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 寶王三昧論

◎ 寶王三昧論(보왕삼매론) - 8. 마음 맞지 않는 사람과 일을 할 때

경호... 2011. 10. 20. 02:05

8. 마음 맞지 않는 사람과 일을 할 때


    于人不求順適(우인불구순적),人順適則心必自矜(인순적즉심필자긍)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 지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園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나의 생각”, “나의 가치관”이 강한 사람일수록 내 주장을 크게 내세우며
    나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았을 때
    얼굴이 붉어지고 마음속에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린 누구나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관념”의 틀어 얽매여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물론 그 “관념” 속엔 “나”라는 것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이며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잘못 된 것이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떤 일이라도
    절대적으로 지금의 내 생각이 100% 옳은 일이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어떤 일이든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새옹지마란 말처럼 옳지 않다고 생각된 일들이 옳게 되어 질 수도 있으며
    옳다고 생각된 일들이 그르게 되어 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내 생각”이란 고집과 아상(我相)이 개입되어 있는가
    아니면 텅 비어 그 어떤 견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내 생각”이란 아상이 깊은 사람일수록
    자신 생각의 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생각만이 옳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 사상 등에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정 고집하지 않는 열린 마음은 가슴을 한없이 맑고 향기롭게 해 줍니다.
    삶의 흐름을 마치 물의 흐름과 같이 자연스럽게 해 줍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옳다”는 아상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내 생각”에 찬성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으며 자꾸만 내 곁에 두려 하고,
    내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나빠지며 자꾸만 멀리하려 합니다.

    사실 진정 “나”를 위해서라면
    내 뜻에 맞지 않는 견해를 가진 사람을 가까이 둘 일입니다.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나의 어리석은 아상을 일깨우는
    참으로 소중한 스승임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뜻에 순종해 주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사람은
    이내 그 순종에 따른 “교만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교만심은 가장 큰 마음의 독입니다.
    “아상”을 가장 크게 거스르는 마음이기에 그렇습니다.
    뜻에 순종해 주는 사람과 가까이 하기는 쉽지만
    뜻에 순종해 주지 않는 사람과 가까이 하기는 어렵습니다.
    아상을 거스르는 일이란 그렇게도 어려운 법입니다.

    이 한 세상, 이 한 순간을 편히 살고 싶어 하는 이는
    언제나 “내 뜻에 맞는 사람”을 가까이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찰나로 돌아가는 순간순간을 억겁의 인연만큼이나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수행자는
    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으로 원림(園林)을 삼기에
    순간순간 내 생각 고집 않고 늘 깨어 있고자 자신을 관찰합니다.

    늘 그렇듯 내 생각이란 절대적으로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생각이 옳을 수도 있고 옳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안다는 것은
    그 어떤 상대의 생각도 받아 줄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의미하며,
    내 생각대로 되지 않더라도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린 세상을 살아가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든 내 생각을 관철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분별심을 내고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며 화를 내어 보기도 합니다.
    그 이면에는 “내 생각이 옳다”라는 어리석은 아상이 깊게 깔려 있습니다.

    물론 내 생각은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옳을 수도 있는 만큼 그를 수도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뻔히 내 생각이 그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고집을 하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이즈음 되면 오직 고집스런 아상만이 남게 됩니다.
    우리네 삶이 이렇습니다.

    내 고집만 놓아버리면 참 살기 쉬운 세상입니다.
    본래 그 어떤 “결정”이라는 것은
    어느 쪽도 100% 옳거나 그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도 잘못된 결정이 될 수 있는 만큼
    어느 쪽도 괜찮은 결정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결정”이 아니라 마음속을 어둡게 만드는 “아상”이란 놈입니다.
    아상을 놓아버리고 내린 결정은 이내 마음도 결정도 밝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방하착(放下着)된 마음은 좀 더 객관화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 상황에 처해 빨리 내 고집을 놓아버릴 수 있는 사람일수록
    삶을 여여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데 차가 막히던가
    기다리는 버스가 오지 않을 때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분별심이 일어납니다.
    그 답답한 마음으로 인해
    오히려 또 다른 일들을 더욱 그르치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초조하고 답답한 마음 턱 놓아버리고 나면
    이내 마음은 평온에 머물게 됩니다.

    어차피 마음을 불안하게 먹는다고
    안 올 차가 더 빨리 오고 막힌 도로가 뻥 뚫리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마음을 법계 주인공 자리에 턱 놓아버리고 나면
    그 집착심이 고요해져 마음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물질로까지 전달되고
    그러고 나면 오히려 일이 되어지는 쪽으로 흐르게 됩니다.

    집착심 때문에 일이 그르쳐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집착심 하나 놓아버리면, 빨리 와야지 되는데 하는 마음 놓아버리면
    그 다음 일은 저절로 되어지게 됨을 많이 봅니다.
    “꼭 와야 한다”는 고정된 생각, 고집을 놓아버린다는 것은
    마음을 텅 비게 하는 수행 작업입니다.

    텅 비어 있는 마음에서 일으킨 한마음은
    법계를 울리고 우주를 울리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저절로 되어지게 되는 법입니다.
    이렇듯 고집스런 마음 하나 놓아버리면
    괴로울 것도 그렇다고 즐거울 것도 없게 됩니다.
    그저 여여하게 평온에 머무는 것입니다.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때 무조건 내 말만 고집하지 말고
    마음을 놓아버리고 상대방의 뜻에 맡겨 보는 것은
    아상을 녹이는 참 좋은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상대의 말에 무조건 따르라는 말도 아니고,
    내 주관 없이 살라는 말 또한 아닙니다.
    내 생각이든 상대의 생각이든
    둘 다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혹은 절대적으로 그르다거나 하고
    옳고 그름을 고정 짓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음을,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음을,
    그렇게 생각이 툭 터져 자유로워야 합니다.

    내 생각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내 고집을 놓을 수 있다면
    다툼과 미움이 많이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내 고집을 놓으란 말은
    그야말로 그 생각에 대한 집착, 고정된 집착을 놓으란 말이지
    생각도 없이 살라는 말은 아니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공부하면서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
    내 주위를 장엄하고 원림을 삼게 되면
    독심인 교만스러운 마음을 잘 닦아갈 수 있습니다.
    이 아상과 고집, 그리고 교만심을 닦아내면
    안 되어지는 듯 해도 되어지는 쪽으로 흐르게 됩니다.

    마음이 텅 비어 졌을 때
    이 세상 모든 일은 마음 따라 저절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고요한 한마음은 법계를 가득 울리기 때문입니다.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