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佛敎에關한 글

달마선.의리선(義理禪).일자선(一字禪) / 윤창화

경호... 2012. 11. 13. 02:51

17. 달마선

 

중국 선종 초조 보리달마가 전한 선

마음 편안히 하는 안심법문이 성격

 

보리달마는 남인도 출신으로 처음으로 선을 중국에 전한 인물이다. 그가 전한 선을 달마선이라고 한다. 조사선, 간화선 등도 모두 달마선에서 파생된 것이다.

 

보리달마와 관련된 공안으로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이 있다.

유명한 공안으로 ‘벽암록’ 제1칙에 나온다.

 

양무제가 달마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가장 성스러운 제일(第一)의 진리입니까?”

 

달마가 말했다. “확 드러나 성스러움 같은 것은 없습니다.”

무제가 말했다. “나와 대면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달마가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무제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자, 달마는 마침내 강을 건너 위(魏)로 갔다고 한다. 그 후 달마는 숭산 소림사로 가서 9년 동안 좌선했다. 이것을 ‘면벽(面壁) 9년’이라고 한다.

 

달마의 수행론, 교육방법은 두 가지인데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이다.

‘이입(理入)’이란 이치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경전(교학)에 의해 불법의 요체를 깨닫는 것이고, ‘행입(行入)’이란 실천에 의해 깨닫는 것으로 네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가 보원행(報怨行)인데 인생의 고통은 자신이 과거에 지은 업의 과보이기 때문에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수연행(隨緣行)으로 인생의 고락을 모두 인연에 의한 것으로 보아 담담히 불도를 닦는 것이고,

세 번째 무소구행(無所求行)은 욕망, 욕구, 애착심을 억제하고 일체는 공(空, 인연소생)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탐욕심을 버리는 것,

네 번째는 칭법행(稱法行)으로 법(法, 眞理, 眞性)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입(理入)과 행입(行入) 이것을 합하여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이라고 하는데, 달마의 여러 가지 글 중에서도 가장 진설(眞說)에 가깝다.

 

달마는 또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깥으로는 모든 인연을 끊고 안으로는 치구(馳求)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마음이 장벽처럼 되어야만 도(道)에 들어갈 수 있다(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牆壁, 加以入道).”

 

장벽은 석녀(石女), 목인(木人) 등과 함께 무심(無心)을 뜻한다. 즉 장벽과 같이 무심한 경지가 되어야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달마선의 수행방법, 성격은 안심법문(安心法門)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인데, 이조 혜가(慧可)와의 문답을 보면 달마선의 성격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극심한 심적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던 혜가가 보리달마를 찾아가서 물었다.

“지금 제 마음은 몹시 불안합니다. 이 불안한 마음을 제거해 주소서.”

 

달마가 말했다.

 “네가 말한 그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그러면 편안하게 해 주리라.”

 

혜가는 그 마음을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자

달마는 “벌써 그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느니라.”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달마는 이조 혜가에게 ‘능가경’을 전했다. ‘능가경’은 유심사상과 여래장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경전으로서 초기 선종의 소의경전이었다. 오조 홍인 때까지 존숭되었으나 육조 혜능이 ‘금강경’을 중시한 이후로는 소의경전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이후 달마의 선은 오조 홍인의 뛰어난 두 제자인 대통신수(606~706)와 육조 혜능(636~713)에 의하여 남종선과 북종선으로 갈라졌는데 북종선 계통이 달마선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8. 의리선(義理禪)

 

이성적 사유로 깨달아보고자 하는 선

여래선과 문자선도 이 의리선의 일종

 

‘의리선(義理禪)’이란 공안이나 화두, 선(禪)을 실참을 통하여 온몸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고, 이성적 사유에 의한 사량 분별심, 혹은 지식적으로 접근하여 깨달아보고자 하는 것을 가리킨다.

학문적, 언어 문자적으로 알려고 하는 것, 이치적, 논리적으로 탐구(참구)하려고 하는 것, 또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해석, 설명, 풀이하는 것 역시 의리선에 속한다.

 

의리선(義理禪)이라는 말은 의로(義/意路)와 이로(理路) 두 단어가 합해진 말이다. 의로(義/意路)는 ‘뜻풀이 방법’, 이로(理路)는 ‘뜻풀이 방법’ 혹은 ‘이치적인 방법’이라는 뜻인데, 모두 동의어로, 선을 사량 분별심과 언어 문자로 탐구하고자 하는 것, 깨닫고자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선에서는 ‘의로부도(意路不到)’라고 하여 의리선을 강하게 비판한다.

공안이나 화두, 선의 세계는 언어문자로는 원래 불가능하며(言語道斷), 깨달음의 세계는 말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 편에 있다는 것이다(言詮不及).

 

간화선의 거장 대혜선사(大慧禪師, 1089~1163)는 왕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의로와 이로가 끊어져야만 비로소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만약 곧바로 쉬기를 원한다면 이전까지 공부가 좀 되었던 곳을 일체 놔두고 오리어 모색할 수도 재미도 없던 곳(어려워서 엄두도 못 냈던 곳)에서 다시 한번 생각을 붙여 보십시오.

만일 생각을 붙일 수도 없고, 모색할 수 없다면 그곳이 더욱더 중요처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치의 길(理路)과 뜻의 길(義路)에 심의식(心意識)이 모두 통하지 않는 것이 마치 토목와석(土木瓦石, 무정물, 무심의 경지)과 같게 될 때, 그 때가 (대오에 가까운 것이니) 공(空)에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서장’ 答王敎授)”

 

‘이치의 길(理路)과 뜻의 길(義/意路)에 심의식(心意識)이 모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안이나 화두는 아무리 이치적 또는 생각이나 뜻으로 알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토목와석(土木瓦石, 무정물)처럼 될 때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심의식 즉 사량 분별심이 완전히 정지되어 마치 무정물처럼 될 때, 그 때가 비로소 깨닫게 되는 때이므로, 혹시라도 공망(空亡), 공무(空無) 또는 ‘이게 헛고생만 하고 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대혜보설(大慧普說)’15권에서는 “남양혜충국사(?∼775)와 대주화상(大珠和尙)의 설법에 대하여, 제방에서는 모두 ‘진흙에 빠지고 물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것은 경절(徑截, 곧바로 깨닫는 것)의 가르침이 아닌 의리선을 말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화상께서는 그 진위를 명확히 판결하셔서 대중들의 의혹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대혜는 “두 분의 설법은 매우 자상한 데, 그것은 납자들을 이끌고자 하는 노파심 때문이지 의리선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대혜는 또 무자화두 참구법(즉 無字話頭十種病)에서도 의리선에 대하여 매우 경계하고 있는데, ‘화두를 생각으로 헤아려서 알려고 하지 말라(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언어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말라(不得向語路上作活計)’, ‘경전 등 문자를 끌어다가 고증하려고 하지 말라(不得向文字中引證)’라고 말하고 있다.

 

의리선의 문제점은 공안이나 화두를 정면으로 타파하려고 하기 보다는 지식과, 지능, 언어 문자적으로 분석하여 터득해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리선도 학문적인 공부를 좀 해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여래선, 문자선도 의리선의 일종이다.

 

 

 

19. 일자선(一字禪)

 

한 글자로 선의 심오한 세계 드러낸것

운문종 일으킨 운문선사의 교육 방법

 

한 글자로 선의 핵심과 그 심오한 세계를 드러내는 것, 한 글자로 선의 세계를 표출해 보이는 것을 ‘일자선(一字禪)’이라고 한다. 또 ‘일자관(一字關)’이라고도 하는데, 수행자들의 질문에 ‘무(無)’, ‘할(喝)’, ‘고(顧)’, ‘감(鑑)’, ‘이(?)’ 등과 같이 한 글자로 선의 의미에 대하여 답하는 것을 가리킨다. ‘일자공안’, 또는 ‘일자화두’라고 할 수 있다.

 

일자선은 운문종의 선풍이다.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의 선 지도 및 교육방법으로, 그것을 ‘운문일자관(雲門一字關)’이라고 한다. 운문선사는 ‘간시궐’, ‘일일시호일’ 등 공안으로 유명한데, 어떤 형식인지 ‘벽암록’ 제8칙 ‘취암(翠巖)화상의 눈썹’이라는 공안을 보도록 하겠다.

 

취암화상이 하안거 해제 일에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했다.

“여러분, 나는 하안거 동안 대중들을 위해 많은 설법을 했는데, 잘 보시오! 내 눈썹이 붙어 있는지?”

보복화상은 “도둑놈은 늘 마음이 편치 못한 법이지”라고 했고,

장경화상은 “(눈썹이) 다시 생겨났네!”라고 했고,

운문선사는 “관(關, 관문)”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설두중현은 “천고에 대적할 사람이 없구만. 운문은 관(關)자로 응수했네.”라고 평했다.

 

이후 선원총림에서는 수행승들의 본질적인 질문 즉 ‘무엇이 부처냐’고 물으면 앞과 같이 한 글자로 답하는 일자선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원오극근은 일자선에 대하여 ‘벽암록’ 8칙 평창에서 “운문은 관(關)이라고 했으니 아주 대단하다. 이 경지를 알기가 매우 어렵다. 운문대사는 대부분 일자선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 일자 속에는 세 글귀가 포함되어 있다.”라고 극찬했다.

 

한편, 중국 고사 가운데는 ‘스승이 제자를 잘못 가르치거나 또는 잘못 설법하면 눈썹이 빠진다’는 속담이 있는데, “하안거 동안 대중들을 위해서 설법을 많이 했는데, 내 눈썹이 붙어 있는지, 잘 보라”는 말은, 선의 세계는 불립문자, 언어도단임에도 불구하고 언설로 표현했으므로 그 자체가 벌써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눈썹은 당연히 빠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눈썹이 빠지는 것도 불사하고 하안거 동안 여러분들을 위하여 법을 설했는데,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느냐는 뜻이다. 오늘이 하안거를 마치는 해제 일이므로 각자 깊이 한번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또 ‘임제록’에는 ‘나의 얼굴을 잘 보게! 눈썹이 몇 개나 남아 있는가?’라는 말이 있고, ‘벽암록’ 27칙에는 ‘눈썹을 아끼지 않다(不惜尾毛)’라는 말이 있는데, 눈썹이 빠지는 과보도 두려워하지 않고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하겠다는 뜻이다. 선승에게 중요한 것은 미혹한 중생을 위하여 불법을 설하고 자비심을 베푸는 하화중생의 보살행이라고 할 수 있다.

 

운문선사에게는 ‘관(關)’ 말고도 일자관이 몇 개 더 있는데, 어떤 납자가 “무엇이 정법안장입니까?”라는 질문에 “보(普)”라고 대답했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면 어디서 참회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로(露)”라고 대답했다. 운문의 일자관에 대하여 ‘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 4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동산은 삼돈방을 놓았으니 그것은 노파심이 철저한 것이다. 운문은 일자관을 수립하여 모든 종사들을 눈을 멀게(봉사)했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윤창화

 

/ 법보신문

 

 

 

 

 

碧巖錄

[第001則]不識 

 

< 垂示>

垂示云. 隔山見煙. 早知是火. 隔牆見角. 便知是牛.

擧一明三. 目機銖兩. 是衲僧家尋常茶飯.

至於截斷衆流. 東湧西沒. 逆順縱橫. 與奪自在.

正當恁?時. 且道.

是什?人行履處. 看取雪竇葛藤.

<수시>

산 너머에 연기가 오르면 불이 난 줄 알고, 담 너머 뿔이 보이면 소인 줄 알며,

하나를 들으면 셋을 알고, 눈짐작이 저울눈보다 정확하다는 따위는 선가에서는 밥 먹고 차 마시듯 당연한 일이다.

온갖 흐름을 끊게 되면, 동에서 솟고 서로 사라지고, 거꾸로 하고 바로 하고, 세우고 눕히고, 주고 받음에서 자유자재하게 된다.

바로 이렇게 되었을 때, 자 말해 보아라.

이러한 사람의 딛고 가고자 하는 곳, 의도하는 바를

是什?人行履處. 看取雪竇葛藤.

 

< 本則>

擧. 梁武帝問達磨大師. 如何是聖諦第一義.

磨云. 廓然無聖.

帝曰. 對朕者誰.

磨云. 不識.

帝不契. 達磨遂渡江至魏. 帝後擧問志公.

志公云. 陛下還識此人否.

帝云. 不識. 志公云. 此是觀音大士. 傳佛心印.

帝悔. 遂遣使去請.

志公云. 莫道陛下發使去取. 闔國人去. 他亦不回.

< 본칙>

양무제가 달마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근본이 되는 가장 성스런 진리(聖諦第一義)입니까?”

磨云.“텅 비어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

帝曰 “나와 마주한 당신은 누구입니까?”

磨云.“모르겠습니다.”

 

무제는 그 뜻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달마스님은 양자강을 건너 위 나라에 이르렀다.

무제가 후에 그 일에 대해 지공에게 물으니,

지공이 말하였다. “폐하! 이 사람을 모르십니까?”

帝云 “모르겠습니다.”

志公云 “이는 관음대사이며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는 분입니다.”

무제는 후회하고 사신을 보내어 모시려 하자,

지공스님이 말하였다. “폐하, 사신을 보내어 모시려 하지 마십시오. 온 나라 사람이 부르러 가더라도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 頌>

聖諦廓然. 何當辨的.

對朕者誰. 還云不識.

因?暗渡江.

豈免生荊棘.

闔國人追不再來.

千古萬古空相憶.

休相憶. 淸風?地有何極.

 

師顧視左右云. 這裏還有祖師?.

自云. 有. 喚來與老僧洗脚.

< 송>

성제확연이라, 어찌 참뜻을 밝혔다 하랴

내 앞에 있는 이 누구요에 모른다는 대답

남몰래 양자강 건너가 버리니

가시덤불 돋아남 면하기 어렵겠네

온 나라 사람 뒤쫓아도 돌아올 리 없으니

천년만년 후회해도 모두 헛일이리

후회는 말아라. 맑은 바람 어디에나 불고 있나니

 

설두화상이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요즈음에도 달마가 있느냐?”

설두스님이 스스로 답하여 말했다.

“있다. 그 달마를 불러오너라. 내 발이나 씻게 해야겠다.”

 

 

 

 

[第008則]眉毛在? 

눈썹이 아직 남아 있는가

 

< 垂示>

垂示云. 則途中受用. 如龍得水. 似虎?山.

不會則世諦流布. ?羊觸藩守株待兎. 有時一句.

如踞地獅子. 有時一句. 如金剛王寶劍. 有時一句.

坐斷天下人舌頭. 有時一句. 隨波逐浪.

若也途中受用. 遇知音別機宜. 識休咎相共證明.

若也世諦流布. 具一隻眼. 可以坐斷十方. 壁立千?.

所以道. 大用現前. 不存軌則.

有時將一莖草. 作丈六金身用.

有時將丈六金身. 作一莖草用.

且道. 憑箇什?道理. 還委悉?. 試擧看.

< 수시>

참진리를 터득하면, 길을 가면서도 참진리를 자유롭게 쓸 수 있음이, 용이 물을 얻고, 호랑이가 산을 의지하는 것과도 같다.

참진리를 터득하지 못하면, 세속적으로 처신함이, 숫양이 담장을 치받고 뿔이 울타리에 걸려 꼼짝 못하는 꼴이 되거나, 나무를 지키며 토끼가 부딛쳐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도 같다.

참진리를 터득한 사람의 한마디는 때로는 웅크린 사자와도 같고, 때로는 금강왕의 보검과도 같으며,

때로는 모든 이의 말문을 막아버리고, 때로는 잔물결을 따르고 큰물결 타는 것과도 같다.

또 길을 가다가도 참진리를 씀이, 마음을 알아주고, 기분을 헤아리며, 희비를 알아차려, 서로 꼭 마음이 들어맞아 서로의 밝음을 증명할 수도 있다.

세속적으로 처신하는 자에게는, 지혜의 눈을 갖추고서, 시방을 방비하며, 깎아지른 천길 절벽을 세울 수도 있다.

그래서 참진리의 큰 쓰임이 나타남은 법칙에 얽매어 있지 않다고 한 것이다.

때로는 한 포기 풀이 일장육척 금빛 부처님으로 쓰이게 하고,

때로는 일장육척 금빛 부처님이 풀 한 포기로 쓰이게 하기도 한다.

자 말해보아라. 이 어떤 도리인가. 그래 자세히 알았는가.

 

 

< 本則>

擧. 翠巖夏末示衆云. 一夏以來. 爲兄弟說話. 看翠巖眉毛在?.

保福云. 作賊人心虛.

長慶云. 生也.

雲門云. 關.

< 본칙>

취암스님이 하안거 끝에 대중법문을 하였다. “한여름 결제 이후로 여러분들을 위해서 설법했는데, 취암의 눈썹이 붙어 있는가?”

 

보복스님이 답했다. “도둑질하는 놈이 정직할 리 없다.”

 

장경스님이 답했다. “눈썹이 자꾸 자라고 있다.”

 

운문스님이 답했다. “함정이다. 함정. 조심해.”

 

 

< 頌>

翠巖示徒.

千古無對.

關字相酬.

失錢遭罪.

 

?倒保福.

抑揚難得.

??翠巖.

分明是賊.

 

白圭無?.

誰辨眞假.

長慶相?.

眉毛生也.


< 송>

취암이 보인 뜻

천고에 상대할 이 없네

함정이다 조심해 응수하다니

돈 잃고 죄 덮어 쓴 꼴


보복의 완곡한 말씀도

칭찬인지 비난인지 알 수가 없네.

말 많다 취암이여

정녕코 도둑놈이로다


흰옥에는 티가 없으나

누가 가려내겠는가.

장경화상 똑똑히 알아

눈썹 자꾸 자란다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