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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장 김일만 / 경기 이천 ‘오부자옹기’

경호... 2012. 11. 29. 02:50

오부자옹기’ 김일만, 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선정

 

천년 도자의 맥을 간직한 도자의 고장이자, 생활 도자의 메카인 여주에 4월 24일부터 5월 9일까지 열리는 여주도자기축제를 앞두고 큰 경사가 났다. ´오부자옹기‘ 김일만 선생(金一萬, 70)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甕器匠) 보유자로 선정된 것.

 

선생은, 지난 2010년 2월 11일 문화재청으로부터 이에 대해 통보를 받고, 한 달 뒤인 3월 16일 보유자 인증서를 교부 받았다.

 

옹기장은 말 그대로 옹기를 만드는 기술 또는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국가는 이러한 전통적 옹기제작기술의 전승을 위해 1990년에 옹기장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했다.

 

 

 

◇ 여주 ´오부자옹기‘ 김일만(金一萬, 70) 선생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甕器匠) 보유자로 선정됐다 ⓒ데일리안 김수영

 

 

 

문화재청에 따르면 선생을 옹기장 보유자로 인증한 것은, 선생이 전통적 옹기 제작 기법과 조형성, 전승 현황 등이 두루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는 등 원활한 전승을 위한 자격을 갖춘 분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광도 영광이지만, 많이 부담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옹기를 만들고 있지만, 무형문화재 보유자로서 더 잘해야겠다, 좋은 옹기를 더 잘 내야겠다는 생각에 밤에 잠도 잘 오지 않아요.”

 

가업인 전통 옹기 제작, 평생을 바쳐

 

김일만 선생의 ‘오부자 옹기’를 찾았을 때, 선생은 마침 방망이로 옹기의 모양새를 만드는 데 한창이었다. 물레 위 점토는 선생의 손길을 따라 애 밴 여자의 배 마냥 완만하면서, 풍성하게 키를 키워갔다.

 

선생의 옹기 제작은 5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가업(家業). 1941년 안동 출생인 선생은 아버지 김운용 옹을 따라 1980년에 지금의 여주 금사면 이포리에 정착해 6대(代)째 전통 옹기를 빚고 있다.

 

김성호(48), 김정호(45), 김창호(42), 김용호(36) 씨 등, 선생의 네 아들 역시 모두 옹기장이로 7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상호인 ‘오부자 옹기’는 이들 오부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야 선대 때부터 배우고 익힌 거라지만…세월이 지남에 따라 우리 전통의 것이라 할 수 있는 대개의 것이 사라지고 있어 내심 이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강요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아이들한테 고맙죠”

 

 

◇ 경기민속자료 제 11호로 지정된 전통옹기가마, 선생은 이 가마로 매년 4차례 옹기를 굽는다

 

 

‘오부자옹기’의 작업은 대개 아침 식사를 끝낸 오전 8시 즈음부터 시작해 해거름 무렵까지 계속된다., 전통 방식을 따라 옹기 제작의 전 과정을 손으로 직접 한다. 그렇게 하루 평균 6말(80㎝정도의 높이) 크기 날옹기(굽기 전 흙으로 빚은 상태) 10개 정도를 빚어낸다.

 

날옹기를 굽는 것은 1년에 4차례, 봄에 두 번, 가을에 두 번이다. 모두 작업장 앞 전통 옹기 가마를 사용한다. 이 전통 가마 또한 2002년 11월 25일 경기민속자료 제 11호로 지정된 명물. 입구에 있는 대포 가마를 포함해 3기의 가마로 이뤄져 있으며, 가장 긴 대포 가마의 경우 길이가 25m에 이른다.

 

“150년에서 200년 정도 됐다지 아마. 아버님 또한 가마가 있어 이곳에 터를 잡으셨던 것 같아요. 이 근처가 예전 이포 나루터거든. 예전 나루가 발달했던 시절에 나루를 이용해 물건을 내고자 근방에 도공들이 자리를 잡았던 거겠죠.”

 

가마에서 구워 나온 옹기 중 온전한 옹기로 인정받아 판매되는 것은 50%정도. 그나마 별도의 매장을 통하지 않고 현장에서만 판매한다. 소비자가 담을 장에 맞는 옹기를 추천하기 위해서다. 유명 백화점 등에서 여러 차례 입점을 요청했음에도, 한사코 고사한 것은 이와 같은 맞춤식 판매를 위해서다.

 

현장 판매만을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작업 현장을 보지 않은 소비자들이 단지 시중가보다 2배 정도 비싼 가격만을 보고 선생의 옹기를 외면하기 때문. 오부자 옹기를 직접 찾아 작업 과정을 본 사람들은 두 말 않고 옹기를 사 간다고 한다.

 

옹기가 많이 팔리는 시기는, 장이나 매실을 담그는 12월말에서 5월까지로 많을 때는 하루에 30명 가까이 ´오부자옹기‘를 찾는다. 하지만 나머지 기간에는 하루에 1~2명 정도가 고작이라고.

 

“만드는 품과 고생에 비해 수익은 많지 않은 편입니다. 그야말로 현상 유지를 하는 정도죠. 전통 옹기를 보전하고 전승하는 차원, 우리 것을 지키고 잇는다는 자부심이 없다면 하기 힘든 일이죠.”

 

전 과정을 손으로 직접, 힘들지만 그래야 좋은 옹기 나와

 

옹기(甕器)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통틀어 부르는 말. 질그릇(土器)은 진흙만으로 반죽해 구운 후 잿물을 입히지 않아 윤기가 나지 않는데 반해 오지그릇(陶器)은 질그릇에 잿물을 입혀 구워 윤이 나고 단단한 게 특징이다. 근대 이후 질그릇 사용이 급격히 줄면서 옹기라면, 통상 오지그릇을 뜻한다.

 

한국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음식물의 저장, 발효 용구로서 이 옹기를 필수적인 생활용기로 사용해왔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와기전(瓦器典)이라 하여 옹기 생산을 담당하는 기관을 두었고, 조선시대에도 서울과 지방에 100여 명의 옹기장을 두었었다.

 

하지만 근대들어 서구문명이 유입되면서 주택 공간과 식기 재료가 변화함에 따라, 옹기 수요도 점차 줄어들게 됐다. 특히 한국전쟁을 전후해 옹기생산에 필수적인 땔나무의 부족과 생산비 절감을 위한 재료의 대체로 전통적인 제작기법으로 만든 옹기는 구경하기 어렵게 되었다.

 

 

◇ 제대로 된 옹기란 들숨과 날숨이 있는, 말 그대로 숨을 쉬는 옹기. 옹기가 들숨과 함께 햇빛을 삼키고, 날숨과 함께 수분을 뱉어내는 가운데 장맛이 무르익는다는 게 선생의 지론이다.

 

 

국가가 옹기장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전통적인 옹기제작기술 전승에 힘쓰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흙을 고르는 일에서부터, 그걸 반죽하고, 두드리고, 패고, 깎고, 비비고, 물레질하고 구워내는 전 과정을 사람 손으로 직접 해야 하니, 제대로 하려면 할수록 더 힘든 일이 바로 옹기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야 제대로 된 옹기가 만들어지니, 참 묘한 이치죠?”

 

옹기를 굽는데 적정 온도는 1200~1230℃ 사이로, 가마에서 소성하고 난 뒤에도 모양과 색깔이 일정하고 표면에 붉은빛을 띤 옹기가 좋다고.

 

선생의 말에 따르면, 제대로 된 옹기란 들숨과 날숨이 있는, 말 그대로 숨을 쉬는 옹기. 옹기가 들숨과 함께 햇빛을 삼키고, 날숨과 함께 수분을 뱉어내는 가운데 장맛이 무르익는다는 게 선생의 지론이다. 그래서 선생은 흙의 반은 익고 반은 익지 않은 듯해야 좋은 옹기라고 말한다.

 

유예된 꿈, 체험시설 갖춘 전통 옹기 작업장

 

‘오부자옹기’를 찾는 손님들은 으레 두가지에 놀란다. 처음 보는 전통 옹기 제작 과정에 놀라고, 그리고 열악한 작업 환경에 놀란다.

 

선생을 비롯한 오부자의 옹기 제작 작업실 규모는 165㎡(50평) 남짓, 그나마 날옹기 건조 공간을 제외하면, 실제 작업 공간은 33㎡(10평)가 채 되지 않는다. 건물 또한 임시로 지은 조립식 건물로, 2001년 본래 있던 작업실이 화재로 사라지면서 임시로 지은 것이라 하지만 작업실이라고 하기에는 옹색하다.

 

“생활에 큰 불편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옹기를 만드는 데는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옹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흙 받는 곳, 건조장, 잿물 입히는 곳, 수분을 빼주는 황토막 등이 있어야하는데 여건 상 그렇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 선생을 비롯한 오부자의 옹기 제작 작업실 규모는 165㎡(50평) 남짓, 그나마 날옹기 건조 공간을 제외하면, 실제 작업 공간은 33㎡(10평)가 채 되지 않을 만큼 작업환경이 옹색하다

 

 

문제는 이 뿐만 아니다. 올 12월이면 길 건너편 집을 비롯해 오부자옹기 작업공간과 생활 터전과 관련한 토지 임대계약이 종료된다. 제대로 된 작업장은커녕 토지 소유자의 생각에 따라 어쩌면 집과 작업실을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

 

“저희야 계속 여기서 작업을 했으면 합니다만 바람대로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전통이 점점 사라지는 마당에, 아이들이 전통 옹기를 체험할 수 있는 체험시설을 갖춘 작업실을 마련하는 게 남은 꿈이라면 꿈이죠.”

 

선생이 모델로 생각하는 곳은 서울 쌍문동에 위치한 옹기민속박물관(www.onggimuseum.org)이다. 1991년 고려민속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옹기민속박물관은 1993년 지금의 옹기민속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해 운영되고 있는 소규모 사립 박물관. 옹기와 관련해 전시와 체험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생산되는 유명 옹기도 구입할 수도 있다고. 지난 2006년 11월 가족과 함께하는 옹기가마탐방 프로그램 일환으로 ‘여주 오부자옹기’를 방문한 적이 있다.

 

선생은 금번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옹기장으로 인증되기 이전인 지난 2000년에 이미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7호 옹기장으로 선정된 옹기의 명인(名人).

 

여주군은 선생의 장인 정신을 기리고, 여주 도자기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매해 여주도자기축제 때마다 별도의 전시관에 선생의 옹기를 다른 경기도무형문화재 분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해 관람객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오부자옹기를 방문 하시는 분들 중에 도자기 축제 때 전시한 옹기를 보시고 직접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축제장에서 옹기를 보시고 그 자리에서 전화 연락 주시는 분들도 많고요. 저로서는 전통 옹기를 많은 분들께 알리고 선보여서 좋습니다”

 

 

 

 

 

선생은 눌변(訥辯)이다 싶을 만큼 말수가 적었다. 선생의 말(言)없는 진중한 손놀림만이 말과 말 사이의 간극을 촘촘히 메울 뿐이었다.

옹기를 만드는 기법은 크게 썰기와 수레질로 나뉜다고 한다. 보통 5년의 이력이면 반죽에서 모양을 뽑는 ‘썰기’는 곧잘 해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형태를 쌓아가는 ‘수레질’은 최소 10년 이상의 세월이 뒷받침돼야 한다. 만드는 사람 머리 속에 있는 옹기의 선과 모양새를 따라 빚는 것이라 그렇다.

흙만 보고도 번듯한 옹기를 떠올릴 수 있는 경지, 아마 그 사람을 명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주군 이포리에 이런 옹기 명장 한 분이 사신다.

 

 

2010.03.25. / 데일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