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禪家龜鑑

『선가귀감(禪家龜鑑)』 선의 세계

경호... 2011. 8. 31. 01:11

월간 불광(佛光)

선의 세계

『선가귀감(禪家龜鑑)』

글· 현각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2003년 9월호

 

서산 대사(西山大師)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이 1579년에 저술한 것이다. 휴정은 법명이고 호는 청허이다. 스스로 금강산 백화암에서 수행하였기에 백화도인(白華道人)이라고 칭했으며, 1577년에 모든 승직을 물러난 이후에는 퇴은(退隱)이라고 불렀다. 시호는 서산 대사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경론과 조사어록의 50여 부에서 참선공부를 위하여 꼭 필요한 어구를 선별하고,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입장에서 각 내용마다 스스로 주해를 붙였다. 제자였던 노원(魯願), 의천(義天), 정원(淨源), 대상(大常), 법융(法融) 등이 공편(共編)하고 사명 대사인 송운유정(宋雲惟政)이 발문을 붙였다.
서산 대사가 이 책을 저술할 당시는 조선조 때 불교의 박해가 심하였다. 이에 서산은 도교·유교·불교의 세 종교를 아우르는 삼가귀감(三家龜鑑) 3권을 저술하여 각 종교의 대의를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그런데 이본(異本)에는 선가귀감·도가귀감·유가귀감으로서 선가귀감이 간략하게나마 그 일부로 편입되어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여기에서는 단행본으로 출간된 『선가귀감』본에 의한다.
본문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먼저 옛 전적에서 인용한 어구를 드러내고, 둘째는 다음으로 이에 대하여 서산의 개인적인 견해를 서술하며, 셋째는 마지막으로 게송으로 어구의 대강을 간략하게 요약하였다. 간혹 게송이 없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첫째는 ‘어구’, 둘째는 ‘해석’, 셋째는 ‘게송’으로 구분하기로 한다.

본문내용

禪家龜鑑 曹溪 退隱 述

有一物於此 從本以來 昭昭靈靈 不曾生 不曾滅 名不得 狀不得一物者 何物 ○ 古人頌云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此一物之所以不曾生 不曾滅 名不得 狀不得也 六祖告衆云 吾有一物 無名無字 諸人還識否 神會禪師卽出曰 諸佛之本源 神會之佛性 此所以爲六祖之椧者也 懷讓禪師 自嵩山來 六祖問曰 什陵物伊陵來 師罔措 至八年 方自肯曰 說似一物 卽不中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三敎聖人 從此句出 誰是擧者 惜取眉毛

선가귀감
조계의 선맥을 이어받은 퇴은이 서술하다.

어구
여기에 일물(一物)이 있다. 이것은 본래부터 대단히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생겨나거나 멸한 적도 없다. 그리하여 명칭도 없고 모양도 없다.

해석
일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크게 일원상(○)을 그려보였다. 고인은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불이 출세하기 이전부터
두렷하게 일원상이 밝았었다.
이것을 석가모니도 몰랐는데
마하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었겠는가.

이 도리가 바로 본래부터 대단히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생겨나거나 멸한 적도 없어서 명칭도 없고 모양도 없는 까닭이다. 육조혜능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한테 일물이 있는데 그 이름도 없고 그것을 표현할 글자도 없다. 그대들은 알겠는가.”
이에 제자였던 하택신회가 나와서 말했다.
“그것은 바로 제불의 근원이고 또한 이 하택의 불성이기도 합니다.”
이로써 하택신회는 육조혜능의 서자가 되었다. 또한 남악회양이라는 선자가 있었는데 숭산에 있다가 육조에게 참배하였다. 이에 육조가 물었다.
“무슨 물건〔甚陵物〕이 이렇게 여기까지 왔는가?” 회양은 그 물음에 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어느 날 비로소 회양은 그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설사 어떤 한 물건〔一物〕이라 해도 정확한 도리는 아닙니다.”
이로써 회양은 육조혜능의 적자가 되었다.

게송
유교·불교·도교의 성인들도
모두 이 일물에서 나왔다네.
그 누가 일물을 말할 수 있으리오.
눈썹 뽑힐라. 눈썹을 아껴라.

佛祖出世 無風起浪佛祖者 世尊迦葉也 出世者 大悲爲體度衆生也 然以一物觀之 則人人面目 本來圓成 豈假他人添脂着粉也 此出世之所以起波浪也 虛空藏經云 文字是魔業 名相是魔業 至於佛語 亦是魔業 是此意也 此直擧本分 佛祖無功能乾坤失色 日月無光

 

어구
부처님과 조사께서 세상에 나와서 쓸데없이 평지에 풍파를 일으켰다.

해석
여기에서 부처님과 조사라는 것은 석가세존과 마하가섭을 말한다. 그리고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대비를 바탕으로 삼아 일체중생을 제도하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일물의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모든 사람이 다 본래면목을 원만하게 구비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부처님과 조사들의 힘을 빌려 연지를 찍고 곤지를 찍는다고 할 것인가. 때문에 이것이 바로 부처님과 조사께서 세상에 나와서 괜시리 평지에 풍파를 일으킨다는 말이다.
그래서 『허공장경』에서 말한 “문자도 마구니의 업이고, 명칭과 모양도 마구니의 업이며, 심지어 부처님의 말씀도 또한 마구니의 업이다.”는 것이 곧 평지에 풍파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자신이 구비하고 있는 본분의 면목을 제대로 알아차린다면 부처님과 조사들도 쓸데없다는 것이다.

게송
하늘과 땅이 모두
무너져버리고
해와 달도 모두
빛을 잃는구나.

然法有多義 人有多機 不妨施設法者 一物也 人者 衆生也 法有不變隨緣之義 人有頓悟漸修之機 故不妨文字言語之施設也 此所謂官不容針 私通車馬者也 衆生雖曰圓成 生無慧目 甘受輪轉 故若非出世之金硼 誰刮無明之厚膜也 至於越苦海而登樂岸者 皆由大悲之恩也 然則恒沙身命 難報萬一也 此廣擧新熏 感佛祖深恩王登寶殿 野老謳歌

 

어구
그러나 불법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갖가지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부득불 방편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해석
여기에서 불법이라는 것은 곧 앞서 언급한 일불을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이란 중생을 말한다.
불법에는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도리〔不變〕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도리〔隨緣〕가 있다. 그리고 사람에게도 금방 깨치는 근기〔頓悟〕와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서 깨치는 근기〔漸修〕가 있다. 때문에 부득불 언어와 문자 등 방편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이른바 공적으로는 바늘 끝만치도 융통을 용납하지 않지만 사적으로는 차량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융통을 부린다는 것이다. 중생이 비록 자기 본분의 면목을 원만하게 구비하고 있을지라도 태어나면서부터 지혜의 안목이 없어 길이 윤회의 고통을 달게 받고 있다.
때문에 세상에서 뛰어난 금칼이 아니라면 그 누가 중생의 무명의 두터운 안막을 벗겨줄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고통의 바다를 건너서 즐거운 피안에 이르는 것은 모두 부처님과 조사의 대비의 은혜를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항사와 같이 많은 신명을 바친다 해도 그 은혜의 만분의 일도 갚기가 어렵다. 이것은 새로 수행하는 도리를 널리 들어서 부처님과 조사들의 깊은 은혜에 감사해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게송
임금께서 용상에 올라가니
백성들이 태평가를 부르네.

强立種種名字 或心 或佛 或衆生 不可守名而生解 當體便是 動念卽乖一物上强立三名字者 敎之不得已也 不可守名生解者 亦禪之不得已也 一擡一謳 旋立旋破 皆法王法令之自在者也 此結上起下 論佛祖事體各別 九旱逢佳雨 他鄕見故人

어구
억지로 갖가지 이름을 붙여서 혹은 마음이라고도 하고 혹은 부처라고도 하며 혹은 중생이라고도 하지만 그 명칭에 집착하여 견해를 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나름대로 다 옳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견해를 내려고 하면 곧 틀려버리고 만다.

해석
일물에 대하여 억지로 마음이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글자를 붙이는 것은 교학에서 부득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명칭에 집착하여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은 또한 선가에서 부득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교학에서 명칭을 사용하고 선가에서 견해를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내세우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쳐부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부처님께서 드러내는 가르침에 자유자재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위의 가르침에 의하여 아래의 행위를 일으켜 부처님과 조사들의 도리를 깨치려는 것으로서 부처님과 조사들의 방편이 각기 다른 것을 논한 것이다.

게송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고
타향에서 친구를
만난 격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