낌이 전혀 없이 말했구나! 아사리와 좌주들이 그에게 속고 말았네.57)

57) 禪門拈頌說話 110則 韓5 p.117b14.

“海印信頌,

風幡不動唯心動, 一語如何話兩般?

?耐老盧大傍若!  ?梨座主被欺?.”

 

 

속았다는 것은 “마음이 움직인다”라고 한 혜능의 말에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일반적 오류를 가리킨다. 이 화두를 다시 “깃발도 움직이고, 바람도 움직이고, 마음도 움직인다”라고 뒤집어 제시하더라도 또 하
나의 새로운 관문이 된다. 움직인다고 하거나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거나 모두 올가미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 노출되어 달아날 길이 전혀 없게 되면 바람과 깃발을 둘러싸고 제시된 말 하나하나가 모두 온전한 화
두로 반전된다. 이와 같이 두 겹 세 겹으로 화두가 산출되지만 “마음이 움직인다”고 한 혜능의 첫 마디에 속지 않고 곧바로 만 길의 절벽58)에서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어떤 분별이건 무너져 내린다면 “마음이 움직인다”는 처음의 문구 자체가 남김 없이 설정된 장치로서 완결되는 것이다. 이미 뚜렷하게 실현된 혜능의 화두를 효과적으로 꿰뚫기 위하여 “마음도 아니다”라는 등으로 달리 말하는 것은 마치 “또 하나의 쐐기로써 박힌 쐐기를 뽑아 내는 방식”59)이지만, 그 뜻을 잘못 알아 차리면 제거하기 위하여 사용한 쐐기가 더욱 단단하게 박힐 수 있는 것이다.

 

58) 만 길의 절벽은 화두에 대한 모든 사유분별이 떨어져 나아가 어떤 수단도 부릴 수없는 화두 공부가 바른 궤도에 들어선 상황을 묘사한다.

“이 근본적인 의심 아래 몸과 마음의 집착을 모두 놓아 버리고 마치 만 길의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이 사유분별을 전혀 가지지 말고,

마치 완전히 죽은 사람과 같아서 이러니 저러니 하는 모든 상념을 다 버리고 단지 無字 화두만 들라.

하루 24시 중 4위의 안에서 단지 화두를 생명의 근본으로 생각하여 늘 의식에서 놓치지 말고,

시시각각 살피며,화두를 들고서 눈앞에 붙이고 있어야 한다.”

( 太古語錄 韓6 p.676b13.

於此大疑之下, 放下身心, 如墮萬?崖下時相似, 無計較, 沒商量,

如大死人相似, 放捨如何若何之念, 單單提箇無字.

於十二時中, 四威儀內, 只與話頭爲命根, 常常不昧,

時時檢察, 提?話頭, 帖在眼前.)

59) 以楔出楔 또는 以楔去楔. ?悟語錄 권19 大47 p.805a7, 從容錄 46則 大48p.256b10 등에 용례가 보인다

 

어떤 禪語이건 그것을 철벽의 화두로 수용하여 그 말에 뭍어 있는 관념에 지배되지 않는 한 마음이라 하건 마음이 아니라 하건 동일한 효용을 발휘할 수 있다. 慧諶은 말한다.

 

 

"눈앞에 있는 그대로가 옳으니 분별하려 하면 바로 어긋난다. 말해보라. 이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마음이라거나 부처라거나 해서는 안 된다."60)

60) 金榮郁, 진각국사어록역해 1 ?상당 76? p.358. “直下便是, 擬心卽差. 且道. 是?什?? 不可道是心是佛.”

 

 

‘눈앞에 있는 그대로가 옳은 것’이라는 말은 마음 심 자를 마음 심 자로 아는 것 이상 다른 분별이 없는 端的인 앎을 지시하는 것이다. 심 자를 두고 눈앞의 그것 이외에 다른 ‘무엇’을 기대하며 분별하는 의식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61) 선사들의 말에서 우선 이러한 虛한 장치를 뚫어 보지 못하고 분별하여 맞추려고 한다면 난해한 한 다발의 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61) 위의 책 ?상당76? <해설> p.359.

 

 

4. 서암의 주인공

 

瑞巖師彦은 ‘마음 공부’를 하는 자들이 자아 또는 주인공을 추구하는 일반적 경향을 소재로 하여 하나의 장치를 제공하고 있다.

 

 

"서암은 매일 스스로 “주인공!” 하고 부르고, 또한 스스로 “예!” 하고 응답했으며, 이어서 “또렷또렷이 깨어 있거라!” “예!” “이 다음에 다른 사람의 말에 속지 말라.” “예! 예!” 하며 자문자답을 했다.62)

62) 無門關 12則 大48 p.294b19.

“瑞巖彦和尙, 每日自喚主人公, 復自應諾, 乃云, ‘惺惺著!’ ‘諾!’ ‘他時異日, 莫受人瞞!’ ‘諾! 諾!’ ”

 

 

서암이 게으르지 않고 수행에 매진하려는 스스로의 경각심에서 이 문답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면 그 본래의 의도를 포착할 수 없다. 이 전체가 온전히 하나의 화두로서의 관문인 것이다. 부르거나 답하는 모든 것에 주체가 있고 그것이 곧 주인공이라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서암은 마치 자문자답하는 곳곳에 주인공이 있기나 한 듯이 일인극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허깨비와 같이 주고받는 문답’63)이 있을 뿐 그 배후에 주인공이 있는 것으로 오인하면 안 된다. 서암의 이 화두는 시종일관 이러한 보통의 착각을 역이용하여 한 마디 한 마디를 관문으로 설정한 것이다.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주인공과 대담한 것이 이 화두의 핵심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서암은 그것을 눈앞에서 잡아챌 수 있는 듯이 교묘하게 속여 가며 “주인공!” 하고 부른 것이다. 天衣如哲이 그 뜻을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읊었다.

 

"서암은 늘 주인공만 부르다가, 수미산 최상봉에 불쑥 나타났네.

대지를 다 뒤집어도 찾을 곳 없으니, 피리 한 가락 불고 누각에서 그림이나 그리리라." 64)

64) 五燈會元 권16 ?天衣如哲章? 卍138 p.643a12.

“有以瑞巖喚主人公話問者, 師答以偈曰,

‘瑞巖長喚主人公, 突出須彌最上峰.

大地??無覓處, 笙歌一曲?樓中.’ ”

 

 

서암은 언제나 “주인공!” 하고 외쳤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어떤 분별과 말도 얼어붙는 孤峰頂上의 소식이었다. 그렇게 알아차린 이상 주인공이라는 소리에 홀리지 않고, 그것이 있거나 없거나 뒤돌아보며 헤아리지 않게 된다. 오로지 그 현장에 흠뻑 젖어 마음껏 누리고 있는 그 사람과 마주칠뿐 주인공이란 말을 고수하며 눈을 멀게 할 것 없다. 학인이 “저의 자신이란 어떤 것입니까?”라 묻자 雲門이 “산에서 노닐고 물을 즐기는 것이니라”65)라고 대답한 말도 그 뜻이다.

65) 雲門廣錄 권상 大47 p.545c4. “問, ‘如何是學人自己?’ 師云, ‘遊山翫水.’ ”

 

 

4. 맺는 말

 

이상에서 선문답에 내재된 ‘장치와 해체’라는 맥락을 간화선의 화두 공부와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았다. 화두가 관문으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설정되는 근거는 간화선 성립 이전에 발견되는 선문답의 장치에 풍부하게
간직되어 있다. 또한 그것에 적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문답일지라도 간화선의 관점에 따라 화두로 해석해 냄으로써 후대에까지 연속되는 고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선사들은 문답 과정에서 實의 장치 속에 虛를 만들어 낸 다음 그것을 實로 오인할 경우 다시 虛로 일깨워 상대의 의식에 박힌 집착을 뽑아 낸다. 實이라는 장치를 통하여 상대를 시험하고, 그것을 虛의 맥락에서 해
체하는 방법은 馬祖道一 이후의 조사선과 그 연장선에서 화두 공부법을 개발한 간화선의 핵심적인 선법이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여러 가지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길잡이와 같다. 간화선사들은 우리의 의식이 말 길에 지배되고 그에 상응하는 집착을 일으킨다는 점에 착안하여 화두라는 장치를 활용한다. 사람들이 의지하고 있는 여러 종류
의 관념들을 그대로 허용하여 그에 따라 분별하도록 유도하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노출된 분별을 쳐부수는 전략을 펼치는 것이다. 이처럼 단단히 굳어진 분별의 소재들을 장치로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도둑의 말을 타고 도둑을 뒤쫓고, 도둑의 창을 빼앗아 도둑을 죽이는”66)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화두는 장치로서 먼저 제기되고 이 말의 장치에 걸려든 것을 보고 곧바로 그것을 해체하여 의지할 대상이 전혀 없는 은산철벽으로 유도해 낸다. 장치는 實에 상응하고, 해체는 그 實한 장치에 대한 망상이 무너지면서 드러나는 虛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이라는 말도 사람들로 하여금 식상한 관념에 떨어지게 만들기 쉽다. 그것 역시 비판적 소재로 되살아나 화두로 부활하는 것에서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다. 마음과 관련된 어떤 구절도 간화선에서는 장치 이상의 깊은 뜻은 없는 것이다.

 

66) 從容錄 100則 ?評唱? 大48 p.292a5.

騎賊馬?賊, 奪賊槍殺賊.” ;

碧巖錄 15則 ?評唱? 大48 p.155b11.

“其實, 雲門騎賊馬?賊.”

 

 

 

참고문헌

 

景德傳燈錄
續傳燈錄
五燈會元
碧巖錄
從容錄
禪門拈頌說話
宗門拈古彙集
宏智廣錄
壇經
大慧語錄
東林雲門頌古
馬祖語錄
無門關
密菴語錄
法眼文益語錄
法華全擧和尙語要
書狀
葉縣歸省語錄
五祖法演語錄
雲門廣錄
?悟語錄
戰國策
正法眼藏

趙州語錄
竹原元庵主語
太古語錄
김영욱, 진각국사어록역해 , 伽山出版部, 2004.
          ?간화선의 화두공부와 그 특징?, 伽山學報 제9집, 2003.

 

 

 

 

 

 

The Equipment and its Dismantlement in Zen Conversation

Kim, Young-wook

 

The most important purpose of Zen conversations is to incapacitate the power of the distorted consciouseness that is obsessed by the various ideas. To accomplish this purpose well, the Zen masters set a trap for it. That is a kind of equipment for making use of his opponent's stiff notion inversely and a method to induce the opponent to this equipment. Ultimately it expose to the fact that his notion is an illusion. This essay is an attempt to explain the truth of Zen conversation with the measure of equipment and its dismantlement. That is not only the fundamental instrument for the Zen masters to applicate their own conversation, but also the way to analyze the other's Zen conversations. There is an intimate connection between the key point of Whadu(話頭) training and the above mentioned instrument. A whadu as the object of tranining corresponds with the instrument in its function. The Zen masters induce the opponents to this instrument and deprive them of all their means of recognization. In this manner, through the ceaseless repetition they lead the opponents to the mountain covered with ice and the iron wall(銀山鐵壁) that cannot be penetrated by any languages and discriminations. At the perfection of whadu training, one will meet the sphere of the moutain covered with ice and the iron wall.

 

In the Zen conversation, there exists a falsehood(虛) disguised as truth (實). And because the Zen conversations are constructed with the equipment and its dismantlement, it is a natural conclusion. If we find the disguised truth in the Zen conversation on all sides and take strip off the veil, we will also find the falsehood in all cases behind it. Budhahood, the mind, the univers, the principle etc are given as if it contains truth. But it is a kind of bait, so we must not accept it as it is given. Although they say “mind is budha”, this is not a proposition with solution but an equipment with falsehood. on the contrary, even if they say “mind is not budha”, it it an equipment too. Regardless of affirmative statement or negative statement, whadus are suggested as the means of dismantlement. There is no road in whadu depending upon both of the two opposite regulations, in the same time the third way is also cutted off. This is the basic attribute of whadu which cannot be captured by the instrument of recognition.

 

The concept of so called mind is the ultimate conclusion of Buddhism universally. But the mind have no ohter meaning except whadu in Khanwha-s?n(看話禪). So it also is the equipment and the one to be dismantled finally. only for dismantling the general nest of notion, “everything is the mind”, they suggest the mind as the critical material. As long as the mind is a whadu, it is not permitted to thought by depending upon every type of category, as the existence-nonexistence or the good-evil. When we are deprived of all sorts of weapons for discrimination and so cannot thought any longer, paradoxically whadu will disclose its inherent figure and we will have the decisive chance to heard its information. The great masters of Khanwha-s?n extract the mind from several occasions of Zen conversations to convert it a gate without any method to break through. For the purpose of penetrating this gate, it is an essential condition for us not to be deceived by the disguised equipment of whadu.

 

 

* Key words:

Khanwha -s?n, equipment and its dismantlement, a falsehood disguised as truth, the mountain covered with ice and the iron wall, Whadu, zen-conversation.

 

? 논문접수일: 7월 5일, 심사일: 7월 24일, 게재확정일: 8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