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問/周易

다석의 주역강의(3) - 팔괘강의(2)

경호... 2012. 2. 13. 02:37

(팔괘강의 - 2)
 요새 상투를 쓰고 갓 쓰고 주역을 중얼거리면 卦辭한다고들 합니다.

이러저리 둘러대기 잘한다 해서 괘사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보게 되었습니다.

 

 괘사를 부린다는 말은 주역의 卦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도 있습니다. 본래의 뜻은 경전을 통해 사람이 힘있게 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 고마움을 주어 함께 혜택을 입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제각기 해석하여 중심에서

벗어난 말을 하기 때문에 이런 말 저런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어느 것이나 경전은 福音입니다. 이런 복임이 권력이나 사람의 장난 때문에 조작되어 괘사한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성경 때문에 동양의 경전이 내버려지고 무가치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역이라는 동양의 경전은 미신이 되었고, 알기 어렵다는 핑계로 괘사한다는 욕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보기에는 어려운 인생문제를 알기 위해 말씀을 알려는 것이 쉬울 까닭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과 같이 주역의 말씀 줄거리를 알려면 참 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 전체의 문제로서 온 인류가 찾는 일이니 만큼 적어도 그만한 대비를 하고 동양의 경전도 공부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당장 알아서 써먹겠다고 하고 덤비니 그 모양이 됩니다.

사물의 발전된 것 이상을 알려고 하고, 평등과 자유의 정신인 窮神知化를 하며,

종국에는 神까지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유신론과 무신론이 다 우상입니다.

인류가 없어진 다음에 유신을 하고 무신을 할 수 있습니까?

어디 누구 앞에서 유신론과 무신론에 대해 입을 열 수 있단 말입니까? 안 되는 말입니다.

 

 인류 전체가 궁신지화하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것이 종단에 어떻게 되는지가 우리와 아주 무관한 게 아닙니다.

끄트머리를 묻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한 부분을 주장합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전체의 한 부분만 주장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때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려고 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을 생각해서 소용없다고 합니다. 소용이 없는지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만물의 이치에는 세 사지 모습이 있습니다.

첫째가 不易이오, 다음이 變易입니다. 그 다음은 交易입니다.

변천하는 것이 사실인데 변하지 않고 영원히 가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참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절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正의 참을 보려고 합니다.

정이 세상에 없는데도 이것을 찾는 것은, 우리가 참 을 하려 할 때 그 범위를 바로잡으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바로잡히는 이것을 正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붙잡지 않고는 본디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不易입니다.

항상 갈 길을 바로 잡고 나갈 길을 가면, 결국 바로 잡히는 것이 있음을 믿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조건의 正 때문에 최후의 승리는 正義에 있다는 말이 생깁니다.

세속에서 말하는 최후의 승리가 정의에 있다는 것은, 내가 옳으므로 내가 이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심판 받는 말입니다.

정의가 최후의 승리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정신줄을 ?잡고 있습니다. 정신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그대로 있는 것이 바로 되어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무엇인지 제멋이 있습니다.

인생에는 무엇인지 제멋이 있고, 우주에도 무엇인지 제멋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제멋이 있다는 것은 나 하나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깨뜨려야 합니다.

깨뜨리는 것이 내적으로 분명히 제멋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不易은 늘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正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變易의 꾀를 도모합니다.

변역의 길을 통과할 때는 우리 앞에 正으로 나서도 죄다 변역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목적에는 反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많이 하는 것은 서로 싫지 않은 交易입니다.

남에게서 무엇을 받으면, 그만큼 나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으레 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교역입니다. 거로 바꾸고 장사를 합니다.

요즘 장사는 없는 물건 골고루 나누어 쓰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남겨 먹겠다는 것입니다.

남겨 먹겠다고 교역하면 공평하게 안 됩니다.

진심으로 이것은 남는 것이니까 없는 집 사람 보고 갖다 쓰라고 하거나, 자신에게는 이것이 있으니

저것을 갖다 쓰라고 하면, 궁극적으로 사람에게는 거저가 없으므로 부끄럽지 않게 남에게 받은 만큼

보답하게 됩니다. 이것이 교역입니다. 바꾸는 것이니다.

그래서 남겨 먹자는 것에서는 교역을 원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원수에게 눈에는 눈, 코에는 코, 입에는 입으로 갚으라고 한 것도 일종의 교역을

뜻합니다. 장사하는 자는 도리어 주면 주었지 남기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물질로 남겨 먹는 이상으로 진리로 남겨야 한다는 정신이라면 다 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희들끼리 선사하는 경우는 사치가 됩니다. 남겨 먹자는 것도 물론 있습니다.

저 집에서 백 원어치 보냈으니 우리는 구십오 원어치 보내고 남겨 먹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요전에 천 원어치 받았으니 나는 적어도 천오백 원어치를 보내야겠다고 선물을 합니다. 이것이 제 자랑과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도 걱정이니다. 교역은 有無相通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실비에 가까운 것이 제일 正에 가까운 교역입니다. 이것은 요샛말로 合입니다.

합해서 지낼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달리 바꾸면 변역이 됩니다. 이것을 반대할 것 같으면 不易이 됩니다.

이것이 상체되어 못 나가는 것 같은가 하면 그대로 또 나갑니다.

나가게 되는데 그때그때 바른 대로 가깝게 되어 나가는 것이 소위 변증법입니다.

생각과 말이 正反으로 나갑니다. 자꾸 변역하는 것은 시대에 바로 나타내 쓰지 못합니다.

바로잡으려 할수록 심하게 변합니다. 그래서 반대로 변하지 않는 것을 바로잡으려고 합니다.

자꾸 사람이 바로 잡으려는 것을 일부러 바로 잡지 못하게 변역을 내기도 합니다.

 

 正앞에 反이 있습니다. 반대가 많으면 점점 더 하지 않습니까?
 어지간히 거저 나가다가 나가서는 合합니다. 변증법, 이것은 진리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면 易이라는 것은 번거로운 것입니다. 이 번거로운 역, 교역의 본원이 불역입니다.

이것이 단시일 내에 변역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종단엔 ‘정’을 붙잡자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꾸 변역의 길을 갑니다.

자꾸 반대되는 것을 우리는 만납니다. 만난 것을 바로잡고 자꾸 변역의 길을 갑니다.

만난 것을 바로잡고 자꾸 正反, 정반 합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변증법이라는 것도 이 易 하나를 갖고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