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눌 [李安訥, 1571~1637] 조선 중기 인조 때의 문신. 형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주청부사로 명나라에서 정원군의 추존을 허락 받아 원종의 시호를 받아왔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詩文에 뛰어나 李太白에 비유되었고, 글씨도 잘 썼다. 그가 함경도 관찰사 시절 변방에서 겨울을 보내며 쓴 시인데, 연로한 부모님이 걱정하 실까 봐 폭풍한설에도 “봄날처럼 따뜻하다.” 하고 편지를 쓰는 그 마음이 참으로 애틋했다. 조정 일에 시비를 가리다 귀양까지 갔다 온 그는 형조참판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가 됐고 나중엔 예조판서에 올랐지만, 백발의 어버이에게 편지를 쓰는 순간에는 한없이 유한 ‘불초소생’ 이었다. ---------------------------------------------------------------------------- 고두현 시인은 "寄家書(기가서)"를 ‘따뜻한 편지’라고 붙이고 몇 십 년 전의 어머니 편지 일부를 이렇게 적고 있다. "눈 뜨고도 코 베인다는 서울에서 그래 고생 많지. 우짜겠노 성심껏 살면 된다. 우리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많다. 스러니 어렵더라도 참고 꼭 건강해야 한다. 몸이 힘이다 ..... .’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됐다고 몇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르라!" 그러다 열세 살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까지는 부모 마음을 제대로 몰랐다. 소풍 가는 날엔 더 그랬다. 조막손만 한'뽀빠이’ 과자 한 봉지 값이 10원이었는데, 부모님께 과자 값 달라는 말을 못해 그냥 사이다 병에 단물만 담아 갔다. 그게 궁핍한 부모님을 도와 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철이 들면서 그게 아니란걸 깨달았다. 차라리 소풍날 용돈으로 10원만 달라고 떼쓸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아무 말도 않고 사이다 병에 단물을 채워 넣는 자식의 뒷모습이 어머니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어머니로서는 소풍 날 과자 한 봉지 값도 주지 못하는 가난보다 그런 사정을 넘겨짚고 한 마디도 보채지 않는 ‘애늙은 이’의 태연자약이 더욱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을 것이다. 마흔 고개를 넘은 뒤에도 그 시절의 짠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살아 계신다면 “올겨울은 봄날처럼 따뜻하다.” 하고 편지라도 쓸 수 있으련만. 시인 고두현
寄家書(기가서) 집으로 부친 편지 - 李 安 訥 欲作家書說辛苦(욕작가서설신고)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 말하려다 恐敎愁殺白頭親( 공교수살백두친) 아마도 백발 어버이 근심할까 두려워 陰山積雪深千丈(음산적설심천장) 북녁 산에 쌓인 눈이 천 길인데도 却報今冬暖似春(각보음동난사춘) 올 겨울은 봄날같이 따듯하다 적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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