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상시

어느 맑고 추운 날 / 박정대

경호... 2012. 2. 1. 01:00

 

 

 

 

 

 

어느 맑고 추운 날 / 박정대

이제는 쓰지 않는 오래된 옹기위에
옥잠화가 심어진 토분을 올려 놓아 보네
맑은 가을 하늘 어딘가에
투명한 여섯 줄의 현이 있을 것만 같은 오후
생각해 보면, 나를 스쳐간 사랑은 모두
너무나 짧은 것들이어서
옹골찬 옹기 같은 내 사랑은
왜 나에게 와서 오래 머물지 않았던 것인가
안타까워 지는 이 오후에
햇살과 바람이 연주하는
내 기타 소리는 너무나 낡고 초라하지만
나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직직 끌며
온몸으로 그대에게로 가네
이제는 떠나지 못하게
오래된 옹기 위에 묵직한 토분을 올려 놓으며
정성스레 물을 주고 있네
그대는 옹기, 나는 토분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
추운 한 시절 견디며
킬킬 대고 있네
햇살 두툼한 오후를 껴입고 나와 앉아
옹기 위에 토분을 오려 놓으면, 근사하다고
우리의 삶도 이만큼 근사해졌다고

 

 

 

하늘의 뿌리 / 박정대 

그것은 풀리지 않는 욕망의 매듭 같은 것이었다
밤새도록 비가 내려 하늘의 뿌리가 지상에 스며들 때
더러는 꿈속까지 비가 내려
잠든 욕망의 옆구리를 들쑤실 때
애인이여, 너를 덮고 잠들던 나의 곤고한 청춘은
한 장의 음화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갈증과 회한이 교차하는 새벽의 문턱에서
삶은 때로는 죽음보다도 더 깊은 침묵으로
나를 엄습하고, 그 결렬한 고독으로부터
나를 건져 올리던 것은
어쩌면 그 아름답고 우울한
한 장의 음화였는지도 모른다

산다는 게 어쩌면
낡은 구식 쟁기와 같은 것이어서
이미 경작할 마음의 밭이 없는 나는
늘 죽음 쪽에 가깝고,
죽음이 나를 수소문하는 저잣거리에서
나는 추억을 헐값에 팔아 넘겼으므로
홀가분하게 죽음에 자수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상의 유리창에 달라붙은 한없이 습기찬 성에처럼
날이 밝으면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병든 혼의 가혹한 질주,
나는 통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덮고 있는 갈가마귀떼의 하늘을 지나
하나의 가혹한 시간과 공기 속을
나는 통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구의 자전을 거슬러올라 또 다른 별의
윤회 속으로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늘의 뿌리여,
너는 왜 지상의 강물에 발을 담그는가
넉넉한 대지의 품속으로 뿌리내리던
빗방울들의 육체여, 너는 지금 어디를
통과해가고 있는가, 밤새도록 비가 내려
그 무슨 격렬한 표현처럼 나를 휩쌀 때
숫처녀와 씹하듯*그렇게, 오오, 나는
하나의 세상을 통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속도에의 열망 같은 것이
나를 살아가게 하던,
이 잔인하고도 황홀한
시간의 늪 속에서

*숫처녀와 씹하듯 : 앙리 미쇼의 詩『바다와 사막을 지나』에서 인용

 

 

 

 

박정대 시인

1965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으며 1990년『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단편들』『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아무르 기타』『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모든 가능성의 거리』가 있으며 현재 무가당 담배 클럽 동인,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 멤버로 활동 중이다. 김달진문학상과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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