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치유의 詩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보라

경호... 2010. 12. 10. 02:24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보라

 

류시화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보라.

幸福과 苦痛은

다른 세세한 事件들과 섞여들어

精巧한 무늬를 이루고

試練도 그 무늬를 더해 주는 색깔이 된다.

 

그리하여 마지막 瞬間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 무늬의 完成을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아메리칸 퀼트) 중에서

 

文學에의 熱情을 지닌 한 젊은 敎師가 시골 學校로 새로 轉勤을 왔다. 그는 詩가 무엇지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에게 義務的으로  詩 한 편씩을 써내게 했고, 그중에서 한 아이의 시를 최고의 작품으로 뽑았다. 그리고 그 아이를 불러 반드시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다른 일상사들에 묻혀 그 일은 곧 잊혀졌지만, 소년의 마음은, 연금술을 거친 금속처럼, 되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었다. 내가 열 살 때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사이에 나만의 신비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아이들과 놀 때나 식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내가 혼자 뒷산이나 마을 앞 강으로 걸어나가면 갑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그런 내면 세계였다.

강에 자란 휘어진 풀들, 수면에 비친 영혼,서리 내린 들판, 작고 흰 돌멩이, 무덤가에 죽어있는 풀벌레 등이 내게 무엇인가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것들은 일상적인 언어로 옮기는 순간, 본래의 색채를 잃고 퇴색하곤 했다.

신비주의를 뜻하는'마스티시즘'은  고대 희랍어인 '미스테스'에서 온 단어로, '입을 닫고 비밀을 지킨다'는 뜻이다. 일부러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선택과 상관없이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것, 그것이 곧 신비다. 존재를 압도하는 경험이  언어적인 표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시인에게 이 신비에의 체험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시는 영혼과 세상을 연결해 준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간이 서 있는자리를 확인시켜 준다. 시드니 레베트는 썼다.

 

 

매 순간

인간의 손으로 지어지지 않은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라.

 

하나의 산, 하나의 별

구불거리는 강줄기

그곳에서 지혜와 인내가

너에게 찾아오리니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시는 인간 영혼의 자연스런 목소리다. 그 영혼의 목소리는 속삭이고, 노래한다.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삶을 멈추고 듣는 것'이 곧 시다. 시는 인간 영혼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그 상처와 깨달음을, 그것이 시가 가진 치유의 힘이다.

우리의 육체적인 존재가 영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며 이 지구 차원에서 육체적인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삶은 영혼 여행의 잉ㄹ부다. 흔히들 시를 감상적인 문학 장르로 치부하지만, 시는 감상이 아니라 이 불가사의한 삶에대해 인간의 가슴에 던지는 질문이다.  시는 진정한 삶을 살도록 자극한다. 아랍계 미국 시인 나오미 쉬하브 니예는 '너무 늦기 전에 자신의 삶을살라'고 충고하고 있다.

 

 

한 장의 잎사귀처럼 걸어다니라.

당신이 언제라도 떨어져내릴 수 있음을 기억하라.

자신의 시간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라.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사용한 언어들이 '다른 어떤 장소'에서 온 언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언어들은 내가, 그리고 사람들이 주위에서 늘 쓰는 그런 언어가 아니었다. 훗날 나는 그것이 영혼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렸다.

그 이듬해 겨울, 나는 몸이 몹시 아팠다. 작은 시골이라서 엄마 등에 업혀 마을에 한 명밖에 없는 공중 보건의에게 가서 가끔 주사 한 대를  맞는 것이 치료의 전부였다. 머리가 허연 그 늙은 의사는 술을 너무 좋아해 코가 빨간 사람이었다. 겨울 내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방 안에 누워 시름시름 앓던 나는, 어느 날 방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는데 봄빛이 완연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내려가 화단의 흙을 살살 파보았더니 연초록 싹들이 흙을 밀치며 일제히 올라오고 있었다. 다시 방안으로 돌아온 나는 엎드려 '봄' 에 대한 시를 썼다. 그리고 곧 병이 나았다. 시를 쓰면서 나는 내 자신이 치유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때로 우리는 삶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삶에 상처받는 사람들이다. 상처로 마음을 닫는다면, 그것은 상처 준 이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삶과의 단절이고, 고립이다. 고립은 서서히 영혼을 시들게 한다.

 

5백 년 전 북인도 바라나시 갠지스 강변에 살았던 시인 까비르는 '죽기 전에 아무리 많은 책을 읽을지라도 이 한 단어를 알지 못하면 그는 아직 진정한 인간이 아니다. 그 단어는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까비르는 '살아 있는 동안 손님을 맞이하라'고 말한다. 그 손님은 신, 진리로 바꿔 읽어도 되지만,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카리브 해의 시인 데렉 월코트는 <사랑이 끝난 뒤의 사랑>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너 자신의 집 문 앞에 도착한

너 자신을 맞이하게 되리라.

그리고 두 사람은

미소 지으며 서로를 맞아들일 것이다.

 

'그에게 들어와 앉으라고 말하라'고 데렉 월코트는 쓰고 있다. 음식을 대접하고 편히 쉬게 하라고, 이 시집 첫머리에 오리아 마운틴 드리머의 <초대>를 실은 것도 그 이유에서다. 그리고 그의 시 <춤>으로 시집을 끝맺은 것도, 상처받은 자신을 초대하라, 그리고 함께 춤추라, 그것이 치유니까.

 

손을 내미는 것은 단지 친절한 행위만이 아니다. 손은 치료의 힘을 갖고 있다. 잡는 손과 내미는 손 모두를, 얼음을 만질 때 우리손에  느껴지는 것은 다름 아닌 불이다. 아파하는 자기 자신에게 손을 내밀라. 그리고  그 얼음과 불을 동시에 만지라. 미국시인 메리 올리버는 '시작수첩'에다 적었다.

'시는 단어들이 아니라 추위를 녹이는 불, 길 잃은 자를 안내하는 밧줄, 배고픈 자를 위한 빵이다.'

시는 빵과 같고, 향기로운 차와 같아서 모두가 그것을 나눌 수 있다. 이 시집을 엮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수피의성자 하즈라트 이나야트 칸은 '인간의 가슴은 돌과 같으며, 그것은 다른 돌에 의해서만 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폴란드 시인 안나 스비르는 연인을 만나러 가던 도중에 길에서한 거지 여인을 지나치게 되었다. 시인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볼에 입맞춤을 했으며

우리는 얘기를 나눴다.

그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그녀가 내면에서는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개가 냄새로 다른 개를 알아보듯이.

 

스비르는 그 늙은 여인과 헤어질 수가 없었고, 빗속에서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애인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더 이상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보리심의 깨어남이다. 모든 존재 속에 자연히 존재하는 자비의 마음인 것이다.

자비의 어원은 '함께 상처를 나눈다'는 뜻이다.

 

티베트의 전통적인 수행법 통렌은 그런 자비심의 극치를 보여 준다. 수행자는 깊은 숨을 들이쉬면서 세상의 고통과 불행과 부정적인 요소들을 다 자기 안으로 흡수한다고 상상한다. 그리하여 모두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염원한다. 그리고 숨을 내쉬면서 온정과 자비와 빛 에너지를 세상에 내보낸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시를 읽고 쓰는 행위는 바로 이 통렌과 같다.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왜냐하면 상처받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감정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상처받지 않는다. 우리의영혼, 존재는 더 큰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도들은 영혼을 '가슴 안의 가슴'이라고 표현한다.

 

어린 시절이 지나고, 내가 진지하게 시를 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열여덟 살 때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나서였다.  나는 밤을 꼬박 새우며 그 책을 다 읽었고, 새벽이 밝아왔을 때 시인의 삶이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어떤 두려움도 뒤돌아봄도 없이 그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시의 사원, 그 사원의 사제는 시인들이다. 수없이 상처받아 본, 다시 말해 시인은 상처받은 치유자이다. 

릴케는 젊은시인에게 일깨우고 있다.

 

마음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줄 테니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한결같이 삶은 생존하는 것 이상임을 일깨우고 있다.

좋은 시는 치유의 힘, 재생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자문하게 한다. 좋은 시는 어느날 문득 자신과 세상을 보는 방식을 새롭게 한다. 오랜 '가짜의 삶' 끝에 메이사턴은 '진짜 자기 얼굴을 찾은' 일을 말하고 있다.

 

나 이제 내가 되었네.

여러 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네.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녹아 없어져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네.

 

회교 시인 잘랄루딘 루미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게스트하우스(여인숙)'에 비유했지만, 나는 그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슴속에 불을 지니고 걸어다니는 존재'라고, 그리고 그 불은  꺼진 듯 보이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재가 겉을 에워싸고 있을지라도. 

스페인의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가 그것을 증명한다.

 

불이 꺼진 줄 알고

재를 뒤적이다가, 그만

손가락을  데었네.

 

가슴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당신은 말할지 모른다. 자신의 삶이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렸다고, 어떤 것을 너무 오래전에 잃어버려서 그것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게 된 것이다.

삶이 어디서 정지해 버렸을까, 그것조차 모르고 있다. 정지해 버린 삶이라니, 어디선지도 모르게!

상처와 슬픔으로 날기를 잊어버린 새가 되지 말라. 죽음에 이르러 자신이 원했지만 살지 못한 삶을 슬퍼하는 대신, 자신이 살아온 삶이 자신의삶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대신..........'당신은 겨우 조금씩 숨을 쉬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람이라고 부르는가?' 하고 메리 올리버는 묻고있다. 그리고 마가렛 생스터의 시는 지적한다.

 

당신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하지 않고 남겨 두는 것이 문제다.

해질 무렵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가를 보는 눈은 감상적인 눈이 아니라 불처럼 타오르는 눈이어야 한다. 모든 비본질적인 것과 불순믈들을 다 태워 버리는. 미구엘 드 우나무노는 '슬픔의 습관을 떨쳐 버리라. 그리고 그대의 영혼을 회복하라'    고 말하고 있다.

 

시가 기적의 치유제는 아니지만, 읽는 이의 영혼의 심층부에 가닿는다. 그 영혼은 삶에서받은 상처로 위축되고 떨고 있지만, 상처받는 일  때문에 사랑을 포기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시인으로 젊은시절 선원에서 몇 년을 보내기도 한 제인 허쉬필드의 시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내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싶다.

사흘 동안 잠시의 중단도 없이

불타고 불타는

이 단풍나무에게.

그리고 떨어지면서도 이틀 동안 더 불타는

 

삶의 비밀을 흘끗이라도 들여다본 시인은 말한다.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하라고, 당신이 진정으로 소속된 그 하나만을 제외하고.

이 삶 속에 태어났다면, 당신은 거친 세파를 견딜 각오를 해야만 한다. 온갖 불필요한 충고와 소음을 들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수많은 병고와 사건이 밀려오리라, 그것이 삶이다. 하지만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지켜낼 만반의 준비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랑이 당신을 정화하리라는 것도, 사랑은 '당신은 누구예요?' 하고 물을 때 '나는 당신입니다'라고 대답해야 문이 열린다(이븐 하라비).

영혼은 본래 완전한 존재이며, 우리는 다만 이 행성에서 불완전함을 경험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왜인가? 그것이 삶이라는 놀이다.

내가 이 지구에서의 삶의 원리에 대해 처음으로 눈을뜬 것은 열세 살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동네에서 친구들과 장님 놀이를 하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더듬거리며 상대방을 찾아가는 놀이였다. 그 놀이 도중에 나는 문득 깨달았다. 우리는 본래 두눈이 정상인데 이 세상에 장님 놀이를 하러 온 것이라고. 무엇이 장님 놀이인가? 슬퍼하는 것, 아파하는 것, 미워하고 한숨짓고 괴로워하는 것, 그리고 그 놀이의 하이라이트는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것이다. 술래가 된 나는 두 팔을 앞으로 뻗어 담과 전주와 나무들을 헤쳐가며 다른 아이들을찾고 있었는데, 문득 어디선가 어떤 목소리가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넌 장님이 아냐, 네 눈은 완전해.'하고.  레너드 제이콥슨은  썼다.

 

일직 도착하려고 서둘지 말라. 

그곳에 도착하면 무엇을 하려는가.

당신이 도착하는 순간 놀이는 끝난다.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하나도 없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연극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탄생과 죽음이라는 연극조차도.

 

조셉 캠벨은<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말한다.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가 있다.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중심에 있게 된다.

 

바샤르는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에서 지구에 사는 사람들을 '한계의 제왕'이라고 설명한다. 이 행성에는 다른 별에는 없는 수많은 제약과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공간, 시간, 이별, 실패, 죽음, 육체 등 이토록 많은한계 속에서사는 삶을 체험하기 위해 우리는 이 행성에 태어난 것이다.

생을 다 보낸 뒤, 어느 날 우리는 '육체라는 이 이상한 옷'을 벗어던진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옷깃이 해지고 단추가 떨어져 나간........, 당신이  아직 젊다면 이 진실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삶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을것이라고, 또한 세월은 당신의 육체에 흔적을 남길 것이다. 피부는 탄력을 잃고, 허리는 굵어지고, 얼굴 모습도 변할 것이다. 더 딱딱하고 더 고집스럽게. 그리고 만일 당신이 이미 이 현상들을 경험하고 있을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었다면 이 진리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D.H. 로렌스는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가? 자신의  영혼이 원하는 삶을 사는 일에 의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삶을 사는것, 진정으로 사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교과서에 실린 시들은 누구보다 잘 외웠고 또 그것으로 잘난 체를 했지만,  그것은 시의 이해와는 거리가 먼, 암기력 테스트에 불과했다. 교사들이 분석해 주는 시를 들으면서 나는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시를 곤충처럼 날개를 찢고, 더듬이를 잘게 부수고, 등껍질을 다 벗겨내 마침내 죽게 만드는 행위임을 느꼈다. 훗날 내 손으로 집적 시집을 사들고 와서 혼자만의 방에서조용히 소리 내어 시를 읽었을 때,비로소 시는 ' 나에게로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시는 인간의 목소리를 위해 씌어진 음악'이라고 마야 앤젤루는 말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 속으로 들어가 그 시에 의해 감정이 순화되고 변화하는 일이다. 시가 영혼의 양식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있다.

알프레드 테니슨의 말처럼 '시인의 명성을 갖는 것보다 시적인 가슴(시심)을 지니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나는 생의 많은 시간들을 먼 지역을 여행하며 보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여행은 시의 세계로의 여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내가 현실에서 느끼는 낯설음,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조차 갖는 이방인 같은 느낌들이 필요 없었다. 그 대신 오히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엮은 잠언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에 이어 이 시집은 또 한 번의 시에의 초대이다.

여기에 실린 시들 역시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포기나 망각이 아닌 초월을 권유한다. 그리고 초월에 이르는 길은 먼저 그것을 충분히 사는 일이라고 말한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그것을 하나의 손님으로 맞아들이라고,

비슬라바 쉼보르스카가 썼듯이 삶에 '두 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연습없이 태어나 실습 없이 죽는다. 어떤 하루도 되풀이되지 않고 서로 닮은 두 밤도 없다. 같은 두 번의 입맞춤도 없고 하나 같은 두 눈맞춤도 없다.'

 

오늘날 정치인과 매스컴과 온갖 광고 매체들에 의해 언어가 오염되고 본래의 의미로부터 멀어졌지만, 시는 여전히 가장 정직하고 순수한 언어로 남아 있다. 시를 잃는다면 우리는 언어의 거의 모든 것을잃는 것이다. 

당신이 단 한 편의 시라도 외운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에라도 당신을 순수한 존재의 세계로 데려다 줄 것이다.

당신이 얼마 동안 삶을 살았는가에 상관없이, 나는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당신의 가슴에 가닿으리라고 믿는다. 당신이 나보다 어리다면, 이 시들은 당신에게 영혼의 방향과 사람의 지혜를 선물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나보다 한 살이라도 더 많다면, 더 절실하게 어떤 시들이 당신의 지나온 생에 울려 올 것이다.

 

이 시들은 내가 수십 번씩 소리 내어 읽은 시들이다. 나는 당신이 시간을 내어 이 시들을 친구에게, 연인에게 읽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그것은 놀라운 치유의힘을 발휘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읽어 줘야 할 것은 결국 시가 아닌가. 삶의 시.......................

이 시집이 당신 안에 있는 사랑을 일깨우고 깊어지게 하기를 나는 바란다. 당신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고, 타인과 세상을 사랑하기를, 이 시집뿐 아니라 결국 모든 책의 저자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리라.

끝으로 당신에게 들려주는 시는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이다.

 

당신이 꼭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참회를 하며 무릎으로 기어 사막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당신 육체 안에 있는 그 연약한 동물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라.

내게 당신의 상처에 대해 말하라. 그러면

나의 상처에 대해 말하리라.

그러는 사이에도 세상은 돌아간다.

그러는 사이에도 태양과 비는

풍경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풀밭과 우거진 나무들 위로

산과 강 위로,

당신이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

매 순간 세상은 당신을 초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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