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復次 須菩提 是法平等無有高下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以無我 無人 無衆生 無壽者 修一切善法 則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 說非善法 是名善法"
淨心行善分 第二十三
復次須菩提야 是法이 平等하야 無有高下일새 是名阿?多羅三?三菩提니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로 修一切善法하면 卽得阿?多羅三?三菩提하리라 須菩提야 所言善法者는 如來가 說 (卽)非善法일새 是名善法이니라
금강경 강의(23)/해안 스님
淨心行善分 第二十三
復次須菩提 야 是法 이 平等 하여 無有高下 일새
부차수보리 야 시법 이 평등 하여 무유고하
是名 阿뇩多羅 三먁三菩提 니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로
시명 아뇩다라 삼먁삼보리 니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修一切善法 하면 則得阿뇩多羅 三먁三菩提 니라
수일체선법 하면 즉득아뇩다라 삼먁삼보리
須菩提 야 所言善法者 를 如來說卽 非善法 일새 是名善法 이니라.
수보리 야 소언선법자 를 여래설즉 비선법 일새 시명선법.
①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다(是法平等 無有高下) :
불교에서 평등이라 함은, 높고 낮고, 깊고 얕고, 크고 작고, 많고 적고 하는 차별이 없는
- 한결같이 법의 근본이 되는 원리.., 만유의 본체를 말하는 것이다.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인간은 물론 축생 · 아수라에 이르기까지도 평등하고 무차별한 본질을 지니고 있음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아는 마음자리의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지극히 맑고 깨끗하며(탐진치가 일어나지 않아)
얽매임이 없어야만(탐진치에 의한 애욕이나 애착등이 일어나지 않는 마음자리에서) 평등심을 얻을 수 있다.
부처와 중생이 다른 점이란,
부처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에서 해탈하고 있으며 다른 사물에 흔들림이 없지만,
중생은 제 몸이나 마음에 알맞는 경계,
즉 순경(順境)을 벗어날 때에는, 탐욕이라는 번뇌가 생기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경계,
즉 위경(違境)일 때에는 진(賑)의 번뇌가 생긴다.
이러한 순경이나 위경에 있을 경우, 높고 낮음 없는 평등을 지키지 못 하고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 같은 사상(四相)과 함께,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觸) · 법(法) 같은 육진(六塵)에 물들고, 더럽혀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중생은 자기의 자성이 불성인 줄 알면서도, 생각과 행동이 바르지 못 하게 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이러한 육진(六塵)과 사상(四相)에 얽매이고, 집착하는 한, 절대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보리를 이룰 수 없다 라는 내용에 대해 _'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과 구경무아분(究竟無我분), 무법가득분
(無法可得分)'에 나오는 내용은 모두 다르다.
제 13.여법수지분은 법도 없고 부처도 없으리라는 것에 대한 의문이고,
제 17.구경무아분의 후반은 선혜선인(善慧 仙人)이 연등부처님에게서 수기를 이룬 바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며, 끝으로
제 22.무법가득분에서는 닦을 것도 있고 증득할 것도 있을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② 선법(善法) :
선법이란 생활(수양)에 있어서 자기를 이롭게 하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악법(惡法)과 반대되는 것이다.
선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불교에서 기본이 되는 것으로 우선 말하는 것으로 오계(五戒)와 십선(十善)이
있다.
오계(五戒)로는
① 중생을 죽이지 말라, ② 남의 물건을 함부로 훔치지 말라, ③ 음란한 짓을 하지 말라,
④ 거짓말을 하지 말라, ⑤ 술을 마시지 말라 등 다섯이며,
① 살생하지 말 것, ② 도둑질하지 말 것, ③ 사음하지 말 것, ④ 함부로 망녕된 말을 하지 말 것,
⑤ 두 혀로 말(이간질 하는 말)을 하지 말 것, ⑥ 욕하지 말 것, ⑦ 꾸민('외곡 · 포장'한) 말을 하지 말 것,
⑧ 탐욕을 부리지 말 것, ⑨ 성내지 말 것, ⑩ 사견(邪見)을 내지 말 것 등이다.
이상과 같은 선법들은, 모두 '착한 생활 · 착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고,
또한 그날 그날을 반성하여 일상생활에 실천한다면,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며,
이 모두는 따로 해야하는 것이 아닌, 둘이 아닌, 별개의 것이 아닌 것이다.
더 나아가,
삼학(三學)이란 도를 닦아서 깨달아야 할 세 가지 '계학(戒學) · 정학(正學) · 혜학(慧學)'을 말하는 것으로,
계학과 정학을 거쳐서 비로소 혜학에 이르고, 혜학에서 미계(迷界)의 번뇌를 없이 할 수가 있다는 불가의
가르침이다.삼학(三學)
한편 육도(六道)의 내용과, 행함(行)을 강조한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행(行),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정진 · 선정' 등은, 부처님의 수행가르침(지침서)인 것이다.
삼학(三學) :삼무루학(三無漏學) :
세 가지「戒(계), 定(정), 慧(혜)」의 흐르고 새어 나감이 없이 닦아 감을 말한다.
法界體性(법계체성)을 지키지 못하고, 망녕된 생각이 쉴새 없이 흘러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공부에,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곧「계율과 선정과 지혜」가 그것이다. 이것을 三學(삼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세 가지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고, 서로 통하고 같이 이어진 것이다.
※ 주석.
다시 또 수보리야,
이 법이 평등하여 높고낮음이 없을새,
이를 아뇩다라삼먁 삼보리라 이름한것이니,
나도없고 남도없고 중생도없고 수자도, 없음 으로써,
일체 착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를 얻나니라.
수보리야 말한바 착한 법이란 것은,
여래의 말로는,곧
착한 법이 아니라, 이 이름이 착한법 이니라.
※ 해설.
위에서 여러번 말한 바와같이 불법은 마음법이다.
그러므로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도 마음법 이니,
이 법은 성현이나, 범부나,더하고 덜함이 없고,
깨친 이나 깨치지 못한 이와, 있고 없음이 없고
사람이나 곤충이나, 높고 낮음이 없이,
본래 평등한 것이요, 본래 족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와 중생이 다른것은,
부처는 깨끗한 본마음 그대로 일체,거슬리는 경계나, 순한 경계에도 물들어 더럽히지 않고,
중생은 본마음을 지키지 못하고.일체 역순(逆順) 경계에 부딪치는 때마다,
부딪치는 곳마다 변하고 변하여, 더러워 지므로,
자기자성이 부처인줄 알면서도, 앎과 행이 일치하지 못하나니, 이것이 걱정인 것이다.
예를들면, 모든 법의 공한 이치를 확실하게 깨달아,
자기자성이 부처님을 본 사람에게 향하여, 어떤 사람이 와서 머리를 좀 빌려 라고 청하는 이가 있다하면,
주저하지 않고 얼른 허락할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것이 곧 깨침과 행이 일치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곳 아뇩보리를 성취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곳 부처를 이루지 못한, 부처인 중생이다.
이것이 곧 이치로는 사상(四相)이 공한것을 알고,
입 로나 붓 으로는 얼마든지 공한것을 말하고, 기록 하지마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딴판이란 말이다.
이러므로 약간의 공리(空理) 를 알았다고 (내노라) 하지말고,
(선지식이다) 자처를 하지말고, 육도만행의 온갖 선법을 닦아,
역순 경계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물들지 않고,
때를 따라,처소를 따라 중생의 근기를 맞추어 자유자재 하여사,
이것을 가히 수행한 사람 이라고 이름할 것이요,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를 얻었다 이름할 것이니.
선한법을 닦아도 선한 법에 무심 함으로 선법이 아닌것이다.
逆順 거꾸로 된 차례(㉡차례
㉢번
')" onmouseout=tooltipOff() href="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1-10-01-02" target=_blank ;>次㉡조목
㉢본보기
')" onmouseout=tooltipOff() href="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1-04-19-01" target=_blank ;>例). 순종(㉡좇다
㉢따르다
')" onmouseout=tooltipOff() href="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1-07-28-01" target=_blank ;>順㉡일하다
㉢조용하다
')" onmouseout=tooltipOff() href="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1-09-21-05" target=_blank ;>從)과 거역(㉡거절하다
㉢어기다
')" onmouseout=tooltipOff() href="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2-01-12-02" target=_blank ;>拒㉡거역하다
㉢맞이하다
')" onmouseout=tooltipOff() href="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1-08-22-03" target=_blank ;>逆). 순리(㉡좇다
㉢따르다
')" onmouseout=tooltipOff() href="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1-07-28-01" target=_blank ;>順㉡다스려지다
㉢깁다
')" onmouseout=tooltipOff() href="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1-04-36-02" target=_blank ;>理)와 역리(㉡거역하다
㉢맞이하다
')" onmouseout=tooltipOff() href="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1-08-22-03" target=_blank ;>逆㉡다스려지다
㉢깁다
')" onmouseout=tooltipOff() href="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1-04-36-02" target=_blank ;>理). 순연(㉡좇다
㉢따르다
')" onmouseout=tooltipOff() href="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1-07-28-01" target=_blank ;>順㉡인하다
㉢연분
')" onmouseout=tooltipOff() href="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2-08-23-09" target=_blank ;>緣)과 역연(㉡거역하다
㉢맞이하다
')" onmouseout=tooltipOff() href="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1-08-22-03" target=_blank ;>逆㉡인하다
㉢연분
')" onmouseout=tooltipOff() href="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2-08-23-09" target=_blank ;>緣)
空理 ①현실(現實)에서 동떨어진 이론(理論) ②근거(根據)가 없는 이론(理論)
【언해본】
“또 須菩提야! 이 法은 平等하여 높은 것, 낮은 것이 없으니 이 이름이 阿?多羅三?三菩提니,
아도 없으며 인도 없으며 衆生도 없으며 壽者도 없는 것으로 一切의 착한 法을 닦으면 阿?多羅三?三菩提를
얻으리라.??
“須菩提야! 이른바 善法은 如來가 이른 것이 곧 善法이 아니라, (다만) 이 (그) 이름이 善法인 것이다.??
【범어본】
그리고 또 須菩提여, 實로 이 法은 平等하여 그 가운데는 어떠한 差別도 存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無上正等覺은, 無我性에 의해, 無衆生性에 의해, 無壽者性에 의해, 無人性에 의해 平等하며,
모든 善法에 의해 現實로 깨달아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須菩提여, 善法, 善法이라는 것은 法이 아니다라고 如來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善法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몽고본】
또 수부티여, 法은 바르고 平等하다. 그 중에 不平等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無上正眞圓滿菩提라 말해지는 것이다.
그 無上正眞圓滿菩提의 果는 我도 없고, 有情도 없고, 壽命도 없고, 人도 없고, 平等도 없다.
一切의 모든 참된 法에 의하여 分明하게 圓滿하게 깨달을 것이니라.
수부티여, 그러나 참된 法, 참된 法 하지만 事實은 그런 것은 없고 다만 그 이름이 참된 法일 뿐이니라.
【티베트본】
“또한 쑤부띠여, 이 법은 同等하여 아무런 不平等도 없다.
그러므로 위없이 올바르고 圓滿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위없이 올바르고 圓滿한 깨달음에는 뭇 삶도 없고
영혼도 없고 개인도 없어 평등하다. 그것은 이들 모든 착한 법에 의해서 바르고 圓滿하게 깨달아진다.
쑤부띠여, 이들 ‘착한 법, 착한 법’ 이라고 하는 것은 如來가 법이 아닌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착한 법’ 이라고 한다.”
【용성】
또한 다시 須菩提야 이 法이 平等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 이름이 阿?多羅三?三菩提니라.
내가 없고 사람이 없고 衆生이 없고 壽者가 없음으로써 一切 착한 法을 닦으면 곧 阿?多羅三?三菩提를
얻으리라. 須菩提야 말한바 善法이라는 자는 如來께서 善法을 곧 말씀함이 아니라 이 이름이 善法이니라.
【운허】
“또 須菩提야, 이 法은 平等하여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나니 이런 것을 아누다라삼먁삼菩提라 이름하느
니라. 나도 없고 사람도 없고 衆生도 없고 오래 삶도 없이 온갖 착한 法을 닦으면 즉시 아누다라삼먁삼菩提를
얻느니라.
須菩提야, 착한 法이라고 하는 것도 如來가 말하기를, 착한 法이 아닐 새 착한 法이라. 이름하느니라.”
【신소천】
다시 須菩提야! 이 法이 平等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 이름이 阿?多羅三?三菩提다.
我가 없고, 人이 없고, 衆生이 없고, 壽者가 없이 一切 善法을 닦으면, 곧 阿?多羅三?三菩提를 얻는 것이다.
須菩提야! 如來가 말한 바 착한 法이라는 것은 곧 착한 法이 아니니 이 이름이 착한 法인 것이다.
【권상로】
다시 須菩提야 이 法이 平等하여 높고 낮음이 없을 새 이 이름이 아녹다라 삼막 삼菩提니 써 나도 없고
남도 없고 衆生도 없고 壽者도 없이 일체 善法을 닦으면 곧 아녹다라 삼막 삼菩提를 얻을 새니라
須菩提야 말한바 善法이라는 것은 如來가 말씀하되 곧 善法이 아니므로 이것이 이름이 善法이니라
【명봉】
다시 다음 須菩提야! 이 法이 平等하여 높고 낮음이 없음을 阿?多羅三?三菩提라 이름하나니 無我·無人·無衆生·
無壽者로써 一切 착한 法을 닦으면 곧 阿?多羅三?三菩提를 얻느니라.
須菩提야! 말하는 바 善法은 如來께서 說하사대 善法 아닌 것을 이 善法이라 이름하느니라.
【기산】
다시 須菩提야! 이 法은 平等하여 高下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阿?多羅三?三菩提라고 이름한 것이다.
我도 없고 人도 衆生도 없고 壽者도 없음으로써 一切 善法을 닦으면 곧 阿?多羅三?三菩提를 얻은 것이다.
須菩提야! 말한 바 善法이란 것은 如來가 곧 善法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善法이라 이름한 것이라고 說한다.
【해안】
다시 또 須菩提야! 이 法이 平等하여 높고 낮음이 없을 새 이를 阿?多羅三?三菩提라 이름한 것이니,
나도 없고, 남도 없고, 衆生도 없고, 壽者도 없음으로써 一切 착한 法을 닦으면, 곧 阿?多羅三?三菩提를
얻나니라.
須菩提야! 말한 바 착한 法이라는 것은 如來의 말로는 곧 착한 法이 아니라 이 이름이 착한 法이니라.
【청담】
“또 須菩提야! 이 法이 平等해서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것을 阿?多羅三?三菩提라 이름하느니라.
나도 없고, 남도 없고, 衆生이도 없고, 오래 산다는 生覺도 없이, 온갖 착한 法을 닦아서 阿?多羅三?三菩提를
얻느니라
須菩提야! 이른바 착한 法이라 함은 如來가 곧 착한 法이 아니라고 말하니 이것이 이름이 착한 法이라.”
【탄허】
復次 須菩提야! 이 法이 平等하여 高下가 없을 새 이 阿?多羅三?三菩提라 名함이니 我도 없고 人도 없고
衆生도 없고 壽者도 없음으로써 一切善法을 닦으면 곧 阿?多羅三?三菩提를 얻으리라.
須菩提야! 말한바 善法이란 것은 如來가 說하되, 곧 善法이 아닐 새 이 善法이라 名함이니라.
【광덕】
다시 또 須菩提야! 이 法이 平等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 이름이 阿?多羅三?三菩提니라.
我도 없고 人도 없고 衆生도 없고 壽者도 없이 一切 善法을 닦으면 곧 阿?多羅三?三菩提를 얻느니라.
須菩提야! 말한 바 善法이라고 하는 것은 如來가 곧 善法 아님을 말하는 것이니 그 이름이 善法이니라.
【월운】
“또 須菩提야, 이 法은 平等하여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으므로 阿?多羅三?三菩提라 하나니,
我相도 없고 人相?衆生相?壽者相이 없어, 온갖 착한 法을 닦으면 즉시에 阿?多羅三?三菩提를 얻느니라.
須菩提야, 착한 法이란 것은 如來가 말하기를,‘착한 法이 아니므로 착한 法이라.??하느니라.??
【무비】
“다시 또 須菩提야! 이 法은 平等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이를 阿?多羅三?三菩提라 이름하느니라.
我도 없고 人도 없고 衆生도 없고 壽者도 없이 一切 善法을 닦으면 곧 阿?多羅三?三菩提를 얻느니라
須菩提야! 말한 바 善法이라는 것은 如來가 說하되 곧 善法이 아니고 그 이름이 善法이니라.”
【석진오】
그리고 또 須菩提여, 이 法은 平等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 이것을 阿?多羅三?三菩提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自我도 없고 人도 없고 衆生도 없고 壽者도 없이 一切의 善法을 닦으면, 즉 阿?多羅三?三菩提를 얻을 것이다.
須菩提여, 말하는 바 善法이란 如來께서 이것을 善法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善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홍정식】
그리고 또 須菩提야, 이 法이 平等하여 높고 낮은 것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아누다라삼먁삼菩提라
한다. 나도 없고, 個我도 없고 衆生도 없고 壽者도 없는 것으로써 一切의 善法을 닦으면 곧 아누다라삼먁삼菩
提를 얻게 된다. 須菩提야, 이른바 善法이란 것을 如來는 善法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善法이라고 이름된다.
【김기추】
“다시 須菩提야! 이 法이 平等하여 높고 낮음이 없을 새 이 이름이 阿?多羅三?三菩提니, 我가 없고 人이 없고
衆生이 없고 壽者가 없음으로써 온갖 착한 法을 닦으면 곧 阿?多羅三?三菩提를 얻느니라.
須菩提야! 착한 法이라 말한 바는 如來가 곧 착한 法이 아니요. 이 이름이 착한 法임을 말함이니라.”
【이기영】
“다시 須菩提여, 이 法은 平等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를 이름하여 阿?多羅三?三菩提라 하느니라.
我도 없고, 人도 없고, 衆生도 없고, 壽者도 없이 모든 착한 法을 닦으면 곧 阿?多羅三?三菩提를 얻느니라.
須菩提여, 이른바 善法이란, 如來께서 말하기를 善法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니라.
이를 일컬어 善法이라고 부르는 것이니라.”
【송찬우】
“다음으로 須菩提야, 이러한 菩提法, 즉 妄想이 다하여 깨달음이 끝까지 다한 境地는 깨달음이나 迷惑의 경지
를 따라서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없이 法계에 絶對 平等하여 이는 聖人에 있어서도 높아지지도 않고 凡夫의
境地에 있다 하여 전혀 낮아짐도 없다. 이것을 두고 阿?多羅三?三菩提라는 名稱으로 부를 뿐이다.
비록 이 法이 平等하다 하나 修行하지 않고서는 正覺을 이루지는 못하므로 應當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의
執着 없이 一切의 功德善法을 修行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즉시 阿?多羅三?三菩提를 얻으리라.
須菩提야, 그렇긴 하나, 말하고 있는 一切의 功德善法이란 如來께서 말씀하시길 差別이 끊긴 平等의 理致에선
善法도 아니나 단지 世俗의 差別을 따라서 功德善法이란 名稱으로 부른다.”
【이제열】
“또 須菩提야, 이 法은 平等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阿?多羅三?三菩提라 하느니라.
‘나’도 없고, ‘남’도 없고, ‘衆生’도 없고, ‘오래 사는 것’도 없이 온갖 착한 法을 닦으면 곧 阿?多羅三?三菩提를
얻느니라.
須菩提야, 이른바 착한 法이라 한 것은 如來가 곧 착한 法이 아니라 일컬은 때문이니,
이름하여 착한 法이라 했을 따름이니라.”
【문제현】
또 다시 말씀하셨다.
“須菩提야! 이 法은 平等하여 높고 낮음이 없기에 이를 이름하여 阿?多羅三?三菩提라 하느니라.
我도 없고, 人도 없고, 衆生도 없고, 壽者도 없이 모든 善法을 닦아야 곧 阿?多羅三?三菩提를 얻느니라.
須菩提야! 善法이라고 말한 것도 如來가 곧 善法도 아닌 이것을 이름하여 善法이라 할 뿐이니라.
【김용옥】
“이제 다음으로 須菩提야! 이 法은 平等하여 높고 낮음이 있지 아니하니,
그래서 이를 이름하여 阿?多羅三?三菩提라 한 것이다.
我도 없고 人도 없고, 衆生도 없고, 壽者도 없는 것으로써 一切의 善한 法을 닦으면,
곧 阿?多羅三?三菩提를 얻으리라.
須菩提야! 이른바 선한 法이라 하는 것은 선한 法이 아니라고 如來가 說하였으니 이를 이름하여 선한 法이라
한 것이다.
【조현춘】
須菩提야! 높고 낮음이 없고 모두가 平等하다고 生覺해야 참으로 阿?多羅三?三菩提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착한 法을 다 行하되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에 걸리지 않아야 참으로 阿?多羅三?三菩提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須菩提야! 如來가 말하는 착한 法을 行하되 착한 法을 行하는 生覺에 걸리지 않아야, 참으로 착한 法을 行한다
고 할 수 있다.
【백성욱】
다시 須菩提야! 이 法은 平等해서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을 새 이것이 阿?多羅三?三菩提니라 내가 없고
남이 없고 衆生도 없고 壽者가 없이 一切의 좋은 법을 닦으니 그것이 곧 阿?多羅三?三菩提니라
須菩提야! 말한 바 善法이라는 것은 如來가 설한 善法이 아닌 것이 그것이 이름이 善法이니라.
【김운학】
다시 또 須菩提야, 이 법은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 이름이 阿?多羅三?三菩提다. 나도 없고 남도 없고, 衆生도 없고 숫자도 없는 마음으로 一切의 善法을 닦으면 곧 阿?多羅三?三菩提를 얻을 것이다.
須菩提야, 말한 바 善法은 如來의 설한 그것이 곧 善法이 아니고 이 이름이 善法이다.
【오진탁】또한 須菩提여! 眞理는 平等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最上의 올바른 깨달음이라 일컫는다. 自己, 사람, 衆生, 存在에 대한 愛著이 전혀 없는 마음으로 갖가지 善을 行하면 곧 最上의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須菩提여! 이른바 善이란 善이 아니기에 이를 善이라 일컫는다고 如來는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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