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佛敎에關한 글

看話禪 참구의 실제 - 無字 화두를 중심으로 - / 김영욱

경호... 2012. 12. 12. 03:29

看話禪 참구의 실제 - 無字 화두를 중심으로 -

 

 

김영욱 / 가산연구원

 

 

차 례

 

Ⅰ. 화두의 일반적 속성
Ⅱ. 五祖法演의 無字 제기
Ⅲ. 무자 공부의 병통
Ⅳ. 화두 참구의 바른 방향
Ⅴ. 결론

 

 

I. 화두의 일반적 속성

 

무자 화두는 趙州從?(778~897)의 문답을 기원으로 한다. 그러나 조주가 학인과 나눈 문답 자체에 간화선에서 말하는 방식의 화두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무자 화두란 조주의 문답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궁구하는 또 하나의 문제제기 방식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모색할 단서를 끊어놓는 방법이 그것이다. 물들거나[觸] 등지는[背] 어느 편도 허용하지 않은 채 설정하는 관문 곧 背觸關 1] 등이 문제를 화두로 만드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활용된다. 이것은 간화선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이전에 여러 조사들의 문답에서 충분히 발견되는 요소이다. 간화선은 이 방법을 수행의 틀로 정착시켜 중심 과제로 제기했던 것이다.

 

이 방법에 따라 조주무자를 간화선의 관점에서 접근한 최초의 선사는 五祖法演(1024~1104)이다. 그의 스승인 白雲守端(1025~1072)도 무자를 화두로 든 적이 없고, 법연의 제자인 ?悟克勤(1063~1125)도 조사의 공안을 중심 수단으로 삼고 간화의 방법으로 그것을 궁구했지만2] 무자 화두를 특별히 내세운 예는 볼 수 없다. 무자를 그 특징적인 공부법과 더불어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다시부각시키는 역할은 이 법맥에서 원오의 뒤를 이은 大慧宗?(1089~1163)의 몫으로 돌아간다.

 

조주무자에 대한 탐구는 화두 공부의 전반적 실태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무자를 중심으로 간화선 수행의 면모를 밝히기에 앞서 화두 일반이 가지는 특징을 예비적으로 들어 본다.

화두는 개념적 사고나 특정한 인식 범주를 수단으로 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두에는 어떤 분별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잡을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고(沒巴鼻) 아무 맛도 없다(無滋味)’거나 ‘손잡이가 없는 쇠망치(無孔鐵鎚)’4]같다거나 하는 등의 비유는 이렇게 어떤 길로도 통하지 않는 화두의 본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화두를 공부하는 사람이 그 본질을 실현하게 되면 ‘마음으로 모색할 길이 끊어졌다(心路絶)’고 한다. ?간화결의론?에는 대혜의 말을 인용하여 화두의 이 속성을 잘 요약하고 있다.

 

1] ?無門關? 43則 大48 p.298b15에 제시되는 ?首山竹??가 대표적인 예이다. “首山省念이 죽비를 잡고 대중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이것을 죽비라 부르면 물들고, 죽비라 부르지 않으면 등지게 된다. 그대들은 말해 보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 無門慧開가 말한다. ‘죽비라 부르면 물들고 죽비라 부르지 않으면 등지게 된다고 하니 말이 있어도 안 되고 말이 없어도 안 된다. 속히 말해 보라. 속히 말해 보라.’ ”(首山和尙, 拈竹?示衆云, ‘汝等諸人, 若喚作竹?則觸, 不喚作竹?則背. 汝諸人且道! 喚作甚??’ 無門曰, ‘喚作竹?則觸, 不喚作竹?則背. 不得有語, 不得無語, 速道速道!’) ; ?大慧語錄? 권17 大47 p.882a1 및 ?禪要? ?除夜小參? 제21 卍122 p.717b18 등에도 보인다.

2] ?書狀? ?答曾侍郞問書? 大47 p.916b25에 ?悟가 증시랑에게 ‘放下著’과 ‘須彌山’의 화두를 공부거리로 주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悟語錄? 권14 ?示隆知藏? 大47 p.777a21 등에 五祖法演으로부터 받은 沒滋味한 화두의 가르침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법맥에서 간화가 중심 수행법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書狀? ?答呂舍人狀? 제2서 大47 p.931c23 ; ?禪文手鏡? ?義理禪格外禪辨? 韓10 p.519c4.

4] ?大慧語錄? 권9 大47 p.846b13 ; ?禪要? ?示信翁居士洪上舍? 卍122 p.712a16. ?禪門拈頌說話? 417則 韓5 p.348c3 ?설화?에 無孔鐵鎚에 비유되는 화두의 일반적인 뜻이 설명된다. “대체로 본분을 터득한 종사들이 드러내는 언구는 하나하나가 마치 구멍없는 쇠망치와 같으니 어찌 분별로 파고들어갈 여지가 있겠는가! 다른 여러 언구들은 그만두고라도 무자와 같은 종류의 공안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大凡本分宗師, 所發言句, 一一如無孔鐵鎚, 豈有穿鑿分! 諸餘言句且置, 無字一般公案, 又無數也.)

 

 

"종사들이 제시한 뜰앞의 잣나무?마삼근?구자무불성 등의 화두에는 단적으로 분명하게 보이는 법은 전혀 없다. 다만 아무 맛도 없고 모색할 수단도 없는 화두를 준 다음 그에 따라 “분별 의식이 타파되지 않았을 경우 망상의 불은 더욱 치열해진다. 바로 이럴 때 다만 의심하고 있는 화두를 놓치지 말고 들라”고 경계의 말을 할 뿐이다."5]

5]?看話決疑論? 韓4 p.734c21. “宗師所示, 庭前栢樹子?麻三斤?狗子無佛性等話頭, 都無端的所示之法. 但給沒滋味, 無摸索底話頭. 然後隨而誡之曰, 情識未破, 則心火??地. 正當恁?時, 但只以所疑底話頭提?.” ; 인용된 대혜의 말은 ?書狀? ?答張舍人狀? 大48 p.941b9에 나온다.

 

‘단적으로 분명하게 보이는 법이 없다’는 말은 그 뒤에 ‘맛이 없고 모색할 수단이 없다’는 말과 호응한다. 잣나무?마?개?불성 등 화두에 들어 있는 어떤 말 속에서도 추론해 나갈 단서를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화두는 그 어떠한 모색과 분별의 근거도 찾을 수 없도록 제시된다. 화두에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단적이고 분명한 지시 내용은 없고, 그와는 반대로 예상되는 지시 내용을 모조리 무의미화시키는 기능이 부각된다. 위에서 인용한 대혜의 말이 그 뜻을 나타낸다. 곧 제시된 말에서 깊이 감추어진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가 있다고 미리 단정하는 분별을 타파하기 위하여 화두를 드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화두를 궁구하다가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 상황을 하얀 눈과 얼음으로 덮여 도저히 오를 수 없는 銀山과 온몸을 던져도 뚫고 나가지 못하는 鐵壁에 비유한다.6]

 

6]은산철벽 앞에 선 것과 같이 어떻게 해 볼 수단도 전혀 없는 경계까지 가야 비로소 禪語로서의 화두가 그 효용을 발휘한다. “바로 이러할 때는 은산과 철벽을 마주한 것과 같아서 앞으로 나아가자니 문이 없고 물러서면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正恁?時, 銀山鐵壁, 進則無門, 退之則失. ?禪要? ?結制示衆? 제4 卍122 p.708a5). 이렇게 진퇴가 모두 막힌 상황에서 궁구하도록 하는 것이 배촉관이다. ; 대혜가 “무소뿔로 만든 미끌미끌한 쥐틀에 들어가 거꾸로 뒤집혀서 나아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 쥐”(?書狀? ?答張舍人狀? 大47 p.941b16)라 한 비유도 마음이 더 이상 어떤 수단과 기량도 부릴 수 없는 은산철벽의 경지를 이른다.

 

 

이 일련의 말들은 화두 공부를 시작하여 도달해야 할 저편 먼 곳에 있는 경지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모든 화두는 밟고 올라갈 점차적 단계가 주어지지 않고 처음부터 곧바로 이 은산철벽의 뜻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주어졌다고 하여 화두를 공부하는 각 사람에게 화두가 그 본질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주어진 화두에 대하여 잡거나 맛보려 하며 이리저리 다양한 이론과 개념을 근거로 모색하고 분별하는 잘못을 범한다. 화두에 그렇게 모색할 단서가 있다고 믿는 순간 그것은 망상분별을 촉발하는 대상이 될 뿐이다. 간화선에서 말하는 10종병을 비롯한 다양한 병통들은 포착할 도리가 없는 화두를 이처럼 분별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에서 생긴다.

 

이상의 내용에 따르면 화두 ‘無’는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란거리가 아니라 이를 놓고 벌어지는 모든 분별과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주요한 뜻을 가진다. 대혜가 “이 無라는 한 글자는 허다하게 잘못된 지각을 꺾어버리는 무기이다” 7]라고 한 말이 그 의미이다. 화두가 무기로 성립되는 이면에는 ‘의심’이라는 본질적이며 부단한 작용이 있다8]. 참구하는 화두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지만 그것을 분별하거나 경전 등에서 근거를 찾는 등 다른 것에 의지하려해서는 안 된다.9] 無 자체는 어떤 맛도 없는 虛한 것이므로 그것에서 實을 분별하기 위하여 돌아보는 순간 함정에 빠지는 것이며 속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7] ?書狀? ?答富樞密狀? 大47 p.921c8. “此一字子, 乃是?許多惡知惡覺底器仗也.”

8]高峰原妙는 ?禪要? ?示信翁居士? 卍122 p.711b1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름지기 알라. 화두에 대한 의심은 믿음을 본체로 하고, 깨달음은 의심을 작용으로 삼으니 믿음이 충분하면 의심도 충분해지고 의심이 충분하면 깨달음도 충분해진다.”

(須知, 疑以信爲體, 悟以疑爲用. 信有十分, 疑得十分 ; 疑得十分, 悟得十分.) ;

?禪家龜鑑? 韓7p.636c14에도 蒙山德異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다.

“몽산은 ‘참선하는 자가 언구를 의심하지 않으면 큰 병통이 된다’고 하였고, 또 ‘크게 의심하면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 하였다.”(蒙山云, ‘參禪者, 不疑言句, 是爲大病.’ 又云, ‘大疑之下, 必有大悟.’) ;

?大慧語錄? 권17 大47 p.886a28.

9] ?禪關策進? ?仰山古梅友禪師示衆? 大48 p.1103a25. “却將本參話頭, 一提提起, 疑來疑去, ?來?去, 凝定身心, 討箇分曉, 以悟爲則. 不可向公案上卜度, 經書上尋覓. 直須卒地斷, 爆地?, 方始到家.” ; 이것은 10종병 중 “경전이나 어록 등의 문자를 끌어들여 입증하려 해서도 안된다(不得向文字中引證)”는 조목에 해당된다. 혜심은 ?狗子無佛性話揀病論? 韓6 p.70b2에서 이 병통이 將迷待悟를 제외한 다른 모든 조목에 다 통하는 것이라 했다.

 

 

조사들이 처음부터 분별할 여지가 없는 평범하고 싱거운 말을 던지는 경우는 결과적으로 이 뜻에 부합된다. 이와는 달리 풍부한 내용과 심오한 개념을 가지고 특정한 무엇을 가리키는 듯한 말을 가장하는 화두도 있지만 이것은 그 화두에 붙는 분별을 유도해 내어 제거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있다고 했건 없다고 했건 화두로 제시된 말들은 따라가 잡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는 것이다. 화두는 모든 헤아림을 틀어막아 아무 맛도 없는 곳에 이르도록 하는 수단이다.

 

 

"단지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는 모든 곳에서 항상 화두를 놓치지 말고 들어야 합니다. “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고 한 문답을 말입니다. 들고서 놓치지 않는 공부가 무르익게 되면 입으로 말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하는 수단이 미치지 못하여 마음 속에서만 무수하게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니 마치 쇠말뚝을 씹은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맛도 없을 때 결코 뜻을 굽히지 마십시오. 이와 같은 시기에 이르렀을 때가 바로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10]

10] ?大慧語錄? 권21 ?示呂機宜? 大47 p.902a3.

“但行住坐臥, 時時提?, 狗子還有佛性也無. 無. 提?得熟, 口議心思不及, 方寸裏七上八下, 如咬生鐵?, 沒滋味時, 切莫退志. 得如此時, 却是箇好底消息.”

 

 

화두를 의심하며 분별을 하나하나 버리다 본래의 뜻 그대로 쇠말뚝과 같이 몰자미하여 은산철벽에 이르면 어떻게도 손을 쓸 수 없는 경지가 된다. 이와 같이 의심의 정점에서 언어와 분별의 수단이 통하지 않는 시기가 좋은 소식이라 한 말은 어떤 의미일까? 太古普愚(1301~1382)는 말한다.

 

 

"부처와 조사의 뜻을 깊이 믿고 모름지기 그 단적인 취지를 판별해야 한다. 마음이 곧 천진한 부처이거늘 어찌 힘들여 마음 밖에서 찾는가! 만사를 내려놓고 살펴보라. 길이 철벽과 같이 막혔을 때 망념이 모두 사라지리라11]. ;

다만 화두를 들고 사유분별이 미치지 않고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곳까지 밀어붙이면 이것이 바로 부처와 조사가 (생사윤회하는) 목숨을 던지는 경지인 것이다."12]

 

11]?太古語錄? 韓6 p.685a10.

“深信佛祖意, 須要辦端的. 心卽天眞佛, 何勞向外覓! 放下萬事看. 路窮如鐵壁, 妄念都滅盡.”

12]?禪關策進? ?高麗普濟禪師答李相國書? 大48 p.1104a21.

“?到心思不及, 意慮不行, 卽是諸佛諸祖, 放身命處.”

 

 

모색할 수단이 완전히 사라진 경계에서 망상이 사라지므로 화두가 몰자미성 그대로 구체화된 상태 곧 본분사가 완결된다는 뜻이다. 화두에 대하여 어떤 방식으로도 마음을 쓸 수 없는 이곳에 이르면 자연히 스스로 수긍하여 알아차릴 수 있다13].모든 수단이 끊어져 망막하게 된 이곳이 궁극적 경지인 셈이다. 대혜가 이 소식을 말한다.

13] ?禪林僧寶傳? 권23 ?黃龍慧南傳? 卍137 p.530b4.

若不令汝如此究尋, 到無用心處, 自見自肯, 吾卽埋沒汝也.”

 

 

"꾸준히 화두를 들고 항상 화두를 의심하다가 도리에 근거하여 알아차릴 방법이 전혀 없고 어떤 맛도 없어서 마음이 뜨겁고 답답하다고 느껴질 때가 바로 화두를 들고 있는 당사자가 목숨을 버릴 순간인 것이니 기억하고 또 기억하십시오. 이와 같은 경계를 보고서 물러나 그만두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은 경계가 다름 아닌 부처가 되거나 조사가 되려는 소식입니다."14]

14] ?書狀? ?答宗直閣狀? 大47 p.933c3.

“擧來擧去, 看來看去, 覺得沒理路, 沒滋味, 心頭熱悶時, 便是當人放身命處也. 記取! 記取! 莫見如此境界, 便退心. 如此境界, 正是成佛作祖底消息也.”

 

 

이 경계에서는 어떤 언어나 행위도 통하지 않는다. 원오는 ‘마음과 부처’로 이루어지는 4구와 방?할을 모두 禪의 생기를 죽이는 死句라 하고, 어디에도 의지하거나 기대어 분별할 수 없게 된 곳을 선의 생명이 시작되는 活句라 하였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 活句인가? 전혀 상관 없다. 마음도 부처도 아니라는 말이 활구인가? 전혀 상관 없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라는 말이 활구인가? 전혀 상관 없다.

상대가 문에 들어오자마자 할을 하는 것이 활구인가? 전혀 상관 없다.

단지 어떤 말이건 있기만 하면 모두 死句이다. 무엇이 활구일까? 알겠는가?

만 길의 봉우리에 외발로 서면 사방 팔면이 온통 암흑으로 뒤덮여 아무 것도 구별할 수 없다. "15]

15]??悟語錄? 권11 大47 p.765b15.

“莫是卽心卽佛是活句?? 沒交涉. 莫是非心非佛是活句?? 沒交涉.

不是心不是佛不是物, 是活句?? 沒交涉.

莫是入門便棒, 是活句?? 沒交涉.

入門便喝, 是活句?? 沒交涉.

但有一切語言, 盡是死句, 作?生是活句? 還會??

萬?峰頭獨足立, 四方八面黑漫漫.”

 

 

언어에 의존하는 어떤 구절이나 그 한계를 넘어서 표현하는 방과 할까지 모두 사구이다. 사구라는 것은 그 앞에서 따라갈 통로가 있다는 뜻이다. 그 모든 것이 전혀 쓸모 없는 물건이 되어 온통 암흑뿐이고 의지할 대상이 없는 상황이 마음의 길이 끊어져 백척간두에 도달한 소식이다. 여기가 바로 어떤 분별이나 말 또는 도리도 통하지 않고 화두의 본질적 속성이 살아 움직이는 활구의 소재처인 것이다.

 

 

Ⅱ. 五祖法演의 無字 제기

 

무자를 화두 공부의 방식으로 제기한 법연의 다음 상당법문에는 무자 화두의 특징과 그것을 공부하는 기본적 방법이 잘 나타나 있다.

 

 

"법좌에 올라 어떤 학인과 조주의 다음 문답을 들었다.

“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無).’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는데, 개는 어째서 없습니까?’

‘그 놈에게는 業識이 있기 때문이다.’

” 법연이 말한다. “대중들이여! 그대들은 평상시에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노승은 평상시에 (이 문답을 두고) 단지 ‘無’라는 글자만 들 뿐 다른 궁리는 하지 않는다. 그대들이 이 하나의 글자만 뚫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대들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뚫겠는가? 이미 훤하게 뚫은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나와서 말해 보라.

나는 그대들이 ‘있다’고 말하기를 바라지도 않고, ‘없다’고 말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말하겠는가? 잘들 계시오.” 16]

16]?五祖法演語錄? 권하 大47 p.665b27.

“上堂擧,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僧云, 一切衆生皆有佛性, 狗子爲什?却無?

州云, 爲伊有業識在.’

師云, ‘大衆! 爾諸人, 尋常作?生會?

老僧尋常只擧無字便休. 爾若透得這一箇字, 天下人不柰爾何.

爾諸人作?生透? 還有透得徹底?? 有則出來道看.

我也不要爾道有, 也不要爾道無, 也不要爾道不有不無.

爾作?生道? 珍重.”

 

 

조주가 ‘없다’고 대답한 말에 대하여 ‘있다’?‘없다’?‘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세 가지 어떤 분별에도 기울지 말고 ‘오로지 무자만 들고’17] 올바르게 말해 볼 것을 요구한다. 법연의 말은 “이 세 가지는 모두 집착된 분별 의식에 의존한 것이기에 덩굴에 다시 덩굴을 덧붙이는 격이다. 이것을 떠나서 어떻게 뚫을 수 있을까?”18]라고 달리 풀이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벗어난 다른 어떤 것에 해답이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17] ?書狀? ?答宗直閣狀? 大47 p.933b10에서 대혜가 무자에 대하여 다른 어떤 생각이 침범해서도 안 되고 ‘단지 무자만 든다’고 한 말과 같다.

“擧狗子無佛性話, 不用作破除想, 不用作情塵想, 不用作差別想, 不用作佛法想. 但只看狗 子無佛性話, 但只擧箇無字.”

18] ?禪門拈頌說話? 417則 ?說話? 韓5 p.349b3.

“道有, 道無, 道不有不無, 皆是情識邊事, 枝蔓上更加枝蔓. 離此如何透得?”

 

 

이것이 간화선에서 어떤 화두를 마주하고 곧 바로 철벽에 부딪히게 만드는 특유의 문제설정 방법이다. 무자를 두고 뚫고 나갈 통로가 어디에도 없고, 모색할 수단이 전혀 없어서 막막한 상황이 바로 이 무자가 화두로 성립되는 요건이라는 뜻이다.또한 이 화두를 수용하는 사람도 곧 바로 이 상황 앞에 설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후대에 강조하는 화두에 대한 ‘의심’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법연 이후 간화선에서 모든 화두를 궁구하는 가장 기초적이며 긴요한 문제제기 방식이다. 법연이 다음과 같이 背觸關의 형식으로 한 말에 좀더 분명하게 그 의미가 드러난다.

 

 

"주먹을 들고서 말했다. “주먹이라 부르면 수행을 해 본 적도 없는 것과 같은 꼴이며, 주먹이라 부르지 않으면 얼굴을 대하고 속이는 짓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보잘것없는 주먹도 얻을 수 없으리라.” ; 만일 禪이라 이해하면 經을 비방하는 것이며, 경이라 이해하면 선을 비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 덩어리로 같다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이 함정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은 매일 만 냥의 황금을 쓸 가치가 있겠지만 만일 뛰쳐나오지 못한다면 (그 대가로) 그대를 잡아갈 곳이 있을 것이다."20]

20]위의 책, 권중 大47 p.659b28.

若作禪會則謗經, 若作經會則謗禪, 若作一團則??. 有人跳得出, 日銷萬兩黃金 ; 若跳不出, 有處著?在.”

 

 

주먹을 주먹이라 부르거나 부르지 않거나 모두 잘못된 것이지만 이 두 가지 장애를 벗어나서 모색하는 것도 해결책은 아니다. 화두로 제기된 한에서는 어떤 출구도 없기 때문이다. 두 가지 장애에 틀어 막혀 꼼짝 못하는 곳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화두가 우선적으로 유도하는 경계이다. 마찬가지로 禪이라거나 經이라고 각각 차별지어 이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부정하여 통할 수 있는 길이 모두 막힌 상태에서 해결해 보도록 문제를 제기한다. 어떤 길도 보이지 않아서 갑갑하고 어두운 함정에 유폐된 듯한 곳은 절망의 경계가 아니라 화두를 타파할 수 있는 문턱에 이른 상태이다.

 

白雲守端이 법연을 인가하면서 “밤송이와 가시나무와 쑥과 같은 禪은 모두 그대의 것이로다”21]고 한 말에서 밤송이 등의 말은 몰자미한 화두를 가리키는 상징어로서 모두 씹거나 입에 넣고 맛볼 수 없는 대상을 나타낸다. 법연이 자신이 깨달은 계기를 전한 다음과 같은 말에도 이 뜻이 나타난다.

21] ?禪林僧寶傳? 권30 ?五祖法演傳? 卍137 p.565b2. “端?之曰, ‘栗棘蓬禪 屬子矣.’ ”

 

 

"내가 제방을 10여 년 간 돌아다니고 온 세상을 공부하러 찾아다니면서 여러 분의 존숙들을 친견하고 스스로 일대사를 깨달았다고 생각하다가 浮山圓鑑의 회하에 이르러 입도 열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뒤에 백운수단 문하에 이르러 쇠로 만든 시큼한 떡 하나를 씹고는 모든 맛이 갖추어진 경지를 알게 되었다."22]

22]?五祖法演語錄? 古尊宿語錄20 卍118 p.412b17.

“況法演遊方十有餘年, 海上參尋, 見數員尊宿, 自謂了當, 及到浮山圓鑑會下, 直是開口不得.

後到白雲門下, 咬破一箇鐵酸?, 直得百味具足.”

 

 

입을 열 수 없는 경지는 어떤 맛도 없어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며, 쇠로 만든 떡이란 그렇게 맛이 없는 화두를 나타낸다.

 

맛이 없는 화두의 참뜻을 알아차려 근본적인 취지를 깨달았으므로 역설적으로 모든 맛이 갖추어진 경지를 알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법연은 바로 이 禪境을 체험한 것이며, 그것은 몰자미한 화두를 궁구하면서 얻은 결과이다. 화두가 타파될 조짐은 그것이 몰자미한 본래의 상태로 드러나는 순간에 온다. 대혜는 이렇게 말한다.

 

 

"단지 화두만 보라. 걸어 갈 때도 들고 앉았을 때도 들며, 항상 화두를 들고 놓치지 않고 의심하다 보면 아무 맛도 없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바로 화두가 타파되기 좋은 기회인 것이니 버려서는 안 된다."23]

23] ?禪關策進? ?徑山大慧宗?禪師答問? 大48 p.1099a22.

“只看箇話頭. 行也提?, 坐也提?, 提?來, 提?去, 沒滋味, 那時便是好處,不得放捨.”

 

 

이렇게 선택과 해결책이 전혀 없는 궁지로 몰아넣는 것이 간화선의 전형적인 문제제기 방식이며, 법연은 무자 화두뿐만 아니라 모든 화두를 이 관점에서 들고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법연의 선법에 정통한 후대의 선사들은 모두 이 맥락에서 그 숨은 뜻을 들추어낸다. 그 선법의 중심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자 화두에 대한 다음의 법문을 보자.

 

 

"오조법연이 법좌에 올라 “개에게도 불성이 있을까? (조주는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개가 고양이보다 10만 배는 낫다.”고 말한 뒤 법좌에서 내려왔다. " 24]

24] ?五祖法演語錄? 大47 p.660a3.

“上堂云, ‘狗子還有佛性也無? 也勝?兒十萬倍.’ 下座.”

 

 

이 간결한 법문에는 위에서 보인 방식의 문제제기는 직접 드러나 있지 않다. 그 본래의 뜻은 무엇일까? 眞覺慧諶은 이 법연의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재차 들어보였다.

 

 

"夜參 때 국사가 오조법연이 법좌에 올라 “조주가 ‘개는 불성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개가 고양이보다 10만 배는 낫다”고 한 말을 들고 평가했다.

말해 보라! 이것은 개의 말인가? 고양이의 말인가?” 25]

25]?眞覺國師語錄? 韓6 p.22a2.

“夜參, 師擧五祖演上堂云, 趙州狗子無佛性, 也勝猫兒十萬倍.

且道! 是狗子語? 是猫兒語?”

 

 

혜심은 개의 말인지 고양이의 말인지를 의문으로 던짐으로써 그 전체를 통괄하는 맥락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것은 법연의 의도를 간파한 또 하나의 절묘한 화두인 것이다. 개의 말과 고양이의 말 중 어느 편을 결정하는 것에 혜심의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혜심은 이 두 가지를 진퇴양난의 관문으로 만들어 궁구할 문젯거리로 들어보인 것이다.

따라서 애초에 제기된 “개가 고양이보다 10만 배는 낫다”는 법연의 말은 표면적인 형식과는 달리 두 놈의 우열을 결정하여 한 말이 아니다. 우열이라는 차별 등을 모두 포괄하여 분별을 하지 못하는 경계에 서도록 만든 것에 법연의 의도가 숨어 있었고, 혜심은 드러나지 않은 그 뜻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낸 것이다. 마치 조주가 “業識”이라 한 대답이 개에게 불성이 없는 진실한 근거로서 들어보인 말이 아니라 몰자미한 말인 것과 같다. 법연이 “낫다”고 한 말은 의문에 대한 결정된 분별과 대답이 아니라 혜심이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고 들어보인 의문과 다르지 않다. 법연은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잡아 보이는 듯했지만 사실은 무자를 철저하게 화두로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 오조법연이 말한다. “비유하자면 무소가 格子窓을 통과하는데, 뿔과 네 다리는 모두 통과하였으나 어째서 꼬리는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 26]

26]?無門關? 38則 大48 p.297c13. “五祖曰, ‘譬如水?牛過窓?, 頭角四蹄都過了, 因甚?尾巴過不得?’ ”

 

 

無門慧開가 “지나가자니 죽음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되돌아가자니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 이 작은 꼬리가 대단히 기괴하기도 하구나”27]라고 읊은 게송도 이 말을 화두로서의 관문으로 해설한 결과이다. 雲峰妙高가 이 말을 듣고 깨달아 “고래가 바닷물을 모두 삼키니 밑바닥의 산호가지가 드러난다”28]고 한 은유도 모든 분별이 사라져 마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心無所之) 화두 공부의 궁극처를 묘사한 말이다.

 

27]상동. “頌曰, ‘過去墮坑塹, 回來劫被壞. 者些尾巴子, 直是甚奇怪.’ ”

28] ?續傳燈錄? 권36 ?雲峰妙高傳? 大51 p.711b22. “鯨呑海水盡, 露出珊瑚枝.”

 

 

법연의 법문에 대한 이상과 같은 해설들은 모두 간화선 일반의 관점에 입각한 것이다. 법연은 평상시에 어떤 화두보다 조주무자를 즐겨 제기하였는데, 학인이 그 뜻을 물음에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하기도 했다.

 

 

"조주가 드러낸 칼날이여! 서릿발같이 차가운 빛이 번득이는구나. 다시 ‘어떤 뜻이냐’라고 묻는다면 몸을 갈라 두 동강 내리라."29]

29]?五祖法演語錄? 大47 p.666c1. “趙州露刃劍! 寒霜光焰焰. 更擬問如何, 分身作兩段.”

 

 

법연이 “낫다”고 한 말은 관문으로서의 함정과 같은 종류였다면 이 게송은 친절하게 자신의 뜻을 보여준다. “어떤 뜻이냐?” 하고 묻는다는 말은 모색할 내용을 미리 예상하고 접근하는 분별을 가리킨다. 이러한 분별을 잘라내어야 무자가 타파된다는 비유이다. 무자에 관하여 더 이상 묻지도 대답하지도 못하여 이에 관하여 “낫다”?“못하다”?“있다”?“없다”는 등의 어떤 맛도 볼 수 없고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는 상태로 이끌기 위한 것이 이를 두고 벌이는 종사들의 다양한 설정이다.

 

따라서 그들이 의도적으로 설정한 표면적인 구절에서 결정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그 책략에 걸려드는 것이다. 조주 무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조주의 다른 문답을 해석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

 

 

"조주가 대중에게 “나의 이곳에는 굴에서 나온 사자도 있고, 굴 속에 있는 사자도 있으나 다만 그 사자를 만나기가 어려울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 때 어떤 스님이 손가락을 퉁겨 그 말에 응답하자 조주가 “무엇인가?”라 물었다. “사자입니다.”

“내가 사자라고 한 말이 벌써 잘못이었거늘 그대는 게다가 뛰거니 밟거니 사자 흉내를 내는구나.” "30]

30]?趙州語錄? 卍118 p.327a17.

“示衆云, ‘我此間有出窟師子, 亦有在窟師子, 只是難得師子.’

時有僧彈指對之. 師云, ‘是什??’ 云, ‘師子兒.’

師云, ‘我喚作師子兒, 早是罪過, ?更行?踏.’ ”

 

 

처음에 조주가 한 말은 사자라는 虛31]를 던져 대중을 시험하기 위한 장치이다. 학인이 사자라는 虛에 현혹된 채 대응한 잘못을 두고 조주가 다시 자신이 만든 장치를 거두어들인 것으로 이 문답은 마무리된다. 다시 말해서 조주의 사자를 근거로 해서는 어떤 해답도 추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몰자미한 화두와 통한다.

 

31] ‘사자’는 본분을 터득한 납승 또는 본래면목 자체에 비유하는 것이 보통이며, ‘굴’이란 그러한 사자가 사는 굴 곧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는 수행처를 나타낸다. 조주는 바로 이와 같은 일반적 개념과 상징을 實인 듯이 내놓았지만 사실은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虛로 활용한 것이다.

 

조사들이 본분을 드러내기 위하여 쓰는 말과 동작 그리고 棒?喝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虛의 뜻을 중요한 요소로 가지고 있다. 태고는 말한다.

 

 

"덕산의 방을 꺾어버리고 임제의 할을 분쇄하여 어느 곳을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나도 속임을 당하지 않은 다음에야 비로소 풍월을 대할만하다."32]

32]?太古語錄? 권하 韓6 p.685b17. “折却德山棒, 粉碎臨濟喝, 到處逢人不被瞞, 然後, 可以對風月.”

 

 

제시된 화두를 實이라 오인하여 되씹으며 분별하면 속는 것이다. 이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조사의 진실이 드러나지만 잘못된 분별을 하나씩 만나서 버리도록 하는 것이 화두 공부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화두나 그것을 해설하는 말들은 어느 것이나 마치 문양이 새겨지지 않은 도장과 같이 사유분별과 언어로 찍어낼 수 없다는 의미에서 虛이며 實이 아니다. 臨濟가 “산승이 말하는 내용은 모두 일시적으로 병을 치료하는 약과 같은 것으로 實을 가진 법은 아무 것도 없다.”33]고 한 말이나 원오가 “온갖 성인들이 설정한 기관에 떨어지지 않고 여러 조사들이 시험하기 위하여 제기한 함정에 노닐지 않는다.”34]라고 한 말도 이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관점은 대혜종고가 조사들의 언어를 보는 핵심적인 근거이기도 하며,35] 그것은 모든 화두에 그대로 적용된다. 법연 계열의 선맥은 모두 글자를 새기지 않은 도장과 같이 찍어서 드러낼 수 없는 虛한 화두를 근본으로 하였던 것이다.36] 법연이 제기한 무자 화두를 해결하는 것이 불법의 존폐를 결정짓는 관문이라 한 대혜의 말37]도 법연이 간화법을 근본으로 하면서 무자 화두를 중시한 경향을 평가한 말이다.

 

33]?臨濟錄? 大47 p.498b18. “山僧說處, 皆是一期藥病相治, 總無實法.”

34]??悟語錄? 권11 大47 p.765c11. “不墮千聖機關, 不遊諸祖?窟.”

35]?大慧語錄? 권15 大47 p.876c2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문양이 없는 도장을 얻어서 2조 혜가의 입에 한 번 찍어버렸으며, 2조는 이 도장을 얻어 조금도 바꾸지 않은 채 3조 승찬의 입에다 찍었다. 이로부터 한 사람은 虛를 전했으나 만인이 그것을 實이라 잘못 전하며 대대로 도장을 찍어 전하다가 강서의 마조에이르자 마조는 남악회양화상으로부터 이 도장을 얻고 ‘오랑캐의 전란이 있은 뒤 30년 동안 소금과 간장이 부족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 것이다. 한 소리 크게 내지르고 말했다. ‘도장의 문양이 찍혔다.’ ”

(“達磨從西天, 將得箇無文印子來, 把二祖面門, 一印印破. 二祖得此印, 不移易一絲頭, 把三祖面門印破. 自後一人傳虛, 萬人傳實, 遞相印授, 直至江西馬祖, 馬祖得此印於南嶽和尙. 便道, ‘自從胡亂後三十年, 不曾小鹽醬.’ ” 師喝一喝云, “印文生也.”) ;

선종에서 대대로 전하는 종지가 虛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간화선의 입장을 가진 대혜의 무리없는 귀착점이다. 實이 아니기 때문에 밟고 올라갈 분별의 계단이 없는 것이다. 인용된 마조의 말도 화두로서의 어떤 맛도 없는 虛로 인지된 것이며, 마지막에 문양이 찍혔다고 한 대혜의 말에는 자신이 한 이러한 말도 虛인데, 착각하여 實을 가진 하나의 분별거리로 수용하지 말라는 경고가 담겨 있다.

36] ?慈明四家錄? ?序文? 卍120,p.161a8에 따르면 “慈明의 제자 楊岐方會는 세 다리를 가진 나귀를 타고 세상 사람들을 모두 밟아 죽였는데, 白雲守端과 五祖法演이 그 종지를 이어서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도장으로 세상 납승들의 얼굴에 찍었으니 정법안장마저 이 눈먼 나귀 편에서 소멸되었다.”(其嗣子楊岐, 跨三脚驢, 踏殺天下人. 而白雲東山, 繼紹其宗, 以無字印, 印破天下衲僧面門, 正法眼藏, 向者?驢邊滅.) 한 말이 그 뜻을 가리킨다. 정법안장일지라도 문양없는 도장으로 찍어서 없애는 것이 이 법맥의 종지라는 취지.

37] ?書狀? ?答鼓山逮長老狀? 大47 p.942c23. “五祖師翁住白雲時, 嘗答靈源和尙書云, 今夏諸莊, 顆粒不收, 不以爲憂. 其可憂者, 一堂數百衲子, 一夏無一人透得箇狗子無佛性話, 恐佛法將滅耳.”

 

 

 

Ⅲ. 무자 공부의 병통

 

1. 有?無와 眞無의 병통

 

조주 무자는 화두라는 보편적인 기반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무자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가지는 개별적 특징도 있다. 무자의 개별적 특징은 주로 이 화두를 궁구하는 데 있어서 발생하는 잘못된 공부법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이 무라는 글자가 촉발시키는 몇 가지 추론의 단서에서 비롯된다.

대표적인 것은 유?무 二分에 입각하여 이 무자를 분별하는 것이다. 어떤 화두건 그에 대한 분별 자체가 바른 공부법은 아니지만 유?무 이분은 조주가 “無”라고 대답한 말로 인하여 촉발되는 특징적 분별이라 할 수 있다. 眞無도 이 분별의 연장선상에 있다.

 

무자는 조주가 개의 불성이 “없다”고 대답한 말을 궁구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다”고 한 대답까지 포함시켜 결국은 조주가 있다거나 없다는 대답을 모두 한 것으로 제시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화두인 이상 이 두 가지 사이에는 큰 차별이 없으며, 효과적으로 화두를 들어보이기 위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보통 무자 화두라 하면 이렇게 유?무 두 가지로 주어진 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관건이 달려 있다. 무자 화두에 대한 慈受懷深(1077~1132)의 게송을 보자.

 

 

"조주의 입 안에는 雌黃이 있으니 그가 말한 구절에서 누가 길고 짧은 차별을 볼 것인가! 우습다, 얼마나 많은 개들이 흙덩어리를 쫓아가며, 깊은 밤에 까닭 없이 빈집에 대고 짖고 있는가! " 39]

39] ?頌古聯珠通集? 권19 卍115 p.236a13.

“趙州口裏有雌黃, 句下誰人見短長! 堪笑幾多逐塊狗, 夜深無故吠虛堂.”

 

 

자황이란 이미 쓴 글자를 지워서 고치는 도구이다. 조주의 입 안에 자황이 있다는 비유는 무라고 하면 유로 지우고, 유라 하고서도 무로 지우는 수단으로서 이 화두에 대한 이해를 보여 준 것이다. 宏智正覺이 “개의 불성이 단적으로 있다고 말하면 뒤로 와서 오히려 없다고 말해 주며, 단적으로 없다고 말하면 앞으로 와서 오히려 있다고 말해 준다.”40]고 한 말도 개의 불성이 “있다” 하거나 “없다” 하거나 이 두 가지 답변에는 그 말 자체로 가리킬 수 있는 분명한 뜻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두 종류의 말은 분별할 대상적 근거가 아니라 상호 소멸을 통하여 각각에 대한 망상분별을 막고 있는 것이다. 유와 무 어느 편이 주어지더라도 다른 한 편을 지우는 수단인 동시에 다른 편에 의해서 지워지는 잠정적 시설이다.

白坡亘璇(1767~1852)이 조주의 유?무 어느 답변이나 일단 주어지고는 자취를 덮어서 없애는 것41]이라 한 취지도 같은 뜻이다. 유건 무건 결정된 의미가 없고, 분별할 대상도 아니므로 두 가지의 우열을 따지며 궁구할 수 없음을 지시한다. 1?2구가 이렇게 해석된다면 3?4구는 위의 방식으로 설정한 조주의 관문을 오해하는 자들에 대한 냉소적 비판이다. 흙덩어리란 지우는 도구이기도 하고 지워지는 대상이기도 한 잠정적 설정과 상대적 수단으로서의 유와 무를 비유한다. 이 虛한 두 가지 말에 궁구할 實한 내용이 있는 듯이 착각하고 따라 다니는 것에 대하여 개가 흙을 던진 사람을 물지 않고 던져진 흙덩어리를 뒤쫓아가며 짖는 것에 빗댄 것이다.42]

 

40] ?從容錄? 18則 ?評唱? 大48 p.238c2. “若道狗子佛性, 端的是有, 後來却道無 ; 端的是無, 前來却道有.”

41] ?禪文手鏡? ?無字揀病論科解? 韓10 p.524c1.

42]이 말은 원래 ?涅槃經? 권25 ?高貴德王菩薩品? 大12 p.516b12에 나오는 다음 비유를 활용한 것이다. “모든 범부들이 果만 보고 그 조건이 되는 인연을 살필 줄 모르는 것이 마치 개가 던져진 흙덩이를 뒤쫓아가고 던진 사람을 쫓지 않는 것과 같다.”(一切凡夫, 惟觀於果, 不觀因緣, 如犬逐塊, 不逐於人.) ;

?諸方門人參問語錄? 卍110, p.854a17에는 이러한 개와 달리 흙덩이는 돌아보지 않고 던진 사람을 무는 사자를 대비하여 그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곧 “ ‘경 ?율?론은 부처님의 말씀이니 그것을 읽고 외우며 그 가르침에 따라 받들어 행할진대 어찌 견성하지 못한다고 합니까?’ ‘어리석은 개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흙덩이를 쫓아가지만 사자는 던진 사람을 무는 것과 같다. 경?율?론은 자성의 작용이며, 읽고 외우는 것은 법성이다.’ ”(又問曰, 夫經律論是佛語, 讀誦依敎奉行, 何故不見性.

師曰, 如狂狗?塊, 師子咬人. 經律論是自性用, 讀誦者是法性.)

 

 

法成枯木(1071~1128)도 유?무 분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힌다.

 

 

"있다고 말하거나 없다고 말하거나 쓸데없이 남아도는 말은 없지만, 천 번 외치고 만 번 불러도 고개를 돌려보지 말라.

향기를 찾고 냄새를 쫓으며 다른 것에 미혹되어 따라다닌다면 공연히 시간을 보내고 세월만 허비하게 되리라." 43]

43]?頌古聯珠通集? 권19 卍115 p.236a15.

“道有道無無剩語, 千呼萬喚不回頭.

尋香逐氣隨他去, 空使流光暗度秋.”

 

 

향기와 냄새를 따른다는 말은 흙덩어리를 쫓는 개의 비유와 같은 맥락이다. 유?무 두 가지로 제시한 말에서 착각을 일으켜 분별의 단서로 그 말을 수용하는 일반적인 잘못을 예상하고, 친절하게 미리 방비해 준 것이다. 무자 화두는 이처럼 고개를 돌리고 찾을 만한 그 어떤 것이 숨어 있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유?무가 자황과 같이 잘못을 교정하는 효용과 기능을 가진 것이기도 한 것이다.

조주 무자에 대한 遷福本逸(宋代 雲門宗)의 게송이다.

 

 

"불성이 있다고도 하고 불성이 없다고도 하는구나.

똑바른 것을 뒤집었다가 뒤집힌 것을 다시 똑바르게 하네.

맑은 연못에 잠긴 달을 차서 없애고, 눈금없는 저울을 부러뜨려라.

물 속에서 불을 피우고 허공에 말뚝을 박는다.

이것을 눈먼 거북이가 죽은 뱀을 갉아먹는 것과 비교할 수 있으랴! 한 쌍의 어금니를 꽉 다물라."44]

44] ?禪門拈頌? 417則 韓5 p.347b22.

“薦福逸頌:有佛性無佛性.

正却倒倒却正.

踏破澄潭月, 拗折無星秤.

火向水中燃, ?從空裏釘.

肯類盲龜?死蛇! 一對牙關緊?定.”

 

 

“불성 ~ 하네”라는 구절은 조주가 번갈아 가며 제시한 유?무의 화두를 말한다. 건져올릴 수 없는 ‘잠긴 달’과 무게를 헤아릴 수 없는 ‘눈금없는 저울’은 그 화두의 몰자미한 속성을 말한다. 특정한 인식의 格에 속박된 ‘눈먼 거북이’가 ‘죽은 뱀’(死句)을 갉아먹듯이 표면적인 유?무의 뜻을 이러니 저러니 분별하는 것으로는 ‘물 속의 불’과 같은 몰자미한 格外의 화두로 제시된 조주의 유?무를 타파하지 못한다.

 

이상의 내용이 간화십종병의 분류로는 “있다?없다는 대립적 유?무의 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不得作有無會)”는 것에 해당된다. 유?무의 무라고 이해하는 병통은 무자 화두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병통이다. 곧 무라고 제시한 표면적인 말을 통하여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흔한 망상분별이다. 무자를 있다는 것과 대립되는 짝으로 분별하여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관념을 해석 수단으로 삼아 분별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무문관? 1칙 ?趙州狗子?에서 “허무하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말고, 유?무 대립의 무로도 이해하지 말라.”45]고 한 말도 그 뜻을 나타낸다. 혜심은 이 병통을 던져진 말에 집착하여 뜻으로 헤아린 결과라고 진단한다.

45] ?無門關? 1則 大48 p.293a4. “莫作虛無會, 莫作有無會.”

 

 

"근본을 모르고 대충 공부하는 道?俗의 무리들은 이 화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제시되는 문답을 보고 드러난 말에 얽매여 뜻을 확정하고, 유?무 양단 중 하나인 무라고 결정지어 이해한다."46]

46] ?狗子無佛性話揀病論? 韓6 p.6913. “汎?道俗, 看此話始終問答, 隨言定旨, 決定作有無之無."

 

 

이것은 무자 화두를 궁구하는데서 생기는 병일 뿐만 아니라 다른 화두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대혜는 조주가 “내가 청주 지방에 있을 때 한 벌의 베 적삼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고 한 말에 대하여 “진실을 여는 조주의 이 한 마디 말은 대단히 기특하여 유?무 어느 편에도 떨어지지 않고 매우 절묘하게 대답한 것이다”47]라고 평가한다. 두 가지 어느 편에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조주의 말이 분별로 추구하거나 모색할 길이 끊어진 경계를 지시하는 몰자미한 것이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유와 무를 분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서 이번에는 상대적인 유?무를 초월한 無를 상정하기에 이른다. 이런 생각은 조주가 제시한 무가 모든 대립을 초월한 절대의 실체로 존재하는 무라고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대혜가 “참된 무로서의 무가 있다고 헤아려서는 안 된다”48]고 한 것은 이러한 병통을 경계한 말이다. 혜심은 이것을 10종병 중 하나라 하고 다음과 같이 그 뜻을 풀었다.

 

47]?大慧語錄? 권14 大47 p.868b13. “所以趙州道, ‘我在靑州, 作一領布衫, 重七斤.’ 趙州這一轉語, 直是奇特, 不落有無, 答得甚妙.”

48] ?書狀? ?答張舍人狀? 大47 p.941b14. “不得作眞無之無卜度

 

 

"다시 잘못 분별하여 “유나 무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무로서의 무이다.

가령 ?금강삼매경?에서 ‘만약 무를 떠나서 유에 집착하거나 유를 버리고 空을 따르면 참된 무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비록 유에 대한 집착을 떠나더라도 공을 보존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한다면 모든 존재의 참된 무를 얻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가지런한 논리로 정리할까 염려하여 “참된 무로서의 무가 있다고 헤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이다."49]

49] ?狗子無佛性話揀病論? 韓7 p.69c17.

“又錯計云, ‘不落有無, 是眞無之無.

如金剛三昧經云, ?若離無取有, 捨有從空, 而非眞無.? 今雖離有, 而不存空,

如是乃得諸法眞無.’ 恐如此差排, 故云, ‘不得作眞無之無卜度.’ ” ;

인용된 말은 ?금강삼매경?에서 일치하는 구절을 확인할 수 없다.

 

 

유나 무 또는 공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은 불교 일반의 보편적인 사유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실체가 있고, 그것이 바로 “참된 무”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잘못을 범하면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대혜는 “참된 무”라는 분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 서생들은 (무자를) 분별로 파고들어가 “이것은 유?무의 무가 아니고 바로 참된 무로서의 무이니 세간에서 말하는 텅 비고 훤히 뚫려서 아무 것도 없는 무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생각해서 저 生死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저 생사를 대적할 수 없다면 옳은 생각이 아닌 것이다."50]

50] ?大慧語錄? 권17 p.886a5.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爾措大家, 多愛穿鑿說道, ‘這箇不是有無之無, 乃是眞無之無, 不屬世間虛豁之無.’ 恁?說時, 還敵得他生死也無? 旣敵他生死不得, 則未是在.”

 

 

이렇게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화두 공부의 바른 방향을 제시한다.

 

 

"이미 옳은 생각이 아니라면 모름지기 걸을 때도 (무자를) 놓치지 말고 들고, 앉아 있어도 들어야 한다.

희?노?애?락이 일어날 때와 대상에 응하여 작용하며 주고받을 때가 모두 화두를 들고 있을 기회이다.

언제 어디서나 화두를 놓치지 말고 들다보면 화두가 어떤 맛도 없어서 마음이 마치 갑자기 한 덩어리의 뜨거운 쇠와 같이 될 것이다.

그 때가 바로 좋은 경계이니 버려서는 안 된다. "51]

51]위의 책, 같은 곳.

“旣然未是, 須是行也提?, 坐也提?.

喜怒哀樂時, 應用酬酢時, 總是提?時節.

提?來提?去, 沒滋味, 心頭恰如頓一團熱鐵相似.

那時, 便是好處, 不得放捨.”

 

 

어떤 시공간에서나 화두를 놓치지 말고 들고서 빈틈없이 궁구하다가 화두에 대한 어떤 분별의 여지도 없는 경계까지 이르러야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을 전하는 말이다.

 

이상에서 무자에 대하여 유?무와 眞無로 분별하는 잘못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무자 화두인 한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착각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조주의 무나 유는 몰자미하고 虛한 화두이며 동시에 이 뜻을 지시하기 위한 도구로 해석된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화두의 구절 자체[句內]나 화두의 구절을 넘어선 곳[句外]에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오인이며 유?무나 진무 등의 병에 걸리는 원인이 된다.52] 무자를 비롯한 모든 화두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인식 수단으로 분별하며 잡아보다가 그것이 虛하여 불가능한 시도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 일단 하나의 공을 이루는 것이다.

 

52] ?看話決疑論? 韓4 p.734a9.

 

 

2. 忘懷와 管帶

 

유?무와 진무의 병통을 포함하여 무자를 참구하면서 나타나는 병통을 제기함으로써 공부의 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조목이 간화십종병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열 가지 조목이 모두 무자 화두에만 적용될 수 있는 병통은 아니다. 10종병이란 용어는 知訥(1158~1210)이 제기한 이래 慧諶(1178~1234)이 ?狗子無佛性話看病論?에서 10종병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으며, 그 뒤 太古(1301~1382)?西山(1520~1604) 그리고 ?狗子無佛性話揀病論?의 각 구절을 나누어 해설을 시도한 白坡의 ?禪文手鏡? ?無字揀病論科解? 등을 거치면서 면면히 계승되어 화두를 실천하는 방법적 요체로 수용되어 왔다. 이것은 원래 대혜가 내세운 조목들을 지눌이 정리하여 10종병이라는 용어를 붙인 것이다.

중국에서는 10종병에 관련된 대혜의 말이 산발적으로 인용되기는 하지만 10종병이라는 하나의 틀로 간화에 접근한 예는 거의 없다. 간화선 실천의 핵심을 담은 高峯原妙(1238~1295)의 저술 ?禪要?에도 10종병 조목 중 한두 가지가 거론될 뿐이다.53] 10종병과 더불어 간화의 방법을 가장 뛰어난 禪法으로 간주하는 徑截門54] 역시 한국 선맥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것으로 이 두 가지 현상은 모두 간화선이 우리나라에서 중심 수행법으로 진행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53]?禪要??答直翁居士書? 卍122 p.721a15에 제시된 다음의 말은 10종병 중 “미혹된 현재 상태에서 깨닫기를 기대하는 것(將迷待悟)”에 해당된다.

“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설사 추호라도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이 생기거나 티끌만치라도 정진하겠다는 생각이 일어나면 이것은 분별심이 아직 그치지 않고 주체와 대상을 분별하는 집착이 남아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종류의 병통은 모두 도에 장애를 일으키는 단서인 것이다.”

(到者裏, 設有毫釐待悟心生, 纖塵精進念起, 卽是偸心未息, 能所未忘. 此之一病, 悉是障道之端也.” ;

이것은 “求悟證之心” 또는 “求證悟之心” 등이라고도 하며, 將心待悟?待悟心 등의 말도 동일한 뜻이다. 이는 화두를 공부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요소 중 하나로 제기된다. 이들은 모두 ‘언제 깨달을 시기가 올까’ 하는 기대심을 가리키며, 지눌은 이것을 10종병 중 근본적인 병통으로 들었다(?看話決疑論? 韓4 p.732c13. 所言十種病, 以求證悟之心爲本.) 대혜 역시 모든 병통의 근본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지만 누누히 이 병통에 대하여 지적한다.

?書狀? ?答曾侍郞狀第二書? 大47 p.917c8에 “이것은 대체로 깨달음을 희구하는 마음을 눈앞에 두고 스스로 장애의 어려움을 만든 것이며, 별다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此蓋以求悟證之心, 在前頓放, 自作障難, 非干別事.)라고 하는 등의 말이 그것이다.

54]경절문이란 다양한 우회의 방편을 다 끊어버리고 근원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간명하고 적절한 방법이라는뜻이다. ‘경절’이라는 용어는 대혜가 “공부한 지 오래되었음에도 힘을 얻지 못하면 마땅히 빠르고 간명하게 힘을 얻는 방법을 구해야 한다.”(若許久, 猶未得力, 當求箇徑截得力處. ; ?大慧語錄? 大47p.926c10)라고 한 말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역시 화두를 올바로 공부하는 방법을 두고 지적한 것이다.

지눌의 ?看話決疑論? 韓 p.735b?733a?733b, 혜심의 ?眞覺國師語錄? 韓6p.30c, 서산의 ?禪家龜鑑? 韓7 p.636b, 鞭羊彦機의 ?禪敎源流尋劒說? 韓8 pp.256~257. 震虛捌開의 ?三門直指? 韓10 p.138 등에서 모두 조사의 公案 상에서 이루어지는 ‘경절’의 방법 곧 화두 공부를 최고의 수행법으로 삼았다. 이는 대혜선에서 자극받은 지눌로부터 비롯된 한국선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10종병의 각 조목들은 화두의 특징을 살리기 위한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화두 공부의 바른 방향을 보이려는 목적에서 거론된 것이다. 혜심이 10종병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하는 다음의 말도 결국은 화두의 기본적 도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귀착된다.

 

 

"이상의 열 가지 조목은 요즘 사람들이 떠나기 어려운 병통이다. 넓게 말하면 10종병이 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有心과 無心, 언어와 침묵이라는 양단에서 생기는 병통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有心으로 구할 수 없고 無心으로도 얻을 수 없으며, 언어로 이를 수 없고 침묵으로도 통할 수 없다”55]고 한 것이다. 이상의 요점만 간략하게 말하면 思議(생각으로 포착하고 말로 표현함)와 不思議라는 양단에서 생기는 병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대혜는 (무자 화두에 대하여) “좌측으로 와도 옳지 않고, 우측으로 와도 옳지 않다”56]고 말하며, 또한 “이렇다고 해도 안 되고, 이렇지 않다고 해도 안 되며,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거나 모두 안 된다”라고 말하여 분명하게 병통을 간별하고 그 핵심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57]

 

55] ?書狀? ?答曾侍郞狀? 제2서 p.917c14 및 ?大慧語錄? 권5 p.829c1?권17 p.882a6.

56] ?書狀? ?答張舍人狀? 大47 p.941b10.

“如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只管提?擧覺. 左來也不是, 右來也不是.”

57] ?狗子無佛性話揀病論? p.70b6.

“是時人難離之病. 廣而言之, 則有十種病, 略而言之, 則不出有心無心?言語寂?. 故古人云, 不可以有心求, 不可以無心得, 不可以言語造, 不可以寂?通. 略而言之, 則不出思議不思議. 所以道, 左來也不是, 右來也不是. 又道, ?也不得, 不伊?也不得, 伊?不伊??不得. 明明地揀破 明明地現示.”

 

 

유심?무심, 언어?침묵, 思議?不思議라는 각각 두 개의 대립되는 길 중 어느 편도 허용하지 않는 관점은 화두 설정의 기초가 된다. 이를 통하여 마음의 길이 끊어져 본래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까닭에 대혜는 “이 4구(유심, 무심, 언어, 침묵)에서 마음을 쓸 여지가 없어야 비로소 본분의 소식을 들어보일 수 있다.”58]고 한다.

58] ?大慧語錄? 권22 大47 ?示張太尉? p.905c24. “於此四句, 無用心處, 方始可以提?此箇消息也.”

 

 

혜심은 대립되는 양편 어느 곳도 길이 아니지만 동시에 유심?무심과 언어?침묵을 벗어나서도 안 된다59]고 하여 벗어나는 통로까지 막음으로써 철저하게 철벽에 마주치도록 유도한다. 이는 10종병의 개별적인 뜻보다 화두가 화두답게 성립되는 특징이 어떤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그 핵심을 보인 말이다. 思議로 기울어도 안 되고 不思議로 기울어도 안 되는 그 자리가 화두가 제대로 성립되는 은산철벽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고와 언어의 모든 도구를 박탈당하면서 부딪치는 상황이다. 화두란 처음부터 이 뜻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여러 가지 인식 수단이 화두를 궁구하는 수단으로 붙을 때마다 하나 둘 털어낸 결과로 결국은 어떤 것도 개입하지 못하는 궁극적인 순간이 오는 것이 보통이다.

 

59] ?眞覺國師語錄? ?示空藏道者? 韓6 p.31b15.

“是知此事, 不可以有心求, 不可以無心得, 不可以言語造, 不可以寂?通. 然亦不得離却有心無心, 語言寂?.”

 

 

10종병 외에 간화선에서는 전통적인 수행법의 맥락을 간화선에 적용한 것이 있다. 昏沈과 掉擧가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잘못을 화두 공부의 관점에 연결시켜 응용한 것이 忘懷와 管帶이다. 망회란 마음에 품은 모든 것[懷]을 잊음으로써 텅 비고 고요하게만 하는 것을 말한다. 대혜는 이것을 의식에 아무런 내용도 남기지 않는 無記나 혼침 또는 ?照 등과 같은 잘못이라 지적한다. 상대적으로 관대란 의식에 어떤 것을 항상 담아두고 버리지 않는 집착을 말한다. 관대는 생각을 붙이고 요모조모 분별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著意와 같은 말이며, 교학적으로는 도거와 통한다.

 

 

"만일 생각을 붙이고 분별하지[著意] 않으면 이번에는 마음을 모두 비워버리는[忘懷] 잘못을 범할 것이다. 마음을 모두 비워버리면 시커먼 산 아래 귀신의 굴에 떨어질 것이니 교학에서는 그것을 혼침이라 한다.

생각을 붙이고 분별하면 心識이 산란하게 흩어지고 한 생각에 또 다른 생각이 이어져서 앞 생각이 그치기도 전에 다음 생각이 이어질 것이니 교학에서는 그것을 도거라 한다.60] ;

모든 것을 놓치지 말고 의식에 지니고 있으라고 하니[管帶] 이들은 눈앞에 비추어지는 대상을 고수하며 분별을 일으키는 자이며,

억지로 망상을 쉬고 그치라고 하니 이들은 마음에 품은 모든 것을 잊고[忘懷] 텅 비고 고요한 상태를 고수하며 분별을 일으키는 자이다."61]

60]?大慧語錄? 권17 大47 p.884c18.

“若不著意, 便是忘懷. 忘懷則墮在黑山下鬼窟裏, 敎中謂之昏沈 ; 著意則心識紛飛, 一念續一念, 前念未止後念相續, 敎中謂之掉擧.”

61]?書狀? ?答曾侍郞狀?제3서 大47 p.918b15.

“敎人管帶, 此是守目前鑑覺, 而生解者 ;

敎人硬休去歇去, 此是守忘懷空寂, 而生解者.”

 

 

혼침과 도거라는 병통을 치유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화두를 부단히 드는 것에 달려 있다. 병도 약도 화두를 어떻게 드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다. 高峰原妙(1238~1295)는 화두를 궁구하는 자체로 번뇌망상이 그치고 혼침과 산란[昏散]이 제거된다62]고 한다. 대혜가 그 뜻을 말한다.

62]?禪要? ?示衆? 제24 卍122 p.719a15.

“?有切心, 眞疑便起. 眞疑起時, 不屬漸次, 直下便能塵勞頓息, 昏散屛除, 一念不生, 前後際斷.”

 

 

"앉아 있을 때 혼침에 빠져서도 안 되고, 또한 도거에 흔들려서도 안 됩니다.

혼침과 도거는 옛 성인들이 비판하던 병통입니다.

고요히 앉아 있을 때 이 두 가지의 병통이 나타났다는 것이 느껴지자마자

오로지 구자무불성 화두를 들고 궁구하게 되면 두 가지 종류의 병통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물리쳐서 그 자리에서 마음이 고요하게 될 것입니다."63]

63]?書狀? ?答富樞密狀? 제3서 大47 p.922b3.

“坐時不得令昏沈, 亦不得掉擧.

昏沈掉擧, 先聖所訶.

靜坐時, ?覺此兩種病現前,

但只擧狗子無佛性話, 兩種病,

不著用力排遣, 當下??地矣.”

 

 

따라서 화두를 올바르게 드는 이외에 두 병통에 대하여 어떤 조작도 가할 필요가 없다. 망념이 일어났을 경우 그것을 눌러 없애려 할 것 없이 무자 화두를 드는 것이다.

 

 

"홀연히 옛날의 악습(관대?망회)이 일어나려 하면 이 또한 억지로 마음을 써서 누르지 말고 다만 일어나려는 순간 “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 ‘없다’ ”라는 화두를 살피십시오. 바로 이러할 때 일어나는 생각들은 붉게 타는 화로에 떨어지는 한 점의 눈송이와 같을 것입니다.64] ;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화두를 보지 않고 비고 고요한 마음을 고수하며 앉아 있어서는 안 되며, (반대로) 화두를 마음에서 놓치지 않더라도 의심하지 않고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혼침과 산란이 일어날 경우 물리칠 생각을 일으킬 필요 없이 재빨리 화두를 들고 몸과 마음의 번잡함을 흔들어 없애고 정신을 바짝 차리면 된다."65]

64]위의 책 ?答劉通判狀? 大47 p.926a26.

“忽爾舊習瞥起, 亦不著用心按捺. 只就瞥起處, 看箇話頭. 狗子還有佛性也無, 無. 正恁?時, 如紅?上一點雪相似.” ;

다음도 이와 동일한 취지의 문구이다. ?大慧語錄? 권17 大47 p.886a2.

“也不著忘懷, 也不著著意, 但自時時提?. 妄念起時, 亦不得將心止?, 止動歸止, 止更彌動. 只就動止處, 看箇話頭.”

65] ?禪關策進? ?大乘山普巖斷岸和尙示衆? 大48 p.1103b22.

“萬法歸一, 一歸何處?

不得不看話頭守空靜而坐 ; 不得念話頭無 疑而坐.

如有昏散, 不用起念排遣, 快便擧起話頭, ??身心, 猛著精?.”

 

 

혜심도 이 두 병통을 경계하고 단지 무자 화두를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으라고 하면서 앞서 거론한 유?무와 진무의 병을 아울러 들었다.

 

 

"고목과 같이 메마른 마음으로 마음에 품은 모든 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마음을 붙들고 항상 놓치지 않고 지니고 있으려 하지도 마십시오.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단지 그렇게 살피며 또렷하게 의식하십시오. 있거니 없거니 하는 대립을 조작하여 보지 말고, 있음과 없음의 대립을 벗어난 참된 무를 관념으로 만들어내어 이해하지도 마십시오."66]

66]?眞覺國師語錄? ?示宗敏上人? 韓6 p.25c5.

“莫枯心忘懷, 莫將心管帶. 狗子無佛性, 只?看不昧, 不作有無見, 不作眞無會.”

 

 

태고는 종밀과 지눌 등이 定?慧와 대응시켜 쓰던 空寂?靈知에 대하여 부단히 화두를 들고 의심하면 모두 갖추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상념이 일어나고 상념이 소멸하는 것을 일러 생사라 하니 이 생사에 처해 있을 때 모름지기 온 힘을 다하여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화두에 다른 분별이 붙지 않고 순수하면 상념의 기멸이 다하고, 기멸이 다한 상태를 고요하다[寂]고 합니다. 고요한 상태라 하더라도 화두가 없으면 의식에 아무 내용도 없는 ‘無記’에 불과하며,

고요한 상태에서도 화두를 또렷이 의심하는 것을 ‘靈知’라 합니다.

이 공적과 영지는 서로 파괴하는 일도 없고 서로 뒤섞이는 일도 없습니다.

이렇게 공을 들이면 하루도 되지 않아 공이 완성될 것이니

몸과 마음이 화두와 더불어 한 덩어리가 되어

의지하고 기대는 것이 없어지고 마음이 갈 곳도 없어질 것입니다. "67]

67]?太古語錄? 권상 ?答芳山居士? 韓6 p.678a13..

“念起念滅, 謂之生死, 當生死之際, 須盡力提起話頭.

話頭純一, 則起滅卽盡, 起滅盡處, 謂之寂.

寂中無話頭, 謂之無記 ;

寂中不昧話頭, 謂之靈知.

卽此空寂靈知, 無壞無雜,

如是用功, 則不日成功,

身心與話頭, 打成一片,

無所依倚, 心無所之.”

 

 

공적과 영지는 화두의 관점에서 설명력을 가지는 것일 뿐 핵심 개념은 아니다. 공적?영지가 定慧雙修와 같은 전통적인 선법의 맥락에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올바르게 들면 定과 慧가 온전히 구현된다고 보는 것이다.

定慧雙修의 관점에서 보면 혼침은 慧가 없는 定, 산란은 定이 없는 慧에 상응한다. 따라서 慧는 혼침의 예방약으로 定과 분리되지 않고, 定은 산란의 예방약으로 慧와 떨어질 수 없다. 이것이 定慧雙修이며 모든 禪定에서 定과 慧는 일체로서 선후가 있을 수 없는 이유가 된다.68]

두 가지는 동일한 선체험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화두에 어떤 분별이라도 붙으면 산란이며 화두를 의심하지 않고 단절되면 혼침이다. 화두 공부의 본질적 작용인 또렷또렷한 의심만 있으면 두 병은 그때마다 제거되고 정과 혜를 구비한 禪定이 자리잡는 것이다.

 

68] 敦煌本 ?壇經? 大48 p.338b7~b14 참조.

 

 

 

Ⅳ. 화두 참구의 바른 방향

 

1. 빈틈이나 끊어짐이 없는 공부

 

화두를 드는 요령 중 하나는 빈틈이나 끊어짐[間斷]이 없이 화두를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화두에 대한 의단이 줄곧 어느 순간에나 이어져야 한다는 뜻과 통한다. 매순간 지속되고 단절되지 않으면서 화두를 의식에서 놓치는 일이 없는 상태는 화두를 “든다”는 말인 “提”?“提?”?“提起”?“擧覺” 등의 말에 함축되어 있다. 이는 화두 공부의 본질적인 뜻이다. 빈틈이나 끊어짐이 있다는 것은 화두를 놓쳤다는 것과 같으며 망상분별의 발생과 직결된다. 고봉은 말한다.

 

 

"최대한 기간을 잡아서 90일이고, 최소한의 기간을 잡으면 7일이다.

거친 생각 안에 세밀한 생각이 있고, 세밀한 생각 안에 또 은밀하게 들어찬 생각이 있어서 빈틈이나 끊어짐이 없이(화두가) 꽉 들어차 아주 작은 티끌도들어서지 못해야 한다.

바로 이럴 때가 은산이나 철벽같아서 앞으로 나아가려해도 문이 없고,물러서면 길을 잃을 것이다."69]

69]?禪要? ?結制示衆? 제4 卍122 p.708a4.

“大限九旬, 小限七日.

?中有細, 細中有密, 密密無間, 纖塵不立.

正恁?時, 銀山鐵壁, 進則無門, 退之則失.”

 

 

빈틈이나 끊어짐이 없이 화두를 들어야 은산철벽의 경계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경계는 모든 분별 수단이 사라져 더 이상 화두에 대하여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화두 공부가 지극히 성숙된 경지를 가리킨다. 이것은 간단없이 화두를 든 결과로 얻은 성과라 할 수 있다. 대혜는 보다 구체적으로 다양한 상황을 들어서 無間斷의 의미를 지시한다.

 

 

"차 마시거나 밥 먹는 동안, 기쁠 때나 노여울 때, 벗과 대화를 나눌 때, 존장을 시봉할 때, 처자식들과 모여 있을 때,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누워 있을 때, 경계와 접촉하고 대상과 마주치며 좋은 느낌이나 불쾌한 느낌을 받을 때, 혼자 어두운 방에 있을 때 등 어느 경우나 잠시도 빈틈이나 끊어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70]. ; 다만 하루 어느 시각 어떤 행위 방식 속에서건 항상 “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없다’ ”는 화두를 놓치지 말고 들고 어느 때나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일상 생활을 벗어나지 않고 이와 같이 공부해 보시기 바랍니다.71] ; 단지 조주가 말한 하나의 무자를 일상 생활하며 대상에 응하는 경계에서 놓치지 말고 들어야 하니 빈틈이나 끊어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72]

70]?大慧語錄? 권20 ?示羅知縣? 大47 p.897c5.

“茶裏飯裏, 喜時怒時, 與朋友相酬酢時, 侍奉尊長時, 與妻兒聚會時, 行時住時坐時臥時, 觸境遇緣, 或好或惡時, 獨居暗室時, 不得須臾間斷.”

71] ?書狀? ?答富樞密狀? 大47 p.921c13.

“但向十二時中四威儀內, 時時提?, 時時擧覺, 狗子還有佛性也無? 云無. 不離日用, 試如此做工夫看.”

72]위의 책 ?答張舍人狀? 大47 p.941c19. “只以趙州一箇無字, 日用應緣處提?, 不要間斷.”

 

 

일상의 구체적 정황에서 어떤 경우라도 화두가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 화두가 끊어지면 그 빈틈에 다른 생각이 자리잡거나 화두를 분별하는 특정한 인식 수단이 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화두가 간단없이 들려지는지 항상 점검해야 하는 까닭이다.73]

 

73]“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누워 있거나 화두를 점검해야 한다. 하루 어느 시각에나 빈틈이나 끊어짐이 없이 들리는가? 차를 마시고 밥을 먹을 때도 화두를 점검하는가? 다른 사람을 대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때도 화두를 놓치지 않는가? 다급한 상황에서도 화두가 의식에 남아 있는가?”

(行住坐臥之際, 點檢話頭, 十二時中, 無有間斷?? 喫茶喫飯時點檢?? 對人接話時不昧?? 顚沛造次時, 有話頭?? ?太古語錄? 韓6 p.676c19) ;

“화두를 하루 어느 순간에나 뚜렷하게놓치지 않고 의심하고 있는가?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도 화두가 끊어지지 않는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활동을 할 때 그 모든 것을 화두와 한 덩어리로 만들 수 있는가?”

(話頭十二時中, 明明不昧?? 對人接化時, 無間斷?? 見聞覺知時, 打成一片?? ?禪家龜鑑? 韓7 p.637c9)

 

 

화두는 일상의 하루 어느 시각 어떤 행위 영역에서도 놓치지 말고 늘 의식에 남아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서 오로지 화두에 대한 의심만 또렷또렷하게 살아 있어야 하며, 다른 생각이 들어설 여지가 없어야 한다74]. 태고는 화두 공부에 있어서 이 방법이 중요한 것임을 철저하게 견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74]마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경지에 이르더라도 화두 이외의 다른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점을 태고는 강조한다.

“만일 이와 같이 진실로 공을 들인다면 공부하는 데 힘이 덜 드는 상태에 이를 것이니 이것이 곧 힘을 얻는 경지인 것이다. 화두가 자연히 무르익어서 한덩어리가 되면 몸과 마음이 홀연히 텅 비고 응결된 듯이 움직이지 않아서 마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게 된다. 이 경계가 바로 공부하는 당사자의 본분이다. 그러나 그 당사자가 여기서 다른 생각을 일으키면 반드시 헛된 것에 미혹당할 것이다.”

(若如此眞實用功, 則便到省力處, 此是得力處也. 話頭自然純熟, 打成一片, 身心忽空, 凝然不動, 心無所之. 這裏只是箇當人. 當人若起他念, 則決定被影子惑矣. 위의 책 권상 韓6 p.676c1)

 

 

"매 찰나마다 조주가 말한 無를 들고 모든 시각 속에서 無를 분명하게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대?소변을 볼 때와 옷을 입거나 밥을 먹을 경우에도 항상 無를 들어야 한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고 닭이 알을 품듯이 어떤 일이 있어도 놓치지 말고 다만 무자를 들라. 이와 같이 화두가 지속되어 끊어지지 않은 채 의심을 일으켜 ‘어째서 無라고 말했을까?’ 하고 궁구하라.

의심이 타파되지 않아서 마음이 답답할 때가 바로 오로지 이 화두를 들기 좋은 때이다. 화두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면 바른 생각이 이루어질 것이니 궁구하고 또 자세히 궁구하며 화두를 의심하라. 의심과 화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이거나 고요하고 말하거나 침묵하는 등 어느 곳 어느 순간에나 항상 무자를 들다가 점차로 깨어있는 상태와 잠을 자고 있는 상태가 한결같이 되는 경지에 이르더라도 화두가 마음에서 떨어져서는 안 된다.

화두를 의심하다가 분별을 잊고 마음의 작용이 끊어진 경지에 이르면 태양이 한밤중에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갈 것이다. 바로 이러할 때 슬퍼하거나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모름지기 본분의 색을 갖춘 스승을 찾아서 영원히 의심을 해소해야만 한다."75]

75]?太古語錄? 권상 ?示紹禪人? p.681c10.

“念念提起趙州無, 一切時中不昧無, 行住坐臥二便時, 着衣喫飯常提無. 如猫捕鼠鷄抱卵, 千萬不昧但擧無. 如是話頭不間斷, 起疑參因甚道無?

疑不破時心頭悶, 正好單提這話頭. 話頭聯綿正念成, 參復參詳看話頭, 疑與話頭成一片, 動靜語?常提無, 漸到寤寐一如時, 只要話頭心不離.

疑到情忘心絶處, 金烏夜半徹天飛. 於時莫生悲喜心, 須參本色永決疑.”

 

 

이렇게 간단없이 들게 되면 잠잘 때도 깨어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화두가 의식에서 떨어지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온다. 곧 寤寐一如의 경지를 말한다. 태고는 여기에 이르면 화두의 의단이 타파될 시기가 가까워진 것으로 본다.

 

 

"만약 근본적인 의심이 아직 타파되지 않았다면 이러니 저러니 하는 생각들은 절대로 피하고 깨달음을 구하겠다는 마음도 일으키지 말며 단지 의심하는 마음에 화두만을 들고서 절실하게 참구하라.

모든 행위 속에서 움직이거나 고요할 때 어떤 경우라도 화두를 놓치지 말고

하루나 이틀 내지 7일 동안 법 그대로 참구하기를 끊어짐이 없으면 꿈 속에서도 화두를 기억하게 된다.

이와 같이 되면 크게 깨달을 시기가 가까워진 것이다."76]

76]위의 책 권상 ?示廉政堂? p.679b10.

“若大疑未破, 則切忌如何若何之念, 亦莫生求悟之心, 但向疑情上, 單提話頭, 切切參詳,

於一切施爲動靜時, 千萬不昧.

若一日二日, 乃至七日, 如法參詳無間斷, 夢中亦記得話頭.

如是則大悟時近矣.”

 

 

간단없이 화두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망상분별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또한 망상분별을 제거하는 방법도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발생했을 때 곧바로 화두를 드는 것이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다는 것은 화두를 면면히 들지 못하고 놓쳤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들고 있는 화두 이외의 것이 마음에 자리잡는 순간 화두라는 불로 태워 없애야 한다.

간화선에서 화두를 자주 불에 비유하는 까닭은 화두 공부 자체가 망상과 잡념을 제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혜는 빈틈없이 들려지는 화두를 불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잡념이 일어날 때 다만 화두를 드시오. 대체로 화두는 큰 불덩어리와 같아서 모기나 땅강아지 그리고 개미가 그곳에 머무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항상 들고 생활하다가 세월이 오래되면 홀연히 마음이 갈 곳이 없어지는 순간 모르는 결에 분출하듯이 한 번 폭발할 것입니다.77] ;

단지 마음에서 일어나는 상념을 태워 없애 보라. 꾸준히 태우다 보면 홀연히 더 이상 태울 것이 없는 차가운 재 속에서 한 알의 콩이 화로 밖으로 튀어나올 것이니 이것이 바로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사람의 경지인 것이다."78]

77]?大慧語錄? 권20 ?示羅知縣? 大47 p.898a27.

“雜念起時, 但擧話頭. 蓋話頭如大火聚, 不容蚊??蟻所泊.

擧來擧去, 日月浸久, 忽然心無所之, 不覺噴地一發.”

78] ?宗門武庫? 大47 p.955c10.

”爾但灰却心念來看. 灰來灰去, 驀然冷灰, 一粒豆, 爆在爐外, 便是沒事人也.”

 

 

마음이 갈 곳이 없어진다는 것은 화두를 들고 그것에 붙어오는 모든 분별을 버리고 또 버리다가 더 이상 붙을 여지가 없는 경계를 나타낸다. 화두라는 불로 그것에 붙는 모든 분별을 다 태워버려서 분별로 모색할 길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고봉도 화두의 이러한 기능이 본래의 목적을 성취하는 가장 요긴한 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일에 대하여 말하자면 마치 큰 불이 모여서 뜨거운 불길이 하늘까지 치솟고 그 사이에 약간의 틈도 없어서 가지고 있는 모든 물건을 다 거기에 던져 넣더라도 마치 송이 송이 눈이 떨어지자마자 녹아버리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터럭만치의 망상인들 용납하겠는가!

만약 이와 같이 화두를 들고 면면히 지속하면 정해진 기간 내에 이루어진 功을 만 가지 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설령 영겁의 시간 동안 공부하더라도 헛되게 고생만 할 것이다."79]

79]?禪要??示衆? 5 卍122 p.708a.

“若論此事, 如大火聚, 烈?亘天, 曾無少間, 所有之物, 悉皆投至, 猶如片雪, 點着便消, 爭容毫末!

若能恁?提持, 剋日之功, 萬不失一. ?不然者, 縱經塵劫, 徒受勞矣.”

 

 

이 일이란 화두를 들고 성취해야 할 본분사를 가리킨다. 결국 망상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는 관건은 화두를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치열하게 드는 데 달려있다. 화두를 놓치고 아무 생각 없이 있거나 “화두 이외의 다른 생각이 자리잡는 것”80]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오로지 화두에 대한 의심만 살아 있어야 하며, 이렇게 공부하다 보면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화두가 들린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81]

 

80]“이로부터 화두에 대한 의심이 단번에 일어나 잠자기를 없애며 먹는 것도 잊고서 동서를 구분하지 못하고 밤낮을 분별하지 못하여 자리를 열고 발우를 펼침과 대소변을 보는 것 그리고 움직이거나 조용히 있거나 말하거나 침묵하는 데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단지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일 뿐 조금도 다른 생각이라곤 없었으며,약간의 다른 생각을일으키려 하더라도 전혀 얻을 수 없음이 마치 못으로 박고 아교로 붙여 놓아서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

(自此, 疑情頓發, 廢寢忘餐, 東西不辨, 晝夜不分, 開單展鉢, ?屎放尿, 至於一動一靜, 一語一?, 總只是箇一歸何處, 更無絲毫異念. 亦要起絲毫異念,了不可得, 正如釘釘膠粘, ?搖不動. 위의 책 ?開堂普說? 제1 卍122 p.704a10)

81]위의 책, ?示衆?제2 卍122 p.706b2. “以至見聞覺知, 總只是箇疑團. 疑來疑去, 疑至省力處, 便是得力處, 不疑自發, 不擧自擧.”

 

 

 

2. 일상의 진실과 화두 참구

 

이상에서 본 대로 간단없이 화두를 드는 공부법은 항상 생활하는 공간인 일상과 연결된다. 화두 공부에 있어서 일상은 생활의 무대일 뿐만 아니라 공부를 촉발하는 유력한 장이기도 하다. 특별히 공부할 장소와 대상을 찾지 않고 가장 가까운 일상을 중시하는 까닭은 화두 공부의 핵심이 그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곳에 진실이 그대로 실현되어 있다는 간화선 이전에 조성된 조사선의 일반적 관점도 작용하고 있다. 혜심이 이 뜻에 대하여 말한다.

 

 

"이 일은 눈앞에 실현되어 피할 곳이 전혀 없다. 일 하나하나에 분명하고 사물 하나하나에 모두 나타난다. 다만 혼미한 시일이 오래되어 전도망상으로 스스로 어렵다는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눈앞에 마주하고도 피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눈을 뜬다면 원래 무슨 모자라는 점이 있겠는가! "82]

82]?眞覺國師語錄? 韓6 p.7c19.

“底事現成, 沒處廻避. 頭頭上明, 物物上現. 只爲昏迷日久, 顚倒妄想, 自生艱阻, 當面諱耳. 忽若眼開, 元來有甚?欠小!”

 

 

항상 마주하는 곳에 본분사가 실현되어 있다는 안목은 “온 세상이 한 개의 공안”83]이라는 말과 통한다. 이에 따라 조주의 무자도 일상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타파할 것을 지시한다. 일상의 모든 것이 불법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조주의 선법에 비추어 보아도 일관성을 갖기 때문이다. 조주의 다음 문답과 그에 대한 東林常總(1025~1091)과 대혜의 게송을 예로 들어 보겠다.

 

83]?松源崇岳禪師語? 續古尊宿語要4 卍119 p44a16. “盡大地, 是一箇公案.”

 

 

"변소에서 문원을 부르자 문원이 “예!” 하고 응답했다.

조주가 말했다. “변소에서 그대에게 불법에 대하여 말해서는 안 된다.84]” ;

동림상총이 읊는다.

“노승이 다름 아닌 변소에 있는데, 불법을 말해 주지 않는구나.

똥 냄새와 전단 향기는 같으니 스승과 제자의 心機가 모두 누설되었도다.”

대혜종고가 읊는다.

“조주가 간직했던 비밀스런 말을 문원은 덮어서 감추지 않았네.

그것으로 대장경의 가르침을 모두 설명해 내니 그 공덕은 실로 헤아리기 어렵도다.” 85]

84]?趙州語錄? 卍118 p.330b10.

 “因上東司, 召文遠, 文遠應諾. 師云, ‘東司上, 不可與?說佛法也.”

85]?東林雲門頌古? 卍118 p.802b17.

“東林頌

‘老僧正在東司上, 不將佛法爲人說.

一般屎臭?檀香, 父子之機俱漏泄.’ ;

雲門頌

‘趙州有密語, 文遠不覆藏.

演出大藏敎, 功德實難量.’ ”

 

 

이 말들은 모두 변을 보는 자체가 불법과 차별이 없으므로 굳이 변소에서는 불법에 대하여 할 말이 없다는 의미이다. 무자가 가지는 일상성은 그러한 조주의 뜻과 그것을 간화선에 적용하는 후대 선사들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일상은 반복되는 환경적 조건이 많다는 이유로 인하여 의식을 타성에 젖도록 하므로 일상에 드러나 있는 진실은 눈앞에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지나치기 쉽다.

학인이 불법에 대하여 지시해 달라고 하자 “밥을 다 먹었으면 밥 그릇이나 씻어라”고 하여 일상의 진리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趙州洗鉢의 공안에 대하여 無門慧開(1183~1260)가 “단지 지극히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도리어 깨우치는 것을 느리게 한다.”86]라고 읊은 게송은 생활 주변에 빈틈없고 뚜렷이 드러나 있는 까닭에 오히려 그 진실을 지나치기 쉬움을 말한다.87] 대혜는 말한다.

 

86]?無門關? 7則 ?頌? 大48 p.294a4. “只爲分明極, ?令所得遲.”

87]?禪門拈頌說話? 429則 韓5 p.361b20에는 조주의 본의에 대하여 “지시한 내용이 있을까? 아니면 지시한 내용이 없을까?”(有指示耶? 無指示耶?)라는 의문으로 처리했다. 이론적 해설보다 이렇게 물음을 던진 것도 조주 문답을 간화선의 입장에서 보는 안목에 기초한다.

 

 

"단지 조주가 제시한 하나의 무자를 일상 생활의 인연에 응하는 곳마다 놓치지 말고 들 일이니 빈틈이나 끊어짐이 있어서는 안 된다.88] ;

禪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사량분별하는 작용에 있지 않고 일상 생활에서 대상에 응하는 경계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요하거나 시끄럽거나 사량분별하는 작용이나 일상 생활에서 대상에 응하는 경계를 버리고 공부해서는 안 된다. 홀연히 진실을 보는 눈이 뜨이면 그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일이 될 것이다. "89]

88] ?書狀? ?答張舍人狀? 大47 p.941c19.

“只以趙州一箇無字, 日用應緣處提?, 不要間斷.”

89]?大慧語錄? 권19 ?示妙證居士? 大47 p.893c28.

“禪不在靜處, 不在鬧處, 不在思量分別處, 不在日用應緣處. 然雖如是, 第一, 不得捨却靜處?鬧處?日用應緣處?思量分別處, 參. 忽然眼開, 都是自家屋裏事.”

 

 

일상의 곳곳에 어느 시각에나 간단없이 진실이 전개되어 있다는 배경사상으로부터 무자 공부의 요령이 제시되고 있다. 또한 일상 생활 자체가 선의 진리는 아니지만 이것을 버리지 않고 공부를 하다가 궁극적 안목를 얻고 나면 그것이 자기 자신의 본분사를 전개하는 조건이 된다. 결국 화두 공부는 주어진 어떤 상황도 벗어나지 않고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자 공부도 일상의 모든 경계를 떠나지 않은 상황에서 하도록 제시되는 것이 당연하다. 혜심도 일상을 떠난 화두 공부는 있을 수 없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만일 여기서 맞아떨어지지 못한다면 다시 하루 모든 시각과 모든 행위 양태 속에서 하나의 화두를 살피시오.

어떤 학인이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 묻자 조주가 “없다”라 한 문답을 어느 때나 들고 어느 때나 놓치지 않고 의식하며, 일상 생활을 떠나지 말고 공부하십시오.

일상 생활을 떠나서 별도의 곳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물결을 떠나서 물을 구하거나 쇠그릇을 떠나서 쇠를 찾는 어리석음과 같아서 더욱 멀어질 것입니다." 90]

90] ?眞覺國師語錄? ?示宗敏上人? 韓6 p.25b4.

“若也於此不契, 則更向十二時中, 四威儀內, 看箇話頭.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但時時提?, 時時擧覺, 不離日用造工夫.

若離日用, 別有趣向則是, 離波求水, 離器求金, 愈遠矣.”

 

 

또한 대혜는 시끄럽고 어지러운 현실 속이야말로 화두를 들 수 있는 기회라고 권고하는데, 이와 같은 화두 공부의 특징 속에서 나온 말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일상의 뒤죽 박죽되는 생활 속에서 무자 화두만 살필 것이며, 깨달았거나 깨닫지 못했거나 또는 화두를 꿰뚫었거나 그렇지 못 했거나는 상관하지 마십시오. 91];

일상 생활에서 대상과 응하는 곳에서 밖의 경계에 마음이 빼앗겨 순수하고 한결같이 공부할 수 없으므로 간격과 끊어짐이 생기는 것입니다.

간격과 끊어짐이 생기는 바로 그 때 마음이 흐뜨러지지 않을 수 없으나 바로 흐뜨러지는 때가 오히려 공부하기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92]

91]?書狀??答宗直閣狀? 大47 p.933c16.

“但日用七顚八倒處, 只看箇無字, 莫管悟不悟徹不徹.”

92]?大慧語錄? 권20 ?示廓然居士? 大47 p.896b12.

“於日用應緣處, 被外境所奪, 不能純一做工夫, 則成間斷,

當間斷時, 未免方寸擾擾, 正擾擾時, 却是箇好底時節.”

 

 

이와 같이 생활 환경 속에서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면서도 항상 화두를 놓치지 말라는 지시는 10종병 중 “모든 것을 날려 없애고 아무 일도 없는 경계 속에 틀어박혀 있으면 안 된다(不得?在無事匣裏)”고 가려낸 병통과 관련된다. 혜심은 10종병 중 이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다시 분별하여 “도리로 모색하는 길과 특정한 의미로 모색하는 길이 모두 허용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곳에서 마음을 쓰는 것보다 아무 일도 없는 것이 낫겠다”라 생각하고,

가령 德山이 “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마음에 일이 없으니 마음이 허하면서도 신령한 분별이 있고, 비었으면서도 묘한 작용이 있다”93]라고 한 말 등을 근거로 삼아 공부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각에서 생기는 병통을 간별하여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경계 속에 갇혀 있어도 안된다”라고 한 것이다."94]

93] ?景德傳燈錄? 권15 ?德山傳? 大51 p.317c11.

94] ?狗子無佛性話揀病論? p.70a16.

“又計云, ‘理路義路旣不?許, 却向伊?處用心, 不如無事,’

如德山云, ‘無心於事, 無事於心, 虛而靈, 空而妙’ 等爲據.

故揀云, ‘不得?在無事匣裏.’ ”

 

 

어떤 일도 하지 않는 ‘無事’의 경계에 자신을 폐쇄하여 놓고 번잡한 일상과 단절되어야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상적인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화두만을 들고 고요한 경계에 빠져 있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어떤 때는 화두를 들다가 어떤 때는 들지 않는 것이므로 간단이 있는 것이며, 화두를 놓치고 멍청히 있거나 망상이 발생하였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화두와 일상의 행위가 갈등 없이 병행하면서 모든 고락의 의식 속에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을 날려 없애버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경계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화두를 드는 때에 화두가 있다가 들지 않을 때는 바로 없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세간의 번거롭고 괴로운 일을 생각하는 마음을 ‘마른 똥막대기’라는 화두에다 돌려놓고

부단히 생각하다가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상태가 되어서 생각하는 기량이 홀연히 다 사라지면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니 억지로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면 영원히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95]

95]?書狀? ?答呂舍人狀? 제2서 大47 p.931c25.

“又不得?在無事匣裏. 不得擧時便有, 不擧時便無也.

但將思量世間塵勞底心, 回在乾屎?上,

思量來思量去, 無處奈何, 伎倆忽然盡,

便自悟也. 不得將心等悟,

若將心等悟, 永劫不能得悟也.”

 

 

화두를 드는 때는 있다가 들지 않을 때는 없다는 것은 결국 화두를 부단하게 들지 못하고 일정하게 화두 공부하는 시간과 공간을 정해 놓고 그 때만 화두를 의식하는 병통을 지적한 것이다. 이 병통은 달리 말하면 일상을 버리고 화두 공부만을 일삼다가 일상으로 돌아오면 화두를 놓치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일상의 일과 화두 공부는 배타적으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다. 법연이 말한다.

 

 

"모름지기 맹렬하게 정신을 차려서 화두를 들고 밤낮으로 궁구하며 그 화두와 대결해야 한다.

아무 일 없는 경계 안에 눌러 앉아 있으면 안 되고, 또한 포단 위에 죽은 듯이 앉아 있어도 안 된다."96]

96]?禪關策進? ?東山演禪師送徒行脚? 大48 p.1098c25.

“須是猛著精彩, 提箇話頭, 晝參夜參, 與他??.

不可坐在無事甲裏, 又不可蒲團上死坐.”

 

 

이렇게 화두를 들고 활발하게 의식이 살아 있어야 하며, 단지 일이 없기만 하면 혼침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특정한 도리에 얽매여 이해하거나 여러 가지 유위의 조작을 가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에 치우쳐 그 반대로 아무 일도 없는 경계에 속박되는 잘못을 범해도 안 되는 것이다.

혜심은 無字나 죽비자 등의 화두를 공부하는 요령에 대하여 평상심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그 핵심을 드러낸다.

 

 

"평상심이 대도일 뿐 도는 알거나 알지 못하는 것에 속하지 않노라97].

말로 표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에 의지하지도 않도다.

구하려 해도 얻을 수 없고, 버리려 해도 떠날 수 없네.

백척간두에서 목숨을 놓아 버려도

눈썹은 예전 그대로 눈가에 드리워져 있으리라."98]

97]이 말은 馬祖가 “平常心이 道”라 한 이래 南泉과 趙州의 문답을 근거로 하여 나온 것이다. ?無門關? 19칙 ?平常是道? 大48 p.295b13 참조.

98]?眞覺國師語錄? ?示淸遠道人? 韓6 p.27b10.

平常心是大道, 道不屬知不知.

不容口議非假意思,

求之不得棄之不離.

百尺竿頭放捨身命,

眉毛依舊眼邊垂.”

 

 

이것은 혜심이 조사선에서 상용하던 평상심의 도를 간화의 관점에서 풀어낸 해설이라 할 수 있다. 말과 생각 어느 것에도 기댈 수 없고, 구하거나 버릴 수도 없어서 모든 인식 범주와 수단이 무용화된 상황이 바로 무자 등의 화두를 궁구하다가 도달하는 은산철벽이며 백척간두이다. 여기서 생사윤회하는 목숨을 놓아 버렸다는 말은 화두를 타파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얻은 최종적인 성과를 “눈썹~”이라 한 것이다. 마지막의 경지가 눈썹이 눈가에 드리워진 것처럼 누구나 알고 있고, 너무도 명백하고 싱거운 사실이라는 점에 묘미가 있다.

지극히 명백하기 때문에 언어와 분별이라는 수단으로는 오히려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혜심이 어떤 상당법문에서 “생각해 보라! 최상국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틀림없이 눈썹이 눈 위에 가로로 붙어 있고, 여전히 콧구멍은 입술 위에 있다는 뜻을 깨달았을 것이다.”99]라 한 말도 같은 취지이다. 더 이상의 앎이나 표현을 진행할 수 없이 뚜렷이 드러나 있는 현상들은 이와 같이 “갈 길이 끊어져야 통하는” 화두의 진실과 일치한다.

 

99]위의 책 p.4c2. “且道! 崔相國悟?什?? 應是眉毛橫眼上, 依然鼻孔壓脣頭.”

 

 

Ⅴ. 결론

 

무자를 포함한 모든 화두는 그 속에 진리를 숨겨두고 읽어내도록 제시된 암호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화두에는 파헤쳐 들어가 알아차릴 수 있는 내용은 없다는 뜻이다. 無건 有건 가리지 않고 實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虛하고 몰자미한 수단으로 수용될 때 진실한 화두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것에 현혹되면 그 말들을 實로 받아들이는 잘못을 범한다. 禪語의 이 속성을 두고 일반적으로 “한 사람은 虛를 전했는데, 모든 사람이 그것을 오인하여 實로 전한다.”(一人傳虛, 萬人傳實)라고 평가한다. 조금도 지시하는 내용이 없으므로 화두는 분별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다만 화두에 붙는 분별들을 쓸어없애다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아서 화두에 대하여 어떤 작용도 일으키지 못하는 은산철벽과 같은 상황에 이르러야 한다.

따라서 은산철벽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주어진 화두의 본질이 그렇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화두를 궁구하는 사람의 망상분별이 소진되면서 이르는 경계이다. 조사들은 분별해서는 안 되는 화두에다 마치 분별할 여지가 있는 듯한 내용을 주고 분별을 하나하나 퍼올린 다음 버리게 만드는 수단을 쓴다. 조사들은 화두를 모색하도록 함정을 파놓고 결국은 모색의 길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도록 연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런 분별도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이 공부의 목적이나 특성이 아니다. 화두에 대하여 어떤 방식의 분별도 하지 못하는 경계에 이르더라도 화두에 대한 의심은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 의심은 혼침과 산란의 병을 모두 견제하는 것으로 간화선에 있어서 禪定의 본질적인 작용이다. 일상 어느 곳에서나 간단없이 화두를 의심하다 보면 그 본래의 뜻을 성취하게 된다.

 

 

Keywordː

背觸觀, 沒滋味, 손잡이가 없는 쇠망치(無孔鐵鎚), 의심, 빈틈이나 끊어짐이 없는 공부(無間斷), 마음으로 모색할 길이 끊어짐(心路絶), 銀山鐵壁, 活句와 死句, 忘懷와 管帶

 

 

 

 

 

The real character of practice in the Khanwha-s?n(看話禪)

 

Kim, Young-Wook

 

/ Kasan Institute of Buddhist Culture

 

The whadu(話頭) suggested by the great S?n leaders can be a true issue only when it is acceptted correctly by the disciplinant. The typical way to make any subjects into whadu is so called the Baechokkwan(背觸觀). It is a kind of gate without any method to break through, because whatever attempts, both an affirmative approach to it and a negative evasion from it, are not permitted. Khanwha-s?n had settled this method as a framework of practice. As there is no room for any kind of recognition, the essentials of a whadu cannot be understood by the conceptual thought or the cognitive category. According to the realization of one's concerned whadu, the road to groping for something or other is entirly exhausted. That is the most suitable condition for enlightenment

 

Chozchu's mu(無) is the most frequently raised whadu in the Khanwha-s?n, but anywhere it is in the scope of the above mentioned universal way of practice. Every answers to the mu case must not fit in the point of truth, and the approach with several kinds of concept and meaning will result in the failure. All gradual steps and phases do not need in this case. Because from the first whado is given as a gate like a fortress that cannot be penetrated by such a means. Simultaneously this is the most ideal condition to complete the whadu. And when it becomes so, whadu will be a kind of weapon to removes all sorts of discriminations

 

Searches for the answer from the superficial phrases which the great leaders set intentionally to teach the disciple is in the many cases presented with stratagem. The point to penetrate into the teacher's intention is to raise the given whadu in one's mind without leaving even a small gap in the ordinarly life.

 

Especially to challenge whadu mu has two common mistakes. The one is to think mu as nothingness in the opposition of existence, the other is to conjecture mu as the truth which surpasses all the oppositions. This two inclinations is the general form of illusion in considering on mu. The thought that the truth depends upon surpassing over the given whadu or it depends upon the whadu in itself, they are both misconceptions. We can escape from this mistakes so far as we know throughly that whadu mu has not any conceptual tastes and there is not a kernel in it.

 

There is not a special method which heals all troubles including the former faults. The only tactics is to run in holding whadu mu constantly. To say in other word, the arising of sickness and the cure both depends upon the correct whadu study. And it is also the reason that the truth must be embodied in the daily life. Because the given whadu must not go away from one's mind in any moment. If we speculate on a whadu without ommision in every place and at all moments in ordinarly life, we may be able to accomplish the essential meaning of S?n. That is the monent of breaking through the concerned wha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