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碧巖錄

「벽암록(碧嚴錄)」 제 1칙 달마확연무성(達磨廓然無聖) - 달마대사와 양무제

경호... 2011. 10. 16. 00:05

    제 1칙 달마확연무성(達磨廓然無聖) - 달마대사와 양무제


      <벽암록(碧巖錄)> 제1칙은
      중국선종의 초조로 추앙받는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에 건너와 처음 불법천자라고 하는 양(梁)의 무제(武帝)와
      불법의 대의에 대한 대화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질문했다.
      “무엇이 불법의 근본이 되는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달마대사는 말했다.
      “만법은 텅 빈 것,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양무제는 다시 질문했다.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달마대사는 말했다.
      “불식(不識).”
      양무제는 달마대사의 말을 깨닫지 못했다.

      달마대사는 마침내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로 갔다.
      양무제는 뒤에 달마대사와의 대화를 지공화상에게 말하자,
      지공화상이 말했다.
      “폐하! 달마대사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양무제는 말했다.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지공화상이 말했다.
      “그는 관음대사이며, 부처님의 정법을 계승한 사람입니다.”
      양무제는 깊이 후회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다시 초빙하고자 하자,
      지공화상이 말했다.
      “폐하께서 사신을 보내어 모셔오려고 하지 마십시오.
      온 나라 사람이 모시러 가도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擧, 梁武帝, 問達磨大師, 如何是聖諦第一義, 磨云, 廓然無聖,
      帝曰, 對朕者誰, 磨云, 不識, 帝不契, 磨云, 遂渡江至魏,
      帝, 後擧問誌公, 誌公云, 陛下還識此人否, 帝云, 不識,
      誌公云, 此是觀音大士, 傳佛心印, 帝悔, 遂遺使去請,
      誌公云, 莫道, 陛下發使去取, 闔國人去, 佗亦不回.



      양무제가 질문한 ‘불법의 근본이 되는 성스러운 진리(聖諦第一義)’는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홍인이 제자들에게 과제로 제시한
      ‘불법의 대의’를 말한다.
      불법의 대의란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공(空)의 실천으로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반야사상과
      반야의 지혜를 언제 어디서고 마음대로 전개하는 자각의 주체인
      불성사상을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육조단경>에서는 불성을 깨닫는 돈오견성(頓悟見性)과
      반야바라밀의 법문으로 대승불교의 전체를 통합하여
      조사선의 새로운 선불교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사람이
      자신의 견해를 게송으로 제시하고 인가를 받아
      조사로서 불법을 계승하도록 <육조단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벽암록(碧巖錄)> 제1칙에서는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을 부처님의 정법을 이은 선종의 초조인 달마에게
      불법천자로 유명한 양무제가 질문하는 대화를 통해서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달마는 ‘일체의 만법은 본래 텅 빈 것(一切皆空)인데
      성(聖)스럽다고 할 고정된 법은 없다’고 대답한다.

      <금강경(金剛經)>에는 ‘고정된 법은 없다(無有定法)’는 말이 있다.
      반야의 지혜는 마음을 어디서도 머무름이 없도록 하는 무주(無住)와
      어떠한 경계나 모양도 취하지 않는 무상(無相)의 실천을 하라는 것이다.
      즉 불법은 시간과 공간이 함께하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일체의 존재와 함께
      반야의 지혜와 자비를 나누는 삶을 지혜롭게 사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양무제의 질문에는
      불법은 ‘성(聖)스러운 진리’이며 어떤 고정된 법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달마는 이러한 양무제의 착각과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리고 양무제가 성(聖)스럽다고 생각하고 질문한 것은
      세간과 출세간적인 차별심에 토대를 둔
      범부(凡)와 성자(聖)라는 상대적인 분별심이 작용하고 있다.
      성(聖)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범부(凡)적인 차별심에서 비롯된 중생심이다.
      시끄러움을 버리고 조용함을 추구하거나,
      미혹함을 버리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상대적인 분별심도 마찬가지이다.

      즉 양무제의 질문은 불법의 근본이 성스러운 것이라는 차별심과
      착각에 떨어진 양무제를 범성(凡聖)의 차별이 없는
      본래의 텅 빈 마음을 체득하는 것이
      불법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제시한 정확한 대답인 것이다.

      그러나 양무제는 달마대사의 법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다시 중생심으로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한다.
      달마대사는 “불식(不識)”이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양무제는 자기와 달마라는 주객(主客)의 상대적인 대립과 차별심에 떨어졌고,
      또한 달마대사 당신은 성스러운 성자가 아닙니까? 라는
      고정관념과 분별심으로 질문하고 있다.

      이러한 주객과 상대적인 분별심에 떨어진 양무제의 질문에 대하여
      달마는 불식(不識)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달마가 말한 불식(不識)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번역하면
      주객(主客)과 범성(凡聖)에 대한 상대적인 분별심이 된다.
      즉 알고 모르는 중생심의 분별 의식에 떨어진 대답이 된다.

      달마가 ‘불식(不識)’ 이라고 말한 것은
      ‘나는 황제인 당신과 주객(主客)의 대립이나 상대적인 차별심이 없다.’는 입장이다.
      <열반경(涅槃經)>에 “법에 의거하고 사람에 의거하지 말며,
      지혜에 의거하지 분별의식(識)에 의거하지 말라”고 설한
      불법의 정신을 알아야 한다.
      식(識)은 중생심의 분별작용이며
      불식(不識)은 불심의 지혜작용이라는 사실이다.

      즉 달마는
      주객(主客)과 범성(凡聖)에 대한 상대적인 차별심으로 질문하고 있는 양무제를
      불심의 지혜로 정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심으로 접근한 양무제는
      달마가 불심의 지혜로 제시한 정법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법의 참된 정신[大意]를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달마대사를 양나라에서 추방하게 되었고,
      달마는 양자강을 건너 당시 위(魏)나라의 숭산 소림사에서
      벽을 향해 앉아서 좌선 수행하며 머물게 된다.

      양무제는 당시 유명한 지공[寶誌]화상에게 달마대사가 어떤 인물인지 묻자.
      지공은 그는 관음대사이며 부처님의 정법을 전해 받은 조사라고 말하자,
      그를 다시 불러오도록 한다.

      지공은 온 나라 사람이 찾아가서 그를 다시 모시려고 해도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달마의 입장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달마의 동요됨이 없는 불심의 경지와
      양무제의 안목 없는 후회를 통감하게 하는 입장을 함께 대변하고 있는 말이다.
      설두는 이러한 양무제의 입장을
      ‘천고 만고에 부질없이 아쉬워하네’라고 게송으로 읊고 있다.

      양무제의 허물은
      달마를 마주하고도 달마의 참된 모습(眞相: 法身)을 친견하지 못하고
      지공화상의 설명을 듣고
      달마대사가 어떤 사람인지 중생의 분별심으로 인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공화상이 “폐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십니까?” 질문하니,
      양무제는 “모릅니다(不識)”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양무제가 말한 불식(不識)은 중생심으로 진실을 알지 못하는 지혜 없는 무지(無知)이다.
      달마가 대답한 불식(不識)과 똑같은 말을 사용하지만,
      불심의 지혜작용으로 대답한 달마의 입장과 내용은 전혀 다르다.

      설두의 게송에
      “여기에 달마가 있느냐? 스스로 ‘있다.’라고 대답하고는
      그를 데려다가 노승의 다리나 씻기도록 해야겠다.”라고 읊고 있다.
      이 일단은 <조주록(趙州錄)>에서 조주가 한 말을 인용한 것인데,
      이 공안을 읽고 있는 학인들에게 경책하는 일절이다.

      여러분들은 양무제와 달마의 대화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한 이야기로 이해하고 있는가?
      양무제처럼 달마를 대상으로 찾는 마음이 있는가?
      달마나 부처를 자신의 마음 밖에서 대상으로 찾는다면
      영원히 양무제처럼 달마의 본래면목(眞相)을 찾을 수가 없다.
      그 달마대사를 찾는 그대의 마음이 달마의 참된 면목이니,
      그(자신의 불심)를 데려다가 자신의 발이나 씻기도록 하라.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지혜로운 삶은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의 발을 씻는 일’이다.
      불법의 지혜는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의 일(삶)을 떠나서 실현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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