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問/周易

다석의 주역강의(5) - 팔괘강의(4): 마지막

경호... 2012. 2. 13. 02:40

(팔괘강의 - 4)
 동양에서는 맨 처음에 이 여덟 가지를 하늘 아래 걸어놓았는데, 우리들도 한 번 맞추어 봅시다.

건진감간(乾震坎艮) 곤손이태(坤巽離兌),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외웠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건감간진(乾坎艮震) 손리곤태(巽離坤兌), 이 순서는 누가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여기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

큰아들은 제켜놓고 막내딸은 내버려두고 어머니를 대접하고, 그러고 나서 막내를 보러 가는 여기에

무슨 뜻이 있는지 모릅니다. 무슨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생각하고 뜻을 알아내야 합니다. 무엇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종단에는 우리가 바르고 올바르게 바른 대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옛날에 복희씨가 한 것처럼 장난을 했습니다. 이 사람의 장난입니다.

그 장난을 문왕팔괘에 맞춰 다시 해보겠습니다.

우선 맘, 울, 물, 임 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맘이 울 이유를 비워두어야 합니다. 줄곧 가는 맘으로 울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참의 한 자리에 도달하기 전에는 참으로 울어대야 합니다.

무슨 종교, 신앙, 철학, 주의를 거치더라도 정(正)에 사는 길은 이 상대세계에서는 변역(變易)입니다.

무슨 변역을 사모하자는 것도 교역(交易)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자유와 평등을 살려 나가자는 것입니다. 맘에서 울면 우는 맘을 이마에 이어야 합니다.

왜 이마냐 하면, ‘나’를 대표하는 이 이마를 반드시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맘의 맘 울음을 다 정(正)에 둔다는 것은, 곧 맘 울음을 이마에 인다는 것은 가장 잘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책임을 등에 지고 머리에 인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이마와 함께 나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몸 발 불 눈’의 몸뚱이는 땅입니다. 이 땅을 딛고 우리는 서 있습니다.

우리가 발로 밟고 있을 때 내 몸뚱이가 나아가는 것은, 내 발로 내가 밟아나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날 밟을 수 있습니다. 이 발이 내 몸을 밟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맘을 밟고 맘의 장소를 잡습니다. 몸뚱이의 한 끄트머리가 가장 열을 내서 밟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우리 맘이 몸과 반대의 길을 밟는 것도 무슨 까닭이 있습니다.

문왕팔괘에 맞춰 이 사람도 웬일인지 이렇게 장난해보았습니다.

‘맘 울 물 임’‘몸 발 불 눈’이라고 말입니다.

눈은 바다와 같이 시원하고 살필 것을 살핍니다. 감출 것을 감추기도 합니다.

밝힐 것을 밝히기도 합니다.

몸이 발로 밟고 나가는데, 눈이 자세히 보고 ‘나’라는 발이 밟을 것을 힘껏 밟아서 발과 불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괘사한다는 말입니다.

괘사를 궤변이라고 하여서 내동댕이쳐도 좋습니다.

미친놈의 말에서도 택할 것이 있으면 택할 것입니다.

괘사나 궤변 가운데 이치가 맞는 말은 들어도 나중에 손해가 없습니다.

이 다음에 가서 들으려 해야 들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의 쌍말도 들어 두는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됩니다.

 이 세상 살림은 왜 그런지 꿈 같은 정신활동을 버리지 못하고 자세히 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몸살림을 열심히 조심해서 합니다.

부질없는 몸살림에서 벗어나, 소리 없고 움직임이 없는 정신적인 일도 잘 챙겨 맘살림을 훌륭히

꾸며야 합니다.

 

 「누가복음」16장에‘남에게 충실하지 않으면 너를 누가 믿겠는가?’구절이 있습니다.

남의 일에 충실하면 하느님 아버지도 믿어줍니다.

부자 집이건 자식 집이건 남의 집 살림이건, 내 살림처럼 충실해야 합니다.

남의 살림에 충실하지 않으면 내 살림도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유치원 때 장난감을 갖고 함께 놀던 동무들이 정말 서로 알고 서로 배우고 서로 아껴주면,

나중에 장성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인물 노릇을 합니다.

 

 ‘맘 울 물 임’‘몸 발 불 눈’입니다.

모든 것을 밟되, 내 몸을 먼저 발로 밟아서 눈을 밟혀야 합니다. 몸을 밟는 눈입니다.

또 우리의 영원한 사명은 맘으로 우는 것입니다.

불역(不易)의 정(正)을 바로 잡아 가자고 울어야 합니다. ‘맘 울 물 임’을 하여야 합니다.

 

“네 눈이 어두우면 네 몸이 얼마나 어둡겠는가?”여기에서 눈은 정신을 가리킵니다. 이런 장난을 통해보면, 이상하게 『성경』에서 이 뜻을 더 힘있게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아이들 장난이라도 그냥 내버려둘수 없습니다.

 

 ‘無思也 無爲也’생각하는 것이 없고 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도저히 생각하는 것이 없습니다. 요새처럼 잔꾀를 낸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남을 속이는 꾀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남을 속이는 꾀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역(易)의 생각이 ‘無思也 無爲也’입니다. 생각할 것도 하는 것도 없습니다.

 

 ‘成而遂通’능률적으로 통하여야 합니다. 장님이 점을 치는 산통을 흔들 때 이런 소리를 합니다.

 

 ‘知天下之故’천하의 까닭을 알아야 합니다. 천하의 까닭이란 천하의 길, 천하의 일을 말합니다.

천하라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하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상당한 이유와 까닭이 있습니다. 변역(變易)의 이치를 알게 됩니다.

이 까닭을 알고 올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최제우가 동학을 할 때 하느님만 보면 ‘造化無盡 永生不滅’한다고 말했습니다.

知는 곧 萬事知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요전에 물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는데, 이 물과 하나가 된 것같이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의 생명은 자꾸 잘 되어 나가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없다는 말들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각이 있다 없다는 말을 합니다.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면 생각이 없는 것이다.

곧 思無思합니다, 따라서 爲無爲입니다. 생각하는데 생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이 있다고 아주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 않는 것은 아주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고서야 꼭 할 것만 하고 안 할 것은 안 하게 됩니다.

 

無爲也처럼 어떻게 할까 걱정하지 않으며 無强爲처럼 억지로 않고 자연히 되도록 하며,

無相思처럼 상대적 생각을 하지 않고 깊은 생명줄을 저절로 잡고 窮神하는 데 매이고 싶습니다.

단지 體物來로‘머사니’를 드러낼 뿐입니다. 無爲也는 無强爲也입니다.

 

 억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알아야 합니다. 미리 좀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이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알아도 엉켜져서는 안 됩니다.

 

(이상 출처는 현암사에서 나오고 다석학회에서 엮은 《다석강의》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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