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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반야바라밀경(莊嚴淨土分 第十)// 우룡 스님

경호... 2007. 10. 18. 14:56

금강경(우룡스님 강설)이 나무아미타불 카페에 있어 퍼왔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스님께서 강설하신 내용에서 약간의 문체와 틀리는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한자도 오타가 있기도 하고....)  함께 읽고 수행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생활 속의 금강경(우룡큰스님 강설-효림출판사) 

 

 

佛告須菩提하사되 於意云何오 如來 昔在燃燈佛所에 於法에 有所得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如來-在燃燈佛所에 於法에 實無所得이시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菩薩이 莊嚴佛土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莊嚴佛土者는 卽非莊嚴일세 是名莊嚴이니이다

是故로 須菩提야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生淸淨心이니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며 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이니라

須菩提야 譬如有人이 身如須彌山王하면 於意云何오 是身이 爲大不아

須菩提-言하사대 甚大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佛說非身이 是名大身이니이다


10. 정토를 장엄함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그 옛날에 여래가 연등불의(燃燈佛)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불의 처소에서 실로 법을 얻은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보살이 불국토(佛國土)를 장엄 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요 그 이름이 장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마땅히

색(色)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소리와 냄새와 맛과 느낌과 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데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須彌山)만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매우 크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말씀하시어 큰

몸이라고  이름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의 一相無相分 第九에서는 수행 중에 어떠한 경지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말 것을 밝혔고 여기 장엄정토분

(莊嚴淨土分 第十 에서는 정토를 장엄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설하시고 계신다.

정토란 불교의 이상 세계인 佛國土를 가리키며 “장엄” 한다는 것은 이상적인 불국토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

하는 것이다.

이 장엄정토분에서 부처님은 수보리 존자에게 “내가 연등불의 처소에서 법을 얻은 것이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 그러자 수보리 존자는 “진실로 법을 얻은 바가 없다”고 대답한다.  이 문답 속의 법은 바로 “授記法門

(수기법문)” 이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한없이 오랜 세월 전에 선혜라는 보살이 불도를 닦고 있었을 때 연등불께서 이 세상에 출현 하셨다.

선혜 보살은 연등불께 공양을 올리고자 꽃을 구했다. 그러나 국왕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자 온 나라의 꽃을

사 들였으므로 선혜 보살은 어디에서도 꽃을 살 수가 없었다. 때마침 어떤 궁녀가 연등불께 바치고자 푸른 연꽃

일곱 송이를 품고 가는 것을 발견한 선혜 보살은 그 꽃 한 송이에 은전 백냥씩을 주고 다섯 송이를 사서 연등불

에게 바쳤다.

그리고 연등불의 행차가 진흙탕에 다다르자 선혜 보살은 부처님의 발을 진흙에 더럽힐까 염려하여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길게 폈다. 옷이 진흙탕 길을 다 덮지 못하자 선혜 보살은 긴 머리를 풀어 진흙을 덮었고 그래도

모자라 진흙탕에 몸을 던져 부처님께서 밟고 지나가게 하셨다. 이때 연들불께서 선혜 보살을 찬탄하여 수기를

주셨다. 

“아, 장하도다, 선혜여!”  그대가 道를 구하는 정성은 참으로 갸륵하다. 이렇듯 지극하게 道를 구하는 정성으로

그대는 오는 세상에 결정코 부처의 道를 성취하리니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


이러한 연등불의 수기처럼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현은 오래 전에 예견 되여 있었다. 수기! 수행자가 부처님으로

부터 “장차 부처님이 된다”는 수기를 받는 것은 매우 획기적이고도 자부심을 갖게 하는 대사건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물론이요 제자인 수보리 존자 조차도 이를 단호하게 제거하여 버린다.

왜냐하면 “수기를 받았다”는 相에 집착하면 그것이 굴레가 되여 참 된 깨달음을 이룰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

였다. 道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때도 묻지 않아야 하며 아무리 좋은 것도 집착을 하면 때가 될 뿐 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다시 “장차 부처가 될 보살들이 불국토 장엄” 에 대하여 질문을 하신다.


“수보리야, 보살들이 불국토를 장엄 하느냐?”  “아니옵니다,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 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요, 그 이름이 장엄일 뿐입니다..”

불국토를 장엄 하는 것, 그것은 바로 보살의 수행이다. 마땅히 보살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부처님이나

수보리 존자는 보살의 불국토 장엄이 “참 된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 이라고 하셨다.

왜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일까? 모든 보살은 自利利他행(자리이타행)과 갖가지 복덕을 쌓아 이상적인 불국토를

이룩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불국토가 장엄 되는 것은 아니다.

결코 불국토는 각종 보석이나 꽃, 나무, 그림 등으로 장식 하는 것이 아니다.

불국토는 진리의 세계이며 깨달음의 세계이며 그 세계는 원래부터 완성 되여 있다. 하지만 無明煩惹 속의

衆生은 어둠에 가려 아예 보지 못하고, 수행을 많이 한 보살은 언뜻언뜻 그 모습을 본다.

그 또한 극히 일부분만 볼 뿐이다. 왜 인가?  마음이 완전히 맑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씀 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청정심을 내어야 한다”

청정심(淸淨心), 그렇다. 마음이 맑아지면 저절로 이 세상이 맑아져 불국토로 바뀌고 마음이 탁하면 이 세상이

그대로 고통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마음을 맑혀 진리의 세계와 한 덩어리가 되면 불국토는 저절로 장엄이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청정심을 유지 할 수 있는가?

부처님께서 설 하신다.  “마땅히 色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고 소리, 향기, 맛, 감촉, 법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라”

그리고는 청정심을 이루는 최상의 법문을 설 하셨다.

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르는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應無所住 而生其心은 지난달에 이야기 했듯이 “봄바람처럼 살고 봄바람이 지나 가듯이 하라” 는 것이다.

봄바람은 집착이 없다. 그러나 봄바람이 지나 가고 나면 분명히 붉은 꽃도 피고 노란 꽃도 피고 푸른 잎도 돋아

난다. 이렇게 살면 그뿐이건만 “내가 꽃을 피워 주었다”  “잎을 돋게 하였다” 고 집착 할 것이 무엇인가?

자세히 돌이켜 보면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것 또한 이름이 마음이지 “이것이 마음이다” 고 할 그 무엇이

보이고 잡히느냐?  정녕 그 마음을 둥굴다고 해야 하느냐? 모나다고 해야 하느냐?  세모꼴이라고 해야 하느냐?

노랗다고 해야 하느냐?  푸르다고 해야 하느냐?


마음이라는 그 자체부터가 규정을 내릴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크다고 해야 할지 작다고 해야 할지, 도무지 규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에 대해 어떻게 집착을 하고 어느 마음에 머무를 것이냐? 그러므로 “머무르는 바 없이” 곧 應無所住

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없는 것도 무감각한 상태도 아니므로 우리는 또렸또렸한 생각을 일으켜서

하나하나를 분명히 실천해야 한다. 이것을 “마음을 낸다” 곧 而生其心이다.  잘 살고 향상의 길로 나아가려면

마땅히 “應無所住 而生其心” 하여야 하건만 우리는 틀에 박힌 듯이 “내 자식이니까..” 하는 생각으로 베풀고

“내 부모니까” 하는 생각으로 봉양을 한다.

그리고는 “나”와 관련이 없는 것은 냉대시 한다. 결코 이러한 우리가 되어서는 향상의 길이 없다.

태양이 온 세상을 비출 때를 생각해 보아라. 태양은 높은 자리, 낮은 자리, 붉은 자리, 푸른 자리, 생물과

무생물을 구별하여 빛을 비추지는 않는다.

마냥 빛을 뿜어 산에도 비추어 주고 바다에도 비추어 주고, 사람, 동물, 풀, 나무, 바위, 흙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그냥 비추어 준다. 그것이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다.


태양이 “나”라는 생각 없이 “내가” “누구에게” “비추어 준다” 는 생각이 없이 온 누리에 빛을 주듯이 우리도

“나”에 머무르는바 없이, 대상에 머무르는바 없이 살아가면 저절로 청정심을 유지 할 수 있게 된다.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면 “나”와 상대가 모두 청정해 지고 서로가 맑아지면 걸릴 것도 문제 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의 것에 대해 너무나 집착을 한다. “나”와 “나의 것” “나’에게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

등을 집착하여 한 없는 갈등과 문제와 고통을 끌어낸다.

나의 생각, 나의 사랑, 나의 가족, 나의 재산 등에 집착을 하고 집착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결과가 어두운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아라?  “나’와 “나의 것”에 집착하여 나와 남, 나의 것과 남의 것을 갈라 버리고

조각을 내면 결국은 “나”의 마음이 흔들리게 되고 “나”의 마음이 흔들리게 되면 세상이 뒤죽박죽 되지 않을

까닭이 있느냐?


고통의 원인, 윤회의 원인, 그 원인은 너무나 간단명료하다. 바로 집착이다. 집착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면 고통으로부터 윤회로부터 해탈 할 수 있게 된다. 결코 실체가 없는 이름만의 것에 집착하지 마라.

무엇 하러 이름만의 것에 집착 하느냐?

금강경 장엄정토분 제10 끝에서 “수미산 만큼 큰 사람” 의 비유가 그것이다.

정녕 수미산만한 크기의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러나 그와 같은 이름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이름에 집착 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답게 이름이 집착 하지 말고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應無所住 而生其心” 하면서 살아야

된다. “應無所住 而生其心..” 그것은 집착을 버리고 사는 삶이다. 할 일을 하면서 집착을 버리고 살아가면

저절로 마음이 맑아지고 마음이 맑아지면 참으로 훌륭한 불국토에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부디 집착이 없는 맑은 마음,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라. 그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꾸준히 나아갈 뿐 흔들리지

마라. 내가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것이 안정 된다. 내가 흔들리니 가족이 흔들리고 집 안이 흔들리고 사회가

흔들리는 것일 뿐, 내가 흔들리지 않으면 가족도 집 안도 사회도 문제가 없어진다.

머무르는 바 없는 마음, 허공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향상의 길로 나아가 불국토를 장엄하고 영원

생명과 무한 행복을 증득하기를 깊이깊이 축원한다.




날마다 좋은날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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