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 寶王三昧論

◎ 寶王三昧論(보왕삼매론) - 11. 억울할 때

경호... 2011. 10. 20. 02:02

11. 억울할 때


    被抑不求申明(피억불구신명),抑申明則怨恨滋生(억신명즉원한자생)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도웁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억울함을 당한다는 것은 크게 억울한 마음 때문에 생기는
    ‘원망심’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살아가며 수많은 작고 미세한 원망심, 손해 본다는 생각, 피해의식, 억울함...
    이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마음은 우리의 생활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기 쉬운 마음입니다.
    사실 억울한 마음, 원망심 때문에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못하고
    일상을 힘겹게 만드는 경우는 너무도 많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나면 누구나 애써 그 억울함을 풀고자 합니다.
    그러나 쉽게 억울함이 풀리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린 상대를 원망하고
    나아가 변명을 하고 심지어 다투며 싸우고 그럽니다.

    사실 억울하다는 마음은 “내가 옳다”는 아상의 마음이기에
    그 아상을 놓기가 힘든 법입니다.
    내 입장에서는 억울함이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그 또한 억울함이 될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그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번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면
    그 과보는 세세생생을 거쳐 우리를 괴롭히게 됩니다.

    윤회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원망심을 품게 되면
    그 원망심이 내 마음의 커다란 인(因)으로 자리 잡게 되고,
    그 마음 놓지 못하고 꽉 붙들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 다시 그 원망의 상대를 만나게 됩니다.
    그 상대가 가는 길을 따라 윤회하여
    그 마음 고스란히 돌려주려고 합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B라는 사람은 다음 생에 태어나
    업식에 따라 A라는 사람과 원수지간의 인연을 맺고 그를 죽이게 됩니다.
    그러면 A라는 사람은 또 B라는 사람에게 원망심을 품고 죽게 되고
    그 다음 생 또 A를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몇 생이고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것이 윤회입니다.

    그래서 윤회를 수레바퀴에 비유합니다.
    똑 같은 업보를 그대로 받으며 몇 생이고 돌고 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원망심을 끊어버리는 것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방하착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음 생에 원수지간으로 다시 만나지 않게 됩니다.

    세상 모든 일은 단독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상의상관으로 존재하기에 내 마음에서 원망심을 놓아버리면
    상대의 마음 또한 고스란히 맑게 녹아내리게 마련입니다.

    사실 부모자식 간에나 부부지간에
    이런 원망심의 사슬로 인연이 되어 만나는 경우는 참으로 많다고 합니다.
    우리 주위에 사랑하던 사람이 결혼해서 서로를 괴롭히고
    또 부모자식간이 지옥과도 같은 그런 일들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 또한 전생의 인연 따라 온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혼한다고, 집 나간다고 해결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 원망심을 녹이고 풀어주어야 합니다.
    집을 나가고 이혼한다고 인연의 사슬이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인과의 사슬은 도무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으로 도망을 가더라도
    동굴 속이나 무인도라도 인연의 사슬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억울한 마음 또한 그 인과의 통 속입니다.
    자기가 지은 인연을 모르니 억울하고 분한 것입니다.
    자신이 부인을 괴롭힌 것은 생각 않고
    이번 생 그 업식으로 따라온 부인이 나에게 못 한다고
    화를 내고, 이혼하자고 야단을 칩니다.

    억울함을 풀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부처님 참성품 자리에 밝게 놓고 녹여야 합니다.
    원망심이 붙을 자리가 없을 때까지...
    원망심을 풀고자 애를 쓰는 일은 인연을 거스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10만원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많은 시간이 흘러 B는 그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A는 여전히 그 사실을 알고 있겠지요.
    받은 사람은 금새 잊어도 준 사람은 잊지 못하게 마련이니까요.
    A는 달라는 말도 못하고 화가 나고 원망심만 생겨 어떻게 받아낼까 고민을 한 끝에
    필요한 곳에 쓰겠다며 B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갚지 않으려는 생각이었겠지요.
    그러나 B는 그때 마침 5만원밖에 없어 그것만을 빌려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A는 돈을 값을 기색이 없습니다.
    B의 마음엔 자꾸 화가 나고 원망심만 늘어갑니다.
    5만원을 잃었다는 생각에 말은 못하고 속으로 꿍꿍 앓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A를 미워하게 되고 사이는 자꾸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지은 인연을 바로 알고 나면 어떻습니까.
    원망심은 어느덧 녹아버립니다.
    오히려 늦게 값은 것이 미안하고
    아직 남아 있는 5만원 때문에 더욱 미안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듯 억울한 마음이 생겨났을 때
    첫째는 자기 지은 인연을 바로 알아
    지혜로써 풀어나가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 원망심을 상대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로 돌려 내가 지은 인연을 명상해 보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빨리 자기 인연을 알아 비워버린다면 좋겠지만
    자기 인연을 올바로 알기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특히나 전생의 인연, 혹은 내가 기억 속에서 이미 지워버린 기억이라면
    더욱 알기가 어렵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놓아라. 비워라 하는 것입니다.

    위에서의 ‘예’에서처럼
    원망하는 마음 또한 그 이면에는
    그럴만한 인연이 있게 마련이란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원망심은
    세세생생 서로를 죽고 죽이는 끊임없는 속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억울함을 당하는 그 경계를 수행의 문으로 삼으라”...
    억울함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내 안에서 녹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분풀이를 하고 밝히려고 애쓰지 않아도
    밝힐 인연은 다 밝혀지게 마련이고,
    밝혀지지 않는다면 내가 지은 과보를 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억울함을 풀지 말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고집하는 마음,
    그 어리석은 마음이 일으킨 원망심을 놓으라는 것이지
    무조건 바보가 되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 기준 또한 결국엔 “나다”, “내가 옳다” 하는 아상에서 하는 일인가
    아니면 전체를 위한 일인가가 될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닌 전체를 위해서라면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명철하게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또한 나와 상대가 둘이 아니라는
    철저한 동체대비심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상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으며 밝혀야 한다는 말입니다.
    원망하며 밝히게 되면 그로인해 또다시
    괴로운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돌아야 할테니까요.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