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패 / 박이화
화투라면
꾼 중의 꾼이었던 나도
다 늦게 배운 고도리 판에서는
판판이 깨어지고 박살납니다.
육백시절의
그 울긋불긋한 꽃놀이패를
그러나 고도리 판에서는 만년 똥패를
미련 없이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늘상 막판에 피박을 쓰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나는 저 한물간 낭만주의에 젖어
이 시대의 영악한 포스트모던에 영합하지 못했던 겁니다.
사랑도 움직인다는 016 디지털 세상에서
나는 어리석게도 아날로그 추억에
젖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 내 생에도
버리지 못하는 패가 하나 있습니다.
젖은 꽁초처럼 미련 없이 던져야 하는데도
홍도의 순정으로 도무지,
내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패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더 이상 히든패가 아닌 세상!
잊어야 하는 데도
언제 어디서나 흥얼거려지는 당신
흘러간 동숙의 노래처럼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이라면
당신은 분명
내 생애 최악의 똥패인지 모릅니다.
?박이화 시집 『그리운 연어』(애지, 2006)
박이화
경북 의성 출생.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그리운 연어』.
구르메 달 가드키 / 박이화
봄이었던 거라
국화주, 매화주, 이화주
꽃이 술을 마셨는지 술이 꽃을 마셨는지
좌우당간 꽃도 술이 되는 세상에
억조중생 구제를 위해 면벽수도 하던 지족선사님
그 십년불와에 주화입마되셨는지
상기병통에 정신이 혼미해지셨는지
그만 술 중의 술 방중술에
십년 염불 도로아미타불 공염불이 되었던 거라
어즈버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졌던 거라 말발타살발타
허나 알고 보면 그는 이미
만중운산 구름처럼
몸과 마음의 경계가 없었던 거라
천지불인 무위하는 자연처럼
별유천지비인간계의 선정에 노닐었던 거라
그리하여 무주강산 달밤에 빈 배의 노를 젓듯
유유히 여인의 뱃전에 노를 저었던 거라
유유자적 구만리 뱃길을 열었던 거라
아무렴, 그에게는 해탈도 열반도
이화에 월백하는 것이고 보면
구르메 달 가드키 가는 것이고 보면
더욱이 때는 봄밤임에랴
소쩍새 만공산 좆죠좆죠 울어쌓는
달빛 질퍽한 봄밤임에랴
四時(사시) / 도연명 陶淵明(365 ~ 427)
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峰
秋月揚明輝
冬嶺秀孤松
오랜동안 지족선사를 흠모해오던 황진이가 마침내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운우지정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날밤 지족선사와 황진이는 나란히 누워 있다가, 지족선사가 슬며시 자신의 손을 황진이 아래에 가져갔는데, 황진이는 지족선사와의 밤에 설레어 촉촉히 젖어있던 것이었습니다.
이에 지족선사가 시심(詩心)이 발동하여,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이로다" - 봄비에 젖어 사방 연못이 물로 그득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절세의 기생 황진이가 지족선사의 아랫도리에 슬며시 자신의 손을 가져갔는데, 지족선사가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바위 봉우리처럼 씩씩하게 서 있었고, 털이 구름처럼 무성하였는데, 이에 황진이도 시심이 발동하여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峰)이옵니다." - 여름 구름에 기이한 봉우리 많이도 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둘은 깊은 관계를 가졌고, 지족선사가 마지막 남은 힘까지 짜낸 후, 돌아 누우며, 가을 달빛이 비추는 것을 보고,"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로다" - 가을 달이 휘영청 밝기도 하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황진이가 격정의 여운 속에 슬며시 지족선사의 아래에 손을 가져갔더니, 힘이 다 한 봉우리가 고송처럼 작아진 것을 느끼고는,"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이옵니다.' - 겨울 산마루에 외로운 소나무가 참으로 빼어났사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野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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