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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록 (呑虛錄)

경호... 2012. 10. 17. 04:11

탄허록 (呑虛錄)

 

* 呑 : 삼킬 탄. 삼키다. 남의 것을 제 것으로 만들다. 싸서 감추다.

 

■ 탄허
0 1913 독립운동가 율제(栗齊) 김홍규씨를 부친으로 전북 김제에서 출생.      본명 탁성(鐸聲)
0 20세 까지 유학공부, 3년간 도교에 심취
0 17세에 결혼 자녀를 둔 22세에 입산. 오대산 상원사 한암 스님에게 사사
0 노장 철학의 대가

 

■ 영원을 바라보는 사상과 예지 - 김중배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동양의 마음은 유불선(儒彿仙)을 근기(根氣)로 다듬어지고 밝혀져 왔다. 유교는 존심양성(存心養性)을 말하고 불교는 명심견성(明心見性)을 말하며 도교는 수심연성(修心練性)을 말한다. 모두가 심성, 곧 마음자리를 탐구하는 데 일관해 왔음은 물론이다. 두어 기른다는 유(儒)나, 밝혀 본다는 불(佛)이나, 닦아 단련한다는 선(仙)이나, 그 표적은 필경 마음이었다. 그 차이는 흔히 유식근(儒植根), 도배근(道培根), 석발근(釋拔根)이라고 말한다. 유가 뿌리를 심는 것이라면, 도는 뿌리를 북돋워 주는 것이고, 불은 뿌리를 뽑는 것이라는 견해다. 애써 심을 것도 없는 초월의 경지에 이른다는 문맥은 사뭇 변증법적 지양(止揚)을 방불케도 한다.

 

 탄허 스님에게는 몇 차례 예지 적중 내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이들은 이미 아는 일이다. 그 하나는 6 ? 25 직전 스승 한암 스님의 만류도 뿌리치고 양산 통도사로 남하했던 이력이다. 그 둘은 울진 ? 삼척 지방에서 무장공비가 몰려들기 직전 ‘화엄경’의 번역 원고를 월정사에서 영은사로 옮겼던 이력이다.

 

 그러나 탄허 사상과 예지의 매력은 더욱 깊은 곳에 있다. 그는 예언한다. 지구에 잠재하는 화질(火質)이 북방의 빙산을 녹이기 시작한 것은 지구의 윤문(閏門이 열려 성숙한 처녀가 되는 과정이라고 비유하는 것이다. 지구의 초조(初潮)현상은 소멸이 아니라 성숙의 모습이라는 낙관론이다.

 

 동양사상의 섭렵을 바탕으로 역학을 동원하는 탄허 스님의 예지력은 다음 세계의 주축은 동방의 한국이며, 그 주인공은 당연히 한국인이라는데 귀착한다. 그는 다시 23도 7분가량 기울어진 지구축이 바로잡히는 날이 올 것을 믿는다. 그날이 오면 기울어진 윤도수(閏度數)로 말미암아 저질러졌던 인간사회의 부정부패도 사라지리라고 믿는다. 듣기에 따라서는 예지의 거창함이 지나쳐 허황됨으로 이어지는 느낌을 뿌리치기 어렵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지식까지 동원하는 그의 예지에는 분명히 설득력이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부정적이며 피해망상이라 할 수 있었던 우리 역사의식에 새로운 긍정, 새로운 용기를 불어 넣어준 탄허 스님의 예지는 미래 적중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현실의 예지일 수도 있다는 실감에 젖게 된다.

 

 탄허 스님은 바로 그 시각의 선지식 이며 또한 선지자다. 새삼스럽게 그가 유불선에 통달한 철승(哲僧)임을 기록할 필요는 없다. 화엄학의 대가로서 ‘화엄경’을 국역했다는 사실도 구태여 되풀이하여 적을 필요가 없다.

 탄허 스님은 그 위에 동양의 역학(易學) 원리로 어제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내일의 역사를 예지한다. 비록 몸은 산간에 있으나 눈은 우주의 운행을 꿰뚫어보고자 한다. 그것이 탄허 스님이 말하는 ‘큰 공부’인 것이다.

 

■ 목숨과 맞바꾼 인연 - 서우담 : 도서출판 교림 대표

 

 나는 4 ? 19학생 운동에 동참하면서 하루아침에 지명수배자 신세가 되었다. 도망자 신세였던 나는 대학교 선배인 법정 스님을 뵈러 해인사로 찾아갔다. 법정 스님은 내게 공부를 하려거든 오대산으로 가라고 했다. 당시 월정사에는 탄허 스님이 계셨다. 그렇게 탄허 스님과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1968년 탄허 스님은 좀처럼 출가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에서 몇 차례 다녀가고 내가 서화담 선생의 16대손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움직이셨다. 세월이 지나고 탄허 스님의 덕망 덕분에 나는 수배에서 풀려났다. 지명 수배가 풀리자 나는 탄허 스님께 출가 전 약속한 대로 속세로 돌아가겠노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탄허 스님은 내게 그의 딸을 부탁하셨다. 아버지가 이렇게 훌륭하니 자녀 또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탄허 스님의 출가 전 부인이신 장모님께 이따금씩 한자로 쓰인 편지가 오곤 했는데 아주 명문이었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딸이라면 보통 이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흔쾌히 결혼을 승낙하였다. 그렇게 결혼 약속을 하고 산을 내려왔는데 알고 보니 장모님은 토정선생의 16대 종손 집안이었다.

이렇게 나는 탄허 스님과 오랜 인연을 맺게 되었다.              

 탄허 스님은 생전에 정말로 많은 일을 하셨다. 특히 10여년에 걸친 줄기찬 집념으로 불교 최고의 경전인 화엄경을 자상한 주석을 곁들여 우리말로 옮긴 작업은 ‘원효 ? 의상 대사 이래의 최대 불사’ 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탄허 스님께서는 초저녁에 4~5시간 주무시고 보통 자정이 되면 일어나셨다. 지구의 순환기가 밤 12시라서 낮 12시까지는 기운이 솟고 낮 12시가 지나면 기운이 내려가기 때문에 자정 전에 1시간 자는 것이 자정 지나고 3시간 자는 것보다 몸에 좋다고 하셨다. 또 기운이 올라올 때는 그 기운을 타고 활동하는 것이 좋고, 기운이 내려갈 때는 쉬는 게 좋다고 하셨다.

 10여 년간 원고지 10만 매 분량, 하루에 100장씩 그것도 한자로, 새벽 시간에 쓰셨다. 우리 중에는 그 한자를 보고 옮겨 적을 수 있는 사람도 이제는 거의 없다. 나는 원문만 컴퓨터로 옮기는 데에도 몇 년이 걸렸다. 이 작업을 하던 중 손가락 마디마다 관절염이 오기 시작했다.

 화엄경이 범어로 10조 9만 5천 48자이다. 그나마 한자로 압축이 되어서 100만 자 정도다. 말이 100만 자이지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런 화엄경 역해는 유불선을 다 통달해야 가능한 작업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일본에는 아직 화엄경 번역판이 없다. 아니, 전 세계에서 자국어로  번역한 사람은 탄허 스님이 처음이다.

 

 

■ 묻고 구하지 않으면 답을 주지 않는다 - 전창렬 변호사  

 

 1960년대는 4 ? 19 혁명과 5 ? 16 군사혁명을 거치면서 새로운 질서의 태동이 꿈틀거리던 시대였다. 고질적인 정치적 후진성과 굶주림과 가난으로부터의 탈피가 시대적 요구였다. 대학생 불자들은 우리 역사상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 피웠고 국가적통일의 지도이념이었던 불교문화 속에서 추진 원동력을 찾으려고 하였다. 당시 나도 1963년 뜻을 같이한 전국의 대학생 불자들과 함께 ‘한국 대학생 불교연합회’를 창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64년 이기영 박사의 소개로 마침 조계사에 와 계시던 탄허 스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탄허 스님은 출가하시기 전 유교와 도교의 제 경전을 섭렵하시고 출가 후 한국 불교의 걸출한 거봉이신 한암 스님의 지도하에 불교의 종지를 깨우치고 3년간 묵언, 참선과 보림을 통하여 자기라는 주체가 확연히 빠져버려 화엄법계와 하나가 되셨다.

 탄허 스님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누구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예의를 갖춰 따듯하게 맞이하셨다. 가르침을 주실 때는, 부득이하게 대중 강연을 하실 때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질문을 해야만 말씀을 하셨다. 아무리 기상천외한 질문이 있더라도 전광석화 같은 답변이 이루어졌고 이는 불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탄허 스님께서는 유교와 도교의 사상과 역사적 사례를 종횡무진으로 구사하여 흥미를 돋우고 이해의 폭을 넓혀 주셨다.

 그래서인지 정치인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끊임없이 스님을 찾아오거나 가르침을 청하였다. 기억하기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인 양주동 박사가 ‘장자’에 관한 가르침을 청하러 월정사에 며칠간 머무르다 가셨고, 함석헌 선생께서는 동양 사상에 대한 의문점을 해소하려고 아침 일찍 안암동에 있는 대원암에 자주 방문 하셨다. 또 노태우 대통령이 수방사령관으로 있을 때 관사로 탄허 스님을 초빙한 일도 있었다. 탄허 스님은 앞날을 궁금해 하던 노태우 사령관에게 국가적 대임을 맡게 될 것을 전제로 한 국정 과제로 한반도 분단의 고통 해소를 위해 남북 간 접촉과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르침을 주셨다.

 

 잊지 못할 나의 스승 탄허, 탄허 스님은 출세간에 있어서는 대선사이시고 대학자이시며, 세간에는 불세출의 경세가이시고, 선각자셨다. 배움에 뜻을 둔 사람에게는 위대한 교육자셨고. 괴로움에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는 가슴 따뜻한 멘토셨다.

 불교 근대사에서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이 만행을. 지월 스님이 농사짓고 밭 매는 것을, 수월 스님이 짚신을 삼아서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불교적 깨달음을 성숙시키는 보림의 방편으로 삼았다면 탄허 스님은 불경 번역과 후학 양성, 그리고 중생고의 해결을 위한 정치적 방향 제시를 보림의 방편으로 삼았다.

 

 

■ 미래를 여는 지혜의 등불이 되다 - 혜거 스님 :

탄허 불교 문화재단 이사장. 탄허 기념박물관 관장

 

“미래를 여는 지혜는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

탄허 스님의 평생 화두를 한 문장으로 표현 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먼저 자아의 성찰로 자신의 잘못을 점검하고 善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修身으로 품격을 갖춘 후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나를 버리고 더 나아가 철저하게 나의 인격과 공로를 버리고, 부족함이 없는 나를 깨달아 생사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야 세상의 버팀목이 되어 나라와도 바꿀 수 없는 큰 그릇이 될 수 있다.”

 

 항상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던 탄허 스님께서 가신지 어느덧 30년이 되었다.
내가 처음 스님을 뵌 것은 1959년 11월 28일, 출가를 결심하고 산천이 온통 폭설로 뒤덮인 태백산 자락에 위치한 영은사에 찾아갔을 때였다.

 출가 결심을 밝힌 내게 탄허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출가는 큰 뜻이 있는 사람이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만약 큰 뜻이 있거든 공부해 보라.”

 이렇게 다짐을 받고서야 출가를 허락해 주셨다.
 당시 영은사는 그해 봄부터 이미 공부에 전념한 대중을 모아 간경결사(看經結社)를 진행중이었다. 결사란 본래 염불결사와 참선결사 위주로 진행되어 왔는데, 간경결사는 우리나라에서 영은사 결사가 처음이자 끝이었다.

 

 6 ? 25 때 전소된 월정사 복원 상량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철 큰스님께서 방문하여 탄허 스님의 처소인 방산굴에 보름 동안 함께 머무르셨다. 그런데 성철 스님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그저 학인을 가르치시는 탄허 스님의 모습만 보고 돌아가셨다. 
 그 후로 단 한 번의 왕래도 없었지만 탄허 스님께서 입적하시자 다음과 같은 조사(弔辭)를 보내오셨다

 화장세계의 큰 옥돌이요
 방산의 밝은 달이어라
 가슴 속 툭 트임이여
 창해에 파도 높고
 신기로운 기를 헤아릴 수 없음이여
 맑은 하늘에 벼락이
 치는구나.
 허!

활연관통(豁然貫通)의 흉금으로 항상 우둔한 사람임을 자임하면서 공부 자리가 아니면 가시지 않고 공부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았던 탄허스님!

 후학을 위해 일구신 모든 업적들은 이 세상의 버팀목이 될 인재들이 나오기를 염원하신 서원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 책 속에서 눈여겨보아 준다면 못난 상좌로서의 부끄러운 마음에 다소 위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1장 예지 - 대한민국과 주변국의 미래를 보다.

 

■ 도(道)가 깊어지면 예지도 깨어난다.

 

부처님은 기원전 479년 겨울, 인도 바이샬리 지방에 흩어져 있는 수행승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했다.
 “나는 지금부터 석 달 후에 입적할 것이다.”
 부처님은 그 예언대로 그로부터 3개월 후에 입적했다.

 일본 막부 시대 중엽에 유명한 고승 백은 선사는 1768년 12월 7일 주치의가 맥을 짚고 “이상 없습니다.” 라고 진단을 내리자 다음과 같이 말하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3일 후에 죽을 사람의 죽음을 예견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당신도 명의는 아니구먼!” 과연 3일 후 12월 10일 84세로 그는 입적했다.

 또 중국의 마오쩌둥도 죽기 10개월 전인 1975년 12월 핸리 키신저 미국무장관과의 대담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한다. 이처럼 종교인은 물론 다른 분야의 인물들도 자기 분야에 도가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예지 능력이 생길 수 있다.

 하늘을 나는 새나 땅에 구멍을 파고 사는 벌레들도 비가 오고 바람이 불 것을 마리 알아 움직이는 것처럼....

 

 

■ 보통 사람과 다른 선견지명이 있다.

 

 6 ? 25 동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 당시 나는 오대산에서 한말 이래로 가장 존경받던 고승 한암(漢岩) 스님을 모시고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한암 스님을 10년 이상 모신 상좌가 없었는데 황송하게도 나는 22년을 모셨다. 한암 스님께 가르침을 받으면서 존경하는 마음은 날로 더해갔다. 기축년인 1949년 어느 날. 개미떼가 자기들끼리 싸움을 해서 법당과 중대 뜰에 수백 마리씩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난(亂) 을 예감했다.

 ‘남북 간에 큰 싸움이 벌어지겠구나!’

 하늘은 하늘의 상(象)을 보이고, 땅은 땅의 상을 보이고, 꼭 사람의 상만 보는 것이 관상이 아니다. 짐승들도 지진을 예지하는데, 하물며 이런 큰 난리는 다 미리 그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그동안 공부를 통하여 얻은 역학원리로 분석해보니 곧 난이 일어날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일단 어려운 상황은 피하자는 생각이었다.

 “스님 오대산을 떠나 남행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한암 스님께 말씀 드렸다. 그러나 30년 이상을 살아온 오대산을 떠날 수는 없다며 완강히 거절하셨다. 
나는 젊은 상좌들과 양산 통도사 백련암에 거처를 마련하고 스님을 모시려 했으나, 한암 스님은 끝내 백련암에 오시지 않았다. 그분의 결의는 대단한 것이었고 여든 살의 고령이었던 한암 스님은 오대산에서 동란을 고스란히 겪으셨다.

 그때 상원사를 불태우려고 군인들이 들이닥쳤는데, 한암 스님은 가사 장삼을 갖춰 입으시고 법당에 의연히 앉아 그대로 태우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노승의 의연함에 놀란 군인들이 차마 불태우지 못하고 떠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또 한 번은 월정사의 한 암자에서 ‘신화엄경론’을 번역하고 있었는데, 울진 ? 삼척 무장공비 사건이 있기 한 달 전에 이를 미리 예지하고 원고를 모두 삼척 영은사에 옮겨 두었다. 그대로 두었다면 무장공비 토벌 군단사령부가 설치된 월정사의 원고는 안전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 국난이 닥칠 것을 예지로 간파한 인물들

 

 조선 중기의 학자 남사고, 그는 강원도 태생으로 풍수, 천문, 복서(卜筮), 상법(相法) 할 것 없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법을 모두 통달한 사람이었다. 그가 예견한 내용 중 맞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명종 말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했다.

 “머지않아 조정에는 당파가 생기겠고, 또 오래지 않아 왜변이 일어나리라. 그런데 만약 진년(辰年)에 일어나면 오히려 구할 길이 있지만 사년(巳年)에 일어나면 구하기 어려우리라. 사직동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마땅히 나라를 태평케 할 임금이 거기서 나오리라.”

 남사고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 맞았다. 조정에는 을해년부터 당파가 생겼고, 왜란은 임진년에 일어났으며,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는 사직동 잠저에서 들어와 대통을 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예언과는 달리, 당시 나라의 지도자 가운데 대조적인 행보를 보인 두 사람의 일화를 통해 예지의 근거를 좀 더 살펴볼 수 있다.

선조 때 영의정이었던 유성룡 보다 앞서 영의정을 지낸 동고(東皐)대감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왜란 전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토정 등과 교분이 두터웠던 그 자신도 역학 등의 전통 학문에 밝아 왜란이 닥쳐올 것을 예지하고 있었다.        

동고 대감은 자기 집 청지기 딸을 중매해서 어느 거지와 혼인시켰다. 그가 그 거지를 눈여겨 본 것은 자신의 유지를 친아들보다 더 잘 받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나면서 두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내가 죽은 뒤에는 청지기 딸의 남편 말에 무조건 따르라.”
 동고 대감이 죽자 청지기 딸의 남편은 몇 차례에 걸쳐 동고 대감의 두 아들에게 재산을 요구했고 몇 년 내에 거의 모든 재산을 내주었다. 그러나 두 아들은 아버지 동고 대감의 유언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왜란이 일어났다. 청지기  딸의 남편이 나타나 말했다.

 “피난을 떠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떠난 피난길은 지금의 청송 땅이었고 거기에는 두 아들에게 똑 같은 집과 재산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이 일화에서 앞날을 내다 본 동고 대감의 예지를 읽을 수 있다. 아쉬운 것은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 국가와 민족의 위기에 대처하는 일보다 자기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했다는 점이다.그가 임금을 위해 한 일은 지금 자하문 근처의 성벽에 비상구 하나를 더 만들어 선조가 그 문을 통하여 피난길에 오르도록 했던 것밖에 없다.

 이와는 대조적인 인물이 율곡이다. 그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하다가 당쟁으로 쫓겨났다. 그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경륜뿐만 아니라 역학에도 밝아 닥쳐올 대란을 미리 알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으나 끝내는 소인들의 어리석음으로 야인이 되었다.

 그 후 이이는 임진각 연안에 정자를 지어 놓았다. 선조가 피난길에 올랐을 당시 임진강 연안에 이르러 어둠 때문에 지척을 분간하지 못할 때 이 정자에 불을 질러 길을 밝히고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게 했다.

 

 

■ 역사에도 인과응보가 있다.

 

불교에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있다. 즉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법칙이다. 이것은 조상의 죄과를 후손이 치른다는 유교의 권선징악 원리와 일맥상통한다. 동양 사상에 있어 대표적인 사상인 유,불,선교는 이런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내가 한, 중, 일 삼국의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은 여기에 근거한다.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세계 역사에서 중국을 동아시아 문명의 발상지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를테면 중국에서 문명이 발생해서 우리나라로 전해졌고 여기에서 다시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시각이다. 또한 일본이 제일 늦게 동양의 전통 문화권에 들어갔지만, 현실적으로는 동양 문화의 세계성을 가장 잘 실현하고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근거로 예측해 본다면 미래 역사에서 일본은 가장 불행한 나라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선조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결과가 미래에 분명히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례로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보자. 일본은 지난 5백 년 동안 무려 49차례나 우리나라를 침략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동양의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며 남을 해칠 줄 모르고 살아온 것이 결국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히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동양 사상의 근본원리인 인과법칙이자 인과응보이며 우주의 법칙이다. 이것이 역학의 원리로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역’의 팔괘에서 우리나라는 간방(艮方)에 위치해 있다. 간(艮)은 사람에 비유하면 소남(小男)이다. 이것을 나무에 비유하면 열매다. 열매는 시종(始終)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소남을 풀이하면 소년(少年)이라 할 수 있는데, 소년은 시종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소년은 청산(靑山)이면서, 아버지 입장에서는 결실이기 때문이다. 소년이 다시 시작되면 성장하여 언젠가는 아버지가 된다. 열매는 결실 전 뿌리에 거름을 주어야 효과가 있고, 일단 맺게 되면 자기를 낳아 준, 다시 말해 열매를 만들어 준 뿌리와 가지의 말을 듣지 않는다.

오히려 열매는 뿌리를 향하여 자기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간(艮)의 원리이자 소남의 해석이며 시종의 논리다.

 

 주역을 지리학상으로 전개해 보면 우리나라는 간방에 해당되는데 지금 역의 진행 원리로 보면 이 간방의 위치에 간도수(艮度數 : 주역에서 말하는 인간과 자연과 문명의 추수정신)가 비치고 있다. 이 간도수는 이미 1900년 초부터 시작되었다.

 

 

■ 한반도가 세계문제 해결의 열쇄를 쥐고 있다.

 

 4 ? 19 혁명은 청년학생(소남)의 궐기로 정권(아버지)을 무너뜨렸는데, 이렇게 청년 학생의 힘으로 정권이 붕괴된 일은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4 ? 19 혁명의 영향으로 전 세계 여러 곳에서 학생들의 봉기 운동이 일어나 유행처럼 번져 나갔으며, 그 결과 선진국에서 스튜던트 파워를 형성하였다. 소남인 우리나라의 수많은 청년학생이 자유당 정권을 붕괴시킨 것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두운 역사가 종결되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상의 원리로 볼 때 소남은 시종(始終)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간방에 간도수가 접합됨으로써 어두운 역사는 끝을 맺게 되고, 이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수밖에 없으며, 인류 역사의 시종이 지구의 주축 부분에 위치한 우리 땅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인류 역사의 종결이라고 한 것은 그 안에 새로운 인류 역사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더라도 이미 1백 년 전부터 하나의 결실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역학의 원리는 오래 전부터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결국 시종을 함께 포함한 소남인 우리나라에 간도수가 와 있기 때문에 전 세계의 문제가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게  될 것이다. 

 

 역학의 원리로 본다면 오늘날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도 일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일본이 우리나라를 36년 동안 강점할 당시 그들은 일본 황궁을 한반도로 옮기려고 궁터까지 마련한 적이 있었다. 또한 영구히 일본 본토로 만들기 위해 우리 민족의 대부분을 만주 등으로 이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35년 이라는 일시적 강점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끝이 났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일시적 현상으로 끝났듯이 우리나라의 남북 분단 문제 또한 그러할 것이다. 물론 위정자나 학자들이 남북 분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천륜의 법칙에는 당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자연에 아무리 강력하게 도전한다 해도 결코 자연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듯이 말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추세가 아닌가.

오늘날 서구의 몰락을 살펴보자 지금 그들은 서구 문명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사상과 동양 문화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날로 커지고, 그 필요성도 점차 증대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머지않아 통일을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에 하늘의 섭리가 필연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 대한민국과 주변국의 관계에도 음양의 이치가 작용하니.

 

 역학에서 소남(小男)과 소녀(小女), 장남(長男)과 장녀(長女), 중남(中男)과 중녀(中女)는 서로 음양으로 천생연분의 찰떡궁합 배합이다. 미국은 역학에서 태방(兌方)이며 소녀다. 이 소녀는 소남인 우리나라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고, 그런 까닭에 해방이후 정통적인 합법 정부를 수립한 우리나라가 미국을 제일의 우방으로 삼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미국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건국을 도왔고 6 ? 25 동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함께 전선에서 피를 흘린 맹방이 되었으며, 전후에는 수많은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 원조 속에는 미국의 국가적 이익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정치적 이익관계를 떠나서 우주의 원리에서 본다면 미국은 소녀이자 부인으로 풀이된다. 미국이 우리나라에 도움을 준 것은 마치 아내가 남편을 내조하는 것과 같아 결과적으로 남편의 성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역학의 원리에 따라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현상과 장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역에서 중국은 진방(震方)이요. 장남이다  장남은 노총각을 뜻한다. 소녀인 미국과 장남인 중국은 후천의 원리에 의해서 한동안은  관계가 지속되겠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한다.

 

 역학적으로 보면 중 ? 소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구소련은 감방(坎方)이면서 동시에 중남이다. 장남인 중국과 중남인 구소련은 같은 양이므로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고 대립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원리는 구소련과 베트남의 관계,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다. 베트남은 공산화 이후 중국보다 소련과 훨씬 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월남이 중녀로서 중남인 구소련과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역학의 원리로 보았을 때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역학의 오행으로 보더라도 월맹은 이방인 남쪽으로 화(火)로 풀이된다. 반면 미국은 태방(兌方)으로 금(金)인데 금이 불에 들어가면 녹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화극금(火克金)의 원리다.   
 이러한 원리로 나는 미국의 국력이 아무리 막강하더라도 월남전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음을 예견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앞서 설명한 역학의 원리는 우리나라와 강대국과의 관계를 음양의 이치로 설명한 것이지 이 역학의 원리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역학의 원리를 이해한 다음에는 우리 스스로 더 성장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빙하가 녹고 일본 열도가 침몰하리라

 

0 노스트라 다무스 - 1999. 7월 전쟁, 지진, 홍수로 지구 멸망 예언
0 기독교의 말세론 - 2천 년 전부터
0 동양의 역학원리
- 6천 년 전의 복희 팔괘 : 天의 이치
- 3천 년 전의 문왕 팔괘 : 지상생활의 人間節義의 이치를 밝힘
- 약 1백 년 전에 미래역으로 밝혀진 正易의 이치는 후천으로서의 자연계와 인간의 앞날 예언

 

 서양 종교의 예언은 인류의 종말을 말해주고 예수의 재림으로 이어지지만, 정역의 원리는 후천세계의 자연계가 어떻게 운행될 것인가. 인류는 어떻게 심판받고 부조리 없는 세계에서 얼마만한 땅에 어느 정도의 인구가 살 것인가를 알려 주고 있다.

 미국의 어느 과학자는 25년 내에 북빙하가 완전히 녹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1980년 경향신문과의 대담 중) 북빙하의 해빙으로부터 시작되는 정역시대는 이천(二天), 칠지(七地)의 이치 때문이다 성경에 따르면 말세의 세계는 불로써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되어 있고 그때는 아기 가진 여자가 위험하니 집 밖에 나가 있으라고 적혀있다. 이것은 곧 지진에 의하여 집이 무너진다는 말이다. 여기에 열거한 사례들은 지구의 종말에 대하여 어느 지점에서 일치하는 점이 있다.

 

북극의 빙산이 완전히 녹으면

 첫째, 대양의 물이 불어서 하루에 440리의 속도로 흘러내려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을 휩쓸고 해안지방이 수면에 잠기게 될 것이다.
 과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1890년 이래로 지구의 기온은 상승하고 있다고 한다. 역학의 이천 칠지에 의하면 지축 속의 불기운이 지구의 북극으로 들어가서 북극에 있는 빙산을 녹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북빙하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미국의 노틸러스 원자력 잠수함이 북빙하의 얼음 밑을 통과해서 단숨에 아이슬란드로부터 구소련의 백해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해빙을 증명하고 있다.

둘째, 소규모 전쟁들이 계속될 것이다.
 세계적인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지진에 의한 자동적 핵폭발이 있게 되는데, 이때는 핵보유국들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남을 죽이려고 하는 자는 먼저 죽고 남을 살리려고 하면 자신도 살고 남도 사는 법이다. 수소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민중의 맨주먹뿐이다. 왜냐하면 오행의 원리에서 토극수(土克水)를 함으로써 민중의 시대가 핵의 시대로 대치해서 이를 제압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비극적인 인류의 운명인데, 이는 세계 인구의 60% 내지 70%가 소멸된다는 것이다. 이중 수많은 사람

이 놀라서 죽게 되는 데 정역 이론에 따르면 이때 놀라지 말라는 교훈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일본 영토의 3분의 2가 침몰할 것이고 중국 본토와 극동의 몇몇 나라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러한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넷째, 파멸의 시기에 우리나라는 가장 적은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한반도가 지구의 주축 부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정역 이론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지구 중심 부분에 있고, 간태(艮兌)가 축이 된다고 한다. 일제시대 일본의 유키사와 박사는 계룡산이 지구의 축이라고 밝힌바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이 정역시대에 태어났음에 감가해야 한다. 오래지 않아 우리나라는 위대한 인물들이 나와서 조국을 통일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또한 모든 국내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나라의 국위를 선양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새로운 문화는 다른 여러 나라의 귀감이 될 것이며 전 세계로 전파될 것이다.


 

중 ? 러 전쟁과 중국 본토의 균열로 인해 만주와 요동 일부가 우리 영토에 편입되고 일본은 독립을 유지하기에도 너무 작은 영토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영향권 내에 들어오게 되며 한, 미 관계는 더욱 밀접해질 것이다.


 

 이러한 대변화의 시기를 세계의 멸망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정역의 시대는 지구의 멸망이 아니라 성숙기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복희팔괘는 천도(天道)를 밝혔고, 또 문왕팔괘는 인도(人道)를 밝혔으며 정역팔괘는 지도(地道)를 밝힌 셈이다. 특히 정역 팔괘는 후천팔괘로서 미래역이므로 이에 따르면 지구의 멸망이 아니라 지구는 새로운 성숙기를 맞이하게 되며, 이는 사춘기 처녀가 초조(初潮)를 맞이하는 것과 같다.


 

 23.7도 기울어진 지축이 바로 서고, 땅 속의 불에 의해 북극의 얼음이 녹는 현상은 지구가 마치 초조 이후의 처녀처럼 성숙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지구의 표면에는 큰 변화가 온다. 현재는 지구 표면에 물이 4분의 3이고, 육지가 4분의 1밖에 안 되지만 이와 같은 변화를 거치고 나면 육지가 4분의 3으로 바뀌게 된다.

 후천의 세계는 마치 처녀가 인간적으로 성숙하여 극단적인 자기감정의 대립이 완화되듯이 지구에는 극한과 극서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불이 물속에서 나오니
 천하에 상극(相剋)의 이치가 없다.

 

 이 구절은 주역에 나오는 문장으로 미래 세계는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가 온다는 뜻이다.

 

 

■ 동아시아가 세계사를 주도하리라


 

세계적인 역사학자 토인비 교수는 미래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미래 세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가 주역이 되어 세계사를 주도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1. 전 세계적으로 국가의 지역적 모델이 되는 제국을 과거 21세기 동안 유지해 온 중국 민족의 경험
2. 중국사의 장구한 흐름 속에 중국 민족성이 가지고 있는 세계 정신
3. 유교적인 세계관에서 나타나는 휴머니즘
4. 유교와 불교가 지닌 합리주의
5. 동아시아 사람들이 지닌 우주의 신비성에 대한 감수성과 인간이 우주를 지배하려고 하면 자기좌절을 초래하게 된다는 도교의 직관
6.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중국 철학의 근본성
7. 동아시아 사람들은 이제까지 서양인들이 자랑으로 삼아왔던 군사, 비군사의 양면 그리고 과학을 기술에 응용하는 근대의 경기(競起 : 서로 앞을 다투어 일어남)에서도 서구에 이길 수 있음을 입증한 것
8. 동아시아 제국들의 용기

 

 이러한 근거를 들며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시대의 전개를 내다보았다.
 토인비 교수가 ‘중국이 동어시아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은 물론 세계를 주도해 나갈 것이다’라고 한 예측은 어디까지나 현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이며 철학적인 논거에 의한 견해다. 그의 견해는 현실적으로 보면 당당하고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을 초월하여 우주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의 견해와 많은 차이가 있다.

 앞으로 동아시아의 미래에 있어 토인비 교수의 예측과 달리 중국의 주도적 역할보다는 우리나라의 역할이 더 강화될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우리나라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서구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는 주체이기도 하다.
 미래를 예측할 때 물론 토인비 교수처럼 역사적, 철학적, 논리적으로 현실을 분석하고 수학적, 지리적 현실을 파악함으로써 미래를 내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의 견해가 역사적 현실로 보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학적 원리에 근거하여 미래를 보는 눈은 그보다 훨씬 포괄적이며 나아가서 인류 사회의 미래를 우주적인 차원에서 볼 수 있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 비책(秘冊)에 담긴 수수께끼

 

 우리나라에는 우주의 기본 원리를 밝힌 비책 ‘천부경’이 있다. 단제(檀帝 :탄허 스님은 여러 역사적 기록을 들어 중국이 우리의 檀帝를 檀君이라고 칭호를 붙인 것은 소국이라고 얕잡아 본 것이므로 단군이 아니라 단제로 불러야 한다고 봄) 때 만들어 졌다고 전해지는 ‘천부경’은 신라 최치원이 한자로 번역하여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선가(仙家)사상의 연원이 되었으며 주역의 시원을 이룬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천부경’은 총 81자로 된 아주 짧은 내용이지만 매우 난해하고 역학의 원리와 공통점이 많다. 물론 유교의 원리는 그 길이가 방대하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천부경’은 역학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천부경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 - 은 시작인데 시작하지 않는 1 - 이요.
 또 일 - 은 끝냄인데 끝냄이 없는 일 - 이다. 


 

 天은 양(陽)이므로 1 - 이며, 地는 2, 人은 3으로 되어 있다. 태극(太極)에서 시작된 수(數)는 삼극(三極) 즉 무극(無極), 태극(太極), 황극(皇極)을 거쳐 1로 귀일(歸一)한다는 것인데, 1의 사상은 천하는 둘이 아니라는 불교의 원리와 부합하며, 역학의 원리와도 부합한다.

일설에는 ‘천부경’으로부터 역학의 시원이 이루어졌으며 단제(단군) 민족이 우주의 근본 원리를 밝힌 사상으로 중국의 기본 사상을 이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는 ‘천부경’의 시원은 중국의 요순과 동일한 시대다. 그러므로 천부경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 복희씨의 팔괘가 나왔으며 그 뒤에 문왕의 주역이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천부경이 단제 때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민족의 위대한 사상이 중국으로 전해져서 중화사상으로 꽃피워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이 사상에 의해 세계는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김정배 교수가 쓴 논문 ‘한국 민족 문화의 기원’에 보면 복희씨 때 황하 유역에 살던 민족과 단제 시대의 고조선 민족은 같은 고(古)아시아 족으로 형제지간, 즉 구이족(九夷族)이고, 그 후로 주(周)나라 때부터 한(漢)족이 황하 유역의 고아시아족을 몰아냈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이제까지 역학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는 종래의 일반적인 견해는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학의 시초는 ‘천부경’이고, 단제의 지배 영역은 전 동아시아 일대였으며 여기에서 발생된 문화가 동아시아 전체에 파급되었다는 발상도 해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토인비 교수가 말했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시대의 전개는 중국이 아닌 바로 우리나라로 볼 수도 있다. 즉 현재 한반도는 지구의 주축에 속하고, 한민족은 ‘간(艮)’의 시종(始終)을 주도하고 ‘천부경’사상은 새로운 세계의 근본이 된다고 할 때, 앞으로 세계의 중심은 우리나라라고 할 수 있다.

 

 

 

제2장 정치 - 지도자의 역량이 국운의 방향타

 

■지도자가 신뢰받을 때 法과 令이 바로선다.

 

 자고로 유명한 지도자는 만민의 총명을 모아 자기의 총명으로 만들어 국정에 반영하는 법이다. 아무리 한 사람이 밝다 해도 만민의 총을 모은 것보다 더 밝지는 못한 법이다.
 논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누군가가 허물이 있다고 충고해 줄 때 기뻐하는 것은 공자의 3천 제자 중  자로밖에 없다.”

그만큼 남의 충언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릇 지도자라면 백성의 참된 말을 귀담아듣고, 허물을 지적하면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고쳐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도(道)가 없으면 부패하기 마련이다. 도는 시공이 끊어져 욕심이 없는 상태다. 이러한 이치를 알아 각 분야에서 도를 실천할 때 올바른 정치가 나오는 것이다.

0 법과 형벌로 다스림은 하수의 정치이다.
0 탐심있는 지도자를 경계하라.

 

 

■ 먹을 게 적은 것보다 공평하게 분배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요즘에 먹고 살기가 편해졌다고 하지만 역시 급선무는 민생고 해결에 있다. 국민소득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국민이 얼마나 살기가 좋아졌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국민 개개인의 소득이 높아진 게 아니라 국민 총소득을 가지고 국민 1인당으로 나눠 평균치를 낸 것이니 참 애매한 숫자 놀음이 아닌가.

 민생고가 해결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문화니 예술이니 종교니 하는 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각박한 마음을 없애 주는 길은 민생고를 해결해 주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가가 할 일이다. 그 다음에 정신적 문화적으로 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종교가나 학자 예술가 등의 몫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집권자(정치가)의 정치 신념과 일치할 때 가능하다.

 사회 전체가 잘 살기 위해서는 정치가가 나서야지 일부 종교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종교인은 어느 시대 어느 국토든 국한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면 1천 명의 스님과 1천 명의 도인 보다는 종교의 도를 잘 아는 한 사람의 정치인이 필요하다.

 

 

■ 국가의 미래를 밤새워 고민하는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라.

 

 제1경제는 돈이다. 제2경제는 사회정화라고 말하고 있다. 제3 경제는 인간이 돈으로만 살 수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필요한 윤리다. 윤리가 바로 서려면 철학이 필요하다.

철학은 제4경제고, 철학 위에 종교가 있다. 그런 까닭에 종교는 제5경제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제1경제가 발전한다 해도 제2,3,4,5경제가 발전하지 못한다면 큰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치인 한 사람은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치가 국민의 의사를 묵살하고 권력 쟁취에 휘말려 싸우는 것은 귀신 혓바닥 장난보다 못한 것이다. 정치의 본질은 그렇게 더러운 곳에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는 정치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종교의 본질은 이론도 아니요. 조직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다. 다만 실천이 수반된 인간 완성에 있다.

 

 모두들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겪는 이 고통은 산고의 고통이다. 주역에 보면 한국은 간방(艮方)이다. 艮은 갓난아기요. 결실을 의미한다. 바로 어머니가 아기를 낳는 때의 진통이다.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아기를 낳듯이 우리나라 1980년대 이전은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는 때다. 그러나 이것은 희망찬 아픔이다. 가까이서 지켜보면 한심스럽고 어수선하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지만 큰 안목으로 지켜보면 희망찬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새 시대가 오기 위해서는 진통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이 고통이 지나면 우리의 숙원이던 남북통일의 서광도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생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도래할 것이다. 그래서 정치가의 역할이 막중하다.

 

 

■ 나라의 운명, 지도자의 심성에 달려있다.

 

 세계 인구를 심성을 기준으로 분류한다면 극선질형(極善質形) 인간 10%, 보통 사람형 80%, 극악질형(極惡質形) 인간 10%로 나눌 수 있다. 왕도 정치의 표본이요. 태평성세를 이루었다는 요순시대에도 모든 백성이 선질은 아니었으며, 극악무도했던 걸주시대라 해도 결코 모든 사람이 악질은 아니었다. 단지 최고 통치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정치가 달라졌을 뿐 인간 심성의 비율은 변하지 않는다.

 성인이 최고의 통치자일 때는 10%의 극선질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10%의 극악질들은 머리를 들지 못했다. 그런데 최고의 지도자가 소인일 때는 그에 따라 10%의 극악질형 관리가 등용되어, 10%의 극선질은 모두 암혈(岩穴)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80%의 보통 사람들은 어느 시대가 되었든 대세를 따를 뿐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을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로 분류한다. 상근기의 삶이란 대인군자, 즉 우주와 자신을 함께 잊고(物我兩忘) 예로써 사는 성인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별다른 지도가 필요하지 않다. 중근기의 인간은 물아양망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세속 법규에 조금도 어극나지 않게 사는 사람을 말하고, 하근기의 인간은 예도 법도 모르고 오직 정에만 이끌려 사는 이들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근기와 하근기를 지도하는 지도자가 성인이냐 소인이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모든 발전은 인화(人和)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좋은 국운을 번영으로 연결시키는 데는 지도자의 역량과 그릇이 인화로 이끄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 국민을 위한 철학부터 갖추라.

 

 정치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기강의 확립이다. 정치의 기강이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도둑이 판을 치고, 정치는 파리같은 인간들의 독무대가 되고 말 것이다. 기강이란 역사의식과 국민을 위한 철학, 인간을 존중하는 종교적 믿음이 있을 때 세워진다.

정치만을 위한 정치는 백해무익하다. 진실로 인간을 위한 정치일 때만 그 기강이 바로 세워질 수 있다.

 흔히 정치인이 되면 세상 전부를 얻은 양 호령하는데, 정치인은 나라의 어른이 아니다. 심부름꾼이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세워진 기강에 따라 철학을 제공하는 사람이며 그 호령은 각계의 지도자, 가정의 부모가 해야 한다. 가정과 같이 서로 위해 주는 관계를 맺도록 정치를 꾸려 간다면 수많은 경찰관과 판검사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의가 중심이 되는 사회는 인간이 인간다워지고 사회는 자연스레 정화된다. 대중이 좋다고 따라서 좋아하고, 대중이 싫다고 따라서 싫어하는 소신 없는 이들은 땅을 기는 개미보다 못한 사람이다. 자기의 주관에 따라서 도의에 따라 움직일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의 영광을 얻어 낼 것이다.

 

 

■ 미래 사회를 준비할 도의적 인물이 절실하다.

 

 우리나라는 인재가 부족하다. 인재가 부족하다는 것은 학사, 석사, 박사나 한 분야의 전문가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의적 인재의 부재를 의미한다. 도의적인 인재란 정치인, 경제인, 종교인, 사회 인사들이 인간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정치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열강들 사이에서 우리나라가 받을 영향력을 걱정하는 데서 나아가 어떻게 하면 도덕적 인격을 함양하여 도의적 인간이 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와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갖고 가르쳐야 도의적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주역에서 艮은 德이라 하며 ‘지야(止也)로 풀이한다. 이는 곧 우리나라가 도덕적으로 제일가는 나라이며 그치는(止) 위치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지진이 일어나도 이곳에서 그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음력은 이미 6천 년 전 복희씨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러한 음력에는 윤날과 윤달이 있다. 윤달이 생기는 이치는 지구의 축이 23도 7분 가량 기울어져 있기 때문인데, 후천시대에는 지구의 축이 바로 세워져 윤달과 윤날이 사라지고 위도와 경도마저 없어진다.  

 

 윤달과 윤일이 없어지면 인간이 지닌 속성으로서 간도수(艮度數)가 사라지고, 인간사회의 부정부패가 없어진다. 윤달과 윤일이 생기는 이치를 윤도수(閏度數)라 하는데, 이것은 중간매체 즉 과도기를 말한다.

 이러한 중간매체야말로 부정부패의 원인이자 부조리의 근본이다. 지금까지는 생존경쟁이나 생활수단 때문에 세계도처에 전쟁이나 분쟁이 일어나고 君子를 가장한 비인간적인 자들이 활개를 쳐왔지만 이 후천시대에는 인재 때문에 오히려 다툼이 있게 된다.

 

 부처님은 설법 중에 최후에 의지하는 4가지 법을 말씀하셨다.

1. 대의(大義)에 의지하고 문자에 의지하지 말라.
2. 지혜에 의지하고 식(識)에는 의지하지 말라. 여기서 지혜는 망상이 붙은 세간(世間)의 지혜가 아니고 분별이 끊어진 반야(般若) 지혜를 말한다. 
3. 법(法)에만 의지하고 사람은 의지하지 말라.
4. 요의경(了義經)만 의지하며 불요의경은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때 요의경이라면 ‘화엄경’ 80권으로, 이 하나에만 의지하지 다른 경전은 불요의경이므로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경전은 모두 대중을 화엄 단계에 끌고 올라가기 위한 방편적인 학설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가치는 모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창조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동서양의 정신문화를 필수과목으로 채택하는 교과과정의 일대 개혁이 단행되어야 할 것이다. 내실을 갖춘 한국인으로 성장시키려면 무조건 서양이나 이웃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모방을 서두르기에 앞서 우리의 정신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 국운이 트이는 시기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새벽이 밝기 전, 짧은 순간이지만 주변은 가장 어두컴컴할 수 있다. 고난에 대한 각오도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도덕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힘이 종교가 아닐까 한다. 그런 종교는 우주 종교라 할 수 있다.

 유불선을 한 덩어리로 하여 위정자가 그 장점만 취한다고 하면 훨씬 나아질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유교가 제일이고, 치신지학(治身之學)으로는 도교가 제일이며, 치심지학(治心之學)으로는 불교가 제일이다. 이런 장점을 잘 취해서 민중을 다스린다면 좋을 것이다.

 

 불교에는 천당, 지옥설, 극락과 같은 말이 기독교보다 몇 백 배나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유치하고 무의미한 것들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최고의 이념은 자각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이고득락(離苦得樂)하는 데 있다. 자기 혼자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중생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산불을 물 한 잔으로 끌 수는 없다. 한 개인, 한 종교인의 함은 미약하다. 하지만 언젠가 그 한 잔 물이 동해물로 변할 때가 올 지도 모른다.

 물질의 풍요만으로 복지국가라는 기준을 잡을 수 없다. 진정한 복지 사회를 실현하려면 학교교육에서 정신문화의 원천인 종교를 가르쳐야 한다. 불교뿐만 아니라 인간을 풍요롭게 한 모든 종교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의 산상수훈, 유교의 논어, 중용, 역학, 불교의 화엄학 같은 것 말이다. 불교의 인과원리만 철저히 터득해도 이 사회의 교도소는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오늘의 나의 현실은 어제의 연장이요. 내일의 나의 현실은 오늘 나의 행동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오늘 나의 생활은 충실해질 것이다.

 

 

제3장 철학 - 한 마음이 꿈을 일으키고, 우주를 일으키니

 

■ 술(術)은 도(道)가 아니다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6 ? 25 동란과 같은 전쟁이 언제 우리나라에 다시 일어날 것인가 따위의 사건을 미리 아는 것을 道 인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술가(術家 : 陰陽음양,卜筮복서, 점술占術에 정통한 사람)의 사상으로 술객이 하는 짓이다. 도의 자리는 아는 것이 끊어진 자리이지 신통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술(術)과 도(道)의 차이는 무엇인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부처님은 육신통(六神通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신족통, 누진통의 신통력)을 했다. 6가지 신통력 중에 누진통(漏盡通 : 마음대로 번뇌를 끊을 수 있고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지혜) 을 제외한 나머지는 術 에 해당한다. 만일 누진통이 없다면 다 아는 것(知)이 붙어 있으니 術이다.

 

 천안통(天眼通)은 인간 육체의 눈이 근거리만 볼 수 있는 것에 비해 장외, 즉 산이 수만 겹 겹쳤어도 장(障) 밖을 보는 것이다. 천이통(天耳通)은 여러 나라, 여러 지역의 말, 나아가 짐승과 귀신의 말까지 듣지 못할 것이 없는 능력을 말하고, 타심통(他心通)은 상대방이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지를 아는 능력을 말한다.

숙명통(宿命通)전생을 아는 능력을 말하고, 신족통(神足通)은 뜻대로 모습을 바꾸거나 마음대로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에 반해 누진통(漏盡通)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끊고 다시는 미계(迷界)에 태어나지 않음을 깨닫는 각자(覺者)의 신통력을 말한다.

 


■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놈이 제일 오래 사는 놈이다

 

 물질은 정신이 아닌 모든 유형(有形)을 말한다. 예컨대 우주에 불의 원소가 충만해 있지만 잠재해 있으니 없는 것 같다. 우주에 가득 찬 것이 불이고, 우주에 가득 찬 것이 물이며 우주에 가득 찬 것이 바람이고 흙이다.

 그러면 지, 수, 화, 풍. 즉 유교사상으로는 금, 목, 수, 화, 토. 이 오행(五行)이 똑같이 가득 차 있는데 다만 불은 잠재해 있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와 나무를 비비면 불이 나오고, 돌로 돌을 쳐도 불이 나온다. 만일 불의 원소가 없다면 물질끼리 아무리 부딪히더라도 불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불이 정신이라면, 나무, 돌 등은 물질이 된다. 그런데 물질을 통하지 않고는 그 잠재되어 있던 불이 나타날 수가 없다.

 결국 물질과 정신이 언제나 맞붙어서 법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하나만 가지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에만 치우친다면 그것은 편견이 된다.

 우리는 부처님의 팔만대장경 교리보다는 자기 마음을 닦는 선(禪)을 좇아가야 한다. 지식으로 1백 년, 1천 년, 1만 년의 앞일을 아는 것보다 아는 것이 끊어진 각(覺)의 자리를 좇아가야 한다. 아는 것과 통하는 術 을 좇기보다는 道 자리를 좇아가야 하며, 한 나라의 위대한 인물이 되기보다는 전 세계적이고 우주 차원의 위대한 인물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길을 찾았다. 결국 어떤 놈이 오래 사는 놈이냐. 어떤 놈이 잘 사는 놈이냐. 그것을 따져봐서 가장 오래 살고 가장 잘 사는 쪽을 택해야 되지 않는가.

 ‘도덕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놈이 제일 오래 사는 놈이다.”

 이 세상에 제일 오래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3대 성인이다. 석가, 공자, 예수. 이들이야말로 제일 오래 사는 사람이다. 그 다음으로 한 나라 안에서 오래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퇴계 선생, 율곡 선생, 이순신 장군 같은 인물들이다.

 공자의 제자였던 안연은 서른두 살에 요절했지만 공자 이후에 안연을 넘어선 인물은 아직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 마음은 우주의 본체

 

 불교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우주의 본체는 마음이다”라고 할 수 있다. 불가(佛家)의 모든 종교적 교훈은 이 한마디에서부터 나온다.

 원래 부처님은 처음 ‘화엄경’을 설하셨으나 이를 알아듣지 못하자 결국 기초과정이라고 할 ‘아함경’에서부터 시작해 올라갔던 것이다. 즉 불교 경전들을 현대 교육과정에 비유하면 방등경이 중학교, 반야경이 고등학교, 법화경이 대학교 과정에 속한다.

 

 따라서 팔만대장경이라는 엄청난 불교 경전도 하나로 꿰뚫어 이해를 하고 나면 아주 간단명료한 것이 된다. 불교 교리가 어렵고 방대하다는 얘기는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 한 부분만을 보았을 때 하는 말이다.
모든 업은 마음이 미(迷)한데서 비롯된다. 원래 사람의 마음이란 청정한 것이 본성이지만 번뇌나 망상의 객진(客塵)이 들러붙어 업을 짓게 된다. 망상이 붙지 않은 마음의 본체를 진여(眞如)라고도 한다.

 중생이 신구의(身口意)를 청정하게 가지려면 그것으로 인한 악한 행위(악업)가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중생의 악업에는 신삼(身三), 구사(口四), 의삼(意三 )이 있다.

먼저 몸으로 짓는 업은 살생(殺生), 도행(盜行), 음행(淫行) 세 가지가 있고,

입으로 짓는 악업은 기어(綺語), 망어(妄語), 양설(兩舌), 악어(惡語) 네 가지가 있으며,

뜻으로 짓는 악업은 탐(貪), 진(瞋), 치(痴)가 있다.

 

 이러한 열 가지 악업은 각기 상품, 중품, 하품으로 다시 분류가 되는데 상품 악업을 지은 사람은 아귀가 되고, 하품 악업을 지은 사람은 축생(畜生)이 된다. 다만 이러한 것은 실제 그렇게 된다는 게 아니라 근기에 따른 방편일 뿐이다. 

 

 

■ 안목과 근기에 따라 수행법이 다르다

 

소승불교에서는 이렇게 말을 한다.

고(苦)가 무서워서
고를 만드는 집착을 끊고
망상을 말하는 도를 닦는다.

 

그런데 화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苦)가 곧 도(道)다.
 망상(妄想)은 본래 마음이 없는데 누가 끊는가?

 

이렇게 같은 법을 가지고도 닦는 법이 다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자신의 안목과 근기에 따라 수행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 생명이란 연(緣)을 만나 운행하게 되는 것

 

 10조 9만 5천 48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화엄경에 관한 연구와 번역을 17년을 두고 지속해 오다가 지난 1974년에 완간을 보았다. 이런 나를 두고 혹시 건강에 문제가 없는지 평소에 어떻게 섭생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별다른 섭생은 하지 않는다. 내가 건강을 유지하는 길이라곤 딱 한 가지뿐이다. 즉 생명의 본처(本處) 자리로 항상 나를 귀경(歸竟)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이때 노력이란 사방에 신경을 안 쓰는 일이다. 즉 신경을 쓰면서도 안 쓰는 도리가 있을 뿐이다.

 생명의 본체는 무형, 즉 시공이 끊어진 자리다. 생명의 본체는 무형이지만 그 본질인 씨가 4대 地 , 水, 火, 風의 연(緣)을 만나 운행하게 되는 것이 생명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구체적 표상은 곧 이 육체를 집으로 하여 아(我)로 나타나는 것일 텐데, 이것을 어떻게 올바르게 운행해야할까?

 

 답은 한 가지,  무아(無我)가 되는 것뿐이다. 무아가 되지 못하고 유아(有我)일 때 본명(本命)의 본처 자리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고(苦)가 생기고 아픔이 일어난다. 도(道 )란 무아를 이루어 나가는 길이다. 따라서 무아가 될 때만이 緣을 자유자재로 요리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온 생명이 무수할 텐데. 과연 이 수많은 생명 가운데 무아를 이루어 본처(本處)로 귀환한 개체는 과연 얼마나 될까? 고작 성인(聖人) 몇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모두 유아(有我)로 머무르다 끝나기 때문이다. 유아는 집착해서 꿈속에 빠져 지내므로 범부로 떠돈다. 그러다 보니 윤회에 떨어지고 업(業)을 지어 본체를 잃어버리고 헤매게 된다.
 우리는 중생(衆生)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서운 말인 줄 알아야 한다. 유아로서는 인연을 만나야 조금이라도 운행할 수 있지만, 무아가 되면 인연 자체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인 까닭에 무아의 길에서 항상 이탈하고 만다.          

 

 그렇다면 중생의 일생은 항상 헛되이 그치고 마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무아(無我)이고자 하는 노력은 비록 이번 생에 道를 이루지 못했다고 해도 내생을 위한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내세관에서는 내세를 부정하면 현실도 없어야 한다. 요약해서 말하면 오늘이 있으니 어제가 있었고 내일이 있고, 금년이 있으니 거년(去年)이 있었고 내년이 있다. 현재가 있으니 과거가 있었고 미래가 있다는 삼세(三世), 즉 삼세윤회설(三世輪回說)을 철두철미하게 말한 것이 불교다.
 그래서 언제나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난다는 인과법칙은 추호도 어김이 없다.
 불교의 인과법칙은 누가 주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이다. 불교 경전 중 ‘인과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전생의 일을 알려면 금생에 받는 것이 전생 일이고
 내생의 일을 알려면 금생에 짓는 것이 내생 일이다. 

 

이 구절에서처럼 내생의 문제는 금생에 지은 선이나 악을 생각해보면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 중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이들이 있다.

 “전생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 또는 조상들 중에 누가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생에 이렇게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좀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교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하겠다.

 

 

■ 무엇으로 평생의 도(道)를 삼을 것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참 믿음이란 믿는다고 하는 것까지 끊어진 자리를 말한다. 주객이 끊어진 믿음인 실견득(實見得)을 성취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유를 넘어선 믿음이므로 일반인들에게는 너무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것을 목표로 삼아서 나가야 한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이무소득(以無所得 : 하는 바 없이 얻음)’ 처럼 믿음도 무소득(無所得)이 되어야 한다.


 옛날에 어떤 학자가 사마온공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평생에 행할 도입니까?”
 그러자 사마온공이 대답했다.
 “성(誠 : 진실하여 망妄이 없음)이다.”
 학자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먼저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사마온공이 대답했다.
 “망령되이 보지 말고 망령되이 말하지 말라.”


 이와 같이 보지 않을 것은 보지 말고, 말하지 않을 것은 말하지 말며, 바로 보고 바로 말하는 것으로 성을 행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 세상에 처세할 때는 부드러운 것이 좋고, 강하고 굳센 것은 화(禍)의 근원이 된다고 했다. 공자와 안연의 대화를 살펴보면 처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아무인(無我無人) 즉 주객이 끊어진 行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학자와 사마온공의 문답에서 보았듯이 망령되이 보지 않고 망령되이 말하지 않는 것이 차선(次善)인 것이다.

 


■ 교리에도 불립문자에도 집착하지 말라.


 달마대사의 사행관(四行觀)을 살펴보면 첫째 보원행(報怨行), 둘째 수연행(隨緣行), 셋째 무소구행(無所求行), 넷째 칭법행(稱法行)이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보원행은 어떤 액난(厄難)이나 고통을 당해도 이것이 과보(果報)거니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심이 된다. 중국 사람들은 칼에 맞고 죽을 때도 합장을 하며 ‘천명(天命)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멀리 유교 도교에서부터 싹터 온 사상이다.


 둘째 무소구행은 구하는 바가 없는 행위다. 고통이란 원(願)이 많은 것이 제일 고통스러운 것인데 구할 바가 없다고 하면 그것이 가장 잘 구하는 것이다.


 셋째 수연행은 緣을 따르는 행위다. 연을 따른다는 것은 굳이 회피하지 않는 것이다. 피하지 않고 연을 따라서 행하는데, 일이 닥쳤을 때 응작(應作)  불응작(不應作)을 觀 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은 끊어버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칭법행은 법에 합한다는 뜻인데, 이 법은 사회법이 아니라 진리에 합한다는 의미다. 능(能)과 소(所)가 다 끊어진 것, 즉 내가 하는 바도 없고 할 바도 없어진 경지를 말한다. 이처럼 마지막 회통되는 것을 칭법행이라 한다. 이것이 달마대사의 사행관으로 칭법행을 통해서 도에 들어간다.


 그런데 달마대사가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 것은 그 당시 고질적인 병, 즉 교리와 지식에 지나치게 치우친 병폐는 고쳐 주었지만 후세에 큰 화근이 되었다. 달마대사가 불립문자로 깨달았다고 해서 요즘 무식한 수좌들 중에는 진짜로 문자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팔만대장경이 필요 없다는 말인가? 불립문자란 문자가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님을 달마대사의 전법제자(傳法弟子) 육조(六祖) 혜능 스님의 어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육조 혜능 스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들이 달마 대사의 말을 빌려 걸핏하면 문자가 필요 없다고 하는데 스스로 자기 미(迷)한 것은 옳거니와 어찌 부처님의 경전까지 비방하는가. 이런 견해는 그릇된 것이니 마땅히 당장 고칠 일이다.”

 

 

■ 부처님은 오고 가는 것이 없다.


 불경에 ‘오오백세(五五百世)’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부처님 자신이 열반에 든 이후를 예언해 놓은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이 열반하면 그동안 세웠던 불법이 점차 무너져 갈 것이라고 하시고, 구체적으로  5백 년을 한 단위로 하여 다음 다섯 단계를 거치면서 쇠퇴해 갈 것이라고 하셨다.


 즉 부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 제1단계 5백 년 동안에는 입산 수도하는 사람이든지 불교를 믿는 시림이면 대게 해탈경지에 이르게 되고, 제2단계 5백 년 동안에는 낱낱이 해탈은 못하지만 선정(禪定) 곧 도를 닦을 줄 아는 사람이 많고, 제3단계 5백 년 동안은 해탈도 선정도 없이 다만 많이 들어서 경의 교리에 통달하여 박문강기(博聞强記)하는 지식 면으로 발달하고, 제4단계 5백 년 동안에는 해탈도 선정도 다문(多聞)도 없이 절이나 짓고 탑이나 쌓는 사업만을 숭상하고, 제5단계 5백 년 동안은 해탈도 선정도 다문도 탑사도 없이 다만 명예나 재리(財利)를 가지고 싸움만을 일삼는다고 하셨다.
 이 예언은 부처님께서 세대가 내려갈수록 풍속이 세속화되어 깨닫기가 어려워짐을 지적한 것이다.     


 ‘원각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비록 말세라도 마음에 허망함을 내지 않으면 부처님은 이런 사람을 바로 현세의 보살이라 하신다.”


 인류 구원은 새로 어떤 성인이 나타나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스스로 깨달아 청정한 본마음으로 돌아갈 때 가능하다.


 부처라는 것은 오고 감이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 사람의 몸과 입과 뜻이 청정하면 부처가 거기 머무르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오신 날’도 따로 없다. 언제든지 그 뜻과 행실이 청정하면 부처님이 오신 것이고 그 뜻과 행실이 청정하지 못하면 부처님은 이미 가신 것이다.


 

 

제4장 생사 - 태어난 이여, 죽음은 피할 길 없구나.


■ 참선문에 들어서면 알음알이는 벗어던져라.


 어떤 사람이 삼(麻)짐을 허리가 부러지게 잔뜩 지고 험한 산길을 걸어가던 중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가까이 가 보니 금이었다. 덩어리가 무척 커서 값어치가 어마어마할 듯했다. 뛸 듯이 기뻤지만 순간 고민이 생겼다.  삼짐을 지고 가자니 금덩이를 버려야 하고 금덩이를 지고 가자니 지금가지 힘들게 삼짐을 버려야 했다.

 그는 어떻게 할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래, 금덩이도 중요하지만 몇 천리를 지고 온 전공(前功)이 아까워서라도 삼을 포기할 순 없지.’
 이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인가. 진짜 보배를 만났으면 아무리 공들여 얻은 것이라도 가짜는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작은 집착을 벗어던지지 못해 귀한 보물을 얻지 못한 것이다. 중생의 인생살이가 이와 같다.
 참선에서도 법의 큰 보배를 얻으려면 지금까지 짊어지고 온 알음알이, 선입지견을 깨끗이 버려야 한다. 깨달음과 알음알이는 함께 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선 문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참선 법문에 비하면 모든 교리는 삼짐에 불과하고 참선은 금덩이와 같은 것임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 예(禮), 법(法), 정(情)으로 살아가는 삶 


 사람이 사는 것을 크게 구분해 보면 예, 법, 정 3가지 형태로 살아간다.
 이때 禮는 천리(天理)를 말하는데, 이는 세속의 예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예의 삶을 사는 사람을 불가에서는 ‘상근기의 사람’이라고 한다. 이는 대인군자요, 우주와 나, 객관과 주관의 구분을 완전히 잊는 물아양망(物我養望)의 경지에 오른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법으로 사는 삶이란 물아양망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자리(自利)보다는 이타(利他)에 치중하면서 세속 법규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를 ‘중근기의 사람’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정으로 사는 사람은 예도 법도 다 모르고 오직 인정(人情)으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인데 한마디로 ‘천치’같은 사람들이다.

 


■ 한 마디 이르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


 도(道)는 진리를 나타내는 대명사다. 한 마디로 길을 가리킨다. 이때 도의 근본이란 ‘바른 것’이다. 따라서 길을 걷되 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름길이든 외진 길이든 길은 길이다. 그래서 본인은 길이라 여기고 가는데, 그 길이 정도에서 벗어난 곳일 수도 있다.


 정도를 걷지 않고 길 밖으로 빠져나가면 결국에는 진흙 구덩이와 가시밭과 어둠 속에서 갈팡질팡 하게 된다. 탈선(脫線)이란 어떤 의미에서든 괴로운 결과를 가져옴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정도를 걷기 위해서는 강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구경(究竟)의 목적지인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이 이르게 될 것이다.


 옛 말씀에 도를 잃으면 德 이라도 갖추어야 하고 덕을 잃으면 仁이라도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인을 잃으면 義라도 지킬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의를 잃으면 禮라도 차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 예마저 잊으니 끝내는 법률학이 나오게 되었다. 자의(自意)에 의한 길을 걷는 나그네가 아니라 요즘 사람은 타의에 의한 방랑자가 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옛날에 남전(南泉) 스님이 뜰에서 풀을 매고 있는데, 도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 법을 물었다. 마침 뱀 한 마리가 뜰을 지나갔다. 남전 스님이 뱀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 마디 이르면 살리고 한 마디 이르지 못하면 죽이겠다.”


 이 시원찮은 도학자가 그만 쩔쩔매자 남전 스님은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호미로 뱀을 죽이고 말았다. 알겠는가? 이 도리를!


대인군자는 숨 한 번 내고 쉼에 전체가 경(經)이다. 천재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끈질긴 집념과 쉼 없는 노력이 원하는 결과를 안겨 줄 뿐이다. 따라서 이것저것을 넘겨볼 것이 아니라 한 가지로 꾸준히 나가야 한다. 집념과 젊음과 용기가 있는 자라면 크게 성취할 수 있다.

 

 

■ 참선, 마음공부의 핵심


 선(禪)이란 인도 고대 말인 범어에서 따온 말로 ‘생각하여 닦는다(사유수 思惟修)’ 또는 ‘고요히 생각한다(정려 靜慮)’는 뜻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부는 불교인만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고, 편안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불교의 선은 좀 더 깊은 뜻을 갖고 있다. 고요히 생각한다고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닦느냐에 특징이 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분류하면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육단심(肉團心), 연려심(緣慮心), 집기심(集起心), 견실심(堅實心)이다 육단심은 우리의 육체적 생각에서 우러나는 마음이고, 연려심은 보고 듣는 데서 분별하여 내는 마음이고, 집기심은 망상을 내는 깊은 속마음이다. 견실심은 본성으로, 이것이 바로 부처님 마음자리다.


 선은 근본 자성을 요달(了達)하여 생사를 끊는다. 우리는 아무리 힘이 있고, 건강하고 권세가 막강해도 언젠가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것은 마음이 나고, 머물고, 변하고, 없어지는 번뇌 망상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생로병사도 생기는 것이다.


 선은 마음속의 생명을 없애는 것이 근본 목적이다. 하지만 마음의  생멸을 잡아 없애려하면 더 일어난다.
 따라서 이때는 ‘나’라는 상(相)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고 잠잠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결국에는 ‘나’라는 놈이 없는 줄을 바로 알게 된다. 그때에만 생멸상(生滅相)이 사라지게 된다.

 

 

■ 잘못된 수행법


 꿈을 꿈이라고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거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방법으로 기도나 염불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기도나 염불을 할 때는 그 뜻을 정확히 알고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는 것이 좋은지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는지 알아야 한다. 또 밖에서 불교를 보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삶을 통해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기도를 잘못하면 마(魔)가 붙기 쉽다. 물론 기도도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다(心外無法)는 생각으로 철두철미하게 하면 참선하는 것이나 경전을 읽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 마음밖에 어떤 대상을 추구한다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이런 틈을 타서 마가 붙게 되면 무슨 칠성(七星)이 붙었다. 혹은 산신이 붙었다고 한다.


 선방에서는 불립문자라 하여 문자를 내세우지 않지만, 경전이나 관련 서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무엇을 세우고 알아야 기도하는 법도 알고 참선하는 법도 알 수 있다. 지혜도 지식을 통한 앎에서 올 때 훨씬 더 확실해진다.


 세계의 모든 종교가 다 그렇듯이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데까지는 다 말하고 올바른 이치로써 바로 터득해야 올바른 종교적 실행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 삿된 길로 떨어질 수 있다.

 


■ 삶과 죽음의 문제를 자유로이 해결하는 법


 불교에서는 마음에 생사가 없음을 깨달음으로써 생사 문제를 해결한다. 덧붙여 설명하면 마음이란 그것이 나온 곳이 없기 때문에 죽음 또한 없다고 보는 것이다. 본디 마음이 나온 곳이 없음을 확연히 간파한 것을 ‘도통(道通) 했다’고 한다.


 우리 자신의 어디든 찾아보라. 마음이 있는 곳이 있는지 말이다. 나온 곳이 없으므로 죽는 곳도 없다. 따라서 道 가 철저히 깊은 사람은 이 조그만 몸뚱이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어리석은 중생들이나 죽음을 두려워하며 천년만년 살고 싶어 하지. 도인(道人)이나 성인(聖人)은 굳이 오래 살려 하지 않는다.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중생들의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다.


 도에 통한 사람은 몸뚱이를 그림자로 본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을 간밤에 꾼 꿈과 같다고 생각한다. 간밤에 꿈을 꾸고 다닌 사람이 꿈을 꾸고 나면 꿈속에서는 무언가 분명히 있긴 있었으나 헛것임을 알듯이 삶 또한 그렇게 본다.     

 
 혹자는 도인도 죽는데 어찌 생사가 없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겉을 보고 하는 소리다. 옷 벗는 모습을 보고 죽었다고 할 수는 없다. 세상 사람들은 이 ‘옷’을 자기 ‘몸’으로 착각한다. 그러다 보니 죽음의 경계에 걸린다. 그러면 도인이나 성인은 무엇을 자기 몸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몸 밖의 몸, 육신 밖의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 좀 어렵게 말하면 시공이 끊어진 자리, 이것을 자기 몸으로 안다.


시공이 끊어진 자리란 죽으나 사나 똑같은 자리, 몸을 벗으나 안 벗으나 똑같은 자리, 우주가 생기기 전 시공이 끊어진 자리, 생사가 붙지 않는 자리를 뜻한다.

 


■ 고요한 곳에서 도를 닦는 것은 시끄러운데 쓰기 위함이다.


 불교인은 아니지만 장자는 다음과 같이 생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였다.
 “죽고 사는 문제가 크다지만 생사가 변하지 아니하며, 비록 천지가 무너져 없어진다 해도 정신을 잃지 않는다.”


 중생은 끝까지 몸과 마음이 둘로 보이기 때문에 마음에는 생주이멸(生住移滅)의 사상(四相), 몸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상, 1년엔 춘하추동의 사시, 세계엔 성주괴공(成住壞空)사상 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은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줄 철저히 각파했기 때문에 마음의 생주이멸은 묘용(妙用)으로 변하고 몸의 생로병사는 거구착신(去舊着新 : 생사에 자유자재한 것)이 되며 1년의 춘하추동은 일원기(一元氣)로 세계의 성주괴공은 무애삼매(無碍三昧)로 변한다.   

   
 우리가 고요한 곳에서 도 닦는 것은 시끄러운데 쓰기 위함이다. 예를 들면 돈벌이 하는 것은 가난한 데 쓰자는 것이요. 깨달음은 얻어서 수많은 중생 구제를 하기 위함이다.


 고통스러움은 어떻게 벗느냐 하는 데 있어 성인의 구원을 받는 방법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스스로 벗어나는 것만 못하다. 시끄럽고 고통스러운 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사의 큰 문제를 자유자재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라 하겠다.

 

 

■ 참되게 안다면 실행은 그 앎 가운데 있다.


 중국 당나라 때 육조 혜능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차라리 생사 속에 머물러 중생을 교화하면서 도를 닦을지언정 소승(小乘)의 적멸(寂滅)에 파묻혀 자리(自利)만을 구하는 해탈은 하지 않겠다. 그러니 항상 자신의 허물만 보고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


 훗날 조선시대 선조 때 서산대사는 육조 혜능 스님이 남긴 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전자는 선가(禪家)의 눈이요. 후자는 선가의 발이다.”


 도가(道家)에 여동빈(呂洞賓)이라는 유명한 선생이 있었다. 그가 득도 전인 예순네 살 때 일이다.  길을 가다가 점심때가 되어 어느 주막에 들러 점심을 주문하고 잠시 정자나무 밑에 누워 쉬다가 홀연히 잠이 들었다. 꿈에서 7,80년을 살았는데 슬하에 여러 자식을 두고 조정에서는 청요(淸要)의 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헌천동지(헌 : 치켜들 흔 또는 헌자로 手변에 기뻐할 欣. 天動地)하는 부귀공명을 누렸는데 깨어 보니 점심으로 부탁한 황량(黃糧 : 조밥)이 아직 익지 않았다는 것이다.


 “10분도 안 된 시간 동안에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7,80년 동안 살았던 그 세계는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가? 그는 이 한 생각을 통찰하며 그 자리에서 무상을 깨닫게 된다. 꿈속에서 1백 년을 산다 해도 꿈속의 일은 역시 꿈인 것이다. 그 일로 인해 세간사를 모두 정리하고 수장자를 짚고 道 를 구하러 나섰다가 신선 종이옹(鐘貳翁)을 만나 수백 년을 사는 선도(仙道)를 성취한다.


 말은 행동을 돌아봐야 하고, 행동은 말을 돌아봐야 한다.

눈과 발이 함께해서 지행이 합일되는 길을 밟는다면 정치가와 교육가는 할 일이 없어 팔짱끼고 앉아 있게 될 것이다.

 


■ 교(敎)와 선(禪), 불교를 이끄는 두 개의 바퀴


 중국에 훤제(煊帝)라는 왕이 있었다. 하루는 꿈 풀이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시험해 보려고 한 가지 꿈을 지어 냈다. 만약 해몽가가 꿈 풀이를 억지로 할 것 같으면 혹세무민 죄를 씌워서 목을 칠 작정이었다.


 “네가 꿈 풀이를 잘 한다고 하니 묻겠다. 간밤 내 꿈에 궁전 처마의 기왓장 하나가 난조(鸞鳥 : 봉황새 종류)가 되어 날아가는 꿈을 꾸었는데 이것은 무슨 꿈인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해몽가가 대답했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지금 궁중에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해몽가가 답변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폐하 아뢰옵니다.”
 “무슨 일이냐?”
 “지금 궁중에서  두 사람이 싸우다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훤제는 기가 막혔다. 꾸며 낸 꿈으로 해몽가를 시험해 보려한 것인데 어떻게 꾸며 낸 거짓 꿈까지 이렇게 잘 맞히는가. 훤제는 그만 놀라서 해몽가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계략을 털어놓았다.

 “네가 해몽을 잘한다고 해서 한 번 시험해 보기 위해 꿈을 거짓으로 지어낸 것인데 어떻게 귀신같이 그 꿈이 잘 맞을 수 있다는 말이냐?”


 그러자 해몽가가 말했다.
 “폐하 꿈이란 정신이 노는 것입니다. 꿈속의 꿈만이 꿈이 아닙니다. 폐하가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 또한 이미 꿈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꿈이 생겨나고 꿈이 있으면 이 우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敎는 부처님의 가르침 곧 교리이고, 禪은 부처님의 마음인데, 이것은 배워서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본래 문답이 끊어진 자리인 이 우주가 일어나기 전, 우리 몸뚱이가 생기기 전 그리고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 자리를 말한다.
 따라서 거기에 무슨 말을 붙일 것인가. 이것이 본래면목이다. 그러므로 깨달았다는 것은 깨달은 것이 끊어진 자리를 말한다. 만일 거기에 ‘깨달음’이란 말이 붙는다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다.

 


■ 지(知)와 각(覺), 앎과 아는 것이 끊어진 자리


 ‘알다’의 뜻을 지닌 한자 중에 ‘지(知)’ 자가 있다. 여기서 파생되는 단어에는 지식(知識)이 있다. 이 말에는 아는 것이 많다는 뜻이 담겨 잇다. 역사 속에서 아는 것이 많아 후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 있다. 그 중에서 토정 이지함 선생은 당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후세 사람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아는 게 많은 사람이다. 토정 선생이 생전에 자신의 친산(親山)을 미리 정해 놓고 그 속에다 빗돌(碑)을 하나 묻어 놓았다.


 그런데 마침 토정선생의 종손자(從孫子)가 삼도감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유명하다는 풍수가 찾아와서는 토정 선생이 정해 놓은 친산이 좋지 않다며 종손자인 삼도감사에게 더 좋은 명당이 있다고 했다. 종손자는 풍수가의 말을 믿고, 토정 선생이 잡아 놓은 친산을 파 보았다.
 그런데 파고 보니 거기에서 빗돌이 하나 나왔는데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불초손이 이 묘를 팔 터이니 개봉축하라.”


 상황이 이와 같다면 누구라도 깜짝 놀랄 일이 아닌가. 이 빗돌의 명문을 보고 토정의 종손자인 삼도감사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즉시 자신이 길지라고 잡았던 곳을 다 물리치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선영에 큰 죄를 지었으니 얼굴을 들 수 없다. 앞으로 나는 선영과 함께 할 수 없으니, 후에 내 묘는 머슴들이나 묻히는 선영산소 밑에다 조그마하게 써 달라.”


 그리하여 삼도감사의 묘는 토정 선생의 산소 밑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토정 선생은 미래 자신의 후손이 어떤 일을 벌일지 다 아는 분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알고 학식이 높아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앎(知)일 뿐이다. 이렇게 아는 것을 가지고 도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아는 것만 가지고 도라 할 것 같으면 토정 선생이 토정 선생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마다 4가지 소원이 있으니
 안으로는 신령하고 강하려 하며
 밖으로는 부자가  되고 귀인이 되려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4가지 소원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를 소망한다.
 그러나 토정 이지함 선생은 달랐다.


 부자는 욕심 안 내는 것이 제일  부자요.
 귀인은 벼슬 안 하는 것이 제일 귀한 것이요.
 강한 것은 다투지 않는 것이 제일 강한 것이요.
 신령한 것은 아는 게 없는 것이 제일 신령한 것이다.


 그러나 알지도 못하고 신령하지도 못한 것은 어리석은 자가 가지고 있고
 다툼질도 하지 않고 강하지도 못한 것은 나약한 놈이 가지고 있고
 욕심도 안 내고 부자도 못 되는 것은 빈궁한 인간이 가지고 있고
 벼슬도 하지 않고 귀하지도 못한 것은 미천한 놈이 가지고 있으니
 벼슬하지 않고도 능히 귀하며
 욕심 안 내고도 능히 부하며
 다투지 않고도 능히 강하며
 아는 것 하나 없고도 능히 신령한 것은
 오직 대인이라야 가능하니라.


 이처럼 토정 선생에게는 아는 것에 머물지 않고 아는 것이 끊어진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현인(賢人)이라는 평가를 듣는 것이다.


 조선 오백년의 유교에서는 정북창(鄭北窓 이름은 정임) 선생을 제일가는 술객(術客)이라 칭한다. 정북창 선생 또한 술객을 넘어선 도의 경지에 이른 분이다. 그가 스무 살이 되어 입산하여 공부하던 때의 일이다.


입산삼일(入山三日)에 지천하사(知天下事)라.
산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천하의 일을 알았네.


 무소부지(無所不知) 즉 모르는 것 없이 다 알았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갔는데, 중국 사람을 만나면 중국말을, 소련 사람을 만나면 소련 말을 유창하게 말했다고 한다. 천재 중에 천재인 사람이 정북창 선생이다.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유래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마흔 네 살에 요절했다. 정북창 선생은 자신의 만장을 스스로 쓴 사람으로 유명하다. 바로 북창자만(北窓自挽)의 시다.


 하루에 천 잔 술을 다 마셔버리고 
 일평생에 만 권의 책 다 읽었어라.
 고상하게 복희씨 이상의 일만 이야기하고
 세속의 얘기는 종래로 입에 걸지 않았도다.

 안연(공자의 으뜸 제자)은 삼십에 아성(亞聖 :공자의 다음 가는 성인)이라 불렸는데
 선생의 삶은 어찌 그리 긴가.

 안연은 서른두 살에 일찍 죽었는데 북창 자신은 마흔넷까지나 살았으니 그것으로 족하다는 내용의 만장을 쓴 것이다. 그리고 좌탈(座脫) 즉 앉아서 몸을 벗어버렸다. 그는 불교에도 매우 조예가 깊었다. 그런데도 유교에서는 그를 술객(術客)이라고 한다.

유교에서는 그의 아는 것만 보았지 아는 게 끊어진 자리는 보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각(覺)은 바로 아는 게 끊어진 것이다.

 

 

■ 생사일여 관에는 두려움이 없다.


 우리나라는 어느 다른 나라보다도 불교의 진수에 있어서, 교리 면으로나 선 사상 면으로나 다 앞서 갖추고 있다.  


 인도, 동남아 문화권은 거의 다 불교 숭상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가 다 후진국이 되었다. 그래서 아마 ‘불교 숭상국은 후진국이다’하는 소리가 나온 듯한데, 사실 이것은 틀린 말이다. 한 나라가 망하고 흥함은 종교로 인한 국민정신과 정치 지도력에 달려 있는 것이지, 종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불교 숭상국인 일본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부흥할 수 있었을까? 나라도 작고 자원도 없는 섬나라이면서도 태평양전쟁 때 세계 3대 강국에 들었고, 패망 후에도 4대 강국에 들고 있다.


 결국 그들은 불교 정신을 잘 활용한 덕분에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그들은 선검일여(禪劍一呂) 정신을 강조했다 즉 참선하는 정신과 칼 쓰는 정신을 하나로 훈련시켰던 것이다. 禪이란, 잡념이 하나라도 붙어서는 안 된다.

잡념은 망상일 뿐이다. 도를 열 번 통했다 해도 통했다는 생각이 붙으면 이미 도가 아니다. 군인이 칼을 쓸 때에도 앞뒤에 이럴까 저럴까 주저하는 생각이 있으면 칼을 쓸 수가 없다. 일본 사람들은 불교의 선 정신을 칼 쓰는 데 주입시켰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들의 군대가 막강할 수 있었고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교정신을 잘 이용했던 때는 신라시대로, 당시 불국사에선 4천여 명의 사대부중을 함께 모여 지내게 하고, 의상 대사를 모셔다 ‘화엄경’으로  국민정신을 지도했으며, 원효 대사는 천성산(밀양 통도사 내원암)에서 매년 1천여 명씩 제자를 길러 냈다. 그처럼 신라는 불교 정신으로 신라 국민을 지도하여 마침내는 삼국통일을 이룩해 냈다.

 
 그러면 도대체 불교정신에 무엇이 깃들어 있기에 그럴 수 있었을까? 바로 불교의 생사일여관(生死一如觀)이다 죽고 사는 것이 하나, 즉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정신만큼 강한 것은 없다. 죽고 사는 문제가 하나라면 과연 무엇이 겁이 나겠는가.

 이 몸뚱이마저 버릴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강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 단계는 망상을 끊고 道  자리에 든 것이나 다를 게 없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이제 결론을 내린다면 불교국 일지라도 불교의 정신을 알맞게 잘 응용할 줄 아는 나라는 발전하고 이를 응용하지 못하는 나라는 후진국이 될 수밖에 없다.
 동양 사상의 핵심은 이렇다.


 “한 근본이 우주 만유요. 우주 만유가 한 근본이다.(一本萬殊 萬殊一本)”


 따라서 현실적 조화를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도덕뿐만 아니라 종교적 가르침이 필요하다. 또한 종교적 가르침을 실천할 줄 알 때 생활에서 변화가 온다.

 

 

■ 생의 의미와 죽음의 초극


 생의 의미와 죽음의 초극은 우리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항상 신비요. 철학이요. 실존이라 하겠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제자가 물으니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 生이라는 것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까지 다루겠느냐.”


 실존주의 사상에서 보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죽음이다. 이 문제를 극복해야만 참다운 인간의 삶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 사는 생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1백 년. 보통 그 안에 모두 소멸된다. 1백 년도 유지하지 못하면서 온갖 망상이 어찌나 많은지 항하사(恒河沙)의 무한히 많은 수로도 셀 수 없을 정도다.


 반면 불교에서 보는 궁극적인 생은 영원무궁한 생이지 1백 년 미만의 생이 아니다. 영원무궁한 생이라는 것은 태어나거나 생겨남이 없는 생(無生의 生)이다. 이것은 언제나 성(性)의 자리에서만 가능하다 시공이 끊어진 그 자리가 바로 무생의 생, 즉 영원한 생이다.


 본래 생사는 둘이 없는 자리다. 만약 생겨나는 것이 있으면 죽는 것이 있게 되고 나는 것이 없으면 죽음도 없는 까닭이다.


 겁(劫)의 불길이 바다 밑까지 태우고
 바람이 고동쳐 산과 산이 맞부딪히더라도
 참되고 변함없는 고요한 그 자리
 그리고 그 고요한 그 즐거움인 근원의 마음자리가 항상 이와 같다.


 육조 혜능 선사는 생사가 본래 없음을 이와 같이 표현했다.


 

제5장 종교 - 3대 성인이 세상에 온 까닭을 아는가?

 

■ 자기 자신을 화복하는 길


 불교에서는 자기 마음의 근본 자리를 밝히는 것, 이외의 것을 외도(外道)라 하고 사법(邪法)이라 한다. 유교에서는 이단(異端)이라 하고, 도교에서는 방문(榜聞) 즉 정문(正門)의 반대라고 한다.


 그렇다면 스스로의 가치는 어떻게 회복해야 할까? 이 가치를 회복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예수, 공자, 석가다. 이들 3대 성인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멸심(生滅心)에서 본래 끊어진 자리를 본 것이다. 이것을 과덕(果德 :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공덕) 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나무 열매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닦을 때 바로 3대 성인이 깨달아 얻은 이 과덕을 가지고 씨앗으로 삼아야 한다. 만일 과덕 밖의 다른 것으로 씨앗을 삼는다면 그것은 미신이요, 외도가 된다.       
 그러므로 과(果)가 없는 인(因)이 없고 인이 없는 과가 없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한 것은 인과동시(因果同時)를 밝힌 것이다. 자연에서 그 예를 찾는다면 모든 초목이 선인(先人 : 꽃)과 후과(後果 : 열매)인 데 비해 오직 연꽃만은 꽃 속에 열매가 맺어 있어 인과동시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성불한 과덕과 일체중생의 망상심(妄想心 : 거짓과 삿됨, 아만과 뽐냄이 합하여 한 덩어리가 된 것)이 둘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마음의 생멸은 본래부터 일어나는 곳이 없는데 일어나는 것으로 망집(妄執 :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는 일) 하여 일체 중생은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사람을 평가할 때 지식을 가지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런데 지식과 지혜는 차이가 있다. 지식이 아무리 높다 해도 지혜는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식은 없어도 지혜는 최고로 발달한 사람이 있다. 물론 둘 다 갖추면 좋으련만 만약 그 중 하나만 선택하라면 지식 보다는 지혜가 훨씬 더 중요하다. 마음을 닦아 깨닫는 데는 지식이 크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얼마나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발심하느냐가 마음공부에서는 관건이 된다. 발심하여 한 생각 거두어서 생각이 일어난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우치면 누구나 3대 성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 종교는 바로 내 마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심에 대해 청담 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
 “불교나 기독교나 무엇이든 간에 종교는 내 마음이며, 내 마음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 형상 앞에 예불을 올리고 절을 한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종교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바다에 비유하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인 칠정은 바다의 파도와 같다. 파도가 일어나는 데서 청탁이 갈라진다. 맑은 물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지만 탁한 물은 배를 엎어서 사람을 죽이는 못된 작용을 한다. 그렇지만 젖(습 濕)는 성질 자체는 변함이 없다. 성인의 마음을 맑은 물이라 한다면 범부의 마음은 탁한 물이다. 그러나 물이 맑다고 더 젖고 흐리다고 해서 덜 젖는 것이 아니다. 물의 ‘젖는’성(性)은 물의 청탁을 떠나서 물이 본래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의 마음이나 범부의 마음이 똑 같다고 하고 그 성 자리의 똑 같은 원리를 깨달을 때 범부가 성인이 되는 것이다. 즉 물이 젖는다는 본래의 성품에서 본다면 하루 종일 바다에 바람이 불어 흙탕물이 튀어도 하나도 손해가 없다는 말이다. 밤낮 젖는 것인데 거기에 청탁이 어디에 붙겠는가. 젖는 성품 자체에는 청탁이 붙지 않는다.

 

 

■ 천당 지옥의 유치원 법문이 생긴 까닭은


 동양학의 3교인 유불선의 성인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고 인품을 과시하기 위해서?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마음속에 본래부터 내재해 있는 우주의 근원이요. 시공이 끊어진 자리를 알려 주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천당지옥의 유치한 법문’이 생기게 된 것이다. 현실 삶에서 천당과 지옥과 같은 인과법칙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3교 성인이 인류에게 가르친 교리는 결코 이것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오직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달아 이 세계가 있는 그대로 극락임을 알려 주러 온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성인의 가르침이 어떤 특정 종교를 믿으라거나 천당지옥을 믿으라는 것이겠는가. 아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 그 모든 것의 주체임을 확연히 알라는 것이다. 만약 자기 자신의 주체를 부정한다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은 것임을 알려 주려 한 것이다.


 현미경 아니면 세균을 볼 수 없고 망원경이 아니면 원거리를 볼 수 없듯, 인간의 어리석음은 성인의 경전을 통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경전을 통해 자기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그것을 근간으로 삼아 생활해야 한다.


 굳이 전문 수행인이 되어 입산수도를 해야만 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근기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선택하여 수시수처에서 공부를 하다 보면 밤새도록 가는 길에 해가 뜰 때가 올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도에 들어가는 문이 상중하의 구별이 있다 하더라도 들어가고 보면 한 자리요. 한 바탕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옛 성인의 말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발심(發心)은 선후가 있을지라도 도를 깨닫는 데는 앞뒤가 없다.”

 

 

■ 시공이 끊어진 자리


 “녹야원에서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49년간 법을 설했어도 한 글자도 설한바가 없다.”


 부처님이 49년 동안 횡야설수야설(橫也說竪也說), 즉 혀가 닳도록 설법을 해놓고도 자신은 단 한 글자도 얘기한 바가 없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성(性) 의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다.


 성의 자리는 다양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유교에서는 중(中)이라고 한다. 중이라는 것은 복판을 가리키는 중이 아니다. 여기에 앉아서 보면 서쪽이 되고 저기에 앉아서 보면 동쪽이 되고 이쪽에서 앉아서 보면 북쪽이 되고 저쪽에서 앉아서 보면 남쪽이 되는 자리로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중앙, 가운데라는 뜻이 아니다. 중앙의 중이 진중(眞中)이 될 수 없다. 서울이 우리나라의 중앙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충청도에서 보면 동쪽이고 함경도에서 보면 남쪽이고 강원도에서 보면 서쪽인데 어떻게 서울이 중앙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중’이란 시간과 공간이 끊어진 자리다. 이를 중용(中庸)에서는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중이다’라고 하고 동시에 “중이란 천하의 근본 우주의 핵심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라는 것도 시공이 끊어진 자리다. 우주는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는데, 시간과 공간이 나기 전, 우주가 생기기 전에 앉으신 분이 누구이겠는가. 그 분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주 창조주인 하나님인데, 기독교적 표현으로 말한다면 그 분이 시간과 공간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범부는 性의 자리를 ‘迷’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못난 놈 노릇을 하는 것일 뿐이다. 성인들은 다 똑같은 존재임을 한결같이 가르쳤다. 이러한 좋은 예는 기독교 성경 ‘산상수훈’편에 잘 표현되어 있다. 마음을 비우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하지 않는가. 마음을 비우는 자가 바로 성의 자리를 각파하여 시공이 끊어진 자리인 것이다. 

 

 

■ 우주 만유가 있는 그대로 평등하다.


 ‘맹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물건이 가지런하지 않는 것은 물건의 실정(實情 : 진리의 대명사)이다.”


 이는 산은 높고, 물은 깊고,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고, 조리는 새고, 바가지는 새지 않는 그대로 각각 평등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물질 위에서 평등을 찾으려고 하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마치 산을 깎아 바다를 메워야 하고, 따오기는 검은 물을 들여서 검게 만들어야 하며, 까마귀는 하얗게 만들어야 하고, 조리는 새니까 꿰매서 새지 않게 해야 하며, 바가지는 새지 않으니 새도록 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런 식이라면 아무리 평등을 찾으려고 해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종교적인 견지에서 평등을 찾는다면 정신을 제일로 보고 물질을 그 다음으로 보기 때문에, 예컨대 정신이 허공이라면 물질은 삼라만상이다. 허공은 진리를 비유한 것인데, 이렇게 모양이 끊어진 허공 속에서 평등을 찾기 때문에 산은 높은 대로 평등, 바다는 깊은 대로 평등, 따오기는 흰 대로, 까마귀는 검은 대로, 바가지는 새지 않는 대로, 조리는 새는 대로 평등, 즉 우주 만유 전체가 있는 그대로 평등한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평등이다.


 종교의 종(宗)을 풀이하면 ‘갓 관’ 밑에 ‘보일 시’ 한 관시(冠示)다. 갓은 제일 꼭대기에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예기(禮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갓이 아무리 헌 것이라 하더라도 발에다 쓰는 것이 아니다.”


 즉 ‘관시’의 뜻은 제일 꼭대기 도리로서 보이는 것이다. 꼭대기 도리는 예수님이 보이신 성부 자리와 유교에서 보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그 性의 자리다. 성이나 도나 교(敎)나 세 글자가 궁극에서는 같은 것이다.


 교(敎 )는 글자그대로 선효후문(先孝後文)이다. 효도 효 변에 글월문으로 행동 중에는 효가 으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효는 백행의 근본이기 때문이


다.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어른을 공경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 근본이 어지러워서 지말(枝末)이 다스려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종교란 우주와 인생의 핵심체인 최고의 진리를 보여서 행동을 먼저하고 학문은 뒤에 해야 한다.

 

 

■ 화엄학의 가르침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


 기독교의 가장 큰 특성은 신성과 인간성을 구분한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으로 나누어, 하느님은 창조주,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관계를 설정해 놓고 인간과 신성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 차이를 두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성 회복이라는 희망을 갖게 해준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성부, 성신, 정자의 삼위일체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 사후에 그 제자들이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인류의 구세주일 수 있었는가를 냉철하게 규명해 본다면 바로 삼위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인 성자가 성부 자리, 성신 자리와 일체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성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불교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없지만 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용어가 많다.
법(法), 보(報), 화(化) 삼신으로 이 셋을 하나로 보는 것이다. 법신이 성부의 자리, 보신은 성신 자리, 화신인 석가모니불이 성자 자리다. 다시 말해서 천강(千江)에 비치는 그림자 달이 화신이라면 달 광명은 보신이며 하늘에 있는 달은 법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49년간 법을 설한 석가모니는 화신인 그림자 몸이다. 교리적으로는 같은 부처지만 최초에 우주관, 인생관을 타파해서 설한 화엄학은 법신의 소설(所說)이요, 무지한 대중을 위해 평생 설하신 화엄학을 부연한 팔만대장경은 화신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화엄학에서는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 말세라도 정신을 차리면 도에 이른다.


 불교는 본연의 가르침인 대승 교리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는 그렇지를 못하고 소승적 기복에만 치우쳐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복으로만 흐른다는 것은 대개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 종교를 믿을 때 나오게 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측면은 어느 종교에서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부활해서 구원할 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늘에 올라갈 사다리가 없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마음 약한 중생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아이쿠, 내가 영원히 살려면 믿어야 되겠구나.’
 예수의 근본정신은 허심자수복(虛心者受福 ), 즉 마음을 비우는 자가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네가 돌이켜서 동자(童子)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도 했다.
 여기서 동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동자란 천진난만한 어린애를 말하는데, 어린애의 마음은 바로 성인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성인의 마음은 곧 그 순간의 마음, 즉 앞뒤가 다 끊어진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 도를 통한 사람도 그와 같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 말씀의 근본정신을 모르고 예수가 구원해 준다고 하니 자기 스스로 구원할 생각은 않고 예수만 부르며 의지하려고 한다. 이것 또한 종교의 기복적인 경향이라 하겠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칠성각에 기도하며 “아들 낳게 해 달라”, “남편 출세시켜 달라”하는 것 등이 모두 기복이다. 그러나 몽매한 중생을 하루아침에 도의 자리에까지 끌어올릴 수가 없으니, 신심을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기복은 어느 종교에서나 의도된다.


 다만 문제는 기복에만 치우치고 여기에 머무는 경향이며, 여기서 마땅히 벗어나야 한다. 청정한 자기 마음의 본체를 밝혀 의타(依他)를 정화하고 자기해탈의 이타행(利他行)을 이루는 것이 올바른 깨달음의 길이다.

 


■ 앞으로 다가올 미래, 종교의 교파를 넘다.


 세상이 거칠고 험악해진 것은 불교의 자비, 기독교의 박애, 유교의 인 등과 같은 종교의 덕목들이 현실에서 실천되지 못한 까닭이다. 그리하여 청소년들의 탈선은 날로 흉포화하고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신라 화랑의 오계를 연마시키는 화랑의 집이 있고 충무수련원이 일선학교 교육에 연계되어 있으면서도 학생들의 탈선이 많아진 것은 오늘의 도덕 교육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가 치닫고 있는 산업화에 따른 인간의 기계화와 노예화, 물질문명의 풍요 추구에 역점을 두는 가치전도의 인생관 등에서 생명 경시의 풍조가 나타나고 있다.

 

 학교교육만으로 도덕의 덕목을 펼치기 어려운 현상이기 때문에 종교적 차원의 신앙심을 사회 전반에 심어 주는 일이 시급하다. 그래서 오늘의 종교는 내세의 영혼 구원이나 수도를 통한 자기만족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사회교화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종교가 대체로 지향하는 신앙은 자신의 수도를 우선으로 하는 것이지만, 현대 사회처럼 종교윤리가 절실한 때도 일찍이 없었다.


 요즘은 세태를 어수선하게 하는 정국의 경색이나 치도(治道)의 기강 문제도 종교적 신앙 차원의 수도가 결핍된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주관, 인생관의 핵심이 되어야 할 우주 생성 이전의 본래 자리를 보지 않고 떠들어대는 문화나 정치는 위선이고, 썩은 것일 수밖에 없다.

 도가 생활화될 때 인간세계는 그 자체로 시공이 끊어진 극락의 낙원이 된다. 모든 정치나 교육이나 문화는 이 같은 도에 합치되는 마음을 텅 비운 자리에서 추진해야 올바른 가치를 지닐 수 있다.

 현재의 종교는 쓸어 없애버려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신앙인끼리 괄목상대하고, 네 종교, 내 종파가 옳다며 적대시하며, 이교인(異敎人)이라 해서 동물처럼 취급하는 천박한 종교의 벽은 무너진다는 뜻이다. 장벽이 허물어지면 초종교(超宗敎)가 될 것이다. 김일부 선생은 유불선이 하나가 된다고 했고, 강증산 선생도 그렇게 예언한 바 있는데, 이 예언은 1980년대부터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까지 서로 자기만 옳다고 했던 교파들이 문을 열고 서로의 장점을 찾아 상봉의 기회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새싹이 나기 위해서는 그 자체는 썩어야 한다. 밝은 면과 좋은 것은 남겠지만, 배타적이고 아집적이고 권력 쟁취의 무대가 된 각 종단이 새로운 출발을 기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요소를 부단히 제거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혼탁한 사회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정신기강을 바로잡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종교야말로 썩어가는 사회의 정화를 위한 절실한 소금이며, 인류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근원적인 도를 지켜줄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다.


 대체로 종교 신앙이란 인간 현실의 지고선(至高善)을 추구하는 정신 수양과 윤리관, 철학관의 확립을 일깨울 뿐만 아니라 최고 수준의 경제적 인간, 최고 이성의 도를 계발하고 실천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