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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갈(白酒) / 타패주(?牌酒) .쓰촨의 역사와 문화

경호... 2012. 12. 2. 23:38

중국을 보는 또 하나의 창(窓) - 배갈(白酒)

 

쓰촨의 역사와 문화를 담다

 

 

 

 

- 타패주(오른쪽)와 타패주 본사 건물

 

<일러두기>

? 현대 중국의 인명 및 지명, 중국의 고유명사는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했다. 단,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고유명사는 한자 독음대로 표기하였다.

<예> 毛澤洞 마오쩌둥 西安 시안 / 長江 장강 杏花村 행화촌

? 술 이름의 경우에도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해야 하나 우리에게 익숙한 술에 한해서만 그렇게 했다. 여타의 술은 발음이 어렵거나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한자 독음으로 표기했다. <예> 茅台酒 마오타이주 五粮液 우량예 / 黃鶴樓酒 황학루주 劍南春 검남춘

? 신 중국 수립(1949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인명 및 지명은 한자 독음대로 표기했다. <예> 李白 이백 杜甫 두보 南京 남경

 

 

 

- 타패주 양조 작업(왼쪽)과 타패주의 발효지

 

 

중국의 ‘국가 명주’ 배갈 중에 ‘타패주(?牌酒, 퉈파이저우)’라는 것이 있다.

포구(浦口)를 뜻하는 한자 ‘타(?)’는 특히 쓰촨(四川)에서 지명에 많이 쓰이고 있다. 쓰촨의 성도(省都) 청두(成都) 시내를 거쳐 장강으로 흘러드는 강의 이름도 ‘퉈장(江)이다. 따라서 웬만한 중국인들은 ‘?’자만 봐도 쓰촨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지난해 말, 중국 허난성(河南省)의 고도(古都) 카이펑(開封)의 한 대학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일정을 마치고 학교 관계자들과 저녁 회식을 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식탁에는 타패주가 여러 병 올라 와 있어 내심 놀랍고 반가웠다. 타패주가 국가 명주의 반열에 들긴 하지만 아직 쓰촨성 밖으로 시장을 넓히지 못하고 있는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이 술을 알아주면 훨씬 환대하는 중국인들의 관례를 아는 터라 아무튼 그날 나는 타패주를 반기며 제법 아는 척을 했고 그들은 그들대로 기분이 좋아 금세 분위기가 고조됐다.

 

타패주 술 회사는 쓰촨의 사홍현(射洪縣) 류수퉈(柳樹) 지역에 있으며 회사에서는 이곳의 이름난 우물 퉈촨(?泉)의 물로 술을 빚는다. 지명에서 술 이름이 유래됐음에도 회사에서는 ‘?’ 글자 하나에도 거의 우주적인 의미를 보탠다. 즉 ‘?’는 ‘장강의 근원(長江之源)’이며 ‘세상의 인재와 물산이 모이고(集吸納)’ ‘하늘과 땅이 호응하는(天呼地應)’ 곳이란 것이다. 사홍현은 청두에서 동북쪽으로 3시간 버스길이다.

 

천혜의 자연에서 빚어지는 타패주

 

사홍은 당대(唐代)의 저명한 문장가인 진자앙(陳子?, 659~700년)의 고향이다. 산천이 수려하고 기후가 온화하며 물산이 풍부한 데다 일찍이 좋은 술을 빚었기에 명주의 고향이라고 했다. 당대에 이미 이곳 술 사홍춘주(射洪春酒)는 맑고 깨끗함으로 정평이 났으며 이는 송대(宋代)에도 이어졌다.

명대(明代)에 생산된 ‘사주(射酒)’는 깨끗함과 향기로 명성이 높았다. 가정(1522~1566년) 연간에 사홍 사람 사동산(射東山)이 산동 지방의 양조법을 배워와 전통의 춘주 양조법에 섞어 보았더니 그 맛과 향이 한결 빼어났다. 이것이 사홍춘주의 전통을 계승한 ‘사주’이다.

 

청(淸) 광서 연간(1875~1908년),읍 사람 이명방(李明方)이 성 남쪽 유수타에 작은 술집 하나를 열고 이름을 금태상(金泰祥)이라고 했다. 집 뒤편에 양조장을 만들어 스스로 술을 댔다. 이것이 태안초방(泰安酢坊)의 전신이다. 그 후 그의 아들 이길안(李吉安)이 가업을 계승했는데 그는 자신이 사홍춘주와 사주의 비방을 얻어 술을 만들었다고 했으며 청룡산(龍山) 기슭에서 솟는 타천의 물을 사용해 술을 빚었다.

술맛은 진하며 달았는데 술꾼들은 이를 ‘금태상대곡주’라고 불렀다. 술맛에 매료된 주객들이 문 앞에 북적대면서 술집은 날로 번창해 갔다. 금태상의 이름이 사방에 퍼지면서 술집에는 앉을 자리가 없어졌고 술을 사 가려는 행렬이 문전에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 술은 만들기가 복잡하고 생산량이 한정돼 있어 원하는 사람에게 다 줄 수 없었다. 술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다음날 다시 와서 줄을 섰다. 손님들에게 미안함을 가진 주인은 작은 나무패를 만들어 거기에다 ‘타(?)’자와 함께 순번을 적어 당일 술을 구하지 못한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음날 패를 가지고 오면 순서대로 술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손님들은 이 방법을 크게 환영했고 이로써 타자 패는 금태상의 증표가 됐다. 패가 유통되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술 이름마저 ‘타패곡주’라고 불렀다.

 

1940대년 초 선비 마천구(馬天衢)가 고향에 돌아와 부모를 모시면서 이 술을 마셔보곤 술맛이 별남을 알았다. 또 타자 패를 보곤 감탄해서 말했다.

“타는 장강의 근원! 금태상이 타로써 패를 삼았으니 윤택할 수밖에 없도다. 이 술은 장래 크게 될 게 분명하다.”

 

술집 주인 이길안도 손님들이 부르는 이름을 흔쾌히 받아들여 타패곡주를 정식 명칭으로 사용했으며 마천구의 예언대로 이 술은 사홍에 큰 복을 가져오는 동시에 중국 배갈의 자랑이 됐다.

 

신중국 수립 후 타패곡주는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전통 기술에 현대과학기술이 접목돼 술의 질이 한층 높아졌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타패주는 사홍춘주, 사주가 가지는 맑고 순한 향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지하의 발효 구덩이에서 얻은 짙고 그윽한 향과 깨끗하면서도 오래 끄는 여운의 향을 다 갖추었다.

 

지난 1989년 열린 제5회 전국주류평가대회에서 타패 54도와 38도 두 술이 영예의 금장을 받아 ‘중국 명주’의 반열에 올랐다. 오늘날 타패 술을 생산하는 타패곡주주식회사는 1951년 12월 태안초방을 임대해 술 생산을 시작했다. 2003년 현재 회사 직원은 5000여명이며 총자산은 20억위안이다. 자회사가 24개이며 주력산업인 술 이외에도 기계, 전자, 제약, 운송, 건자재, 포장·인쇄 등의 분야까지 확장해 그룹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이 회사는 사홍현 재정 수입의 50% 이상을 감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縣) 중심지에서 택시로 20여분이면 도착하는 술 회사의 정문. 도시 공원과 다를 바 없다는 소문 그대로 회사는 나무가 우거진 드넓은 부지에 건물들을 균형 있게 배치시켜 놓고 있다. 산시성의 분주(汾酒) 회사처럼 타패 역시 부지의 많은 부분을 술 문화 관광공간으로 꾸며 소비자에게 돌려주고 있는 셈이다.

 

회사 구역은 크게 사무지역, 생산지역, 거주지역으로 구분되는데 지역과 지역 사이에는 버드나무, 복숭아나무, 은행나무 등 경제 수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수림은 회사원과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는 동시에 미생물의 자연스러운 집합과 번식에도 기여해 술 제조에 도움을 준다. 비옥한 토양과 온화하고 습기가 많은 날씨도 천부적인 환경을 만들어준다. 시원스럽게 뚫린 구역 내 도로들이 회사의 곳곳을 연결하며 아열대 식물들이 자라는 풀밭이 보는 이의 눈을 상쾌하게 한다. 밤중에는 회사의 슬로건을 새긴 대형 네온사인이 휘황하게 돈다. 회사 자체가 현대의 ‘주성(酒城)’이라고 자랑하는 홍보담당 직원의 말도 과장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회사가 위치한 류수퉈는 현 남쪽에 있다. 관광지로 유명한 저우짜이커우(九寨口)에서 발원한 푸강(?江)의 물이 북쪽에서 흘러들어 사홍현 24개 마을을 통과한 뒤 이곳 류수퉈에서 드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한다. 이 들판은 동쪽으로 푸강과 칭롱산을 마주하는데 산은 마치 강가에 누운 한 마리의 용과 같다. 붉은 수수가 익어갈 때면 온 들에 불꽃이 이는 듯하다. 1986년 타패 회사에서는 칭롱산 자락의 부강 가에서 하루 5000t의 질 좋은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우물을 찾았다.

 

 

 

 

- 진화산 가는 길

 

대시인 진자앙과 두보를 앞세운 마케팅

 

타패의 브랜드 선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역사 인물이 진자앙과 두보다. 진자앙은 이곳 사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두보는 직접 이곳을 여행하면서 자신의 시에 사홍춘주를 명기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연관성만 따진다면 진자앙이 사홍과 더 긴밀하지만 지명도에서 두보를 따르지 못하는 관계로 두 사람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타패 술을 선전하고 있는 셈이다.

 

사홍을 찾는 외지인은 한 번쯤 반드시 찾는다는 진화산(金華山)은 현 북쪽 푸강 가에 있다. 당대의 대시인 진자앙이 공부했다는 이곳은 사홍문화의 한 상징이 된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진자앙은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컸다. 당 고종 4년(659년)에 태어난 그는 21세에 장안으로 갔으며 682년 진사가 됐다. 여 황제 무측천(武天)이 그의 출중함을 알아 벼슬을 내렸고 사람들이 그의 시문을 베껴가려고 서로 싸웠다. 돌궐이 쳐들어 왔을 때 그는 의연히 붓을 던지고 전장에 나가 승리한 후 장안으로 돌아왔다. 우습유(右拾遺)에 발탁됐던 그는 거란 토벌에 나섰다가 장수의 미움을 받고 강등됐다. 비분강개한 그가 유주대(幽州台; 북경에 있었다)에 올라 하늘을 보며 탄식했는데 이것이 천고의 절창이 됐다.

 

 

앞을 봐도 옛 사람은 보이지 않고 (前不見古人)

뒤를 돌아봐도 오는 이를 보지 못 하네 (後不見來者)

천지의 아득함을 생각하며 (念天地之悠悠)

홀로 창연히 눈물 흘린다. (獨愴然而涕下)

 

 

진자앙은 서기 698년 아버지가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머잖아 사홍 현령의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서기 700년 울분으로 죽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뒷날, 이백은 진자앙과 남조시대의 시인 포조(飽照) 두 사람을 가리켜 기린과 봉황과 같은 존재라고 했으며 두보는 그를 일월처럼 빛나는 성현이라고 칭송하였다.

 

당 만력 6년(771년) 금화산에 진자앙을 기리는 비석을 건립한 이래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그를 흠모하는 이들이 정자를 수리하고 조각상을 세웠다. 현재의 독서대 주변에는 고목이 빽빽이 솟아 있으며 고풍스러운 담장이 주위를 두르고 있다. 안으로 들면 ‘고독서대(古讀書臺)’란 네 글자가 적힌 정문이 있고 길을 따라가면 감우청(感遇廳)을 만난다. 건물 안에는 청년 진자앙의 모습을 새긴 백옥 전신상이 있고 그 뒷면 벽에는 대표작 ‘감우시(感遇詩)’ 38수가 새겨져 있다.

 

타패 술이 두보를 앞세우는 까닭은 시 ‘야망(野望)’에 직접 사홍춘주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사홍춘주를 원류로 삼는 타패로서는 이보다 고맙고 귀한 기록이 없다. 두보는 762년 겨울 사홍에 왔다. 선배 시인 진자앙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두보는 쉰 한 살. 사홍을 찾았을 때는 진자앙이 세상을 떠난 지 62년이었다. 두보는 평소 진자앙에 대한 존경심이 컸을 뿐 아니라 그의 불행한 신세에 대한 동정도 있었다. 사홍에 도착한 두보는 금화산을 둘러보고 무동산 아래에 있는 그의 옛 집도 구경했다. 시 ‘야망(野望)’도 이쯤에서 읊어졌다.

 

 

사홍현의 춘주는 이 추운 날에도 여전히 푸른데

(射洪春酒寒仍綠)

먼 데 보며 마음 아파하면서도 술 한 방울 보낼 데가 없구나.

(極目傷神誰爲携)

 

 

시인은 적막한 사홍의 겨울 풍경에 고통스러운 자신을 대입시킨다. 사홍춘주와 함께 표현된 ‘한잉녹(寒仍?)’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 일반적으로 겨울에 술을 담아 봄이 되면 완성되는 술을 춘주라고 하는데 ‘寒仍?’은 당시의 춘주가 청록색을 띠었다는 전제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추위 속에도 여전히 푸르다는 뜻으로 새긴다. 아무튼 대시인 두보가 한 번 시로 읊으면서 춘주가 사홍의 대명사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타패 술은 아직 최고급 배갈의 반열에 들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타패의 광고 전략부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근래 타패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카피는 ‘유세월구 적적타패정(悠歲月久 滴滴?牌情)’이다.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오랜 세월 변함없이 뚝뚝 묻어나는 타패 술의 정’쯤 될까. 이런 음풍농월 식으로는 되레 제품의 품위를 떨어뜨려 고급화 지향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가치 매김에는 공리적인 심리가 많이 작용한다. 예컨대 술의 경우에도 이 술이 내게 얼마나 이로운 것인가를 따져 선택하는 경향이 많다. 실제로 소비자의 입맛이라는 것도 이런 계산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술의 광고에 있어서도 계산의 핵심을 겨냥해야 한다는 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2006년부터 타패는 제품 브랜드의 개선과 조정에 발벗고 나섰다. 아울러 경영 주체의 다원화도 꾀했다. 모두 자사 제품의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취해진 조치인데 그 효과는 아직 미지수다. 문제는 국외자가 보더라도 모품(母品)의 퀄리티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우량예, 수정방처럼 고급화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서봉주, 고정공주처럼 대중을 겨냥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이상 그 브랜드가 소비자의 뇌리에 각인되기 어렵게 마련이다. 선택과 집중에도 문제가 있는 성싶다. 타패가 전국 시장을 겨냥한다고 말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청두로 대표되는 쓰촨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차라리 청두 하나를 차지하겠다는 전략을 펴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지난 2007년 6월부터 회사에서는 담아타패(淡雅?牌) 시리즈의 제품에 힘을 쏟고 있다. 40도 미만의 도수 낮은 술로 승부수를 띄워보겠다는 전략이다.

 

 

 

(왼쪽부터)

사홍 진화산 / 진자앙의 시를 새겨놓은 진화산 독서대 / 진자앙 독서대 앞의 기사비

 

 

최학 소설가·우송대 교수

 

필자 최학 교수는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고,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이 당선되면서 큰 주목을 받은 중견 소설가다. 대표작으로 <서북풍>,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이 있으며,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니하오 난징> 등 중국 관련 저서도 있다. 현재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로 많은 중국인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중 양국간 교류에 일조하고 있다.

 

 

/ 이코노미플러스 

 

 

 

 

 

 

 

파촉(巴蜀) 문화의 진수를 담은 술, 타패주(?牌酒)

 

 

 

 

 

 

 

 

파촉(巴蜀) 문화의 진수를 담은 술

타패주(?牌酒, 타파이 주)

 

- 진자앙(陳子昻)을 키운 사홍(射洪)의 산수

 

 

술 사려는 이들의 순서를 위해 패(牌)를 나눠 주다.

 

‘?’는 강 이름 ‘타’자이다. 그러나 정작 ‘타패(?牌)’ 술 회사가 있는 쓰촨의 사홍현(射洪縣)을 흐르는 강은 타강이 아니고 부강(?江, 푸쟝)이다. 이 강은 관광지로 유명한 구채구(九寨口) 부근에서 발원하여 미옌양(綿陽), 사홍 등지를 거쳐 충칭(重慶)에 가서 장강(長江)으로 흘러든다. 본래의 타강은 청두(成都) 시내를 거쳐 나와 루저우(瀘州)까지 흐른 뒤 장강으로 든다. 이렇듯 타강이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를 브랜드(牌)로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홍현에는 유수타(柳樹?)라는 지역이 있고 이곳에 타천(?泉)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이 물로 술을 빚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패 회사에서는 ‘?’ 글자 하나도 거의 우주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즉 ‘?’는 ‘장강의 근원(長江之源)’이며 ‘세상의 인재와 물산이 모이고(?集吸納)’ ‘하늘과 땅이 호응하는(天呼地應)’ 곳이란 것이다. 사홍현은 청두에서 동북쪽으로 3시간 버스길이다.

 

사홍은 당대(唐代)의 저명한 문장가인 진자앙(陳子?. 659-700년)의 고향이다. 산천이 수려하고 기후가 온화하며 물산이 풍부한데다 일찍이 좋은 술을 빚었기에 명주의 고향이라고 했다. 당대에 이미 이 지역의 술 사홍춘주(射洪春酒)는 맑고 깨끗함으로 이름났으며 이는 송대(宋代)에도 이어졌다.

 

명대(明代)에 이곳 사람들은 ‘사주(射酒)’를 빚었는데 깨끗함과 향기로 명성이 높았다. 명 가정(嘉靖. 1522-1566년) 연간에 사홍 사람 사동산(射東山)이 역주법(易酒法)을 배워 이를 전통의 춘주 양조법에 섞어 보았더니 그 맛과 향이 한결 빼어났다. 이것이 사홍춘주의 전통을 계승한 ‘사주’이다. 청 건륭(乾隆. 1736-1795년) 연간 사홍에는 1백여 집의 양조장이 있었다. 청대의 사홍춘미주(射洪春美酒)는 ‘사주’를 칭찬하는 호칭이었다.

 

청(淸) 광서(光?) 연간(1875-1908년),읍 사람 이명방(李明方)이 성 남쪽 유수타에서 작은 술집 하나를 열고 이름을 금태상(金泰祥)이라고 했다. 집 뒤편에 양조장을 만들어 스스로 술을 댔다. 이것이 태안초방(泰安酢坊)의 전신이다. 그후 그의 아들 이길안(李吉安)이 가업을 계승하였는데 그는 자신이 사홍춘주와 사주의 비방을 얻어 술을 만들었다고 했으며 청룡산(?龍山) 기슭에서 솟는 타천(?泉)의 물을 사용해 술을 빚었다. 술맛은 진하며 달았는데 술꾼들은 이를 금태상대곡주(金泰祥大曲酒)라고 불렀다. 술맛에 매료된 주객들이 문 앞에 북적대면서 술집은 날로 돈을 벌었다.

 

 

 

<사홍현을 거쳐 흐르는 부강, 이백의 고향 장요가 이곳에서 멀지 않다.>

 

 

금태상의 이름이 사방에 퍼지면서 술집에는 앉을 자리가 없어졌고 술을 사 가려는 행렬이 문전에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 술은 만들기가 복잡하고 생산량이 한정돼 있어서 원하는 사람에게 다 줄 수 없었다. 술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다음 날 다시 와서 줄을 섰다. 이런 손님들에게 미안함을 가진 주인은 작은 나무패를 만들어 거기다 타(?)자와 함께 순번을 적어 당일 술을 구하지 못한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음날 패를 가지고 오면 순서대로 술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손님들은 이 방법을 크게 환영했고 이로써 타자 패는 금태상의 증표가 되었다. 패가 유통되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술 이름마저 ‘타패곡주(?牌曲酒)’라고 불렀다.

 

1940대년 초 선비 마천구(馬天衢)가 고향에 돌아와 부모를 모시면서 이 술을 마셔보곤 술맛이 별남을 알았다. 또 타자 패를 보곤 감탄해서 말했다. ‘타는 장강의 근원! 금태상이 타로써 패를 삼았으니 윤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천지의 뜻. 이 술은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게 분명하다.(?乃大江之正源也! 金泰祥以?爲牌 有潤澤天地之意! 此酒將來必成大器)’. 술집 주인 이길안도 손님들이 부르는 이름을 흔쾌히 받아들여 타패곡주를 정식 명칭으로 사용했으며 마천구의 예언대로 이는 사홍에 큰 복을 가져오는 동시에 중국 배갈의 한 자랑이 되었다.

 

신 중국 수립 후 타패곡주는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전통 기술의 바탕 위에 현대과학기술이 접목되어 술의 질이 한층 높아졌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타패주는 사홍춘주,사주가 가지는 맑고 순한 향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지하의 발효 구덩이에서 얻은 짙고 그윽한 향과 깨끗하면서도 오래 끄는 여운의 향을 다 갖추었다.

 

1989년에 열린 제5회 전국주류평가대회에서 타패 54도와 38도 두 술이 영예의 금장을 받아 ‘중국 명주’의 반열에 올랐다. ‘빼어난 술이 오늘처럼 사홍에서 나오니 진자앙의 옛 고향에 타패 향이 넘치네. (上品如今出射洪,子?故里?牌香)’란 찬사도 이때부터 생겼다. 오늘날 타패 술을 생산하는 타패곡주주식회사(?牌曲酒股?有限公司)는 1951년 12월 이씨의 태안초방을 임대하여 술 생산을 시작했다.

 

2000년 현재 회사의 직원은 5천여 명이며 총자산은 20억 위안이다. 자회사가 24개며 주력산업인 술 이외에도 기계, 전자, 제약, 운송, 건자재, 포장인쇄 등의 분야까지 확장하여 그룹으로 발전했다. 2002년 현재 배갈의 총생산량은 14만7천 톤에 달했으며 1억 위안의 영업수입을 실현했다. 사홍현 재정 수입의 54%를 술 회사가부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 중심지에서 택시로 20여 분이면 도착하는 술 회사의 정문. 도시 공원과 다를 바 없다는 소문 그대로 회사는 나무가 우거진 드넓은 부지에 건물들을 균형 있게 배치시켜 놓고 있다. 행화촌의 분주 회사처럼 타패 역시 부지의 많은 부분을 술 문화 관광공간으로 꾸며 소비자에게 돌려주고 있는 셈이다.

 

회사 구역은 크게 사무지역, 생산지역, 거주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지역과 지역 사이에는 버드나무, 복숭아나무, 녹나무(楠木)、은행나무 등 경제 수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수림은 회사원과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면서 아울러 미생물의 자연스러운 집합과 번식에도 기여하여 술 제조에도 도움이 된다. 비옥한 토양과 온화하고 습기가 많은 날씨도 술 생산에 천부적인 환경을 만들어준다. 시원스럽게 뚫린 구역 내 도로들이 회사의 곳곳을 연결하며 아열대 식물들이 자라는 풀밭이 보는 이의 눈을 상쾌하게 한다. 대형 건물의 옥상도 화원으로 꾸며져 있다. 최근에 세워진 신세기 화원이며 전원 별장, 실험소학교 등도 이들 녹지에 있다. 밤중에는 회사의 슬로건을 새긴 대형 네온사인이 휘황하게 돈다. 회사 자체가 현대의 ‘주성(酒城)’이라고 자랑하는 홍보담당 직원의 말도 과장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타패 양조회사 전경>

 

 

‘샘물 찾기’의 타패 전설

 

타천은 유수타에서 솟아난다. 유수타는 현 남쪽에 있다. 북쪽에서 흘러드는 부강의 물은 사홍현 24개 마을을 통과한 뒤 이곳 유수타에서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한다. 이 들판은 동쪽으로 부강과 청룡산을 마주하는데 산은 마치 강가에 누운 한 마리의 용과 같다. 평야 뒤편에는 용지산(龍池山)이 있으며 붉은 수수가 익어갈 때면 온 들에 불꽃이 이는 것과 같다.

 

소문난 샘이 으레 그렇듯이 유수타의 타천에도 아름다운 전설이 있다. 먼 옛날 이곳에 타랑(??)이라는 한 똑똑한 총각이 있었다. 부지런한 그는 건너 마을에 사는 유씨 처녀를 사랑했다. 처녀의 아버지는 대대로 술을 만드는 이였는데 가난한 타랑에게 딸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남녀의 사랑은 부모도 막을 수 없는 법, 하는 수 없이 처녀의 아버지는 타랑에게 조건을 하나 걸었다. 네가 나의 양조업을 계승하려면 먼저 맑은 샘부터 찾아내야 한다. 좋은 샘을 얻지 못하면 두 번 다시 내 딸을 만나지 못하리라... 그날부터 타랑은 괭이를 들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땅을 팠다. 아홉 날 아홉 밤 동안 99곳을 팠으며 999개의 괭이를 깨뜨렸고 999개의 괭이자루를 분질렀다.

 

옥황상제가 그의 노력과 인내에 감동했다. 상제는 부강의 용왕에게 그를 도와주라고 명했으며 용왕은 청룡산과 용지산이 만나는 곳에 맑고 단 샘물을 뿜어 올렸다. 타랑이 이 물로 술을 만들었지만 술은 향기도 맛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피곤에 지쳐 잠에 빠져 들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그를 용궁으로 데려갔다. 용왕이 그를 위해 잔치를 열었고 물고기, 새우 병사들이 차례로 와서 예를 올렸다. 노인이 호리병의 술을 타랑에게 주었는데 타랑은 좋은 술맛에 놀라 거푸 감탄했다. 노인은 두 동이의 선주(仙酒)를 그에게 선물했다. 잠을 깼을 때 모든 것이 사라졌지만 술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타랑은 그 술을 자신이 판 샘에다 쏟았는데 이내 샘에서 향기로운 술이 솟아났다. 유씨 처녀와 결혼한 후에도 타랑은 정성으로 술을 빚었으며 좋은 술의 이름이 세상 널리 퍼졌다. 뒷사람들은 그때 타랑이 팠던 우물을 타천이라고 하였으며 그가 만든 술을 사홍춘주라고 하였다.

 

같은 쓰촨성의 명주 낭주(郎酒)에도 이와 매우 흡사한 전설이 있다.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유사성을 가지지만 굳이 어느 쪽이 앞이고 뒤인지는 따질 일이 아닌 듯싶다. 형식면만 보더라도 양쪽의 전설 모두 ‘그 옛날 옛적’부터 전해져 온 것은 아닌 듯싶기 때문이다.

 

1986년 타패 회사에서는 청룡산과 용지산 자락이 서로 만나는 부강 가에서 하루 5천 톤의 질 좋은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우물을 찾았다. 미네랄이 풍부한 이 물은 위생방역부의 검사 결과에서도 국가 표준에 적합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화산으로 들어가는 길>

 

 

진자앙, 유주대(幽州臺)에 올라 천고의 절창을 부르다.

 

타패의 브랜드 선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역사 인물이 진자앙과 두보다. 진자앙은 이곳 사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두보는 직접 이곳을 여행하면서 시에다 사홍춘주를 명기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연관성만 따진다면 진자앙이 사홍과 더 긴밀하지만 지명도에서 두보를 따르지 못하는 관계로 두 사람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타패 술을 선전하고 있는 셈이다.

 

사홍을 찾는 외지인은 한 번쯤 반드시 찾는다는 금화산(金華山)은 현 북쪽 부강 가에 있다. 당대의 시인 진자앙이 공부했다는 이곳은 사홍문화의 한 상징이 된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진자앙은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컸다고 전한다. 그전까지 책을 알지 못했는데 18, 19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금화산 향교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자(字)가 백옥(伯玉)이며 당 고종 4년(659년)에 태어났다. 집이 무동산(武東山) 기슭에 있어서 금화산과 부강을 바라 볼 수 있었다. 향교에 든 후로는 가족들도 만나지 않은 채 독서에만 매달려 수년 사이에 백가(百家)를 제 것으로 만들었다.

 

21세에 장안으로 갔으며 682년 진사가 되었다. 여 황제 무측천(武?天)이 그의 출중함을 알아 벼슬을 내렸고 사람들이 그의 시문을 베껴가려고 서로 싸웠다. 돌궐이 쳐들어 왔을 때 그는 의연히 붓을 던지고 교지지(喬知之)를 따라 전장에 나섰으며 이겨서 장안으로 돌아왔다. 우습유(右拾遺)에 발탁됐던 그는 696년 거란 토벌에 나섰다가 장수의 미움을 받고 강등되었다. 비분강개한 그가 유주대(幽州台. 북경에 있었다.)에 올라 하늘을 보며 탄식하였는데 이것이 천고의 절창(絶唱)이 되었다.

 

 

앞을 봐도 옛 사람은 보이지 않고 (前不見古人)

뒤를 돌아봐도 오는 이를 보지 못 하네 (後不見來者)

천지의 아득함을 생각하며 (念天地之悠悠)

홀로 창연히 눈물 흘린다. (獨愴然而涕下)

 

 

진자앙은 698년 아버지가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15년의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머잖아 사홍 현령의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서기 700년 울분으로 죽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진자앙은 새로운 문풍(文風) 운동을 펼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제(齊), 양(梁) 시대의 시가들이 숭상했던 형식주의 문풍을 비난하였다. ‘어여쁨만 택하다 보니 시의 본뜻이 없어진다. (采麗竟繁 興寄都絶 )’든가 ‘한없이 늘어지고 맥 빠져서 옹골참을 얻지 못한다. (???靡 風雅不作)’면서 당시의 폐단을 지적한 것이 그것이다. 그가 희망한 것은 ‘한위시대의 기개(漢魏風骨)’ ‘올바른 소리(正始之音)’였으며 ‘기개는 단정하고 점잖으며(骨氣端詳) 소리는 물 같고 바람 같아야 하며(音情?挫) 빛나는 재주는 세련돼 있으며(光英朗鍊) 금석에 새긴 듯한 음성이 있는(有金石聲)’ 시가의 출현이었다. 이는 내용과 형식이 통일된 시가를 말하는 것으로 그의 시 ‘감우시(感遇詩)’ ‘등유주대가(登幽州台歌)’ 등이 이러한 주장을 실현해 보이는 것이 된다.

 

이백은 진자앙과 남조시대의 시인 포조(?照. 약 415-470년) 두 사람을 가리켜 보기 드문 기린과 봉황과 같은 존재라고 했으며 두보는 진자앙을 일월처럼 빛나는 성현이라며 ‘진습유고택(陳拾遺古宅)’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재주가 있어 ‘이소(離騷)’와 ‘시경(詩經)’의 경지를 이으니 (有才繼騷雅)

제아무리 빼어난 시인도 그와 비견할 수 없네. (哲匠不比肩)

공은 양웅(揚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 뒤에 태어났으나 (公生揚馬後)

이름이 일월처럼 드리워지네. (名輿日月懸)

 

 

고문(古文) 운동에 앞장섰던 한유(韓愈) 또한 ‘천사(薦士)’란 시에서 ‘나라에 문장이 성했는데 (國朝文章盛)/ 진자앙이 먼저 시작하였고 (子?始高蹈)/ 이백과 두보가 발흥시켰다. (勃興得李杜)’면서 그를 높이 쳐들었으며 백거이(白居易)는 진자앙과 두보 두 사람을 한몫 칭찬하길 ‘두보와 진자앙, 재주 있는 이름이 천하를 묶는다.(杜甫陳子? 才名括天下)’고 하였다.

 

 

 

<진자앙 독서대>

 

 

당 만력(萬曆) 6년 (771년) 동천(潼川)절도사 이숙명(李淑明)이 금화산에다 진자앙을 기리는 비석을 건립한 이래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그를 흠모하는 이들이 정자를 수리하고 조각상을 세웠다. 진공학당(陳公學堂)으로 불리던 곳도 ‘독서대(讀書臺)’로 고쳤다. 현재의 독서대 주변에는 고목이 빽빽이 솟아 있으며 고풍스런 담장이 주위를 두르고 있다. 안으로 들면 ‘고독서대(古讀書臺)’ 네 글자가 적힌 정문이 있고 길을 따라가면 감우청(感遇廳)을 만난다. 건물 안에는 청년 진자앙의 모습을 새긴 백옥 전신상이 있고 조상(彫像)의 뒷면 벽에는 그의 대표작 ‘감우시(感遇詩)’ 38수가 새겨져 있다.

 

두보가 진자앙의 고향에서 마신 술

 

타패 술이 두보를 앞세우는 까닭은 시 ‘야망(野望)’에 직접 사홍춘주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사홍춘주를 원류로 삼는 타패로서는 이보다 고맙고 귀한 기록이 없다. 이 시는 금화산의 비석에 새겨졌지만 일찍 훼손되었다. 현대에 와서 타패 회사가 주동이 되어 금화산를 정밀 답사했으며 그 결과 순양각(純陽閣) 앞의 비각들에서 이 시를 찾았으며 탁본을 하여 복원했다. 유명 사학자 판원란(范文瀾)이 다방면으로 고증을 하여 묵적(墨跡)이 과연 시성(詩聖)의 것임을 확인하였다. 두보를 위해서도 진귀한 서각(書刻)이 아닐 수 없었다.

 

두보는 762년 겨울 사홍에 왔다. 가까운 재주(梓州. 지금의 三台. 사홍에서 40여 km)에 머물게 되면서 선배 시인 진자앙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51세의 두보는 이 해 여름까지도 성도(成都)의 초당에서 생애 가장 안일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4월부터 당 현종, 숙종이 차례로 죽고 대종(代宗)이 즉위하는 정세 속에 그의 벗이며 가장 독실한 후원인인 엄무(嚴武. 726-765년)가 조정으로 불려갔다. 엄무는 성도에서도 가장 높은 관직에 있었음으로 물심양면 두보를 도울 수 있었다. 아쉬움을 어쩌지 못한 두보는 장안으로 가는 엄무를 면주(綿州. 지금의 면양)까지 따라와 전송했다. 성도-면주의 거리는 우리의 서울-청주와 비슷하다. 면주에서 엄무와 헤어지고서도 두보는 성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성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살육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는 화를 피하기 위해 면주에서 재주로 거처를 옮겼으며 성도의 가족들도 불러 들였다. 성도에 대한 미련을 버린 그는 벌써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능강(陵江)이 흐르는 낭주(?州. 사홍에서 80여km)로 가서 배를 타고 지금의 충칭으로 내려 간 다음 장강을 타 내려 머나 먼 금릉(남경), 양주로 간다는 계획이었다. 낙양(洛陽) 근처의 고향, 아무리 그곳이 멀다 해도 양주에서 운하를 타고 황하로 들 수만 있다면 돌아가지 못할 곳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그 일 년 뒤 두보가 막상 낭주에 도착했을 때 포기하였다. 엄무가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가 되어 다시 성도에 부임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 해 11월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았던 또 다른 시인 이백이 머나먼 당도(??. 남경 부근)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두보는 모르고 있었다.

 

두보가 사홍을 찾았을 때는 진자앙이 세상 떠난 지 62년이었다. 두보는 평소 진자앙에 대한 존경심이 컸다. 두 사람은 같은 습유(拾?) 벼슬을 지냈다는 이력이 있었으며 진자앙의 불행한 신세에 대한 동정도 컸다. 앞서 면양에 있을 때 두보는 사람을 시켜 자기 대신 진자앙을 추모해 줄 것을 부탁한 일도 있었다. ‘그대가 사홍에 간다니 날 위해 한 번 울어주시게(君行射洪縣 爲我一?然)’라고 읊은 시 ‘재주자사로 부임해 가는 이 사또를 보내며(送梓州李使君之任)’에 그 정황이 잘 나타난다. 그런 그가 직접 사홍에 왔으니 얼마나 감회가 컸겠는가.

 

사홍에 도착한 두보는 금화산에 있는 진자앙의 유적을 둘러보고 무동산 아래에 있는 그의 옛 집도 구경했다. 시 ‘야망(野望)’도 이쯤에서 읊어졌다.

 

 

금화산의 남쪽 자락 부수강의 서쪽 기슭 (金華山南?水西)

겨울바람과 햇살이 점점 스산해지는구나. (仲冬風日始凄凄)

산은 월휴로 이어져 예전의 촉 땅을 휘감고 (山連越?蟠三蜀)

물은 흩어져 파유로 또 오계로 흐르네. (水散巴?下五溪)

외로운 학아, 너는 무슨 일로 춤을 추나 (獨?不知何事舞)

굶주린 새는 뭘 달라는 듯이 사람에게 지저귀네. (飢鳥似欲向人啼)

사홍현의 춘주는 이렇게 추운 날에도 여전히 푸른데 (射洪春酒寒仍綠)

먼 데 보며 마음 아파하면서도 술 한 방울 보낼 데가 없구나. (極目傷神誰爲携)

 

 

시인은 적막한 사홍의 겨울 풍경에 고통스런 자신을 대입시킨다. 사홍춘주를 둘러싼 시의 표현 또한 칭찬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춘주를 좋아한다는 속뜻은 분명 있다. 시에 나오는 월휴(越?)은 지금의 사천 월서현(越西縣)이며 파유(巴?)는 파현(巴顯)과 유주(?州, 충칭)다. 오계(五溪)는 호남 서부에 있다.

 

 

 

<뇌양에 있는 두보의 묘소 입구 안내판>

 

 

두보는 사홍에서 짧은 시간을 보낸 뒤 통천(通泉)으로 떠난다. 곽원진(郭元振. 토번을 무찌른 장수)의 옛집을 둘러보고 설직(薛稷. 화가)의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또 장안에서 만나 알게 된 왕 시어(王侍御)를 만나는 목적도 있었다. 시어는 당시 조정 신하들을 움켜잡을 수 있는 권력자였는데 마침 왕 시어도 통천에 와서 극빈 대접을 받고 있었다. 연이어 화려한 술잔치가 벌어졌는데 두보도 자주 가서 그를 모셨다. 이 때문에 두보가 통천에서 지은 시들 중에는 이와 관련된 것이 많다. 예컨대 ‘통천 동산 야정의 잔치에서 왕 시어를 모시고(陪王侍御宴通泉東山野亭)’와 ‘왕시어를 모시고 동산 꼭대기의 잔치에 참석한 뒤 통천 요 현감과 술을 지니고 강에 배를 띄우다. (陪王侍御同登東山最高頂宴, 姚通泉?携酒泛江)’와 같은 작품들이다. 앞 시의 내용은 이렇다.

 

 

강물은 유유히 동으로 흘러가고 (江水東流去)

맑은 술통에 또 해가 기우네. (?樽日?斜)

걸출한 그대와 잔치를 즐기니 (異方同宴賞)

다른 곳이 서울이겠는가. (何處是京華)

정자는 산수에 기대 있고 (亭景臨山水)

동네의 저녁연기는 나루터 모래밭과 짝이 되네. (村烟對浦沙)

좋은 경치 속에서 마음껏 노래 부르니 (狂歌遇于勝)

취할 수 있는 여기가 곧 내 집이네. (得醉?爲家)

 

 

통천동산야정(通泉東山野亭)의 위치는 지금의 타패 회사 부근이다. 위의 시에서는 직접 사홍춘주의 언급이 없지만 정황을 헤아려 보면 연회에 나온 술이 춘주였으리란 추측은 가능하다.

 

두보에게와 달리 사홍 사람들이 제 고향 출신의 자랑스러운 시인 진자앙에게 가지는 유감(?)이 하나 있다. 진자앙의 그 많은 시 가운데 정작 사홍춘주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없는 데서도 흔적을 찾고 기미라도 느끼려는 것이 진자앙과 고향 술을 사랑하는 사홍 사람들의 심리다. 그래서 진자앙의 시 ‘봄밤에 벗과 이별하며(春夜?友人, 二首)’에서 ‘은촛대의 촛불이 타들어 가는데 금동이의 술이 자리를 빛내네. (銀燭吐?烟 金樽對?筵)’란 구절을 찾아내어 시에서 표현되는 잔치가 집에서 친구들을 위해 연 것이니 응당 고향의 사홍춘주가 사용됐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두보의 시에서 사홍춘주와 함께 표현되는 ‘한잉녹(寒仍?)’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 일반적으로 겨울에 술을 담아 봄이 되어 완성되는 술을 춘주라고 하는데 ‘寒仍?’은 당시의 춘주가 청록색을 띠었다는 전제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추위 속에도 여전히 푸르다는 뜻으로 새긴다. 아무튼 대시인 두보가 한 번 시로 읊으면서 사홍춘주가 사홍의 대명사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타패의 집중과 선택

 

그렇지만 타패 술은 아직 최고급 배갈의 반열에 들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떤 전문가들은 타패의 광고 전략부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근래 타패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카피는 ‘유세월구 적적타패정(悠歲月久 滴滴?牌情)’이다.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오랜 세월 변함없이 뚝뚝 묻어나는 타패 술의 정’쯤 될까. 이런 음풍농월 식으로는 되레 제품의 품위를 떨어뜨려 고급화 지향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가치 매김에는 공리적인 심리가 많이 작용한다. 예컨대 술의 경우에도 이 술이 내게 얼마나 이로운 것인가를 따져 술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은 것이다. 실제로 소비자의 입맛이라는 것도 이런 계산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술의 광고에 있어서도 이러한 계산의 핵심을 겨냥해야 한다는 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2006년부터 타패는 제품 브랜드의 개선과 조정에 발 벗고 나섰다. 아울러 경영 주체의 다원화도 꾀했다. 모두 자사 제품의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취해진 조치인데 그 효과는 아직 미지수다. 문제는 국외자가 보더라도 모품(母品)의 가치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우량예, 수정방처럼 고급화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서봉주, 고정공주처럼 대중을 겨냥하는 것도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이상 그 브랜드가 소비자의 뇌리에 각인되기 어렵게 마련이다. 선택과 집중에도 문제가 있는 성싶다. 타패가 전국 시장을 겨냥한다고 말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청두로 대표되는 쓰촨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차라리 청두 하나를 차지하겠다는 전략을 펴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2007년 6월부터 회사에서는 담아타패(淡雅?牌) 시리즈의 제품에 힘을 쏟고 있다. 40도 미만의 도수 낮은 술로 승부수를 띄워 보겠다는 전략이다.*

 

 

타패주 가격

 

타패삼성특곡주: 45위안 내외

타패대곡주 35도: 60위안 내외

타패주 50도 30년: 400위안 내외

 

 

출처 :

‘배갈, 白酒의 향과 맛을 찾아 (http://blog.naver.com/jegang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