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책 소개

漢詩, 한글을 입고 새 노래를 부르다

경호... 2011. 12. 20. 00:44

옛 시정을 더듬어 / 손종섭 지음 / 김영사

책의 저자인 손종섭옹은 '한시'를 전문으로 다루는 한문학자다. 공식적인 학위는 없지만 박사들이 즐비한 학계로부터 실력을 높이 평가받는 '재야 한문학자'다. 베스트셀러 '다산 선생 지식경영법' 등의 저자인 정민 한양대 교수는 2000년 손옹의 글에 반해 대학원 강의를 주선하기도 했다. 올해 93세인 손옹이 펴낸 이 책은 구순을 훌쩍 넘긴 그의 평생 내공을 느낄 수 있다. 70세 이후 본격적인 저술 활동을 시작한 손옹은 1992년 한시 풀이집 '옛 시정을 더듬어'와 2003년 속편인 '다시 옛 시정을 더듬어'를 펴내 주목을 받았다. 1992년에 펴낸 책의 제목과 같은 이 책은 손옹이 지난 20년간 쌓아올린 우리 한시 해설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92년의 '옛 시정을 더듬어'와 '다시 옛 시정을 더듬어'의 내용을 수정하고 가필하는 한편, 동시대 동일인의 작품끼리 한데 모아, 시대별 인물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상·하권 14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엔 최치원부터 정약용까지, 신라에서 조선에 이르는 350수의 엄선된 한시가 실려 있다. 충과 효 등 전통적 덕목에서 사랑 그리고 이별의 슬픔, 비루한 세상에 대한 풍자에 이르기까지 옛 시인들이 다룰 만한 주제는 모두 쓸어 담았다. 형식 면에서도 오언과 칠언 절구에서부터 단시와 연작시, 시조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범위를 아우른다.

저자의 한시 해석이 남다른 평가를 받는 이유는 다른 부차적인 기준은 배제하고 오로지 시인의 마음에 공감하고 조금도 가감 없이 전달하는 데 있다. 가령 '부끄럽다! 태어난 곳 본디 천키로/버림받은 이 원한을 참아 견디네'라는 최치원의 '접시꽃'에 대한 해설에서는 단순히 주목받지 못하는 꽃의 신세를 그린 것이 아니라 육두품으로서 신라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시인의 마음을 접시꽃에 '우의(寓意)'해 빗댄 것으로 해석한다. 저자는 "옛님들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어느덧 그 작품 세계 속으로 침몰돼 버리곤 한다"며 "이같은 버릇 때문에 나는 필경 독자도 감상자도 역자도 논평자도 아닌, 바로 그 작품 속의 '당사자'로 변신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또 한시를 옮기는 과정에서 한글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김정희의 '시골집'을 옮기면서 '호박 덩굴 싱푸르게 외양간을 타오르고'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기서 '싱푸르다'라는 말은 '싱싱하면서 푸르다'라는 뜻으로 특별히 만들어 낸 말이다. 또한 이숭인의 '산마을'에서는 '맑은 샘물이 돌 뿌리를 양치질한다'라는 구절을 '돌 어금니를 양치질한다'로 바꿔 옮긴다. 원래 작자가 '牙(어금니 아)' 자를 사용하고 싶었지만 운율 때문에 '根(뿌리 근)'을 택한 아쉬움을 읽어 이렇게 한 것이다.

손옹은 "이 책은 미력이나마 한시(漢詩)에서 칙칙한 한복(漢服)을 벗겨 내고, 산뜻한 우리의 한복(韓服)으로 갈아 입혀 우리 말, 우리 가락으로 노래하며 춤추게 하는 작업을 하노라고 한 것들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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