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나무의 철학 외/조병화

경호... 2012. 4. 27. 23:54

 

나무의 철학   

                                 -조병화(1921~2003)


살아가노라면

가슴 아픈 일 한두 가지겠는가


깊은 곳에 뿌리를 감추고

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사는 나무처럼

그걸 사는 거다


봄, 여름, 가을, 긴 겨울을

높은 곳으로

보다 높은 곳으로, 쉼없이

한결같이


사노라면

가슴 상하는 일 한두 가지겠는가

 

 

 

 

 

 

추  억 

 

잊어 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 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초  상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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