看話禪의 성립배경
김호귀 /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차 례
Ⅰ. 서언
Ⅱ. 선수행과 깨침의 전개방향
1) 離念과 無念의 의미
2) 깨침에 대한 오해 - 無事禪
Ⅲ. 大慧 看話禪의 출현배경
1) ?照禪法의 출현
2) 眞歇의 ?照에 대한 大慧의 입장
3) ?照禪法의 비판 내용
4) 당시 선종계의 폐풍
Ⅳ. 결어
I. 서언
간화선은 화두를 통한 선수행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승이 화두를 제기하여 제자로 하여금 화두를 보게끔 하는 선수행이다. 반면 제자가 스승에게 화두를 들어 질문하는 형식을 통하여 그 답변행위에서 스스로 어떤 의미와 행위를 터득하는 선수행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두의 작용은 수행에 임하는 제자에게는 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스승에게는 화두가 제자를 제접하는 도구이고 수단적인 의미이지만 제자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부여된다. 곧 화두는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부여받아 해결해야 하는 과업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제자 스스로가 맛보고 도달하고자 설정한 의문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화두는 깨침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이면서 스스로가 타파해야 하는 도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곧 화두는 한편으로 도구로서 유지해야 하는 것이면서 한편으로 그 자체를 타파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것이 화두가 지니고 있는 양면성이다. 이 양면성은 선종 자체내에서 일어나는 변질 내지 변혁의 과정과 그것에 대응하기 위한 방식으로 표출되어 갔다. 곧 수행과 깨침에 대한 입장 내지 견해와 자체내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한 모색으로 나타났다. 입장 내지 견해의 차이는 당말기의 선풍의 흐름에서 나타났고, 자체내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한 것은 송대에 선수행법의 차이와 당시 선종계의 폐풍에서 나타났다. 전자가 종적인 이유라면 후자는 횡적인 이유이다.
후자에도 다시 묵조선법에 대한 것과 당시 선종계의 일반적인 폐풍을 들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점이 각각 간화선의 대두 내지 성립배경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선수행과 깨침의 전개방향
1. 離念과 無念의 의미
어느 사상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불교의 경우도 그 목적을 구현해 나아가는데 있어서 양면적인 모습이 있다. 하나는 번뇌를 없애는 데 중점을 두어 번뇌의 퇴치가 곧 본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본래부터 없애야 할 번뇌가 없다는 입장에서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본래의 성품을 제대로 드러내는 행위에 중점을 두고 그것에 대한 자각에 힘쓰는 것이다. 전자가 方便修行의 성격이라면 후자는 正修行의 성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초기선종의 시작을 보리달마에게 둘 경우1] 경전에 의하여 그 사상적인 바탕을 구명한다면 우선 보리달마가 전승시켰다는 4권 ?능가경?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달마는 제자를 접화하는데 있어 자신의 가르침인 ?이입사행론?을 제시하였고, 아울러 4권 ?능가경?에 의하여 수행할 것을 권유하였다.2]
이것은 달마 스스로가 九年面壁을 하고서 그 경험을 제자들에게 권유한 것일 뿐만 아니라 중생들에게 본래부터 구비되어 있는 自心을 인정한 바탕에서 가능하였다. ?능가경?에서는 바로 중생에게 본래부터 구비되어 있는 청정한 성품을 인정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번뇌를 청정케 하려는 방식에 대하여 四頓四漸을 제시하고 있다.3] 이것은 중생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청정심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그 수행적인 측면에서 보면 청정심을 구현해 나아가는 입장에서 번뇌를 퇴치해 나아가는 방편수행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1]여기에서 초기선종의 개념은 중국에 선법이 전래된 이후 중국에서 종파의 개념으로 등장한 시대를 말한다. 특히 보리달마로부터 육조혜능까지의 200여 년 동안의 선풍과 선의 갈래와 선수행의 제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2] ?傳燈錄? 卷3, (大正藏51, p.219下)
3]?楞伽阿跋陀羅寶經? 卷1, (大正藏16, pp.485下-486上)
이와는 달리 초기선종의 한 부류에 속하는 牛頭宗의 선자들은 진리가 구현된 입장에서 그것을 그대로 향유하면서 구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가령 牛頭法融은 ?반야경?에 의하여 깨침을 얻고나서 줄곧 다음과 같은 입장에 서 있었다.
"방편으로 묘한 말을 하는 것은 병통을 없애는 대승의 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의 성품과는 관계없는 일로서 空化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無念의 眞常이어야 끝내 마음으로 분별할 길이 끊어지고, 離念의 성품이어야 요동치 않고 생멸에도 어그러짐이 없다." 4]
4]?傳燈錄? 卷4, (大正藏51, p.227下) “方便說妙言 破病大乘道 非關本性譚 還從空化造 無念爲眞常 終當絶心路 離念性不動 生滅無乖誤”
이와 같은 예는 牛頭宗의 선자들 뿐만 아니라 傅翕과 寒山 등 소위 習禪者들로 구분되는 선자들에게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보리달마의 ?능가경?의 사상으로부터 ?반야경?의 사상으로 거쳐 ?법화경?과 ?열반경?의 사상으로 변동해 나아가는 모습을 반영해 주고 있다. ?반야경?에 있어서는 아직 공의 성격 곧 부정의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법화경?과 ?열반경?에는 긍정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이것은 초기선종의 사상적인 흐름이 방편수행으로부터 정수행으로 이행해 나아가는 것으로서 소위 북종의 방편적인 점수로부터 남종의 정수행적인 돈오로 변화해 나아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방편수행의 성격이 인간의 번뇌로 뒤덮힌 현실을 통찰하는 것이라면, 정수행의 성격은 인간속에 내재하는 본래의 자성 내지 불성에 대한 자각이다. 인간이 지니고 살아가는 고뇌의 원인은 무명이다. 그 무명을 제거해 나아가는 것이 이념의 측면이라면 그 무명의 실상을 깨치는 것은 무념의 측면이다. 무명이라는 것은 무지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번뇌가 있는데 오히려 그것이 진리의 인식을 가져온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하여 많은 환상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자아와 영원불멸한 것에 대한 환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 환상이 우리의 올바른 인식을 왜곡하고 있다. 바로 그 인식을 왜곡하는 것이 우리네 속에 있다는 것이 무명이다. 그리하여 무명을 두고 이념과 무념으로 설명하자면 이것이 북종과 남종의 성격을 구분하는 하나의 준거가 되기도 하였다.
소위 북종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청정하고 진실하며 평등하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곧 주체적인 인간성의 직관이다. 그리고 그 방식이 좌선을 통한 명상의 실천이었다. 如來淸淨禪이라든가 眞如三昧라든가 一行三昧 등으로 불리우는 것들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확신은 깊은 좌선의 명상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종의 선자들은 이미 그것을 ?화엄경?과 ?반야경?과 ?기신론? 속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기신론?의 究竟覺이나 本覺의 사상은 자기의 心의 근원에서 실제로 깨치는 경험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각의 사상이란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과 이론의 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반대로 소박한 명상의 실습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북종선의 성립은 그처럼 뛰어난 철학과 수행을 겸비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자각의 체험과 사상의 운동이었다.
이에 대하여 종밀은 북종선의 특색을 ?번뇌의 티끌을 떨쳐버리고 청정심을 직관하여 명상의 방편에 의하여 대승경전의 진리에 통달하는 것?이라 요약하고 있다. 북종의 주장에 따르면 번뇌는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다. 때문에 번뇌는 떨쳐버릴 수가 있다. 번뇌의 티끌을 떨쳐버린다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본래 번뇌의 티끌이 없었기 때문이다. 번뇌의 티끌이 없었기 때문에 번뇌의 티끌을 떨쳐버릴 수가 있고, 또한 번뇌의 티끌을 떨쳐버릴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논리에 근거하여 좌선실천에 힘쓴 것이 북종선의 특색이었다.
그러나 소위 남종의 선자들은 본래의 청정성 그 자체에 입각해 있으면 이미 애초부터 티끌이 없을뿐더러 청정이라는 것조차도 無用하다고 말한다. 가령 거울이 아름다운 대상을 아름답게 비춘다해도 그 청정성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염된 대상을 오염된 모습 그대로 비춘다해도 거울이 본래의 청정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아름다움과 추악함, 청정과 오염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으로서 거울은 그들 어느 것을 대한다 해도 차별의식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북종선의 입장은 거울의 본래청정성을 번뇌를 떨쳐버린다는 구체적인 현실의 수행에 의해서 실증하고 확실하게 하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을 體와 用의 개념에 적용시켜보면 거울의 본래적인 청정성은 體이고 그것이 청정과 오염을 평등하게 비추어내는 것은 用이다. 현실적인 수행으로 어디까지나 객진을 떨쳐버린다는 用에 의하여 본래의 청정성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자각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離念과 無念으로 설명하자면 분별의식의 상념을 그친다는 의미에서 북종선이 離念을 주장했다는 것에 상대하여5], 荷澤神會 일파의 남종선은 본래적인 분별의식의 부정에서 출발하는 無念을 설한다. 신회의 離念은 거울의 때를 없애는 것이고 無念은 본래 없애야 할 때가 없다는 입장이다. 神秀는 ?大乘無生方便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5]神秀는 ?大乘無生方便門?에서 ‘離念은 佛의 본질이다’고 말한다. 이것은 깨침이란 다름아닌 念을 여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佛이 佛인 까닭은 본래부터 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念이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은 본래는 없었던 念이 새롭게 현전했다고 간주하는 것 그 자체가 망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離念의 念이 망념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그 망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다. 그 경지가 곧 離念이다. 이와 같이 자각하는 것이 ?大乘無生方便門?에서 말하는 無生의 方便法門이다.
묻는다 : 佛이란 무엇입니까.
답한다 : 佛이란 心이 明澄하여 有無의 의식을 떠나 身心의 대립을 일으키지 않고 종내 진여를 지키는 것이다.
묻는다 : 진여란 무엇입니까.
답한다 : 心이 분별의식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 心이 곧 진여이다. 그리고 物이 분별되지 않으면 그 物이 곧 진여이다. 心이 진여라면 心이 해방되고 物이 진여라면 物이 해방된다. 心과 物이 모두 분별을 여의면 벌써 실체적인 것이란 아무것도 없게 된다. 바로 이것이 깨달음의 큰 나무이다.
대체적으로 자기를 깨친다는 것은 心의 본체가 모든 분별의식을 떠나 있는[心體離念]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차별을 떠난 心의 모습은 마치 허공의 넓이처럼 아무리 나아가도 다할 수 없고, 모든 존재는(凡이나 聖이나) 다 평등하다. 불세계가 淸淨과 平等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것이 여래가 깨친 평등법이다. 이 법신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들의 본래적인 깨침(本覺)이 주장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법신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 법신이란 누구에게나 구족되어 있는 불성 내지 법성이다. 이것을 신회는 북종의 선자들에 대하여 그들이 단순한 청정을 지키는 것으로 보아 비판을 가하였다.6]
6] 神會, ?南陽和尙頓敎解脫禪門直了性壇語? ?제군은 모든 선과 악을 결코 차별하지 말라. 명상으로 心을 응집하는데 끄달리지 말라. 心으로 心을 집중하여 주시해서는 안된다. 만약 心을 계속 집중하여 주시한다면 그대들의 心은 心을 주시하는 것에 끄달리게 된다. 그와 같은 명상을 하지 말라. 또한 시선을 내려깔아 주시하지 말라. 만약 그렇게 되면 시선을 내려가는 것에 끄달리게 된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또한 일부러 의식적으로 心을 안으로 거두어들이지 말고, 밖을 향해 遠近을 보려고 하지도 말라. 이와 같은 것을 모두 하지 말라. 그래서 경전에서는 ?內觀하지 않는 것이 깨침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기억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결국 자기의 心 그 자체는 본래 공적하다?
북종의 가르침에서 망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제일로 삼아 오로지 守眞心하라는 것을 신회는 모두 心에 끄달리는 것으로 간주하여 물리치고 있다. 이에 대한 신회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제자 : 스님이 말하는 心은 是非가 있는 겁니까.
답한다 : 없다.
제자 : 心은 住하는 바가 있습니까.
답한다 : 心은 住하는 바가 없다.
제자 : 스님은 心이 住하는 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心은 心이 住하는 바가 없음을 알고 있는 겁니까.
답한다 : 알고 있다. 그대는 진정으로 그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제자 :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心이 어디에도 住하는 바가 없다면 그것을 안다는 것은 어떻게 되는 도리입니까.
답한다 : 어디에도 住하지 않는다는 것은 心의 落着이다. 落着된 心의 본체를 心의 안정[定]이라 부른다. 낙착된 心의 본체에는 自然知가 있어서 잘 자기심의 본체가 낙착하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을 깨침[慧]이라 부른다. 心의 안정과 깨침은 진실로 하나이다.
경전에서 ?낙착된 心이 관조의 작용을 일으킨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디에도 住하지 않는 心은 知를 여의지 않는다. 知는 어디에도 住하지 않는 心과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知는 心이 스스로 어디에도 住하지 않는 줄을 아는 것이지 결코 다른 知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열반경?에서는 ?定이 지나쳐 慧가 없으면 무명이 증대되고, 慧가 지나쳐서 定이 없으면 삿된 생각이 일어난다. 이처럼 定慧가 평등하게 될 때에 분명하게 佛性을 볼 수가 있다?고 말한다. 이로써 생각해 보건대 어디에도 住하지 않는 心이 知를 일으키는 것이고, 心이 공적한 줄을 아는 것이 곧 그 작용이다. 7]
7]위의 책.
명상은 心의 작용을 멈추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것에도 끄달리지 않고 어디에도 住하지 않는 心의 자유로운 활동을 깨치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인 心의 근저에 본래 자연스러운 知가 있기 때문이다. 신회는 그와 같은 깨침을 가능케 하는 본래적인 自然知의 작용을 무엇보다도 중시한다. 그것은 내부로부터 저절로 일어나는 知이지, 북종선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외부로부터 觀하거나 깨치는 대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직관이라 해도 관찰되는 것은 知가 아니라 記憶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知는 어디에도 住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그 근저에 이것을 지탱해주는 근거를 지니지 않는다. 知야말로 공적한 心의 본질 그 자체이다. 어디에도 住함이 없는 心이 無住이다. 無住의 근본으로부터 일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이 ?금강경?과 ?유마경? 등에 의하고 있다는 것은 후에 신회 자신이 말하고 있다. 신회가 말하는 無住는 무엇보다 우선 활동적이고 근원적인 것으로서 반야바라밀의 空한 활동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신회의 無住는 북종의 離念과 전혀 그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신회는 북종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첫째, 心만을 凝하여 선정에 들어가는 것은 判斷中止의 空에 빠지는 것이다. 선정에서 나온 후에는 일부러 心을 작용시켜 모든 현상의 변화를 분별하는 것을 깨침이라 하는데 그것은 마치 경전에서 妄心이라 부르는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말하자면 깨쳤을 때에는 선정이 없고 선정 때에는 깨침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모두 분별번뇌를 떠나지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둘째, 心을 凝하여 청정을 관찰한다. 셋째, 心을 起하여 외계를 통일한다. 넷째, 心의 작용을 거두어들여 안으로 沈潛한다.
신회는 이 네 가지를 들어 그 잘못을 지적하고, 나아가서 그 네 가지가 진정한 깨침을 방해하는 것이라 말한다. 후에 臨濟義玄(?-866)도 이 구절을 인용하여 좌선과 명상의 편향을 비판하여 淸淨業 내지 造地獄業이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신회의 비판이 후에 중국선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북종에서의 분명한 입장이었던 定으로부터 깨침으로 나아가는 방편이 결코 定을 떠나 깨침을 내세우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定과 깨침을 하나로 간주하지도 않고 둘로 간주하지도 않음으로써 각각의 본질을 體用의 관계에 입각하여 분명히 하려고 한 것이었다. 신회는 이 점을 고의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無住라는 말은 ?유마경?에서 ?無住의 근본으로부터 일체법을 건립한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8]. 따라서 無住는 기본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신회가 無住를 本知로 삼은 것은 언어의 의미상으로는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일체법의 근본이라 하여 心의 본체로 간주하게 되면 오히려 신비적인 실체로 비춰지는 경향은 부정할 수 없다.
8]僧叡(353-420)의 주석에 의하면 그것은 實相의 또 다른 명칭이다. 그리고 실상은 性空의 또 다른 명칭이다. 性空은 말할 나위도 없이 반야바라밀의 내용이다.
또한 無念은 ?유마경?과 ?기신론?에도 보이는 말이다. 특히 ?기신론?의 ?어떤 중생이 있어 無念을 관하는 사람은 곧 佛地를 향하게 된다?는 것은 ?楞伽經?에 근거하고 있다. ?기신론?은 無念에 대하여 일심에 대한 최초의 작용을 깨쳐 心에 初相을 知해야 할 것이 아니라 無念임을 知하는 ‘절대적 깨침’의 근거로 삼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신회가 말한 바와 같은 능동적인 의미는 아니다.
이렇게 보면 無住도 無念도 그 본래 語義로서는 북종의 離念과 다르지 않다. 신회는 이것을 무리하게 주체적인 本知로 삼았다. 여기에서는 북종선이 지니고 있는 定으로부터 깨침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입장이 극복되어 體用不二가 엿보인다. 그것은 현실적인 用으로서 수행의 계기였던 분별과 망상의 우연성을 비판하여 절대적인 공적의 본체로 귀입시킴으로써 투철한 일원론적인 입장으로 일관한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本知의 대상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用을 단순한 유희로 삼고, 나아가서 體마저 무의미한 우연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회의 本知를 더욱 철저화하여 그것을 自性의 用으로 삼아 대상적인 隨緣의 用과 구별함으로써 선과 화엄철학을 총합하려고 한 종밀에 이르러 비로소 그와 같은 관념성의 극복이 엿보인다. 종밀이 스스로 하택신회의 남종을 正系로 삼고, 마조(709-788)의 선은 방계임을 주장한 것은 오로지 그와 같은 自性의 本用과 隨緣의 應用을 구별함에 있었다.
2. 깨침에 대한 오해 - 無事禪
간화선 성립의 종적인 원인으로 당대에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던 남종선에서의 수행과 깨침에 대한 하나의 부정적인 견해를 들어볼 수가 있다. 그것은 흔히 平常無事한 의미의 無事禪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無事禪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으로서 수행과 깨침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을 들어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는 수행을 의미하는 좌선 곧 定과 깨침을 의미하는 지혜 곧 慧의 관계를 이 후대에 등장하는 ?照禪과 看話禪으로 비교한다면 다음과 같은 관계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照禪은 坐禪을 專一하게 하여 수행과 깨침이 不二임을 강조함에 비하여 看話禪은 깨침을 主로 하여 그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화두를 드는 직관주의방식을 채용한다."
이로써 생각해보면 묵조적인 방식에 대하여 좌선을 통하여 깨침을 얻는다는 발상은 마치 점수로써 번뇌를 없애고 깨침을 얻으려는 북종선의 경향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 때문에 돈오에 입각한 직관주의야말로 남종선이 지니고 있는 정통으로서 간화선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면 남종선의 정통은 간화선에 있고, 묵조선은 남종으로부터 배척된 북종선과 동일한 입장으로서 남종의 정통이 아니라는 견해를 보일 수 있다. 나아가서 이단이라고 단정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이단의 경향에 있다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과연 이와 같은 입장에서 묵조선은 남종선의 방계이고 간화선이 정통이라는 획일적인 구분이 정당한 것인가. 이 문제를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우선 남종선의 기본적인 수행구조인 定의 유형 내지 定의 성격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좌선과 깨침(修證)에 관해서 선종의 역사상에 나타난 修?觀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卽心是佛이라는 본래자성의 청정성을 실제적으로 어떻게 수용하고 전개시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방식에 대한 세 가지 형태이다.
첫째는 본래 自性淸淨佛이므로 모든 行住坐臥의 행위는 다 본래부터 깨침의 현현이다.
둘째는 본래 自性淸淨佛이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그에 걸맞는 좌선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좌선할 때는 반드시 깨침이 현현한다.
셋째는 이치적으로는 본래 自性淸淨佛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미혹해 있기 때문에 그 미혹으로부터 벗어나 깨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의 경우는 중국 唐代 남종선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이에 대한 견해는 당대선종에서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臨濟義玄은 ?臨濟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납자들이여, 불법은 애써 用功할 필요가 없다. 다만 평소에 無事하게 ?屎送尿하고 着衣喫飯하며 피곤하면 잠자면 그만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안다. 고인이 말했다.
‘밖을 향해 공부하지 말라,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짓일 뿐이다’라고. 그대들은 이미 隨處作主이고 立處皆眞이다. 그러니 경계를 맞이하여 회피하지 말라."
또한 종밀이 ?裴休拾遺問?과 ?圓覺經大疏抄? 卷三下에서 洪州宗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는 곳에서도 볼 수가 있다.
"홍주의 주장은 心을 統御하여 사념을 작용시키고, 손가락을 튀기고 눈을 꿈벅꿈벅하며, 所作하고 所意하는 것이 모두 모두 불성 그대로의 작용이지 다른 작용이 아니라고 말한다. 貪?瞋?癡가 그대로, 선을 짓고 악을 짓는 것도, 고라고 느끼고 락이라고 느끼는 것도 모두 불성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종밀이 홍주종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에서 하택종의 종지와 비교하려는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지만 홍주종의 입장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9] 바로 이와 같은 예들은 첫째의 대표적인 사고 방식을 보여주는 말이다. 교학적인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첫째와 둘째는 本覺門的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셋째는 始覺門的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선 셋째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에 대한 입장으로는 송대 大慧宗?가 ?妙心居士孫通判請普說?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본각을 시각에 합치하는 것을 佛이라 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지금의 始覺을 가지고 본각에 합치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왕 묵조의 무리들은 無言?然으로 始覺을 삼고, 威音那畔으로 본각을 삼는다. 본래 이런 법은 없다. 이미 이런 법이 아니라면 어떤 것이 佛인가. 만약 全是覺이라면 어찌 다시 미혹이 있겠는가. 만약 미혹이 없다고 말하면 석가노자가 명성이 나타났을 때 홀연히 깨쳐 自家의 本命元辰이 원래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어찌하겠는가. 그러므로 ‘시각으로 인하여 본각에 합치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납자들이여, 홀연히 콧구멍을 찾게 되면 그것이 곧 道理이다. 게다가 이것은 사람마다 모두에게 본래부터 구족되어 있다."10]
이로 보자면 대혜의 수증관은 바로 셋째에 해당한다. 이치로서는 ?사람마다 모두 본래 구족되어 있다?는 것이지만 事로서는 ?지금의 始覺을 가지고 본각에 합치시킨다?는 시각문에 입각해 있어 현실에 미혹해 있는 것을 감히 강조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임제종의 종조인 임제의현과 간화선의 대성자인 대혜종고는 전혀 다르다. 전통적인 唐代禪의 첫째의 입장을 버리고 대혜가 셋째의 입장에 선 것은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임제선의 아류가 無事禪을 오해하여 無事禪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 아류와 같은 수행의 집단이 대혜의 말을 빌리자면 ?照邪禪으로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9]이에 해당하는 내용이 馬祖道一의 ?馬祖錄?과 黃檗希運의 ?宛陵錄? 등에 잘 드러나 있다.
10] ?普說? 卷4, (大正藏47, p.888上)
대혜의 말처럼 묵조선은 ?全是覺?으로서 ?始覺(無言?然)卽本覺(威音王那畔)?으로서 둘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좌선하는 곳에 깨침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혜의 좌선관은 깨치기 위한 수단으로서 어디까지나 깨침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에 비하여, 묵조선의 좌선은 수단이 아니라 좌선이 깨침이라는 목적 그 자체로서 깨친 자의 좌선이었다. 첫째와 둘째가 본각문적인 성격이고, 셋째가 시각문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중국 선종사의 흐름속에서 선의 본질에 대비시켜보면 곧 묵조선이야말로 唐代禪의 정통이고, 송대에 성립한 간화선은 그 방계가 되고 만다. 그러나 한편 대혜가 간화선을 대성시킨 배경에는 오히려 본각문적인 무사선의 오해를 극복한 시각문적인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각각을 정통이니 방계니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곧 묵조선은 둘째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첫째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 첫째와 둘째의 차이는 미묘하다. 그러나 둘째가 수행의 필요성을 강조함에 비하여 첫째는 수행마저 필요치 않다는 입장이다. ‘卽心是佛’이란 본래 첫째의 사고방식으로서 남종선으로 출발했을 때는 철저하게 첫째의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송대에 와서는 卽心是佛에서 是佛이라는 그 결과에만 집착하여 본래의 卽心이라는 본질에 대해서는 까마득하게 무시해버리는 無事禪에 떨어지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묵조선의 경우도 중국선의 흐름속에서 첫째의 특색을 지니고 첫째의 정통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이 坐禪을 무시한 本證만을 강조한 나머지 無事禪에 떨어질 경우에는 ?照邪禪으로 비판을 받았다. 때문에 첫째의 입장에 대하여 악성적인 무사선에 떨어진 것을 초극하려는 것이 셋째의 입장에 서 있는 간화선의 역사적인 과제였다. 간화선은 이미 이와 같은 수행과 깨침에 대하여 正眼을 상실한 시대적인 부조리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곧 새로운 수행법의 출현을 기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 성립이 가능하였다.
Ⅲ. 大慧 看話禪의 출현배경
앞서 살펴본 선수행과 깨침에 대한 선종사적인 흐름에서 보았듯이 대혜가 간화선을 주창하게 된 그 종적인 원인은 아무래도 당대부터 계속된 무사선의 오해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이것이 간화선의 출현에 관계된 간접적인 원인이라면 그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에 행해지고 있던 묵조선법에 대한 대혜의 견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제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묵조선법에 대한 대혜의 입장과 당시 팽배해 있던 선종 일반계의 부조리에 대한 대혜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한다.
1. ?照禪法의 출현
大慧宗?에 의하여 간화선이 대성하게 된 횡적인 원인으로는 당시에 이미 출현해 있던 ?照禪法에서 찾아볼 수 있다. ?照禪法은 앞서 언급한 曹洞宗旨에 바탕을 둔 것으로11] 송대초기에 등장해 있었다. 그것은 우선 眞歇淸了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眞歇은 宏智과 함께 丹霞子淳의 法嗣로서 당시 雪峰山에 주석하면서 ?照禪風을 크게 드날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法系를 曹洞宗 가운데서 보면 洞山良价 - 雲居道膺 - 同安道丕 - 同安觀志 - 梁山緣觀 - 大陽警玄 - 投子義靑 - 芙蓉道楷 - 丹霞子淳 - 眞歇淸了로 이어지며, 宏智正覺과는 법통으로 형제간이다.
眞歇의 語錄은 그의 ?塔銘?에 의하면 두 가지가 세상에 유행했다고 한다12]. 하나는 ?劫外錄?으로서 ?卍續藏經?에 현존하고, 다른 하나는 雪峰山 주지 때의 語錄인 ?一掌錄? 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13]. ?劫外錄?은 1128년 6월에 長蘆山을 물러난 41세 이전까지의 기록이다. 그리고 ?一掌錄?은 1130년부터 1135년까지의 43세부터 48세 까지 雪峰山에서 주지하고 있는 동안 1134년(眞歇 47세) 2월 이전까지의 기록으로서 ?續刊古尊宿語要?가 바로 그것의 拔萃라는 것이 밝혀져 있다14]. 大慧가 ?照邪禪이라고 공격을 시작한 것은 1134년 夏安居 이후부터인데 이 두 가지 어록의 간행이 그 이전이라는 것은 大慧의 ?照禪 비판을 고찰하는 데 있어 중요한 관건이 되어 있다.
11] 曹洞宗旨에 근거한다는 것은 回互와 不回互의 원리에서 볼 수 있듯이 수행과 깨침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그 양태적인 입장의 차이라는 것에 바탕하고 있다는 말이다. 수행과 깨침의 일치라는 입장에서 수행을 깨침의 과정으로 보지 않고 깨침을 수행의 결과로 보지 않는 회호의 입장이기 때문에 수행은 깨침의 표현이고 깨침은 수행의 본원이다. 이것은 곧 ?照禪法에서 말하는 坐禪과 本證의 상호관계성이기도 하다.
12] ?眞歇語錄? 卷上, (卍續藏124, p.635上) “語錄兩集 行於世” 또한 이 내용은 앞의 中橋居士 吳敏이 1168년에 쓴 ?眞州長老了禪師劫外錄序?, (卍續藏124, p.619下)에도 인용되어 있다.
13]椎名宏雄씨는 ?宋元版禪籍の硏究? p.615(1993년 8월, 大東出版社)에서는 ?眞歇語錄?의 ?塔銘?에 있는 ?語錄兩集行於世?를 인용하고 있다. 한편 石川力山씨는 ??眞州長老了禪師劫外錄抄?の硏究(上)?(?駒澤大學佛敎學部論集?25, 1994)에서는 宏智가 찬술한 眞歇 ?塔銘?의 序와 ?南宋元明禪林僧寶傳? 卷2 ?眞歇傳?에는 ?劫外錄?과 ?一掌錄?의 두 책이 세상에 세상에 유행했음을 전하고 있다. ?一掌錄?의 내용은 현존하지 않지만 거기에 李綱이 붙인 序文 만이 ?梁谿全集? 卷137에 전한다. 石井修道씨는 이것을 ?宋代禪宗史の硏究? p.272에서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14]石井修道, ?大慧宗?とその弟子たち(8)?(?印度學佛敎學硏究?25-1. 1977) ?續古尊宿語要? 6권(卍續藏118, p.537上 - 卍續藏119, p.188下. ?續佛敎大藏經? 제8책, p.837 - 제9책, p.189)
?眞歇語錄?의 卷下에 있는 ?信心銘拈古?는 大慧의 ?照禪 비판에 대항하기 위하여 찬술된 것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大慧가 대성시킨 看話禪과는 그 종풍이 크게 다르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거기에서 大慧가 ?照邪禪이라 비판한 소위 ?妙悟?에 대하여 眞歇은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당시에 진헐과는 달리 宏智는 眞歇의 종풍을 비교적 잘 서술해 놓고 있는 ?塔銘?에서 ?깨달음[悟]으로 則을 삼는다. 오직 證得으로만 상응한다?15]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大慧 측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말로서 大慧와 眞歇과는 달리 大慧와 宏智 사이의 교감이 있었던 것을 짐작케 해준다.
15]위의 책, (卍續藏124, p.635下) “以悟爲則 惟證相應”
眞歇의 ?照禪法에 대해서는 ?眞歇語錄? 2권 가운데 그 卷上에 해당하는 ?劫外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劫外錄?은 眞歇이 머물렀던 여섯 곳, 곧 長蘆山?雪峰山?阿育王山?龍翔寺?徑山?崇山顯孝禪寺 가운데 최초의 長蘆山에서의 설법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밖의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眞歇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어록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그의 사상적인 특징은 ?照禪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現成公案을 주창하고 있다.
"현성공안은 남에게서 구할 것이 아니다. 그대 자신과 나 자신이 곧 현성공안이다. 따라서 보고 듣는 것이 그대로 현성공안의 진실이고, 소리와 색이 그대로 현성공안의 진실이며, 움직임이 그대로 현성공안의 진실이고, 말하는 것과 침묵이 그대로 현성공안의 진실이다. 그러니 일용사의 見聞覺知가 그대로 현성공안의 순수진리 아님이 없다." 16]
16]?眞歇淸了禪師語錄? 卷上, (卍續藏124, p.643上-下)
“現成公案?求他作? 見聞也眞 聲色也眞 動靜也眞 語?也眞 卽今日用見聞覺知純眞”
둘째는 ?照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이다.
"텅 비어 있으되 신령스럽고 고요하나 오묘하다. 그리하여 밝음이 널리 두루하니 거울에 비추는 듯 하다."17]
17] 위의 책, (卍續藏124, p.626下) “虛而靈 寂而妙 明密浩然 猶落鑑照”
이것은 處處에서 찾아도 얻을 수 없고 다만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찾지 않아도 스스로 얻어지는 것임을 말한다. 그러면 그 한 곳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다름아닌 자신이 마음 속에 이미 드러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大休大歇의 자리에서 곧 모든 用을 얻고 活見을 얻으며 모든 明을 얻어 털끝만치도 ?漏가 없다.
그리고 입으로는 佛法의 기미도 말하지 않고, 목숨은 저절로 끊어지고 四大는 저절로 탈락하며 빛과 그림자가 함께 透脫하니, 만 길 절벽에 매달린 몸과 같아 무엇 하나 의지할 바가 없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가만히 앉아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의 혓바닥을 끊어버리고 모든 機가 은밀하게 닿는 곳마다 混融해 있다. 이러한 경지의 심리는 一念이 萬年으로서 眞常體露하여 行住坐臥의 각각 행동이 孤明하여 구분이 없고 형태를 잃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眞歇이 丹霞子淳에게 參하여 깨달음을 얻은 機緣이 바로 空劫已前의 本來自己였던 점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眞歇은 ?信心銘?의 ?一種平懷 泯然自盡?에 대한 그의 ?拈古?에서 ?皮膚를 탈락하고 오직 하나의 진실만이 있다. 그것이 과거와 현재를 마치 높이 떠오른 태양처럼 밝게 비추어 지금 이 곳 面前에 赤裸裸 赤??하게 나타나 있다. 이것을 평상심이라 한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常을 되돌이켜 道에 합치하여 計較를 부려서는 안된다?18] 라고 말하고 있다. 곧 본래가 움직임이 없으면서 그것을 상실하지 않고 은밀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18]위의 책, (卍續藏124, p.641上)
2. 眞歇의 ?照에 대한 大慧의 입장
大慧宗?(1089-1163)는 安徽省 宣城縣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奚이다. 江西省을 중심으로 수행하였는데 특히 ?潭文準(1061-1115)의 지도를 받았다. 文準이 示寂한 후 37세(1125) 때 天寧寺의 圓悟克勤 아래서 大悟하였다. 揚州를 거쳐 江西省에서 활동하고, 46세(1134) 때는 福建省으로 가서 당시 雪峰山에서 활동하고 있던 眞歇淸了 一派에 대하여 공격을 가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照禪에 대한 공격이었다.
49세(1137) 때에는 徑山에 머물렀지만 4년 후 53세(1141) 때에는 政爭에 휩쓸려 湖南省 衡陽으로 유배를 당해 거기서 10년을 지내고, 마침내 廣東省의 梅州로 옮겼다. 68세(1156) 때에는 유배에서 풀려나 宏智正覺의 권유로 阿育王山에 머물고, 70세(1158) 때에 다시 徑山으로 돌아왔다. 이 후 75세(1163) 8월 10일 徑山의 明月堂에서 示寂하였다. 바로 이 大慧 禪風의 성격을 看話禪이라 하는데 이것은 그의 語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만 顚倒妄想의 마음, 思量分別의 마음,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 知見解會의 마음,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마음 등을 일시에 놓아버리고 그 곳에서 바로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한 승이 조주에게 물었습니다.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말했습니다. ‘없다[無]’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無’라는 한 글자는 허다히 많은 惡知惡覺을 쳐부수는 무기입니다.
有無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고, 道理의 알음알이도 짓지 말며, 뜻으로 사량하거나 헤아리려 하지도 말고, 揚眉瞬目으로 근거를 삼으려 하지도 말며, 언구로써 참구하려고도 말고, 무사안일에 그대로 빠져 있지도 말며, 드러난 곳에서 이해하려고도 말고, 문자를 빌려 인증하였다고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하루종일 모든 행위에서 항상 놓치지 말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19]
19] ?大慧語錄? 卷25, (大正藏47, p.921)
이것은 大慧 나이 50세(1138) 때의 것으로 富樞密은 바로 ?宏智錄? 최초의 刊本에 ?序?를 붙인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이 사람에 대하여 대혜는 곧 망상과 미혹한 마음을 버리고 ?無字? 화두를 드는데 있어 모든 作爲的이고 分別的인 마음을 떠나서 無分別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화두를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사대부들에게 無字話頭를 참구시킨 것이 大慧 看話禪의 한 특색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화두를 드는 가운데 생기는 禪病의 치료에 대해서도 대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대부들이 學道에 있어서 두 가지를 해서는 안된다. 그 하나는 忘懷이고 다른 하나는 著意이다. 이른바 著意라는 것은 어리석은 무리들이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버리는 것[管帶]을 말하고, 忘懷라는 것은 어리석은 무리들이 하는 ?照를 말한다. 管帶와 ?照는 두 가지 병통으로서 이것을 제거하지 못하면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른바 생사라는 것은 본래 형체와 분단[形段]이 없다. 다만 學道人이 그 생사심을 파하지 못하기 때문에 윤회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생사의 마음을 파하면 곧 윤회의 성품이 그대로 해탈의 도량이 된다. 그러나 윤회와 해탈도 모두 거짓 이름에 불과하기 때문에 形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일상 행위에서 이와 같이 관찰한다면 곧 日久月深 얻지 못할 바가 없다."20]
20] ?普說? 卷4, (大正藏47, p.884下)
대혜는 ?昏沈???忘懷????照? 등과 ?掉擧???著意???管帶? 등 두 가지의 선병을 극복하지 못하면 생사윤회의 미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생사의 세계와 해탈의 세계도 본래 假名이기 때문에 벗어나야 할 생사의 세계와 추구해야 할 해탈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행위 속에서 그대로 공부를 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大慧는 이와 같은 眞歇의 선풍에 대하여 그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들을 향해서 ?照의 선풍에 대하여 신랄한 공격을 가하고 있다.
"거사 元昭는 오랫동안 진헐선사에게 참하였다. 그리하여 자수용삼매를 얻어 그 극치에 달했다. 후에 洋嶼庵에 있는 대혜를 방문하여 대중들과 함께 입실하였다. 대혜가 원소에게 狗子無佛性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질문을 하였다. 이에 원소가 뭐라 답변을 하려 하자 대혜가 죽비로 원소를 내려쳤다. 이에 원소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그 곳에서 계속 수행을 하였다.
어느 날 대혜가 일러 말했다.
?技倆을 드러내지 말고 곧 바로 땅을 가르고 끊을 줄 알아야 비로소 생사를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기량만을 얻어 생사를 해결하려고 기대한다면 돌아가거라.
원소는 이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21]
21] ?續傳燈錄? 卷32, (大正藏51, p,694上)
곧 元昭는 眞歇의 휘하에서 공부를 하여 自受用三昧를 얻었다. 그러나 大慧를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大慧에게서 일찍이 배워왔던 ?照禪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받고 결국은 大慧의 제자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大慧는 元昭의 ?照思想에 대한 비판을 하였다. 곧 眞歇의 선풍에 대하여 ?혹자는 無言과 無說과 良久와 ?然함을 가지고 空劫已前事라고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休하고 歇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이 眞歇의 가르침은 土木瓦石과 다를 바가 없다?22] 라고 말하고 있다.
休하고 歇하라는 가르침은 바로 眞歇의 가르침 그대로이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진헐은 자신의 道號를 ?참된 쉼?이란 의미에서 眞歇이라 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大慧는 이러한 그의 견해를 ?照의 선자들은 ?山의 귀신굴에서 조사들의 언구나 인용하여 그것을 了了常知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土木瓦石과 같이 冥然하고 無知함으로부터 벗어나서 行住坐臥에 있어서 惺惺歷歷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大慧의 ?照禪風에 대한 공격은 眞歇의 휘하에서 공부해 온 定光大師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23]. 이에서 定光大師도 元昭와 마찬가지로 大慧에게 參하면서 大慧의 ?照禪風의 공격을 받는다. 곧 이른바 자신의 눈은 본래 올바른 것인데도 스승을 잘못 만난 탓이라 하고, 定光大師의 견해에 대해서는 空無寂滅에 떨어진 것으로서 혼이 흩어져 버린 죽은 사람과 같은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또한 大慧는 ?四十二章經?의 ?20難?을 언급하면서 그 ?20難?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 그 모습을 강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다.
22]?大慧語錄? 卷14, (大正藏47, p.867中)
23]위의 책, (大正藏47, pp.864中-866下). 이와 함께 대혜는 특히 ?書狀?의 여러 곳에서 ?照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縣吐註解 書狀? p.54의 註解에서는 그 구체적인 인물로서 平普融을 말하고 있다. 平普融은 大慧가 그의 나이 34-37세 사이에 참학한 인물로서 太平寺에 주석하고 있었다.
?大慧年譜? 34年條(佛敎大藏經73. pp.515-516). 그리고 邪見으로 인하여 폐해를 경험한 사람들로서 ?書狀?에 보이고 있는 인물들로는 다음과 같다. (1) 大慧宗?(?答富樞密?의 첫 번째 편지) · (2) ?密首座(?答富樞密?의 첫 번째 편지, ?答王敎授?) · (3) 開善道謙(?答富樞密?의 세 번째 편지) · (4) 劉寶學(?答劉寶學?) · (5) 劉彦忠(?答劉寶學?) · (6) 李?政(?答富樞密?의 세 번째 편지) 등이다.
"만약 깨치면 쉽고 못 깨치면 어렵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과 쉽다는 두 글자 또한 本地風光이나 本來面目에는 아무런 간섭도 미치지 않는다. (중략) 왜냐하면 이 법문에는 본래 어렵다는 것도 없고 본래 쉽다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오늘날 사대부들이 왕왕 대부분 掉擧에 빠져 있다. 그런데 오늘날 제방에는 일반의 ?照邪禪의 무리들이 있어서 사대부들이 塵勞에 放碍가 되어 조금도 마음에 안녕을 얻지 못함을 보고서 조용히 가르치기를 식은 재와 마른 나무처럼 마음을 지니라고 말한다."24]
24]위의 책, (大正藏47, p.884下) “若悟卽易 不悟卽難 然難易兩字 亦不干本地風光 本來面目 何故 此箇法門本無難本無易 ... ... 往往士大夫 多是掉擧 而今諸方 有一般?照邪禪 見士大夫 爲塵勞所障 方寸不寧 ?便敎他 寒灰枯木去”
이에 鄭尙明이라는 사대부가 大慧에게 경전과 어록 등의 많은 근거를 들어 대항한다. 이에 大慧은 다시 그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大慧가 雪峰山을 방문한 직후에 1134년 大慧 46세 때 福州의 洋嶼庵에 머무르고 있을 무렵 일찍이 大慧의 스승인 圓悟克勤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던 遵璞禪人과 그의 도반이었던 曇懿가 眞歇淸了파 아래에서 참하고 그 곳에서 인접한 ?라는 곳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에 大慧는 이들에 대하여 준열한 비판을 하면서 그들의 깨달음을 꾸짖어 스스로 遵璞禪人은 자신의 過誤를 뉘우치면서 ?이전의 가르침은 나쁜 앎이었다?고 하고, 曇懿는 大慧의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서 大慧의 문하에 參하였다.25]
이러한 일련의 예들은 곧 大慧가 진헐의 ?照禪風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으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후부터 大慧의 ?照禪風에 대한 공격도 더욱 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眞歇은 특별한 대응을 보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어록인 ?劫外錄?과 ?拈古? 등에 보이고 있는 내용은 大慧의 비판이 시작되기 이전의 것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大慧에게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후에 中橋居士 吳敏이 쓴 ?劫外錄?의 ?序文?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 ?序文?에 의하면 長蘆山의 淸了禪師는 芙蓉道楷의 孫이고 丹霞子淳의 子이다.
眞歇은 無所得으로써 법을 얻어 설한 바 없이 법을 설했다. 그것은 마치 구름은 흘러가고 물은 고여 있듯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휘하에서 법을 묻는 자가 천 칠백이었는데 모두 법을 듣는 바 없이 들었다고 한다. 眞歇은 항상 維摩의 沈?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어서 감히 그 경지를 엿보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空山이 보배를 지니고 있는 것과 같았으며 은하수에 가을날의 밝은 달빛이 어울려 비추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그러한 경지는 보고 있어도 볼 수가 없고, 말로 언급할 수가 없으며, 듣고 있어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甘露法을 들은 사람은 마치 병상에 누워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것과 같았고, 천둥과 비가 山川草木을 길러내는 것과 같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 소식은 나무 닭이 서리를 맞아 홰를 치고, 돌 호랑이가 구름을 보고 울부짖으며, 새가 노래하나 산은 조용하고, 매미가 노래하나 숲이 고요한 듯 하다. 그러니 담장 너머에 뿔을 보고 소를 알고, 말의 울음소리를 듣고 말[馬]을 알아차리는 격이 바로 眞歇의 선풍이었다.
眞歇의 이러한 모습은 宏智正覺이 찬술한 그의 ?塔銘?26]에 나타나 있다.
佛祖의 등불은 東西로 이어져 오면서 깨침을 則으로 삼기에 오직 깨달음으로만 상응할 수 있다. 이것을 眞歇淸了는 曹洞의 宗旨로 전하여 더욱더 심화시킨 것이다.
25]위의 책, (大正藏47, p.914上)
26] ?眞歇語錄? 卷上, (卍續藏124, pp.635下-636上)
3. ?照禪法의 비판 내용
이와 같은 예를 통하여 대혜가 眞歇의 묵조선법에 비판을 가한 것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 내용은 ?書狀?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화두 참구에 대한 강조는 ?書狀?에서만 해도 大慧는 趙州從?의 無字話頭를 참구할 것을 총 11회 이상 언급하고 있다. 無字話頭에 대한 이러한 일련의 강조는 특히 思慮分別의 단절을 통해서 특히 사대부들에게 있어서는 일상행위에서 話頭一念이 이루어지는 것을 겨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화두가 없이 대혜의 눈에 寂?斷見에 젖어 있는 모습으로 비친 부류는 당연히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大慧는 公案에 의해서 자기의 망상을 제거하는 것을 그 첫째 목표로 삼았다. 그 대안으로서 대혜는 趙州從?의 ?無字? 公案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無字?三昧에 들어 內外가 打成一片되는 心境에 도달하여 그것으로써 모든 분별망상의 삿된 생각을 불식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公案에 대하여 大疑團을 불러일으켜 大疑大悟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公案을 들지 않고 의심이 없이 묵묵히 앉아 좌선만 하게 되면 枯木의 禪에 빠져 마침내 暗證의 禪에 떨어지게 된다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소위 ?照禪의 비판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에 대하여 ?書狀?에서 대혜는 크게 세 가지 유형에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곧 우선 坐의 형태에 대한 것, 다음은 話頭의 無視에 대한 것, 그 다음은 깨달음에 대한 錯覺에 대한 것 등이다.
첫째는 坐의 형태에 대한 것으로는 앉음새[坐] 그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가리킨다. 척량골을 곧추 세우고 거취를 짓지 말라고 경계한다. 그것은 이 육신을 구경의 것으로 삼는 것이라서 마음이 야생마와 같이 나부끼는 것이 마치 마음이 멈춘다 할지라도 돌로 풀을 눌러 놓은 것과 같다고 비유하여 자신도 모르는 결에 마음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라 비유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자신의 앉음새를 최고의 가치로 삼아 수행하는 묵조의 只管坐禪 수행을 겨냥한 것이다.
"응접할 때에는 오로지 응접만 하십시오. 그리고 靜坐할 때에는 오로지 정좌만 하십시오. 그러나 앉아 있을 때에 앉아 있는 것에 집착하여 그것을 궁극으로 간주하지는 마십시오. 요즈음 삿된 무리들이 묵조의 정좌를 궁극의 것으로 삼아 후학들을 잘못 이끌고 있습니다. 나는 두려움 없이 그들을 꾸짖어 불은에 보답하여 말세의 폐단에서 구하려 합니다." 27]
27] ?大慧語錄? 卷26, (大正藏47, p.923下)
이것은 조용히 앉아 있는 그 자체만을 가지고 비판한 것은 아니다. 달리 앉아 있는 것을 능사로 삼는 것에 대한 내용을 언급한 것이다. 굳이 어느 대상을 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앉아 있는 자세에 집착하는 잘못을 질타하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다. 大慧가 겨냥한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단지 앉아만 있는 것을 가지고 깨달음의 當體라고 간주하는 ?照의 무리를 대상으로 삼은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요즈음 일종의 杜撰漢이 자기의 본분자리도 결실을 맺지 못하였으면서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거두어 조용히 앉아서 호흡이 끊어지게 하라고 하니, 이러한 무리는 진실로 불쌍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28]
28] ?答許司理? 둘째 편지, ?大慧語錄? 卷26, (大正藏47, p.924下)
깨달음이 이미 올바르다면 보고 들으며 맛보고 느끼며 이치를 헤아려 아는 일체의 行住坐臥의 행위가 청정할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고요히 앉아 억지로 거두어 굳게 앉아 있으라 하는 것을 비판하여 보인 것이다. 이것으로써 대혜는 그 묵조사선의 가르침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로써 ‘湛然’이라는 호를 지어 보인 것이다. 또한 ?진실함이 없는 방편[技倆]으로 학자를 거두고 일체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와 같이 칠흑같이 캄캄한 경지[黑漆漆地]로 눈을 굳게 감고서 묵묵히 항상 비추라고 말하는데 언충도 이러한 무리들에게 무너졌습니다. 괴롭고 괴롭습니다. 이러한 말을 만약 그대가 狗子無佛性話頭를 깨닫지 못했던들 나[徑山]도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29] 라고 하여 구체적인 폐해의 대상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곧 無言無說로 흑산아래 귀신굴 속에 앉아서 눈감고 있는 것을 威音那畔이라느니 父母未生時의 소식이라느니 하면서 묵묵히 항상 비추어 보는 것을 선으로 삼기도 한다고 누차 말하고 있다.
29]?答劉寶學? ?大慧語錄? 卷27, (大正藏47, p.925上-中)
둘째는 話頭參究에 대한 無視이다. 앞서 언급한 첫째의 坐의 이러한 유형에 대한 비판은 실은 앉음새라기보다는 화두 참구의 무시로부터라는 것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이것이 화두 및 방편을 무시하는 것으로 직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혜는 화두를 절대화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화두 자체를 목표로 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성인의 방편임을 모르는 무리들을 향하여 극구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諸方의 漆桶輩는 다만 방편에 집착하여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참된 법이라고 남에게 가르치니, 남의 눈을 멀게 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辨邪正說?을 지어 그들을 구제하려 했습니다? 라는 말은 곧 방편에 집착하여 버리지 못하면서 宗師 노릇을 하는 자를 겨냥한 것이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사람은 대부분이 한가로이 앉아 있는 곳에 가 머물고 있습니다. 요즈음 총림에는 근본자리도 모르는 무리들이 있는데 이른바 ?照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발은 땅에 굳건히 딛지도 못하면서 깨달음의 흔적만 추구하여 잘못 날뛰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이야기도 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곧 禪의 궁극이라 간주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業識을 본분자리라 부르고 있을 뿐 근본자리를 모르는 자들입니다."30]
30]?大慧語錄? 卷29, (大正藏47, p.937上)
여기에서는 묵묵히 좌선하는 坐의 형태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잘못 망상에 빠져 그것을 깨달음의 현성이라 간주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은 곧 話頭없이 바로 그 당체를 威音那畔의 일과 空劫已前의 마음자리로 대신하여 無事寂靜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어디서나 一行三昧와 一相三昧로 일관해야 할 치열한 구도심을 접어둔 채 현실을 무시한 안이한 모습의 부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대혜는 이러한 것을 가리켜 아무것도 모르는 흑산귀굴 속의 귀신들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묵묵히 좌선하는 그 자체를 망상에 빠져 있는 모습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대혜는 ?答李郞中?에서 ?가장 하열한 무리는 ?照無言과 空空寂寂으로 귀신굴에 빠져 있으면서 그 곳에서 구경의 안락을 구하는 것이다?31] 라고 몇몇 邪師들에 대하여 공격을 가하고 있다. 이 중에는 그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총명하고 지견이 많은 것을 경계하는 말로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삿된 견해의 으뜸을 견문각지를 알아서 자기를 삼고 現量境界로써 심지법문을 삼는 자들이라 하여 오히려 분별망상을 특히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삿된 무리들이 사대부에게 마음을 거두고 고요히 앉아 일마다 관여하지 말고 쉬어가고 쉬어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찌 분별심을 가지고 마음을 그치게 하며, 분별심을 가지고 마음을 쉬게 하며, 분별심을 가지고 마음을 활용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한다면 어찌 외도와 이승의 禪寂 斷見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으며, 어찌 자기 마음의 밝고 묘한 작용과 구경안락과 여실히 청정한 해탈 변화의 묘를 나타내겠습니까?32] 본래 법에는 취사선택의 분별이 없건만 쓸데없이 집착하고 있지만 집착해야 할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31]?大慧語錄? 卷29, (大正藏47, p.935上-中)
32]?答陳少卿? 첫째 편지, (?大慧語錄? 卷26, 大正藏47, p.923中)
셋째는 깨달음에 대한 無視이다. 다시 깨달음을 무시 내지는 깨달음에 대한 착각을 일삼는 자들에 대한 것으로 비판의 화살을 가하고 있다. 대혜가 깨달음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즈음 ?照의 삿된 무리들은 無言과 無說을 極則으로 삼아 그것을 威音那畔의 일로 간주하고 공겁이전의 일로 간주하며 깨달음이 있음을 믿지 않아 깨달음을 잘못된 것이요 第二議的인 것이며 방편의 말이고 교화하는 言詞라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무리들은 남을 속이고 스스로를 속이며 남을 잘못되게 하고 스스로를 잘못되게 합니다."33]
33] ?大慧語錄? 卷28, (大正藏47, p.933下)
이것 역시 가만히 앉아서 아무 말이 없이 그대로를 깨달음의 현성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의 당체는 어떤 모양이나 언설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저 그대로 受用하고 있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혜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대단히 큰 망상이다. 왜냐하면 話頭를 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話頭없이 앉아만 있는 것은 草木瓦石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혜가 비판한 내용의 두 번째인 話頭에 대한 부정 내지 무시하는 입장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것과 맞물려 있다. 그래서 대혜는 다음과 같이 아울러 말하고 있다.
"혹 아무 말없이 흑산 아래 귀신굴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을 威音王那畔이라 하기도 하고 父母未生時의 소식이라 하며 묵묵히 앉아 항상 뚜렷이 비추어 보는 것을 선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들은 깊은 깨달음을 구하지 않으면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을 第二議諦에 떨어지는 것이라 하고 남을 속이는 일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깨달음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34]
34]?大慧語錄? 卷30, (大正藏47, p.941下)
이의 내용과 같이 ?照邪師輩의 행위는 스스로를 깨닫지 못하고 가치관의 전환으로부터 오는 심각한 병폐를 지적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병폐를 극복하기 위하여 大慧는 끊임없이 狗子無佛性話를 통하여 자신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그로부터 대자비심을 일으켜 逆順의 경계를 대해서도 진흙에 빠지듯 물에 빠지듯 목숨을 아끼지 말고 구업을 두려워하지 말며 중생을 구제하는 데에 힘써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구원으로서 곧 깨달음에 대한 正覺을 겨냥한 것이다. 그런데도 정녕 자비심과는 멀리 잘못 자신의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대혜는 어떤 태도를 취하였을까. 대혜가 말하는 깨달음에 대한 錯覺이라는 것은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남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비단 자신만이 아니라 모두를 미혹으로 이끌어 가는 것을 가리킨다. 大慧는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에 대하여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에 대해서 자신의 心眼도 열지 못하면서 오로지 글 속의 언구만 통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치니 깨달음과는 영구히 멀어질 뿐이라는 것이다. 대혜는 이에 대하여 곧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일종의 머리깍은 외도들이 있어 자기의 마음도 밝히지 못했으면서 남들에게 안주하라고 말한다.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중생제도를 위하여 천 분의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다 하더라도 안주하지 못하고 마음에 미혹만 더할 뿐이다. 또한 인연 따라 받아들여 생각을 잊고 ?照하여 비추어 보고 받아들이게 하니 이 또한 미혹만 더하니 언제 깨달을 수 있겠는가."35]
35] ?大慧語錄? 卷25, (大正藏47, p.918上)
이것은 곧 깨달음에 대한 착각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것을 남에게도 가르쳐 남의 눈까지도 멀게 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대혜는 이 문제에 대하여 그 원인은 참학인 들이 祖師의 진실처에 다다르지 못하고 다만 방편의 말에 끄달려 그것을 전부인 것으로 잘못 아는 것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照禪을 향한 비판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었다. 그 공안 참구의 중요성은 大慧가 일생을 두고 강조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趙州의 無字話頭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大慧의 無字話頭에 대한 주안점은 어디까지나 動靜一如한 입장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곧 看話的인 성격에 대한 이전부터의 관점을 계승이라 할 수 있다. 대혜에게 있어서 간화적인 것이라는 것은 일상생활 속의 언제 어디서나 無字話頭에 대한 일념의 지속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大慧가 無字話頭를 통하여 제시하는 看話禪의 정신이기도 하다. 가령 ?書狀?의 ?答呂舍人?의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만의 의심도 하나의 의심에 통한다. 그러므로 화두에 있어서 의심이 타파되면 천만의 의심은 일시에 타파된다. 그러나 화두가 타파되지 않더라도 일단 그 화두상에서 공부해 보아야 한다. 만약 화두를 버리고 다른 문자나 경전이나 고인의 공안이나 일상의 번뇌를 지니고 의심을 일으키면 곧 악마와 같은 무리이다.
우선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화두를 드는 곳에서 이해하려 하지말고 사량하거나 헤아리려 해서는 안된다.
다만 사량할 수 없는 곳에 나아가 사량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치 쥐가 소 뿔 속에 들어가듯이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생각이 끊긴 곳에 다다를 수 있다. 그러고도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는다면 곧 狗子無佛性의 화두를 들어야 한다. 불조의 말이나 제방의 노숙들의 말이 비록 천차만별이라도 만약 무자화두를 알게 되면 그 모두를 단 번에 알 수 있어 달리 묻지 않아도 된다."36]
36]?大慧語錄? 卷28, (大正藏47, p.230上)
“千疑萬疑 只是一疑 話頭上疑破 則千疑萬疑 一時破 話頭不破 則且就上面 與之?崖 若棄了話頭 却去別文字上起疑 經敎上起疑 古人公案上起疑 日用塵勞中起疑 皆是邪魔眷屬
第一不得向 擧起處承當 又不得思量卜度 但着意就不可思量處思量 心無所之
如老鼠入牛角 便見倒斷也 又方寸若鬧 但只擧狗子無佛性話 佛語祖語 諸方老宿語 千差萬別 若透得箇無字 一時透過 不着問人”
이처럼 대혜는 無字話頭를 최후의 궁극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굳이 공안만이 절대적인 것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곧 반야의 마음에 깊이 들면 굳이 망상심을 물리치지 않더라도 악마와 외도들이 항복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일상의 행위 속에서 所得心을 떠나서 자유롭고 번잡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大慧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는 천성적으로 깨달음을 지향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몸과 마음이 청정하여 반연에 끄달리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능히 行住坐臥에 있어 노승이 가르쳐 준 요점대로 쉬지 않고 수행해 가십시오. 곧 일념에 깨달음에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하면 가령 금생에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가르쳐 준 대로 죽는 날까지 계속해 나아간다면 저승사자도 범접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이 반야 속에 머물러 있어 잡념이 일지 않기 때문입니다."37]
37] ?大慧語錄? 卷29, (大正藏47, p.934上)
바로 일상의 행위가 반야의 실천이 되는 화두공부가 요구되고 있다. 그런데도 수행을 통하지 않고도 본래 깨달음이 완성되어 있다고 말하여 화두를 참구하는 것을 待悟之心 쯤으로 여기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에 대한 대혜의 입장은 곧 그들이 話頭를 무시하고 黑山鬼窟 속에서 번뇌만 키워가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무리들에 대하여 정진에 있어서는 조용한 ?照風의 寂靜主義에 빠지지 말라고 주의시키면서 현실 속에 직접 뛰어들어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가는 것이 인간의 진실한 본분이라 하고 있다.38]
그러나 이것은 고사하고 그 錯覺에 빠져 있는 무리들은 반드시 ?照邪師만이 아니지만 오히려 자신을 추스리지도 못하면서 그 잘못을 남에게까지 물들게 하고 있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여섯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물고기의 눈을 구슬로 간주하는 것은 名字만 고수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들에게 攀緣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눈앞의 鑑照知覺에 끄달려 知解를 내는 것이며,
셋째는 사람들에게 고요히 쉬도록만 하는 것은 無想空寂에 끄달려 知解를 내는 것이고,
넷째는 사람들로 하여금 無覺無知함을 가르치는 것은 곧 土木瓦石과 같이 되는 것은 寂靜의 경지이지 知覺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은 無知覺하게 방편을 잘못 알아 知解를 내는 것이며,
다섯째는 사람들에게 인연 그대로 返照시켜 惡覺이 나타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은 觸?情識을 오해하여 知解를 내는 것이고,
여섯째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은 본래 바탕이 없는 것이니 생각이 생기거나 멸하거나 관여치 말아야지 관여하면 그것이 生死心이 될 뿐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자연의 바탕을 가지고 구경법을 삼아 知解를 내는 것 등39]이다. 이것은 곧 대혜가 ?照의 입장을 비판한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38]?大慧語錄? 卷26, (大正藏47, p.921下)
39] ?答曾侍郞? 셋째 편지, ?大慧語錄? 卷25, (大正藏47, p.918中) 내용 요약.
宏智正覺이 ??照銘?을 찬술한 것은 굉지 나이 40세 때(1130)이고40], 대혜의 비판이 시작된 것은 ?年譜?와 ?書狀?, 그리고 ?普說? 등을 통해 볼 때 대혜 나이 46세(1134) 때부터이다. 이 때의 상황을 전해 주고 있는 것으로 ?大慧年譜?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40] 拙論, ??照禪에 關한 硏究? p.91 도표. 따라서 대혜가 ?照邪師라고 비판에 것에 대하여 굉지가 그 비판을 오히려 자기 종파의 장점으로 삼아 ??照銘?을 지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南劍州의 司法을 지낸 林遵善 適可가 洋嶼에 암자를 짓고 스님을 맞아들여 머물게 하였다. 종도들이 깨달음을 무시하고 수행자들이 적묵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辨邪正說?을 지어 그들을 공격하여 한 때의 폐해를 구하였다."41]
41]?大慧年譜? 46년조. ?大慧語錄? 卷8, (大正藏47, p.841下)
“林適可司法?菴於洋嶼 延師居之 時宗徒撥置妙悟 使學者困於寂? 因著辨正邪說而攻之 以救一時之弊”
?普說?에 나타나 있는 내용은 ?錢計議請普說? 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곧 납자들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총명하고 영리한 사람들이 著意 곧 掉擧 아니면 忘懷 곧 昏沈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은근히 묵조의 무리들에 대하여 忘懷에 빠져 있는 것은 흑산 아래 귀신의 소굴에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빗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소흥 초기에 ?지방에 들어가 암자에 머무르고 있을 때 힘써 그들을 물리쳤다. 곧 그것은 불조의 혜명을 끊는 것으로서 천 부처가 출세하더라도 참회할 수 없다."42]
42]?大慧語錄? 卷17, (大正藏47, p.885上).
“妙喜紹興初 入?住菴時 便力排之 謂之斷佛慧命 千佛出世不通懺悔” 또한 邪見으로 인하여 폐해를 경험한 사람들로서 ?書狀?에 보이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위의 주석 25) 참조.
이와 함께 그 구체적인 것으로 鄭尙明과의 문답했던 예를 들어 ?然히 침묵만 지키고 있는 무리들을 향한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점은 宋代에 들어오면서 그와 같은 禪機와 妙用은 차츰 形骸化되고 形式化되어 가면서 선은 그 생생한 모습을 점차 잃어가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4. 당시 선종계의 폐풍
그와 같은 와중에서 나타난 갖가지 폐해와 부작용은 많은 碧眼宗師들에게 다시금 각성의 계기를 만들어 주기에 충분하였다. 그 가운데 大慧宗?는 출가수행자 뿐만 아니라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재가인에게까지 적극적으로 파고들어 선법을 널리 보급시킨 대표적인 선사였다. 대혜는 출가자만이 아니라 재가자들에게까지 선이 일상생활에서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고 터득되어야 하는 가에 대하여 고구정녕하게 설하였다. 이것은 그의 法語와 普說과 書信 등을 통하여 그의 어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示妙明居士? 부분에서 ?辨邪正說?이라는 형식으로 수행에 대하여 일련의 警戒 내지 勸?한 것이 그의 어록에 수록되어 있다. 그것을 보면 당시에 일반적인 선종계의 병폐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되짚어볼 수가 있다. 이제 그와 같은 폐풍에 대하여 대혜가 지니고 있던 관점을 ?辨邪正說?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辨邪正說?에서 구체적으로 주장하고 권장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辨邪正說?의 내용이 모두 한꺼번에 설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은 마지막 부분의 信에 대한 것에서도 살펴볼 수가 있다.43]
첫째와 둘째는 方便(權實)을 변별하지 못하는 것과 善巧方便의 不在에 대한 것이다. 근년 이래로 道를 배우러 오는 자들이 대부분 근본을 저버리고 지말을 좇으며 正을 등지고 邪에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44].
이들에게는 소위 남의 스승이라는 사람들은 먼저 기특하고 현묘하다는 것은 자신의 흉중에다만 쌓아놓고 전승시키고 있으면서 입과 귀로 전수한 것만을 종지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邪毒만 시킬 뿐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깨침의 무시에 대한 것으로 앞서 언급한 묵조선법에 대한 것을 들고 있다. 이들을 향해서는 ?근년에는 깨침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깨침이란 사람들을 기만한다고도 말하고, 깨침이란 가설된 것이라고도 말하며, 깨침이란 사람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깨침이란 第二義諦에 떨어진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사자의 탈을 뒤집어쓰고 여우의 울음을 내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법안을 갖추지 못한 자들은 자칫 그들에게 현혹되기 쉽습니다. 그러니 불가불 자세히 살피고 가려야 합니다?45]고 말한다.
넷째는 方便(文字?言說?分別)에 떨어지지 말고, 方便을 錯認하지 말라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것도 넓게는 앞의 첫째와 둘째에 대한 것이다.
다섯째는 生死心을 돌려 無字話頭46]를 들라는 것에 대한 것이다. 당시에 선종일반에서 화두를 들지 않음으로 해서 발생되는 것에 대하여 특히 書狀47]에서 전반에 걸쳐 누누이 강조하고 있어 餘論할 바가 없을 정도이다.
여섯째는 擬心하지 말고, 無事禪에 떨어지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도 앞서 언급한 無事禪에 대한 誤解와 더불어 그를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擬心하지 말라(擬心으로 헤아릴 바가 아니기 때문에)는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실로 應緣處에서 按排하지도 말고 造作하지도 말며 擬心으로 思量 分別 計較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蕩蕩하여 無欲하고 無依하십시오. 그리하여 有爲에도 不住하고 無住에도 不墮하며 세간상과 출세간상을 作하지도 마십시오. 이것이 곧 日用四威儀 가운데서 본래면목에 不昧한 것으로 그 여섯 번째입니다?48]
일곱째는 明眼宗師를 參하고, 言說에 떨어지지 말라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德山의 말일 인용하여 ?그대들은 다만 心에 대하여 無事하게 하고 事에 대하여 無心하라. 그러면 虛하지만 靈하고 空하지만 妙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만약 털끝만치라도 本末을 言으로 어떻게 해보려 한다면 그것은 모두 자기를 속이는 꼴이 되고 만다?49] 경계시키고 있다.
여덟째로 信을 지니고, 話頭를 들라는 것에 대한 것으로 선종의 가장 보편적인 것에 대하여 재삼 당부하는 내용이다.
대혜는 위와 같은 ?辨邪正說?을 요약하여 佛病?法病?衆生病이라 말하고 있다.
佛病은 善巧方便을 지니지 못하고서 방편을 그대로를 만능으로 간주하는 병통과 범부행위까지도 일상생활 그대로가 깨침이라 하여 無事甲裏에 떨어지는 병통을 가리킨다.
法病은 언설을 통한 갖가지 병통으로써 곧 言語相?文字相?知解分別相에 떨어져 있는 것과 방편의 가르침을 방편인 줄 모르고 實로 간주하는 병통을 말한다.
衆生病은 중생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속성으로서 分別事識과 不信疑惑과 迷惑愚癡를 말한다.
따라서 대혜가 말한 것을 이에 따라 분류해 보면 ?辨邪正說?의 가르침 가운데 佛病은 여섯째와 둘째, 法病은 넷째와 일곱째, 衆生病은 첫째와 셋째와 다섯째가 각각 해당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병통을 치유하는 근본적인 자세는 信을 바탕으로 하여 화두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대혜가 당시 선종계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문제점을 妙圓道人에게 설하는 형식을 통하여 드러낸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대혜 46세 때의 ?答曾侍郞?의 편지에서 이미 ?辨邪正說?이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묵조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다는 46세 이전에 벌써 그의 법어 속에서는 충분히 당시의 時流를 향한 대혜의 비판의식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43] 信에 대해서는 이전에 묘명거사의 부인 圓妙道人에게 설한 것을 대혜 자신이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가 있다. 여기에서 대혜가 지칭한 道人이라는 말은 일상생활에서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44]?傳燈錄? 卷6, (大正藏51, p.246下)
45] ?大慧語錄? 卷29, (大正藏47, p.937上)
46] ?法演錄? 卷下, (大正藏47, p.665中-下)
47]?大慧語錄? 卷29, (大正藏47, p.934中-下)
48]?大慧語錄? 卷20, (大正藏47, p.896上-下)
49] ?傳燈錄? 卷15, (大正藏51, p.317下)
Ⅵ 결어
묵조선법에 대한 이와 같은 대혜의 입장은 이미 그 비판속에 필연적으로 그에 상대한 새로운 선법의 도래를 잉태하고 있었다. 그것은 수행과 깨침에 대하여 그것을 卽時代的인 것으로 보려는 대혜의 입장과 딱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거기에서 순수하게 진리에 입각한 超時代的인 것으로 보려는 개인적인 입장 곧 순수수행이라는 진헐의 입장과 깨침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이고 종교적인 입장 곧 대사회적인 중생교화라는 대혜의 입장과는 달랐다. 대혜의 간화선법의 제시는 곧 ?辨邪正說?을 통하여 이전의 無事禪의 오류에 빠져있던 선종계에 대한 새로운 대안의 제시와 함께 묵조선법의 초시대적인 깨침만의 추구에 대한 개혁의 표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 사회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려는 인간으로서 사대부계층을 움직이는 힘을 지니기 위해서는 즉금의 현실재에 집중적인 대결을 겨누는 대혜와 같은 행동방식이야말로 고뇌하는 지식인들의 가슴에 부응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다름아닌 대혜 간화선이 출현한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간화선에서 화두를 드는 이유가 散亂心과 ?沈을 동시에 제거하려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散亂心이 일상의 평상심을 악성적인 無事禪으로 오해하는 것과 더불어 선종 일반계에서 행해지고 있던 佛病과 法病과 衆生病 등으로 당말기부터 내려온 종적인 원인이었다면, ?沈은 당시에 ?照禪法의 부정적인 폐해에 빠져 있던 횡적인 원인이라 할 것이다.
The formations come into being of Ganhwa-Seon(看話禪)
Kim, Ho-Gui
/ The Buddhist Research Institute, Dongguk Univ.
The zen-school of Tang(唐) dynasty was the essence of China zen buddhism. But, in Song(宋) dynasty, the zen action and zen thought went off their color. So, gradually vicious practices and side effects appeared in many aspect.
The Ganhwa-Seon(看話禪) was a practice of zen-buddhism. Especially, Ganhwa-Seon emphasis so called Hwadu(話頭). That is, Ganhwa(看話) means have a look at the Hwadu. This Ganhwa-Seon come into being in Song-dynasty of Chinese by Daehye-Jonggo(大慧宗? : 1089-1163). Here we can ratiocinate some reasons, namely, the formations come into being of Ganhwa-Seon.
Firstly, We can examined that Daehye-Jonggo have the critical attitude for the thought of Silent-Penetration(?照) by Jinhul-Chungryo(眞歇淸了). At that times, a group of the thought of Silent-Penetration lapsed into a state of coma. In many ways, this was a target of the critical attitude by Daehye-Jonggo, so called, a fancy, a foolish imaginings, a stupefaction, a sleeping sickness, a delusion, and the borderland between sleeping and waking, etc.
Secondly, the attitude of a peace-at-any-price principle about all seon-practice. The ways of prudentialism was originated from the closing years of Tang-dynasty. The secondly effect on seon-buddhism were preval!ent every seon-masters at the time of the early days in Song-dynasty.
In this state of affairs, Daehye-Jonggo had the critical attitude for the thought of Silent-Penetration and the ways of prudentialism. So, he standed by his many opinions in his "The Discrimination between right and wrong on Seon-practice(辨邪正說)". At that time, Daehye-Jonggo(大慧宗? 1089-1163) set up against that problem and that followers. As a part of that preventive measure, he preached sermons for not only Buddhist priests but also high officials that The Discrimination between right and wrong on seon-practice.
Here we can abstract his taught for them in eight ways.
First, discriminate the expedients.
Second, Alert absence of expedients.
Third, Do not ignore of enlightenments.
Fourth, Do not depend on letters and notions.
Fifth, only adhere The Muja-Hwagu(無字話頭) instead of divisionism.
Sixth, Do not consider at own discretion.
Seventh, Seek after for seon masters.
Eighth, Bear in mind the faiths.
These eight ways were as it used at that times, and are as it useful for modern seon practice and buddhist priests. Here we can examined some reasons about the formation come into being of Ganhwa-Seon(看話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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