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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시 / 문정희
나 옷 벗어요 그다음도 벗어요
가고 가고 가는 것들 아름다워서
주고 주고 주는 것들 풍요로워서
돌이킬 수 없어 아득함으로 돌아갈 수 없어 무한함으로
부르르 전율하며 흐르는 강물
나 옷 벗어요 그다음도 벗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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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약속
창밖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풋열매가 붉고 물렁한 살덩이가 되더니 오늘은 야생조의 부리에 송두리째 내주고 있다 아낌없이 흔들리고 아낌없이 내던진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감나무는 나의 시계 감나무는 제자리에서 시시각각 춤추며 시시각각 폐허에 이른다
어차피 완성이란 살아 있는 시계의 자서전이 아니다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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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은 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몸을 뒤집을 때마다 악기처럼 리듬이 태어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암각화를 새기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한 창조인 양 눈이 머는 것이다 바람에 온몸을 부딪치며 쉬지 않고 바위에게 흰 손을 내미는 것이다 할랑이는 지느러미가 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순간마다 착각의 비늘이 돋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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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바다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나뿐인가 그래서 고독은 이리 깊은가
성난 발톱으로 달려드는 절벽 아래 밤바다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바다뿐인가
내 안에서 일어서고 내 안에서 무너지는 천둥의 깊이
해골과 남루와 유랑의 불빛 출렁이는 밤바다를 생포하면 알 수 있을까
지옥보다 외로운 내 안의 내가 보일까
-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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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endständchen", op. 42 (Drei Gesänge) no. 1 2. Johannes Brahms, "In stiller Nacht", WoO. 33 no. 42 3. arr. Friedrich Silcher, "Untreue 배신" 4. Sting and Dominic Miller, "Shape of my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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