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상시

남사당 / 노천명

경호... 2012. 5. 28. 00:59

 

 

 

 

 

 

남사당 / 노천명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같은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졸아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 치마를 둘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야 장터 어는 넓은 마당을 빌러
<람프>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된다.

 

산 너머 지난 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씨이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소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고별 / 노천명

 

어제 나에게 찬사와 꽃다발을 던지고
우뢰같은 박수를 보내주던 인사(人士)들
오늘은 멸시의 눈초리로 혹은 무심히
내 앞을 지나쳐 버린다.

 

청춘을 바친 이 땅
오늘 내 머리에는 용수가 씌어졌다.

 

고도에라도 좋으니 차라리 머언 곳으로
나를 보내다오.
뱃사공은 나와 방언이 달라도 좋다.

 

내가 떠나면
정든 책상은 고물상이 업어갈 것이고
아끼던 책들은 천덕꾼이가 되어 장터로 나갈게다.

 

나와 친하던 이들. 또 나를 시기하던 이들
잔을 들어라. 그대들과 나 사이에
마지막인 작별의 잔을 높이 들자.

 

우정이라는 것, 또 신의라는 것,
이것은 다 어디 있는 것이냐
생쥐에게나 뜯어 먹게 던져 주어라.

 

온갖 화근이었던 이름 석 자를
갈기갈기 찢어서 바다에 던져버리련다.
나를 어디 떨어진 섬으로 멀리멀리 보내다오.

 

눈물 어린 얼굴을 돌이키고
나는 이곳을 떠나련다.
개 짖는 마을들아
닭이 새벽을 알리는 촌가(村家)들아 잘 있거라.

 

별이 있고
하늘이 있고
거기 자유가 닫혀지지 않는 곳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