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碧巖錄

「벽암록(碧嚴錄)」 제 3칙 마대사불안(馬大師不安) - 마조화상의 병환

경호... 2011. 10. 16. 00:07

    제 3칙 마대사불안(馬大師不安) - 마조화상의 병환


      <벽암록(碧巖錄)> 제3칙의 이 공안은
      <조당집> 제14권 마조화상전에 전하고 있는 유명한 선문답인데,
      마조화상이 입적하기 얼마 전에 병환으로 고통 받고 있는 마조화상에게
      원주가 건강을 여쭙는 인사말이다.

      마조도일화상이 병환으로 몸이 편치 않았다.
      원주스님은 마조화상에게 물었다.
      “화상께서는 요즈음 법체가 어떠하십니까?”
      마조화상이 대답했다.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 이네.”

      擧. 馬大師不安. 院主問, 和尙近日, 尊候如何. 日面佛月面佛.



      ‘불안(不安)’은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않는 상태로서 육체적인 병환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선불교에서는 육체적인 병환과 함께 번뇌 망념의 중생심으로 고통 받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불교의 가르침은 번뇌 망념의 불안한 중생심의 고통을 벗어나(解脫)
      깨달음의 경지에서 평안하고 안정되고 지혜로운 삶을 사는 방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경지를 안신입명(安身立命)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공안은 마조화상의 육체적인 병환을 걱정하여 여쭙는 원주의 질문에
      마조화상은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이지” 라고 짧게 대답하고 있다.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에 대해서 <불명경(佛名經)> 제7권에는
      “월면이라는 부처님이 있는데,
      그 월면불의 수명은 일일일야(一日一夜)이며,
      일면(日面)이라는 부처님이 있는데
      그 일면불의 수명은 1800세라고 한다.” 라고 설하고 있다.
      마조화상은 불명경에서 설하고 있는 월면불과 일면불을
      입장을 예로 들어 자신의 경지에서 대답하고 있다.

      사실 대승불교의 특징은 불명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공간적으로는 시방(十方)과 시간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서
      무수히 많은 부처의 이름을 제시하고 있다.
      즉 다불(多佛)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부처는 어떤 존재인가?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만약 부처라는 모양[色]으로 부처를 구하거나 음성[소리]으로 부처를 구한다면
      여래를 친견 할 수가 없다.”라고 설한다.
      즉 부처나 여래를 자신의 마음 밖에서 추구하는 목적 대상으로 설정하여 찾아 구한다면
      영원히 부처나 여래를 친견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主]가 부처[客]를 구한다는 주객(主客)의 상대적인 대립과
      부처나 여래라는 대상적인 분별심으로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분별심과 중생심을 떨쳐버리지 않는 한
      여래나 부처를 친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부처나 여래를 친견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여래나 부처는 어떤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다고 한다면
      부처나 여래는 어디에 있으며 부처나 여래는 무엇이며 어떻게 친견해야 하는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이 문제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면
      참된 부처나 여래를 친견할 수가 없는 것이며,
      한 평생 헛되이 엉뚱한 옆길에서 불법을 찾아 해매는
      한심한 수행자가 되고 말 것이다.

      부처나 여래를 친견한다는 것은
      마음 밖의 어떤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 부처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즉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불성을 깨닫고 부처를 이룬다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은
      자기의 법신불을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불성과 법신불을 체득하는 것을 선불교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하며,
      부보(父母)라는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근원적인 불심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번뇌 망념이 없는 본래의 불성을 깨닫는 자각적인 견성(見性)의 체험이
      그대로 부처나 여래를 친견하는 것이며
      이러한 친견은 불성의 지혜작용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법신(法身)은 형상이 없고 여래도 가고 옴이 없기 때문에
      형상으로 보거나 소리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의 본래심[佛心]으로 자각(깨달음)하는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불성의 자각적인 지혜작용을 견성(見性)이라고 하며,
      이러한 깨달음의 지혜작용을 법신불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에 경전에 등장하는 많은 부처는 법신불의 지혜작용을 말한다.

      마조화상은 원주의 질문에 “일면불 월면불” 이라고 대답한 의미는 무엇인가?
      마조화상은 자신의 경지를 ‘일면불과 월면불’로 표현하고 있다.
      일면불과 월면불은 불명경에서는 수명이 짧은 월면불, 수명이 긴 일면불로 설명하고 있지만,
      부처는 수명의 길고 짧음에 관계할 것 없이
      일체의 차별심과 분별심을 초월한 깨달음의 경지에서
      법신불의 지혜로 살고 있는 것이다.

      마조화상은 원주가 육체적인 병환을 걱정하여 여쭙는 질문에
      자신의 입장을 병환으로 고통 받는 육체적인 대상을 설정하여 대답하지 않고,
      병든 환자의 몸과 병들지 않은 육체,
      육체나 마음이라는 이원적(二元的)이고 상대적,
      차별적인 분별심을 초월한 법신의 경지에 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일면불과 월면불은 단순히 경전에서 설명하는 부처 이름이 아니라
      마조의 법신불이며 본래면목인 것이다.
      마조는 육체적인 병환과 정신적인 병환, 병(病)과 불병(不病),
      장수불(長壽佛)과 단명불(短命佛)의 상대적인 대립을 초월한
      자신의 법신은 언제나 태양과 달처럼,
      여여(如如)하게 변함없이 살고 있는 경지를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태양과 달(日月)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법신불의 경지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깨달음[법신불]의 경지는 중생심의 생멸이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번뇌 망념의 생사가 없는 불생불사(不生不死)의 경지이다.
      그래서 법신불의 대표적인 아미타불은
      나고 죽음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는 수명(無量壽)이라고 한다.

      또한 법신불의 지혜광명은 시방세계에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무량광(無量光)이라고 한다.
      <화엄경> 제34권 ‘보왕여래성기품’에도
      법신 여래의 지혜광명을 태양과 달에 비유하고 있으며,
      일월이 출현하면 세간과 깊은 산 계곡에까지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 것처럼,
      여래의 지혜광명도 이와 같다고 설한다.

      설두화상도 마조의 일면불 월면불에 대한 법문을 체득하기 어려웠지만,
      그가 20년간의 많은 각고를 겪은 수행으로
      이 공안의 의미를 파악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읊고 있다.

      “마조화상이 말한 일면불과 월면불이여!
      오제(五帝) 삼황(三皇)은 무슨 물건인가?
      20년간 수행하여 고생을 겪으면서,
      그대[本來心]를 위하여 푸른 용이 사는 동굴에 몇 번이나 내려갔던가?
      많은 고충을 받았다[屈].
      그 고충을 말로서는 표현할 수가 없네.
      눈 밝은 수행자여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라!”

      설두는 마조화상의 ‘일면불 월면불’을
      중국인들의 이상적인 황제 오제 삼황에다 비교하여
      어떠한 부처나 어떠한 황제의 이름에 끄달리거나 집착하지 말고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설두는 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인 부처나 오제나 삼황의 권위를 초월하여
      자신의 법신불을 체득하기 위해서 20년간 많은 어려움을 견디는 수행을 하였다.
      용의 턱 밑에 있는 구슬[寶珠: 법신불]을 체득하기 위해서
      용이 살고 있는 창용굴에 여러 차례 들어갔다고 하는 것은
      신명을 돌보지 않고 수행에 전념한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한 고백이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소굴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상신실명(喪身失命)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행하여
      마조의 법문을 통해서 자신의 법신불을 체득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조화상의 ‘일면불 월면불’을 머리로 적당히 이해하지 말고
      신중하고 철저하게 수행하여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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